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2. 04.
기니피그에서 티푸스를 연구하던 중에 니콜 박사님은 감염된 동물이 뚜렷한 증상을 나타내지 않아도 전염성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미열조차 없다고 해도 그 동물은 감염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 1928년 노벨생리의학상 시상 연설에서
▲ 1928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세균학자 샤를 니콜(사진)은 티푸스를 연구하다 무증상 감염 현상과 이 상태에서도 전염력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다. 위키피디아 제공
중국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가 사실상 지역감염 단계로 진입하면서 환자와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 후베이성의 우한 인근 도시들도 지역감염 조짐을 보인다고 한다. 이 정도 치사율을 보이는 질환이 대도시에서 지역감염을 일으킨 건 100여 년 전 스페인 독감 대유행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지역감염이 우한 또는 후베이성의 몇몇 도시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세계로 확산된다면 신종 코로나는 스페인 독감의 21세기 버전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무증상 감염자를 통해서도 전파될 수 있다는 발견은 꽤 불길한 징조다. 특히 매일 수만 명씩 중국과 인적 교류가 이뤄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방역 방식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증상 감염과 잠복기는 어떤 차이일까.
무증상 감염자 전파 100여 년 전 발견
잠복기는 병원체가 감염한 뒤 숙주에서 병의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걸리는 기간이다. 병원체에 따라 잠복기 말기부터 전염력이 생길 수 있다. 반면 무증상 감염은 통상적인 잠복기를 넘어 신체 조직이나 혈액에 병원체가 존재함에도 특별한 증상이 없거나 경미해 당사자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다. 잠복기 말기 상태가 이어지는 셈이다. 병원체에 따라 숙주에 평생 남아있을 수도 있고 적응 면역계가 작동해 만들어진 항체로 소멸될 수도 있다.
무증상 감염의 발견은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의 세균학자 샤를 니콜은 급성 전염병인 티푸스의 감염 경로를 규명한 공로로 192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니콜은 모종의 병원체(훗날 리케차라는 작은 박테리아로 밝혀졌다)가 체외 기생충인 몸니를 중간숙주로 해서 전염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과정에서 니콜은 병원체에 감염된 동물이 특별한 증상을 보이지 않더라도 전파력이 있다는 뜻밖의 발견을 했다. 그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염되지 않거나 감염돼도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비율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니콜은 1933년 발표한 논문에서 뒤의 현상을 ‘불현성 감염(Les infections inapparentes)’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은 무증상 감염(subclinical infection)이라는 용어를 주로 쓴다.
병원체는 감염병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라는 니콜의 발견은 오랫동안 의학계에서 무시됐다. 19세기 미생물학의 등장과 함께 전염병의 병원체 이론(germ theory)이 수천 년을 이어오던 체액 이론인 사람의 몸 상태가 원인이라는 주장을 몰아내면서 ‘병원체가 질병의 특성을 결정한다’는 도그마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증상 감염은 사실상 모든 병원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고 전염성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데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라는 게 점점 분명해지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독감도 무증상 감염자에게서 옮을 수 있다. 독감의 경우 전체 감염자의 3분의 1이 무증상이다.
호흡기 질환의 경우 무증상 감염자의 체액에는 바이러스 농도가 낮을 것이고 기침을 하는 일도 드물어 전염력은 증상이 있는 감염자에 비해 훨씬 작을 것이다. 그러나 무증상 감염자가 많으면 이들을 통해 병원체가 옮을 가능성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연초 우한폐렴 소식이 알려진 뒤에도 중국에서 수십만 명이 들어온 우리나라에 잠복기 또는 무증상 감염인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는 게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이유다.
앞에도 언급했듯이 바이러스 존재는 신종 코로나 발생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다. 바이러스 접촉까지는 외부 변수이지만 발병 여부와 증상의 경중은 내부 변수에 해당하는 숙주의 몸 상태가 중요하다.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치료하다 감염돼도 멀쩡할 수 있고 무증상 감염자에게서 나도 모르게 옮아도 심각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동일한 병원체가 사람에 따라 이처럼 극과 극의 결과를 낳는 것일까.
▲ 바이러스에 의한 질환은 개인에 따라 증상 차이가 크다. 이는 숙주(사람)의 유전형에 따라 바이러스가 세포에 침투해 증식하고 빠져나가는 과정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왼쪽은 바이러스에 취약한 유형의 숙주에 침투한 경우로 바이러스(녹색)가 일사천리로 증식해 방출되고 있다. 오른쪽은 바이러스에 강한 유형에 침투한 경우로 곳곳에서 숙주의 방어체계(빨간색)에 막혀 바이러스가 힘을 못 쓰고 있다. ‘/ 바이러스(Viruses)’ 제공
숙주의 유전적 다양성이 차이 불러
바이러스는 크기가 나노미터 단위인 작은 입자로 숙주 세포 안에서만 증식할 수 있는 기생체다. 한 줌에 불과한 게놈(코로나바이러스의 경우 3만 염기)으로 60억 염기쌍으로 이뤄진 사람의 세포를 이기려면 바이러스의 입장에서 많은 행운이 겹쳐야 가능한 일이다. 침투에서 유전자 전사 및 번역, 게놈 복제, 조립, 방출까지 매 단계에서 숙주의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면서 동시에 방어체계를 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수한 돌연변이를 통해 이런 길을 찾았더라도 모든 숙주에게 통하는 건 아니다. 숙주의 유전적 다양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떤 단계에서 바이러스에 취약한 유전형을 지닌 불행한 숙주는 심각한 증상을 겪을 수 있지만 특정 단계의 진행을 방해하는 유전형을 지닌 숙주는 감염 자체가 되지 않거나 감염이 돼도 증식이 잘 안 돼 무증상 또는 경미한 증상에 그칠 수 있다.
바이러스 침투 단계에서 숙주의 유전적 차이로 감염 여부가 결정되는 유명한 예가 바로 HIV(에이즈바이러스)다. HIV는 백혈구 표면의 CCR5 단백질을 인식해 세포 안으로 침투하는데 CCR5 변이형(델타32)에는 달라붙지 못한다. 부모 양쪽에서 이 유전형을 받은 사람은 HIV에 노출돼도 감염되지 않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사스 코로나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세포 표면의 ACE2 단백질을 인식해 침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ACE2는 아미노산 805개로 이뤄진 꽤 큰 단백질로 다양한 유전형(단일염기다형성(SNP))이 존재한다. 따라서 바이러스의 S단백질이 인식하는 부분의 구조가 SNP로 다를 경우 결합력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실제 사스 코로나바이러스의 경우 ACE2의 한 변이형에서 감염률이 낮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일단 세포 안으로 침투한 바이러스는 게놈이 껍질(캡시드)에서 빠져나가 세포질로 들어간 뒤 증식(유전자 전사 및 번역, 게놈 복제)을 한다. 이 과정에서 게놈이나 전령RNA(코로나바이러스의 경우 게놈이 곧 전령RNA다)이 노출돼 있어 숙주 방어체계의 공격 대상이 된다. 숙주의 유전형에 따라 전투력에 차이가 나고 그 결과 바이러스가 증식에 실패하거나 증식 속도에 영향을 받는다.
모기가 매개하는 웨스트나일바이러스는 치명적인 뇌염을 일으키며 치사율이 3.9%에 이른다(미국의 경우). 참고로 치사율은 증상이 있는 환자 가운데 사망한 사람의 비율이다. 이런 고병원성 질환임에도 무증상 감염자의 비율이 70~80%에 이른다(혈청 검사를 통해 병을 앓은 적이 없음에도 웨스트나일바이러스 항체가 확인된 사람들이 환자보다 많다는 말이다).
지난 2009년 학술지 ‘PLoS 병원체’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OAS1 유전자의 변이형을 지닌 사람의 비율이 감염자에서 전체 평균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변이형은 유전자 발현이 낮아 OAS1 단백질이 적게 만들어지고 그 결과 바이러스 침투 초기에 노출된 게놈을 제대로 파괴하지 못해 증식 단계로 넘어가면서 감염이 된다.
최근 미국에서 독감이 유행해 “지금 신종 코로나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라는 미국 내 기사들이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는데, 1만여 명의 사망자 가운에 아이들도 68명이나 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참고로 지구촌에서 매년 수억 명이 계절성 독감에 걸려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지만(치사율은 0.05% 내외) 대다수가 지병이 있는 노인들이라 신종 코로나처럼 공포의 대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평소 건강하던 아이가 독감에 걸려 죽는 경우가 가끔 발생한다. 지난 2015년 학술지 ‘사이언스’는 IRF7 유전자가 고장난 아이들이 독감바이러스에 취약하다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IRF7는 전사인자로 바이러스의 게놈을 파괴하는 몇몇 인터페론의 발현을 유도한다. IRF7 유전자가 고장난 아이는 독감바이러스가 침투해도 이들 인터페론의 수치가 올라가지 않아 바이러스가 급속히 증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증식을 마친 바이러스 입자들은 너덜너덜해진 숙주 세포를 빠져나가야 새로운 세포에 침투할 수 있다. 이때도 숙주 세포가 협조해야 하는데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거꾸로 같이 죽자며 ‘물귀신 작전’을 벌이는 장치를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백혈구 세포 표면에 있는 테터린(tetherin) 단백질은 증식한 바이러스를 붙잡아 방출을 막는 역할을 한다. 에이즈바이러스의 Vpu 단백질이 테터린을 없애 바이러스 입자가 탈출에 성공한다. 그런데 테터린의 유전형에 따라 바이러스의 방출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테터린 단백질을 조금 만드는 유전형은 Vpu의 작용에 특히 취약해 바이러스가 다른 세포에 퍼지는 속도가 빠르고 에이즈 증세가 일찍 나타난다.
모든 바이러스에 강할 수는 없어
여기서 주의할 점은 모든 바이러스에 강한 유전형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유전형이 강한지 취약한지는 바이러스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이즈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하는 CCR5 변이형(텔타32)은 웨스트나일바이러스에는 오히려 취약한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숙주의 유전형이 바이러스에 대한 민감성이 결정하는 요인의 전부는 아니다. 나이와 성별, 영양 상태, 장내미생물 조성, 생체리듬 등 다양한 요인이 병원체에 노출됐을 때 감염 여부 및 증상 유무와 경중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역시 바이러스에 따라 선악이 달라진다. 통상적으로 아이는 면역계가 미성숙해서, 노인은 면역계가 노쇠해 병원체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바이러스에 따라서는 면역계가 왕성한 시기에 더 큰 피해를 볼 수도 있다(과잉 면역 반응을 일으켜 자멸하는 ‘사이토카인 폭풍’ 현상). 영양 상태도 불량하면 더 취약할 것 같지만 반대 경우도 있다. 예전 천연두 역학 조사 결과를 보면 만성 영양 결핍 상태인 빈곤층 아이들보다 잘 먹는 부유층 아이들의 사망률이 더 높았다.
동일한 병원체가 숙주의 유전형이나 환경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낸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현상이다. 아울러 감염이 되지 않거나 무증상 감염인 이유를 밝히면 바이러스의 침투를 차단하거나 증식을 억제하는 약물을 개발하는데 영감을 줄 수도 있다. 다만 사람을 대상으로는 연구의 제약이 많아 생쥐 같은 실험동물을 대상으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 위생시설과 백신, 항생제가 등장하기 전 인류의 기대수명은 20~25세 불과했다. 신생아의 절반이 어린 시절 각종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양한 병원체가 유행할 때마다 해당 병원체에 취약한 유전형인 아이들이 솎아진 게 누적된 결과다. 각 시대의 나이에 따른 생존율을 나타내는 그래프다. / ‘미국립과학원회보’ 제공
많은 세상일이 그렇지만 병원체와의 관계도 ‘운칠기삼(運七技三)’의 영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홍역바이러스나 천연두바이러스, 소아마비바이러스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유전형을 지닌 사람은 오래전 백신이 개발된 덕분에 잠재적인 위험에서 자유로워졌다(물론 본인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반면 독감바이러스나 코로나바이러스에 취약한 유전형을 지닌 사람(바이러스의 유형에 따라 달라진다)은 여전히 병원체가 출현할 때마다 긴장해야 한다(물론 누구인지는 모른다).
신종 코로나 사태에 대응해 외출할 때는 마스크를 쓰고 수시로 손을 씻는 등 개인위생을 철저히 해야겠지만 불운하게 바이러스와 접촉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의 상당 부분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내 유전형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약간 씁쓸하다.
강석기 /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