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村居 /교외에서 살며
梨 花 開 盡 碧 桃 開 (이화개진벽도개) 피어있던 배꽃지자 벽도 꽃이 새로 피니
誰 遣 春 光 次 第 回 (수견춘광차제회) 누가 봄빛을 보내서 차례대로 피게 하나
窮 巷 悄 然 門 獨 閉 (궁항초연문독폐) 궁한 시골 쓸쓸한데 홀로 문을 닫아거니
滿 堦 香 雪 蝶 飛 來 (만계향설접비래) 뜰에 가득핀 흰꽃 찾아 나비들 날아오네
<어 휘>
次 第 : 순서, 차례
窮 巷 : 가난한 이들이 사는 좁은 뒷 골목
悄 然 : 쓸쓸함, 고요함
滿 堦 : 뜨락에 가득, 堦는 階와 같은 글자
香 雪 : 향기가 나는 흰꽃
<지은 이>
김육(金堉, 1580-1658), 자는 伯厚(백후), 호는 潛谷(잠곡), 본관은 청풍, 시호는 文貞이다.
1580(선조 13년) 7월 14일, 漢城 麻浦里(마포리) 外家에서 태어났고, 15세 倭亂(왜란)을 피해 海州(해주)에
있으면서 成渾(성혼)에게 수학하였으며 4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25세 尹汲(윤급)의 딸 坡平尹氏(파평윤씨)와 혼인하고, 司馬試(사마시) 初試(초시)에 합격하고, 3년 후에는
天磨山(천마산)을 유람 후 〈天聖日錄(천성일록)〉을 쓰다. 海州 神光寺(신광사)에서 독서하였으며, 3년 후에
태학생으로 牛溪(우계) 先生에 대한 辨誣疏(변무소)를 올렸다.
32세 太學(태학) 齋任(재임)으로 鄭仁弘(정인홍)의 儒籍(유적)을 삭제하였고, 이 해 별시 초시에 합격하다.
35세 광해군의 亂政(난정)에 실망, 세상을 피해 加平(가평)의 潛谷(잠곡) 淸德洞(청덕동)에 들어가 농경으로
생활하며 이듬 해 晦靜堂(회정당)을 짓고 記文(기문)을 쓰다. 44세 3월, 反正 이후 의금부 도사가 되다. 겨울,
增廣試(증광시) 初試(초시)에 수석하다.
45세 李适(이괄)의 亂(난)이 나자 어가를 호종하여 가다가 陰城(음성) 縣監(현감)이 되고, 9월 殿試(전시)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10월에는 정언과 전적을 차례로 맡다. 46세 1월, 병조 좌랑에 기사관을 겸하고는
「光海君日記」편찬에 참여 후에 지평, 전적, 정언, 문학 등을 두루 역임하다.
48세 胡亂(호란)이 일어나자 상소하여 戶牌法(호패법) 혁파하기를 청하다. 세자를 모시고 江都(강도)로 들어
가다. 5월, 接伴使(접반사)의 종사관이 되어 甑山(증산)에 가다. 9월에는 도체찰사 金瑬(김류)의 종사관으로
李仁居(이인거)의 난을 평정하였다.
50세 金世濂(김세렴)의 銓薦(전천/ 관리 추천)문제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문외 출송되어 楊根(양근)에 머물던
중에 冤獄(원옥)을 심리하라는 분부에 따라 금부가 아뢰어 사면되다. 53세 5월, 부수찬, 부교리, 이조 정랑이
되었고, 이후 의정부 검상, 사인을 거쳐 山陵(산릉)의 일로 가자(加資)를 받고서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55세 9월, 金剛山(금강산)을 유람 후 「淸風世稿)청풍세고)⌟와 「楓巖集/풍암집」을 간행하였으며, 57세 4월에
예조 참의가 되었다. 동년 7월, 聖節千秋使(성절천추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다음 해 6월에 돌아 와
복명하였다. 使行(사행) 중에 〈玉京壯遊錄/옥경장유록〉, 〈朝京日錄/조경일록〉, 〈集杜詩 /집두시〉를 짓다.
59세 1월, 장예원 판결사에 이어 다시 예조 참의가 되고, 이어서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湖西(호서)에
大同均役法(대동균역법)을 실시할 것을 계청하였으며, 救荒撮要/구황촬요」, 「辟瘟方/피온방을 한글로 번역
하고, 「己卯八 賢傳/기묘팔현전」을 간행하였다. 水車(수차)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 해에 安璐
(안로)가 찬한 「己卯錄(기묘록)」을 간행하고, 「楓巖集(풍암집)」을 중간하였다. 다시 조정으로 돌아 와서 동부
승지와 형조 참의, 대사성이 되었고, "皇明紀略/황명기략"을 짓다.
63세 3월, 대사간이 되다. 이어서 병조 참의, 호조 참의, 우승지가 되다. "類苑叢寶/ 유원총보" 를 저술하였다.
64세 승문원 부제조, 한성 우윤, 도승지가 되고, 2월에 元孫을 모시고 瀋陽(심양)으로 들어갔다가 귀국한 뒤
예조 참판, 이조 참판 겸 비변사제조가 되었다. 아들 金佐明(김좌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12월에, 원접사에
차임되고, 〈召使錄/소사록〉을 저술하였다. 66세 우참찬, 대사헌, 예조판서가 되고, 觀象監(관상감) 提調(제조)
로서 時憲曆(시헌력) 사용을 주장하였다. 이듬 해에 姜嬪(강빈/소현세자의 비)의 獄(옥)으로 체직되어 出城
(출성)하여 待命(대명)하였다.
후에, 謝恩副使(사은부사)로 북경에 가다. 燕行感慨錄(연행감개록〉을 짓다. 이듬 해 開城(개성) 留守(유수)가
되어 錢貨(전화)의 유통을 주장하였으며, 「孝忠全經(효충전경)」, 「童蒙先習/동몽선습」 등을 간행하여 학문을
장려하였다. 70세에 耆老所(기로소)에 들어가고, 9월에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 해, 大同法(대동법) 시행문제로
金集(김집)과 불화가 생기자 사직하였다. 후에 進香使(진향사) 로 차임되어 중국에 갔으며 이 때 〈三塗度厄錄/
삼도도액록〉을 저술하였다.
72세 영의정이 되면서, 湖西(호서)에 大同法(대동법)을 시행하고, 常平通寶(상평통보)를 유통시키며, 私鑄錢
(사주전)을 허락하고, 統營(통영)의 添防(첨방)과 평안도의 虞侯(우후)를 혁파하였다. 73세 「攷事增刪/고사증책」, 「海東名臣錄(해동명신록)」을 찬하였다. 77세 영의정으로 상차하여 湖西(호서)의 城役(성역)과 束伍軍(속오군)
일을 논했으며,「萬病回春(만병회춘)」을 印行(인행)하고, 이듬 해 兩湖 (양호)에 大同法(대동법) 실시를 청하다.
79세에 湖南(호남) 大同法 시행을 논하다. 均役法(균역법)과 射法(사법)을 논하고, 이 해 9월 4일, 한양 會賢洞
(회현동)의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지은 이는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추앙받는 김식(金湜) 선생의 후예로, 다재다능한 인물로서 한 평생을 나라
일에 진력한 분이다. 풍부한 유학적 소양과 학문적인 바탕위에 실용적인 민생에 대한 구휼방책을 세워 전란을
겪은 국가의 안정에 기여한 바가 크다. 이러한 공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대동법(大同法) 실시는 공의 집념과
노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공은 40세가 넘어 비교적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와, 하급직에서 재상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성심과 성의를 다 바친 경세가(經世家)였으며, 다방면에 걸쳐 많은 저서를 출간한 유능하고 근면한 선비이자 학자이기도 하였다.
공은 또한 필자의 11대조와 과거에 함께 급제하신 분이고, 두 분이 충청감사(잠곡선생)와 전라감사(낙주공)로
일하시면서 주고 받은 한시들도 있어서, 선생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공은 이처럼 조선 왕조를 통털어 유능한 재상으로 손꼽을 만한 인물로서, 아래와 같은 재미있는 고시조를 남기기도 하였다.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게
내 집에 곶 피며는 나도 자넬 청하옴세
백년 덧 시름 덜 일을 의논코자 하노라
오늘 소개한 잠곡(潛谷) 김육 선생의 칠언 절구에는,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촌가의 봄 풍경을 잘 묘사
하고 있다. 시인은 조정에서 여러 관직을 맡으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다가, 벼슬 길에서 물러나 고요하고
쓸쓸한 시골에 묻혀 있으면서 외롭게 지내든 시절의 작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