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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년 3암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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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길을 따라 스크랩 불교계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백초월(白初月) 스님.
향상일로 추천 0 조회 231 16.03.01 09: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백초월(白初月)은 1878년 2월 17일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 금산부락에서, 부친 백하진()과 모친 김해 김씨의 세 아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인영(), 아명은 학명()이었고 족보상에는 도수()라는 이름으로 기재되었다. 수원 백씨 26세손이었던 백초월은 집안이 진주군 정촌면 관봉리로 이주함에 따라,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지냈다. 한편, 백초월은 소년 시절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배움의 탐구열이 용솟음치던 청년기인 1891년에 지리산의 영원사()로 입산 출가하였다.

 

출가할 당시 동조()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초월()은 그의 법호이다. 이 외에 최승()이나 의수() 등 다양한 가명을 가졌는데, 아마 독립운동에 참여했을 당시에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입산한 그는 영원사의 주지를 역임한 이영진()을 은사로 모시고 수행하였다. 이 때에 이영진으로부터 초월이라는 법호를 지어받았다.

 

백초월은 영원사에서 승려로서의 기본을 배운 후 해인사 강원()에서 사미과와 대교과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래서 1914년에는 대덕() 법계를, 그 후에는 대교사() 법계를 받았다.

 

조선중기부터 구한말까지의 영원사 역대 조실을 총정리한《조실안록(錄)》에는 백초월이 1903년 겨울, 1904년 초의 영원사 조실이었음을 전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초월이 영원사 조실을 맡을 당시 나이가 20대 중반이었다. 이는 백초월의 경학 실력이 간단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해인사 강원의 경학과 지리산권 불교를 정통으로 이수한 대상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백초월은 경학을 배우면서 참선 수행도 하였다. 해인사 선원의 기록인『방함록()』에 ‘초월() 동조(照)’라고 나오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1908년 해인사 강원에서 강사로 활동하였다는 기록이 이고경(李古鏡)의「해인사약지」에 나온다. 1909년 범어사 강원에서 작성된 것으로 전하는『성도기(記)』에는 “을유 추칠월 동래범어사 청풍강당 초월대화상 법하 동거록( )”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를 보면, 1909년 당시 백초월이 범어사 강원에서 후학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백초월의 속랍이 30대 초반이었고, 그 호칭이 대화상()이라고 지칭하였음을 볼 때 경론을 가르치는 강백으로 공인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그는 해인사와 지리산권의 불교에서 공부를 정통으로 마친 승려였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대강백, 큰스님의 반열에 오른 지식인, 지성인이었다. 그가 항일민족운동 대열에 처음으로 참가한 것은 이른바 1910년부터 1911년 사이에 전개된 임제종()운동 당시였다. 그에 대한 문헌 기록은 없지만, 백초월이 참여했다는 증언이 있다.

 

백초월은 1915년에 개교한 중앙학림의 초대 강사로 내정되었다는데, 중앙학림은 오늘날 동국대학의 전신이다. 동국대학 개교의 역사적 시점은 1906년, 불교계의 근대식 최초 학교로 개교한 명진학교이다. 명진학교는 1915년 전국 본사급 사찰의 후원을 전폭적으로 받으면서 중앙학림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백초월이 강사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취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출가 본사인 영원사가 화재를 입었기 때문이다. 1911년 12월 9일 영원사는 큰 화재를 당하여 가람이 거의 전소되었다. 화재 시 백초월은 영원사 외부에 있었지만 영원사로 돌아왔다. 영원사 재건불사에 동참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영원사의 주지인 전재룡 및 대중 승려와 함께 불사금 화주를 위해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모금활동을 하였다.

 

백초월은 영원사 재건불사와 주지 소임을 마치고 청주 용화사 포교당으로 갔다. 그는 영원사 주지 재직 시에도 용화사의 포교 활동을 지원하다가, 영원사 주지를 마치자 전적으로 이곳으로 와서 포교에 전념하였다. 그는 용화사에 거주하면서 청주의 재가불자들에게 불교를 가르치면서 나라 및 민족의 현실에 깊은 고민을 하였다. 그러면서 해인사 지방학림의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화엄경〉을 탐독하다가, 화엄경의 ‘통만법명일심()’이라는 구절에서 느낀 바가 있었다. 그는 일심( ), 즉 한마음을 갖고 독립운동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어쨌든 용화사에서〈화엄경〉의 일심을 주목한 것은 후일 그가 일심교()라는 항일적 이념을 정비하고, 일심회()라는 비밀 항일 조직체를 만든 계기였다. 그는 우리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면 나라의 독립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3·1운동 당시 불교계 대표로 활동한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이 백초월을 민족대표에 포함시키려한 시도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지만 3·1운동 전후, 백초월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는다. 기록이 남아있는 일제의 관헌문서는 백초월이 서울로 올라와 독립운동에 투신한 시점을 1919년 4월로 전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3·1운동 발발 당시 국내의 동포뿐만 아니라 해외 동포, 기독교와 천도교는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는데 반하여 불교도는 무관심한 것을 개탄함에서 찾았다.

 

그는 상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우선 중앙학림() 내에 한국민단본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을 주도하였다. 한국민단본부()는 3·1운동 직후 김법린, 김상헌, 박민용, 김상호가 상해의 임시정부에 가서 보고한 전국불교도독립운동본부()를 지칭한다. 백초월은 당시 불교계 독립운동의 구심체였던 이 두 단체에 모두 관여하였다. 불교계 3·1운동의 계승, 불교계 독립운동의 견고화의 중심부에는 이처럼 백초월이 있었다.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중투쟁을 하였을 때, 백초월은 전국 불교계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백초월의 독립운동은 임시정부 및 만주 독립군을 배경으로 전개된 군자금 모금과『혁신공보()』의 발간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는 국내 불교계와 임시정부를 연결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 격인 민단본부 학인승려들을 연락책으로 활용했다. 그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기도 하고, 자신의 특파원으로 중앙학림 학인이며 민단 부원이었던 대상자들을 사찰 및 승려에게 보내 모금활동을 추동했다. 통도사 주지 김구하·천은사 주지 하용화·화엄사 총무 이인월·화엄사 승려 김영렬·쌍계사 등이 백초월의 자금 제공에 협조하였다. 특히, 범어사의 오성월·오리산·김경산은 많은 자금을 제공하였다.

 

모금된 자금은 자신의 조직원(민단부원)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 및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 보냈다. 그는 길림성의 독립군에 11명(박달준·김봉율·김장윤·강재호·박영희·송복만·손덕주·박덕윤·이창옥·이덕진·김성수)의 불교청년을, 상해의 임시정부에는 6명(신상완·백성욱·김법린·김봉신·김상헌·박민오)의 청년 불자들을 파견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보내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제반 상황을 유의하면 당시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결 고리를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백초월은 민단의 부원들을 활용하여『혁신공보』라는 비밀 소식지를 발간, 배포하였다. 간행은 1919년 7월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는데 백초월은 자신을 혁신공보사의 사장이라고 내세웠다. 이『혁신공보』 활동에는 중앙학림 출신인 김법린·백성욱·김상헌·김상호 등이 참여했다.

 

한편, 백초월은 임시정부의 경비 지원을 목적으로 인천, 부산, 원산 항구의 관세를 담보로 미국에게 15억 달러의 차관을 신청하였다. 일제의 보고문에 따르면 백초월의 제의에 미국은 유럽의 한 나라가 보증을 하면 응하겠다고 하여 이승만·안창호·김규식이 그 보증국을 구하였다고 한다. 이에 백초월은 국내에서 임시정부의 공채를 발행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기획은 임시정부와의 깊은 연계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백초월은 1919년 4월경에 상경하여 중앙 불교계 항일운동의 중심인물로 등장하였다. 그러면서 그 중심적인 역할로 상해의 임시정부와 연결되었다. 3·1운동 직후 국내 불교계의 독립운동에서 백초월의 부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백초월은 그해 11월 25일 단군 건국기념일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려는 시위 계획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종로의 삼청동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이 내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에 관한 축하문과 선언서·포고문이 배포되었는데, 그 배후에 백초월이 큰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이 적극 관여한 그 운동에서 의친왕 선언서가 뿌려졌다. 선언서에 나오는 33인의 민족대표에 불교계 대표로 백초월과 정남용()이 포함된 것에서 백초월의 당시 국내 독립운동선상에서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이처럼 백초월은 1919년 12월 이전까지는 다양한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군자금 모집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1919년 12월 2일 일제의 조선총독부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 백초월의 신상 변동, 즉 재판에 회부되었는지, 그리하여 정식 구형?수감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추정하건대 많은 고문을 받았지만 증거 부족 등으로 수감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초월은 고문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해졌으며, 간혹은 미치광이 행세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1920년 3월 1일, 일본유학생들이 3·1독립선언 1주년을 맞이하여 일본에서 전개한 독립만세운동, 국내에 격문 배포, 일본의회에 독립청원을 기도한 사건 등에 백초월이 연루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제에 또 다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신조선〉의 주간으로 활동하였던 이달()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백초월은 이 사건을 실무적으로 추동한 이중각()의 제의를 받아들여 2월 18일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본격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전인 1920년 3월 1일, 동경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월 9일 국내로 압송되었다. 백초월은 체포 시에 42세의 영원사 승려로 나오며,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을 당시에는 별명인 백의수()로 활동하였다.

 

1920년 5월, 백초월의 치열한 독립운동은 승려독립선언서() 배포 및 의용승군제() 추진 사건에서 극대화되었다. 이 사건은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승려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백초월과 연결되었던 중앙학림 출신인 신상완·김법린·백성욱 등은 독립운동선상에 불교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와 협의하여 국내 불교계 거물의 상해 망명 유도, 불교계 자금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 불교 단체의 독립운동 참가 등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승려독립선언서의 작성, 임시의용승군제가 추진되었다.

 

승려독립선언서는 1919년 11월 15일 대한승려연합회 대표 승려 12명의 이름으로 국내외에 배포된 선언서이다. 국문, 한문, 영문의 3종으로 작성된 이 선언서는 3·1운동기 불교계의 독립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준 문건이다. 이 선언서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 12명의 가명으로 상해에서 제작, 국내외에 배포되었다. 백초월 그는 국내외를 망라하는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으며, 중앙학림 학인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상해 임시정부를 배경으로 활동하면서, 3·1운동 직후 급증한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3·1운동 직후, 백초월이 추진한 독립운동은 불꽃과 같았다. 일제의 경찰대에 피체되어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삶 자체가 고통 그 자체였지만 독립운동을 지속해야 하겠다는 의식은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백초월은 우선 진관사와 마포포교당에서 몸을 추스르고, 재기를 기약하였다. 몸이 회복되자 승려로서의 기본적인 포교 활동부터 시작하였다. 이는 일제의 집요한 감시를 따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구도 하에서 백초월의 설교, 포교 활동이 주목된다. 그는 조선불교대회·중앙포교소·각황사 등에서 강연을 했다. 1920년대 중후반에도 강연 활동은 지속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면적으로는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진관사의 후학들에게 불교와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일제 시선을 피하기 위한 강연을 하면서 일심교()라는 항일적 이념을 내세웠다. 1921년 서울 마포포교당을 근거로 활동하면서 일심교 강령을 구상하였다. 즉 일심만능(), 군교통일(), 세계평화()라는 3대주의 강령을 표방하였다. 일심만능()은 일심, 한마음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우리 민족의 독립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군교 통일주의( )는 잡다한 여러 종교를 일심교로 통일, 세계평화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평화주의( )는 전 인류, 사회인이 일심이 되면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를 하나로 만들 수 있어서 세계 평화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심교 표방의 목적, 즉 내면으로는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26년 7월경에는 진관사 마포 포교당에 일심교 사무소를 차리면서 본격적인 일심교 행보를 시작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독립운동에의 동참을 적극 설득하며 동지를 포섭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밀송하였고, 임시정부에 밀사를 보냈다.

 

백초월은 일심교를 통해 동지와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항일 조직체인 일심회()를 만들었는데 비밀 결사조직인 일심회의 항일 활동은 전국적인 차원이었다. 진관사와 진관사 포교당은 그 중심이었고, 각처에서 백초월의 뜻에 동조한 동지들이 결속되었으며, 전국에서 자금이 모금되었다. 정읍의 오지 사찰인 석탄사에서 비밀리에 일심회 활동을 하였고, 백초월이 전국의 각처, 각 사찰을 순방하였다는 것은 그를 증명하는 실례이다.

 

백초월은 동학사 강원에서 1930년부터 3년 간 강주로 있었다. 그가 어떤 계기로 충청도의 심장부인 계룡산의 동학사에 왔는지는 전하지 않지만 그의 강주 부임은 그의 불교 경학 및 사상에 대한 실력을 인정한 결과이었을 것이다. 그는 동학사에 오기 이전 진관사에서도 학인들을 가르쳤다. 정식 강원이 설립되지 않았던 진관에서는 부정기적으로 학인, 젊은 스님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는 진관사를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 은신처, 그리고 휴식처 등으로 활용하였다. 때문에 그의 일상적인 가르침은 불교계 제도권 학교인 강원과 같은 강의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20대에 조실, 강백을 역임한 당사자이었기에 후학들에게 불교 교리와 사상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는 거칠 것이 없었다. 나아가 백초월은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학인과 후배 스님들에게 불어 넣었다. 이와 같은 행적을 갖고 있던 백초월이 동학사 강사로 부임하였다. 현재 동학사의 도서관 자료로 보관되고 있는《동학사사적()》 은 1929년에 서술되었는데, 그 서술자가 바로 백초월이다. 도입부에 ‘최승도인(人) 초월동조(照)’라고 적혀 있다.

 

동학사 강사로 활동할 당시 백초월에 대한 증언 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강한 민족정신이 용솟음 쳤다는 것이다. 그는 감시하는 일본 경찰에게는 미치광이, 바보로 행세하였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독립정신을 불어 넣었다. 그 시절 백초월은 방안에 죽은 거북이를 보자기에 싸 두고, 아침저녁으로는 거북이를 바라보면서 참선을 하였다. 이 시기에도 일본인 형사가 정기적으로 동학사를 내왕하여 백초월을 감시하였다. 그래서 일본 형사가 와서 백초월의 방을 쳐다보면, 백초월은 죽은 거북이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해서, 일본 형사는 백초월을 정신이상자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간혹, 백초월은 방안에서 거북이의 노래를 불렀다고 당시 강원의 학인이었던 금암은 증언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민족정신, 독립운동은 동학사 시절에도 전혀 죽지 않았음을 거듭 확인하였다. 즉, 백초월은 동학사의 강사를 하면서 반미치광이의 행세를 하면서도 민족의식을 학인들에게 불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이면으로는 그의 독립운동 조직체로 강구하였던 일심회를 통하여 동지를 모집하였다.

 

3년간 동학사에 있었던 백초월은 계룡산 신도안의 용화사로 이전하여 2년 간 머물렀다. 백초월은 동학사에서 더 으슥한 용화사로 갔다. 그리고 근처인 부여의 무량사에도 왕래하였다. 이런 행보는 그가 추구한 일심교의 전파, 항일 비밀결사체인 일심회의 조직 강화, 혹은 본격적으로 비밀결사의 항일 활동을 위한 것으로 본다.

 

일제의 비밀첩보 문건에 의하면 백초월은 1934년 음력 9월, 전북의 정읍군에 소재하는 석탄사에서 그의 독립운동에 동참한 승려 몇 명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체인 일심회()를 본격적으로 조직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즉, 백초월은 용화사에 머물면서, 그리고 오지의 석탄사에 가서는 한 단계 진전된 항일투쟁의 길로 나가는 방향을 모색하였다.

 

동학사와 용화사를 거친 이후 백초월의 행적은 1935년 3월 경, 봉원사에서 찾을 수 있다. 서울 신촌에 있는 봉원사는 구한말 근대의 서막을 알렸던 사찰이었다. 이 절은 개화승 이동인과 개화당 청년들이었던 서재필·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이 신문명, 근대 지향을 고민하였던 역사가 배어있는 곳이다. 백초월은 봉원사 강원의 강사로 부임했다. 그 무렵 백초월은 3대 강사로 지칭되었으며, 이화여대의 학장을 역임한 김활란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백초월은 봉선사 학인들에게 독립의식을 강렬하게 고취시켰다.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번갯불 번쩍 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좌고우면()하지 말고 즉시 가담할 것을 늘 종용하였다. 이렇게 백초월이 독립운동을 신앙, 생활이라고 언급하면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그의 민족의식이 민족 주체성이라는 기반에서 나왔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백초월은 1936년에 월정사 강사로 부임하였다. 여기에는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을 함께 한 항일승려인 이종욱이 월정사의 주지이었던 점이 작용하였다. 이종욱과 백초월은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 전달 등 다양한 방면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당시 백초월에게 배운 조영암은 이에 대하여,「불교사상」1985년 3월호에 기고한 ‘스님들의 항일운동’이라는 글에서 “백초월 스님을 강사로 월정사에 뫼신 것 또한 지금 생각해보니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만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조영암은 그가 월정사에서 수학할 때 오대산 중대()에서 백초월이 갑자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회고하였다. 그 무렵 오대산 상원사 선원에서 수행하였던 창조는 백초월이 독립운동을 하였고, 의식이 투철하였다고 증언했다. 월정사 강사를 그만 둔 1938년 무렵에는 진관사 마포포교당으로 갔다.

 

이렇듯이 백초월은 동학사, 봉원사, 월정사 등지의 강원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학 양성은 단순히 불교를 가르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고, 민족을 수호해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학인 스님들에게 고취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일심회를 통한 항일 비밀결사운동을 추진하였다. 때문에 백초월이 학인들과 함께 한 그 시간은 절체절명의 세월이었다. 자신과의 싸움을 하면서도, 일제와의 대결을 결코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초월은 계룡산과 오대산을 거쳐 1938년 초반 무렵,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10년 이상, 서울 및 전국 각처에서 일심교의 강령을 대중들에게 전달하고, 그를 통해 나타난 항일 비밀결사 조직체인 일심회를 갈무리 하였다. 그가 전국의 수많은 사찰에 다녔고, 그에 대한 행적이 전하는 것의 본질에는 나라의 독립을 되찾겠다는 염원이 있었다. 이제 그는 일심회라는 비밀 결사조직체를 가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일제는 중일전쟁의 도발을 강구하고 있었다. 한국 침략, 만주 침략의 기반을 발판으로 중일전쟁은 실로 동양의 진로와 역사를 뒤엎을 수 있는 청천병력과 같은 도전이었다. 일제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어서도 총력전을 강요하였다. 일본의 명운이 걸린 총력전이었기에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었다. 총후보국 체제로 사회 전반을 전쟁체제로 내몰았다.

 

한국에서도 징용과 징병이 나타났다. 그리고 전쟁 물자를 위한 각종 물품 납부 등이 강요되었다. 사찰에서도 군수물자 제작에 필요한 그릇, 종 등 쇠붙이를 납부해야만 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은 만주로, 중국 본토로 군인과 물자를 보급하는 기지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군인, 군속, 간호요원 등의 인력과 전쟁의 물품이 용산역에서 출발하였다. 용산역을 거쳐 평양, 신의주를 지나 만주의 봉천, 신경, 하얼삔 등지로 퍼져 나가는 것이었다. 용산역이 이를테면 중일전쟁의 출발선이었다.

 

그래서 백초월이 이끄는 일심회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거사를 1939년 10월에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만주로 떠나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쓰려고 한 것이다. 그는 용산역에서 민족의식을 용감무쌍하게 보여줌으로써 중일전쟁의 구도를 깨고, 그로 인하여 동포들에게 경각심을 불어 넣고, 만주로 끌려가는 청년들에게는 민족을 절대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1939년 10월 11일, 백초월을 비롯한 일심회 회원들은 마포정 414번지(진관사 마포 포교당)에서 모임을 갖고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낙서를 대서특필하기로 하였다. 그 의거에 나선 회원은 박수남()이었다. 그는 1937년 11월 초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일심회()에 입회한 조선운송주식회사 용산영업소 임시 인부였다.

 

일심회 차원에서 행한 10월 14일의 그 거사는 성공했다. 일심회 회원들은 환희하였다. 그래서 백초월은 일심회 회원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독촉하고, 지속적으로 동지를 확보할 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낙서를 단행한 박수남과 배후의 인물인 백초월은 10월 23일 일제에게 체포되었다. 박수남은 고문 후유증으로 1940년 7월 14일에 사망하였고, 백초월은 일제에 피체되어 정식 재판에 회부되어 1940년 10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의 판결 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복역을 하고, 1943년 3월 3일에 출소하였다.

 

출소한 백초월은 또 다시 만주로 보내는 독립운동 자금에 연루되어 일제에 체포되었다. 백초월은 그 후 청주교도소에 구금 중이던 1944년 6월 29일에 옥중 순국하였다. 순국 연유는 전하지 않지만, 일제의 가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보인다. 백초월은 1920년에도 고문을 당하였기에 20년 간의 체포, 구금, 고문, 감시를 당하였다.

 

그의 시신은 행방불명되었고, 독립정신의 복권은 1986년에 가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91년에는 고향에 순국비가 서기도 하였다. 백초월의 맹렬한 항일독립운동은 2009년 5월, 그가 머물던 진관사에서 태극기를 비롯한 진귀한 독립운동 자료가 대거 발견됨으로써 재확인되었다. 백초월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는 지금부터 본격화되어야 할 것이다.

 

▶ 출처;김광식 저술, 민족사 편찬,『백초월 평전』, 2014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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