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도 베트남 선교여행 보고
참가자: 김보한목사(전주 평화중부교회) 5월22일- 26일까지,
박순종 목사
일시: 2006년 5월 22일(월) 10시 40분 인천출발 - 6월1일(목) 06시 30분 인천 도착
장소: 베트남 하노이, 하이정, 하이퐁, 하이 롱, 하노이, 남딩, 빙, 하노이, 타잉후엔
방문가정: 빙-닷 , 흥 , 룽 , 디엠 , 황티투, 부쑨안, 뚜이,
리엔 딸 남편 , 후엔 부모님, 탐 아줌마, 찐 아버지, 리엔 부모님집,
원반럼, 하일리 딸 부긴안 부모님집, 링 부모님집, 원반탕 가정, 노이 아줌마 가정
( 17가정 )
만난 사람들: 화이 아줌마 남편, 경석 딸-누나, 리엔 동생, 투안 아버지, 룽 동생과 친구들,
링의 사촌(부산에서 선원) 등
1. 그들은 가난한 노동자였다.
가난한 살림살이 속에서도 웃으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아껴 쓰고, 저축하고, 한푼이라도 소비 구조에 내버리지 않았다. 10년을 일하고 돌아간 디엠씨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여행 한번 가지 않았다. 어쩌면 10만원이면 그동안 헤어져 있었던 아픔을 삮이고, 수고한 보람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가족들과 바깥바람이라도 쇠고, 외식이라도 한번 할 것이 건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묵묵히 집에 있었다.
2명의 숙박과 아침 식사비를 포함해서 60달러 호텔에 4일간을 묵고 있는 우리를 너무나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미안 하였다.
자녀들은 책을 학교에서 물려받아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과서에 낙서나 메모를 하지 않고 사용하고 다시 물려주어야 하였다. 교과서 이외의 다른 동화, 소설, 잡지, 전집류 등의 서적이 있는 집은 없었다. 대학생의 방에도 책은 복사한 교과서 몇 권과, 필기한 노트밖에 없었다. 공부할 책상과 의자를 갖춘 집도 거위 없다. 옛날 사과 궤짝 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였다.
2. 한국에서의 고생이 가정을 회생시키고 있었다.
하이정의 디엠, 하이퐁의 순안, 하노이의 흥, 빙의 럼, 등등 모두들 그러하였다.
3층 집을 짓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정의 형편을 펴게 하였다. 아주 고생하고 저축하여 성공한 친구들은 어쩌면 나보다 잘살고 있었다.
3. 이산가족의 아픔은 너무나 크고 힘들었다.
10년, 8년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찐, 리엔 부부 가족, 흥 가족, 룽 가족 등등 모두들 이산가족의 아픔을 품고 있었다. 이들의 부모들과 형제 , 어린 자녀들을 만날 때 눈물이 흘렀다. 무엇이 이토록 아프게 하는가?
“그러면, 일 그만하고 귀국하면 될 것 아닌가?” 하고 말할 사람도 있다. 생존권의 문제를 그리 쉽게 말해서는 안된다. 남북의 이산가족이 만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10년, 5년 이상을 일한 근로자들에게 비자를 주고, 왕래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는 것이다. 그날이 속히 오도록 가족들을 만날 때 마다 또 기도하고 기도하였다.
4. 한국을 그리워하며, 다시 일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는 친구들 모두가 이 꿈을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빨리 다시 한국에 갈수 있나요?”
너무 슬펐다. 어쩌면 돈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지----. 생존권의 문제는 전혀 국가적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해서라도 그들은 먹고 살기를 원하고 있었다.
지난날 일본에 일하러간 한국인들이 항상 일본 이야기를 하고 일본말을 조금씩하며, 일본을 그리워하듯이......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네팔 산악지대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하노이의 오토바이처럼 돈을 향해 너무 달리며 행복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행복은 돈에 달려있지 않다. 문명에 달려있지도 않다. 오히려 자족함과 여유와 감사가 행복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가? 자유시장경제체제속에서는 어쩔수가 었이 살아남으려면- (사실은 행복을 찾으려면) 모두가 다 거리로 몰려 나와 달리고 또 달려야 하는가? 이제는 다 버리고 광야로 사막으로 빈손으로 들어갈 때인 것 같다. 선교의 중심에 이 여유와 감사의 영성을 주어야 한다.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5. 한국의 하나님은 베트남에는 없었다?
베트남에 있던 그 많던 교회는 거의 문을 닫았고, 남딩의 교회는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물론 가톨릭 교회였다. 개신교회는 아주 없었다. 한국에서 신앙훈련을 아무리 잘 받고 돌아가더라도 막상 예배 처소를 찾지 못하고, 신앙의 동료들을 만나지 못하고, 가족들에 둘러 싸여, 신앙을 잃어 버리고 만다.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던 원반럼은 2년만에 주기도를 하고 성경말씀을 들었다.
이를 위해서 하노이 선교센터 설립은 시급하다. 김보한 목사의 적극적인 후원과 계획들로 베트남에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1년전에 귀국한 원반탕 아저씨는 한국에서 교회에 나오고,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9일간 함께 지내는 동안 기독교인이 되기를 희망하였고,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나가기를 약속하였다.
6. 고용허가제를 통한 입국에 대한 홍보는 없었다.
고용허가제를 위한 한국어자격 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입국비용에 대한 한마디의 홍보도 없었다.
왜 산업연수생제도를 폐지하고, 고용허가제도를 실시한다고 하였는가? 가장 큰 문제는 입국비용 때문이었다. 한국에 입국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베트남 친구들은 자기 순서가 되어서 연락이 오면 10,000달러를 내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또, 그 순서라는 것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돈을 내야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고용허가제도는 자기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입국비용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홍보하지 않았다. 결국 산업연수생제도는 계속해서 이름만 바꾼 채로 시행되고 있었다. 한국정부의 공공연한 묵인하에..... 이것은 한국 관계기관에 제도개선을 요청할 사항이다.
7. 전주 평화중부교회(김보한목사)의 교우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귀한 학용품과 수건, 옷, 인삼 등의 선물들은 베트남 친구들에게는 너무 귀중한 선물이었습니다. 마음속 깊이 감사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물질적 선물이 아니라 마음의 선물이며, 선교의 귀한 열매로 맺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