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보낸건 작은 아버지(숙부)세조 입니다,세종은 단종의 할아버지구요...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입니다..김문기도 들어 갑니다,주의할것은 신숙주는 절대 아닙니다,세종때는 유능한 집현전 학자였지만,세조한테 붙어서 그 유명한 숙주나물의 원조가 신숙주라는것도 잊지마
세종은 조선 4대왕이시고 단종 6대왕을 죽인 세조는 조선 7대왕이십니다.
스카르메타님 단종을 몰아낸 것은 세종이 아니라, 세조입니다. 그리고 실제 六臣이 아니라 七臣입니다. 상기 외에도 김문기선생이 있습니다. 조선신록에도 김문기 선생이 언급되고, 후대에 사육신이라 하여 김문기 선생이 빠지고 유응부 장군이 되었는데, 국사편찬위에서 김문기 선생도 사육신으로 인정했죠. 사육신묘도 7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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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대왕 문종 - 이 향(1414년-1452년. 재위:1450년 2월-1452년 5월. 집권 2년3개월.)
문종은 세종 즉위3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29년 동안 왕세자에 머물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역수 및 산술에도 뛰어났고 서예 에도 능했다.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물를 익혔고, 여러 가지 치적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적 치적은 세자 향의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었고 6품 이하의 신하에 대해서는 윤대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이렇듯 유연함과 강인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제위 2년3개월만에 39세 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문종은 첫번째 빈궁으로 김씨, 두번째로 봉씨가 있었으나 둘 다 과실이 있어 폐위되었다. 순빈 봉씨가 폐출되자 권전의 딸이 세자빈으로 정해졌는데 그녀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이다. 현덕왕후는 1441년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죽었는데, 그녀의 원혼이 수양대군이 왕권을 찬탈한 후에 궁중에 나타나 그의 가족들을 괴롭혔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래서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가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죽었으며 세조 역시 꿈에서 그녀가 뱉은 침 때문에 피부병에 걸려 고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해 쳐 관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제6대왕: 단종 - 이 홍위 (이 장으로 개명)
(1441년-1457년. 재위 : 1452년 5월-1455년 윤6월. 집권 3년 2개월)
현덕왕후 권씨는 26세에 단종을 낳고 해산에 기력을 완전히 빼앗긴 탓으로 죽음을 앞두게 된다. 그녀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3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에 혜빈 양씨는 세손 홍위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이렇게 양육된 홍위는 8살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세손에 책봉된다. 세종은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하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유성윈,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이는 세종자신 도 이미 병세가 악화돼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처지였고 세자 향(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 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세종이 이런 간곡한 부탁을 한 것은 자신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인물 이었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 하자 홍위는 세자로 책봉된다. 문종은 즉위 2년 3개월 만에 어린 세자를 부탁 한다는 고명을 남기고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세자 나이 12세였다. 단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 하는 것이 일반적 이었는데,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왕비도 없었다.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았으며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데 그쳤다. “황표정사” - 대신들이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 위에 낙점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모든 정치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들인 황보인, 김종서 등에게 집중되어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종의 아들들 즉 왕족의 세력이 팽창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왕숙들이(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 세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둘째인 수양과 세째인 안평은 서로 경쟁을 벌여 급기야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고 만다.
※ 계유정란 : 명목은 김종서가 황보인, 정분등과 부동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1453년 4월 명나라에 고명사로 갔다 돌아온 수양은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고,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철퇴로 죽이고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은 왕명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당했다. 이들의 죄명은 안평대군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계유정란으로 고명대신들이 거의 참살당하자 조정은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수양은 영의정에 올랐으며 또한 왕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수양은 자신의 집권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을 정난공신에 봉하고 그들이 지칭한 난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안평대군은 사사시키고 우직은 진도에 유폐시켰다. 중앙을 장악한 수양은 변방에 자신의 세력을 심기위해 함길도 도절제사를 교체하였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이 소식을 듣고 신임 절제사로 부임하던 박호문을 참살하고 난을 일으켰다.
이징옥은 원래 4군과 6진 개척에 공로가 컸던 인물로 김종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수양이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변 인물들과 함께 수양을 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징옥의 난은 무위로 끝났다. 이처럼 정치적 실권이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 송수현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듬해 윤6월 수양대군이 자기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 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 갔다.
이후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출신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 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 되었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여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17세의 나이로 賜死되었다.
▣ 계유정난의 배경과 사건 분석 당시 조정은 영의정에 황보인, 좌의정에 남지, 우의정에 김종서가 포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이 해 10월에 좌의정을 내놓게 되고 좌의정에 김종서, 우의정에 정분이 앉게 된다. 당시는 의정부서사제였기에 조정의 권력은 의정부의 삼정승이 쥐고 있었는데 건강이 악화된 남지가 정사에 적극 참여할 수 없자 조정은 황보 인과 김종서가 좌지 우지하는 상황이 되었고, 정분이 우의정이 된 다음에도 계속 두 사람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단종실록에는 이들 대신이 안평대군 등 종친뿐 아니라 혜빈양씨, 환관 등과 모의하여 궁중에까지 세력을 펴는 한편 황표정사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요직에 배치하여 붕당을 조성하고 끝내는 종실을 뒤엎고 수양대군에게 위협을 가한 것이 계유정난의 원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단종실록이 세조때에 편찬된 점을 고려할 때 이 기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계유정난은 수양과 그 주변 무리들이 왕권을 탐한 나머지 저지른 비윤리적인 역모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 단종복위사건(1455년) : 1455년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종친들과 신하들을 귀양 보내고 왕으로 등극하자,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집현전 학자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의 문관들은 유응부, 성승 등의 무관들과 모의하여 상왕으로 물러앉은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책명사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가 오자 유응부가 왕을 보호하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체화 되었다.
당시 세조는 책명사를 맞이하기 위해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가게 되어 있는데, 바로 이 순간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계획 이었다. 하지만 한명회가 창덕궁 연회장이 너무 협소하여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암살계획은 뒤로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사실을 알려 단종복위에 가담한 사람은 모두 붙잡힌다. 김질이 고발할 때 성삼문에게 들은 말이라 했고 성삼문은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과 같이 모이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더 추궁하자 유응부와 박정도 등도 이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등과 이에 연루된 17인이 투옥되었다.
집현전학자 출신의 단종복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폐되었는데, 또 한번의 단종복위 사건이 금성대군에 의해 일어난다. 하지만 거사 직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해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불리우다가 1698년 숙종 24년에 복위되었다.
※사육신 :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 중종 때 사림파들이 충절을 기리기 위해 남효은이 사육신이라는 말을 처음 씀.
※생육신 :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은. 세조 때 한평생 벼슬을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켰다. 이 중 남효은은 사건 당시 불과 두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장하여 세조의 부도덕한 찬탈 행위를 비난함으로써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