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말약(郭沫若, 1892-1978)의 해학
- 마르크스(Marx, Karl Heinrich, 1818~1883)가 공자를 방문하다(馬克思進文廟) -
1949년 무려 한 세기 이상의 장구한 혼란을 극복하고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새로운 중국인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탄생하였다.
이는 중국사에 있어서 거대한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사에 있어서도 일대 사건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던 날 중국 최고의 지성인이며 문인이었던 곽말약은 이 새 출발에 대해 한 편의 시를 써 그의 큰 기쁨을 표출하였다.
인민의 중국은 아시아의 동쪽에 우뚝 섰다.
넓고 빛나는 수많은 길이 모두 새로운 천지를 위해 비춰준다.
엄청난 어려움을 이기고 오늘 새 중국 형성을 경축하니,
다섯 별이 그려진 홍기가 온 땅을 붉게 하는구나.
그 곳에 사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고, 물산 또한 풍부하다.
공인과 노동자들이 앞으로 영원히 이 땅의 주인이다.
우리의 영광된 조국으로 하여금 대동(大同)을 향해 계속 나아갈 것이다.
人民中國 屹立亞東
光芒萬道 福射寰空
艱難締造慶成功
五星紅旗遍地紅
生者衆 物産豊
工農長作主人翁
使我光榮祖國
穩步走向大同
반만년의 중국 역사에 있어서 왕조는 수없이 바뀌어 왔다.
이렇게 보면 1949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도 그러한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출발은 지금까지 중국이 겪지 못했던 새로운 양상이었다.
우선 새 중국은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못하던 사회주의 국가의 시작이었다.
다른 한편 개국 이래 항상 중국인의 정신적 지주였고 문화의 핵심이었던 유교(儒敎)가 주인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서구 사상인 마르크스주의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 뿐이겠는가? 나라를 송두리째 뺏겼던 13세기의 원이나 17세기의 청도 문화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중국보다 열등하여 그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지금까지 듣고 보지도 못하던 서양문화, 기독교 등은 지금까지 중국의 문화나 가치척도 등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버렸다.
이러할 즈음 중국 지식인들이 갖는 고뇌는 대단했다.
이에 필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새 출발을 열렬히 경축했던 지식인 곽말약이 지은 매우 흥미로운 하나의 우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10월 15일 공자의 문묘에 제사를 지낸 다음날 그의 문하생 안회, 자로, 자공과 함께 공자는 상해의 문묘에서 싸늘하게 식은 돼지머리를 뜯고 있었다.
서양사람으로 보이는 4명의 젊은 청년들이 4인교를 타고 곧장 문묘 안으로 뛰어들었다.
공자의 제자 중 힘이 으뜸인 자로가 분개하여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 때 공자는 ‘네 용기는 가상하지만 별로 쓸모가 없다’고 하며 황급히 제지하였다.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니 뺨은 바다의 게처럼 생기고 수염이 턱주가리에 가득한 사람이 앞장을 섰다.
자공이 이들을 영접해서 대성전으로 오르게 하였는데 공자는 그들을 정중하게 맞았다.
“어디서 온 누구시오?”
“서양에서 온 칼 마르크스입니다.”
공자는 원래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터라 마르크스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 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먼 길을 오셨으니 어떤 가르침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공자가 듣기에 마르크스의 말은 남쪽 오랑캐의 황새가 찍찍 거리는 소리와 같아 통역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저의 이데올로기가 이미 중국에까지 전해졌는데 요즘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선생님의 사상 때문에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사상이 무엇이고 내 사상과는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점들을 알려주십시오”
공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나의 사상은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체계도 잡혀있지 않고 두서가 없으니 선생님의 이데올로기부터 말하면 내가 그와 비교해서 견주어 보겠습니다. 선생님의 의견이 우리에게 전해졌으나 전혀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아직 번역된 것도 없기 때문이죠. 선생님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것이라면 아마 동서양의 잡지 몇 권만 읽으면 되겠지요?”
“좋습니다. 그러면 먼저 나의 이데올로기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사상의 출발점은 현실세계를 철저하게 긍정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삶이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탐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점에서 당신의 사상과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출발점이 같습니까? 혹은 다릅니까?”
역시 공자는 2500살이나 되었으니 능란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로 하여금 먼저 말하게 함으로써 논전에 있어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자 옆에 있던 자공은 마르크스의 말을 듣고 반갑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맞아요. 우리 선생님도 삶을 부유하게 하는 도를 중요시하셨습니다. 즉 천지의 가장 큰 덕은 ‘생(生)’이라고 하셨으니까요.”
이 때 공자도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요. 선생님과 우리의 출발점은 완전히 같습니다. 그러면 선생께서 생각하시는 이상세계는 어떠한 것입니까?”
공자가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마르크스는 신이 나서 자기의 사상에 대해 열을 토하기 시작했다.
“저는 물질주의자만도 아니고 원대한 이상세계의 꿈을 갖고 있습니다. 즉 만인이 하나같이 모두 자기의 재능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발전시키며 모두 각각 생활이 보장되고 걱정이 없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취하는 공산사회가 그 목표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천국이 건설되지 않겠습니까?”
“아! 옳아요”
공자는 손뼉을 치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내가 말한 이상세계와 대동세계에 대해서 한 번 말해 볼 테니 들어보시지요.
큰 도(道)가 세상에 행해지던 시대에는 천하를 자기의 사유물로 생각하지 않고 공동의 것으로 돌렸습니다. …… 사람들은 자기의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았으며 자기의 자식만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자식들도 같이 사랑했습니다.
늙은이는 안락하게 그 수명을 마칠 수 있게 하고, 젊은이들은 그의 일자리를 가질 수 있게 하고 어린이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하고, 홀아비와 과부, 고아, 병든 사람들도 모두 그들이 양육될 곳이 있게 했습니다.
…… 재화(財貨)는 삶에 있어서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므로 땅에 버려서는 안되지만 자기만을 위해서 감추어두지 않았으며, 힘은 필요하지만 자기만을 위해서 쓰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니 사람들은 모두 순박해지고 풍습이 아름다워 도적이 일어나지 않아 집집마다 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것을 대동의 세계라고 하는데 선생님의 이상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예기 「예운편」에 나오는 ‘대동사상’에 대해 공자는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마르크스는 속으로 ‘이 늙은이는 공상적 사회주의자이구나’라고 생각되어 반론을 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저는 공상가는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사회적 산업이 점차 증진되는 가능성과 자본이 소수인의 수중에 집중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빈곤의 병폐를 일으켜 투쟁은 영원히 그치지를 않습니다.”
이 때 공자 역시 동의를 표현하였다.
“옳아요 옳아. 나도 언젠가 부족함을 걱정하지 말고 균등하지 않음을 근심하며, 가난한 것을 근심하지 말고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하라고 했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선생님과 나의 견해는 결국 같지 않습니다. 나의 이상은 일정한 발전단계가 있으며 확고하면서도 실증적입니다.”
마르크스는 흥분해서 외쳐댔다. 공자도 지지 않고 크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인구가 많아지면 생활을 풍부하게 해야 하고, 식량이 족하고 군비가 충족되면 백성이 정부를 잊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천하를 밝게 하려면 먼저 자기나라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지요. 나 역시 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알며 옷 입고 밥 먹는 것이 풍족해야 영화와 욕됨을 안다고 했습니다.”
공자는 제자와의 대화를 상기하면서 마르크스의 이상세계에 대해 이미 자기도 논어 속에서 언급했음을 지적하고 있었다.
드디어 마르크스는 감탄하기 시작했다.
“2000년 전에 멀고 먼 동방에서 이미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신 선생이 계셨다는 것은 상상 못했습니다. 선생님과 내 사상이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내 사상이 당신 때문에 중국에서 시행될 수 없다고 했는지 모르겠군요.”
공자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가 무려 2000여 년 동안이나 참아왔던 답답한 마음에서 나오는 한숨이었다.
“중국인들이 어떻게 선생의 사상을 실현할 수 있단 말이오?. 내가 2400여 년 전에 말한 것도 실현이 되지 않아 이렇게 보시다시피 식은 돼지 머리만 뜯고 있는데 말이오.”
마르크스는 깜짝 놀라며 외쳤다.
“뭐라고요? 선생님의 사상도 실현되지 않았단 말입니까?”
“실현이라니요? 나의 사상을 오직 이해만이라도 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 지 모릅니다. 그러면 선생의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도 나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도 선생을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그제서야 중국의 정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났는지라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저는 이제 고향에 돌아가 저의 아내를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마르크스 선생님, 당신은 부인이 있으시군요.”
“왜 없겠습니까? 아내는 서로 뜻도 통하고 길도 같고 아주 미인인 걸요?”
“사람들은 모두 부인이 있는데 나만 없구나”
공자는 갑자기 풀이 죽으며 길게 탄식하였다. 공자 옆에서 반나절이나 혀끝이 간질간질하였던 자공이 재빨리 끼어들어 공자를 옹호했다. 이에 공자도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내 부모를 공경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부모를 공경하고, 나의 아이를 귀여워하므로 다른 사람의 아이를 귀여워한다고 말한 듯이 있듯이 나는 내 처를 사랑하므로 다른 사람의 처를 사랑할 수도 있는 사람이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의 마누라도 내 마누라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허허 선생님, 나는 공산주의만을 제창했는데 선생님은 공공연히 공처주의까지 부르짖고 계시군요. 선생님의 사상은 나의 사상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좋습니다. 다시는 선생님을 번거롭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마자 마르크스는 전쟁에서 패한 사람처럼 함께 온 사람들과 함께 서둘러 문묘를 빠져 나왔다. 유럽에 두고 온 부인을 잘못해서 공자에게라도 빼앗길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이 얼마나 기상천외하고 흥미로운 내용인가!
곽말약은 원래 의학을 공부했었고 시인이었고 극작가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 번역가이자 역사가였고 고문자학자였으며, 문학장조사의 지도자였으며 혁명적 정치가였고 걸출한 사회활동가이기도 했다.
또 중국 공산당의 선전가였다. 특히 1949년 공산주의 중국의 출범 후 과학원 원장이었으며, 전중국 작가 동맹의 의장이고, 세계 평화를 위한 활동에도 적극 가담하는 등 다재다능한 천재적 학자이며 정치가이고 또 공산주의자였다.
이러한 그가 쓴 위의 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 당시 중국이 직면했던 서양의 마르크스주의와 중국의 유교가 만나서 어떻게 서로를 융화시켜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결코 그 당시로서 끝날 수도 없었고 오늘날에도 계속 될 수 있는 문명사적이고 인류사적인 문화의 교류 또는 문화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다. 1993년 미국의 새무엘 헌팅톤이 쓴 문명의 충돌 이래 특히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타의 붕괴 이후 벌어지고 있는 미국과 이슬람 세계와의 계속 되는 분쟁 역시 바로 이러한 문명의 충돌이 아니겠는가!
비록 이 글이 작가에 의해서 우화나 콩트처럼 매우 해학적으로 쓰여졌지만 그것이 갖는 깊이와 의미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독자들에게 웃음을 던져주면서도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깊이 되새겨보도록 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