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영도가 언제 영도라는 지방편제로 바뀌었으며, 일제는 왜 절영도의 지명변경을 단행했는지 당시 상황을 유추해보자.
절영도의 명마 절영(絶影)은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말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멸시킨 대한해협의 길목 절영도를 대마도에 연결시킨 쓰시마해전 이라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절영도의 절(絶)을 끊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 かみかぜ [神風 신의 위력으로 일어난다는 바람]
◆ 아래 사진의 포대는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구축했을까? 같은 시기에 동일 목적으로 구축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 이 포대의 건축물도 동일시대 같은 목적으로 구축된것으로 추정되어진다.
◆ 가덕도 사령부 발상지지나 지심도 포대 모두 러일전쟁을 대비한 일본군의 군사시설이다. 빈 껍대기 대한제국!
1897년 군대해산을 시작으로 대한제국의 국권 침해는 시작되었다. 일본제국으로부터 군사.치안의 지속적인 방해를 받았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이후 외교권과 경찰권을 완전히 강탈당했다. 1904년 1월 21일 고종은 국외에 중립을 선언했지만, 2월 8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인천, 부산, 마산, 원산 등지에 군대를 상륙 시켜 서울을 점령하면서 자주적 개혁은 중단되고 일본의 고문정치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1904년 7월 20일에 군사경찰훈령(軍事警察訓令)을 만들어 치안권(治安權)을 빼앗은 데 이어 1904년 8월 22일에는 한일외국인고문용빙(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관한 협정서로 재정권마져 빼앗았고,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시늑약 (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은 강탈당했다. 1910년 8월 22일에 《한일병합조약》이 강제체결되고, 1910년 8월 29일에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로 멸망하였다.
◆ 이 척화비는 천가초등학교 교정에 있다.
첫댓글 2024년 대한민국에 살고있어 참 다행입니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 아름다운 자연을 위해 더 소중히 지키고 사랑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