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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68혁명의 역사와
의의
1. 들어가며
이 리포트에서는 프랑스 68혁명의 역사와 의의를 다룬다. 이미 30년이 지난 프랑스 68혁명을
다루게 된 이유는 현재의 학생운동이 68혁명의 내용과 이미지를 상당히 많은 부분 차용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이다. 원래 필자의 의도는 68혁명이
어떻게 현재의 남한의 학생운동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 함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능력과 노력의 부족으로
이 과제는 다음으로 미룰 수 밖에 없고, 이 리포트에서는 68혁명과정에 대한 역사적 파악과, 현재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68혁명의
의의만을 간략히 다루고 있다. 어쨌든 현재의 진보운동과 특히 학생운동을 이해하는데는 68혁명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므로, 나의 고민에 이
숙제가 조금의 보탬이 될 수 있었다면 성공적인 공부였다고 평가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이제까지 장님이었다.
그들은 모든 원리에 오욕을 입히고 혼란시켰다.
그들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입까지 봉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편리에 맞춰진 인형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타도하고자 하는 것은 체제이지 '인간'이 아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모든 가면을 벗기고, 모든 침묵을 깨뜨리고
자신의 목소리로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광대'의 비밀을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비밀의 배후에 '부패한 국왕'의 추악한 얼굴이 숨어 있다.
우리는 이제 착취자로서의 역할을 미래에까지 연장시켜서는
안 된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혁명적 힘의 원천이 있다.
1968. 당시에 행동위원회 성명초안 [우리들은 전진한다]에서
1. 프랑스 68혁명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
낭트르는 파리 외곽의 대학으로, 증가하는 학생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건설한, 전통이 짧은 대학이다. 1968년 3월 22일에 8명의 학생들이 얼마 전 전국 베트남위원회의 회원 6명이 연행된 데 항의하러 데앙 학부장의 집무실로 쳐들어갔다. 그들 가운데 다니엘 콘-방디라고 불리는 사회학과 학생이 있었다. 그는 1967년 11월에 학생과밀에 반대하여 10,000-12,000명이 참여한 동맹휴업을 조직했던 그룹의 일원이었다.
68년 이전 10년 동안 학생 수는 170,000에서 514,000으로 증가하였다. 국가는 재정
일부를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는 거대한 학생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으며 대학교와 칼리지가 이를 떠맡을 것을 요구했다. 1962년 이후
대학면적은 두 배로 늘어났지만 학생 수는 거의 세배가 되었다. 편의시설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으며, 학생과밀은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데앙 집무실
점거 엿새만에 경찰이 투입되어 캠퍼스가 봉쇄되었다. 대학 내부의 학생 500명은 토론그룹으로 갈라졌다. 사회학과 학생들은 시험을 보이콧하고,
'우리는 왜 사회학도가 되려고 하는가?'라는 제목의 팜플렛을 제작했다. 학생들은 강의실을 상설 정치토론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강사들은 편이 갈리기 시작해, 일부는 학생들의 요구를 지지했다. 대학은 공간을 제공했지만, 4월 2일 학생 1,200명이 대형강의실 중 한 곳에
모였다.
3.22 운동
부활절이 지나자, 선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점거 한 달이 되는 4월 22일에 강의실에서 집회가 열렸다. 1,500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자본주의적 기술대학의 전면거부'를 요구하는 결의문이 제출되었으며, 잇따라 노동자계급과의 연대를 호소하였다. '3.22운동'은 캠퍼스 내 동료 학생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었다.
대학은 콘-방디를 포함한 관련 학생 8명을 징계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5월 3일 소르본느의 징계위원회에 출석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들을 변호하기 위해 강사 4명이 자원했다. 동맹휴업은 교육부장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이전해에 로디아세따와 사비엥에서 중요한 공장파업이 있었다. 로디아세따라는 화학섬유공장의 파업에는 23일간에 걸쳐 14,000명이 참여했다. 경영진은 그 해말에 파업노동자 92명을 해고하고, 공장폐쇄로 맞서기도 하였다. 1967년 6월 프조공장은 협상기간에 전투경찰이 투입되어 두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1968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르노 비이앙꾸르 자동차공장에서 모두 8건의 쟁의행위가 있었다. 알랭 뚜렝이 말한 '프랑스인은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라는 지적은 점점 명확해져 가고 있었다.
흑적기, 개선문에 내걸리다
5월 3일 금요일 소수 학생들이 소르본느 앞 광장에 모였다. 낭트르에서 온 학생들은 그곳 소르본느의 활동가들과 결합하였다. '낭트르의 8인'은 다가오는 월요일에 징계를 받을 예정이었다. .
군중들이 불어나기 시작해서 대학당국은 마비상태가 되었다. 오후 4시경 경찰과 폭동진압경찰이 소르본느를 봉쇄하였다. 그들은 학생들을 체포하였는데, 그들은 헬멧을 쓰고 요소에 분산 배치되었다. 소식이 급속히 퍼져 시내 전역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연행자를 구출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소르본느가 강제로 폐쇄된 것은 700년 역사에서 두 번일 뿐인데, 다른 한번은 나치가 파리를 점령한 1940년의 일이다. 전국학생연합(UNEF)와 전국고등교육 교원조합(SNESup)은 즉각 파업에 돌입하여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제출했다.
1. 소르본느의 재개
2. 경찰 철수
3. 연행자 석방
이 단체들은 3.22 운동과 함께 하였다. 최초의 불만은 학생과밀로부터 제기되었지만, 이제는 더 넓은 세력들과의 연대 위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폭력 경찰
5월 6일 월요일, '낭트르의 8인'은 인터내셔날가를 부르면서 경찰 방어선을 통과했다. 그들은 대학징계위원회에 출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학생들은 파리 시내를 행진하기로 결정했다. 라텡 지구로 되돌아오는 길에 생 쟈크 거리에서 경찰로부터 습격을 당했다. 학생들은 보도블럭을 깨고, 바리케이트를 만들기 위해 차를 뒤엎었다. 경찰은 최루가스를 쏘아대고 증원을 요청했다. 생 제르멩 거리는 유혈전장이 되었으며, 공식발표에 따르면 그날 하루 422명이 체포되고 경찰 345명이 부상당했다. 이 날은 '피의 월요일'로 68년 운동사에 기록되고 있다.
화요일에는 대행진이 뒤따랐고, 경찰을 조롱하듯이 흑적기가 개선문에 내걸리고 인터내셔날가가 도로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 주는 비슷한 투쟁이 계속되어, 거리는 군중들로 생동감이 넘치고 정치토론이 활발하였다. 수요일 경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투
중간계급은 경찰이 학생들에게 휘두른 야만성에 진저리를 쳤으며, 대다수의 노동자계급은 국가에 맞서는 학생들의 전투욕에 고무되었다. 5월 10일 금요일 고등학생을 포함한 학생 3만명이 당페르-로쉬로 근처에 모였다. 그들은 생 제르멩 거리를 따라 소르본느를 향해 행진했다. 생 제르멩 주위의 모든 도로는 충돌에 대비한 무장경찰이 차단하였다. 시위대는 경찰의 공격에 대비해 50개의 바리케이트를 세웠다. 한 목격자가 전하길, "우리 바이케리트는 이중이다. 하나는 3피트 높이의 돌무더기이고, 다른 하나는 20야드 뒤에 나무, 자동차, 쇠기둥, 쓰레기통으로 쌓아올린 9피트 짜리이다. 우리의 무기는 돌, 쇠붙이등 거리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라디오 리포터는 거리에 60개의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유럽1 방송의 보도와
뤽상부르 라디오를 청취하기 위하여 밤을 세웠다. 정부는 요구사항 3가지 중 2가지를 양보했으나, 연행자는 석방하지 않았다. '동료를
석방하라!'는 요구는 실현되지 못했다.
탄압
바리케이트는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학생과 시위대는 신경가스로부터 보호하고자 소다수에 적신
손수건을 사용했다. 싸움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주택가에 경찰이 들이닥쳤고, 사람들은 끌려가 경찰차 안에서 두들겨 맞았다. 임산부가 맞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옷이 벗겨졌고, 일부는 결박당할 때까지 사타구니를 걷어채였다. 가투가 끝날 때까지 367명이 부상당하고 460명이
연행되었다. 토요일 아침, 바리케이트를 치우기 위해 병력 수송차량이 들어왔으며, 생 제르멩 거리를 내달릴 때에는 야유와 조롱을 받았다. 5월
13일 월요일 학생들은 석방되었으나, 이미 불길은 걷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은 하루동안 파업을 지시했고, 같은날 파리에서 가두행진이
있었다. 적게 잡아 20만이 '드골 퇴진'을 외치며 가두행진에 참여했다. 지금 정부지도자는 적으로 간주되었다. 행진 후에 해산 요구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따랐으나, 학생들 대다수는 소르본느를 점거하기로 결의했다.
속임수를 부리는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PCF)은 낭트르의 시위학생들을 처음부터 비난했었다. 총비서 예정자, 조르즈 마르셰는 '폭로되어야 할 엉터리 혁명'이라는 글을 출판했다. 그는 이 글에서 3.22운동이 대부분 대부르조아의 아들들이며 노동자계급 출신의 학생들을 경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 사업체의 지배인이 되기 위해 혁명의 불길을 곧 잠재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5월 8일 당지도부는 운동의 규모를 보고 나서 기조를 바꿔 봉기를 장악하려 들었다. 그들은 지금 학생들의 선례가 작업장에서도 반복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사태를 방치해 공산당의 통제를 벗어나게 하기보다는 행동을 편들고 있는 양 보여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태를 또 한번 오판했다. 노동총연맹(CGT, 공산당이 좌우하는 노조)지도부 또한
노동자들이 이미 주도권을 잡고 난 직후에라야 작업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행동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루이 아라공(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공산주의 작가)은 오데옹에서 열리는 집회에서 연설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집회에 참석한 3.22운동 사람들은 '전 인민의 아버지, 스탈린
만세'라는 풍자 섞인 외침으로 그를 조롱하고 야유했다. 당 정치국원 로제 가뤼디는 학생들이 주장한 경제의 자주관리, 자치위원회와 탈집중화 원칙을
수용했다. 또한 학생들의 목표와 일치감이 확산됨에 따라 '프라하의 봄' 사건에 대해서도 사죄했다. 그는 곧 PCF에서 쫓겨났다.
당에 봉사하는 것만이 진실?
PCF는 학생운동을 대개 '바쿠닌, 트로츠키주의, 단순 모험주의의 극좌, 쁘띠부르조아적 혼합물'로 분류하였다. 이즈음 당기관지 '뤼마니떼'에 익명의 글이 실렸다. 이 글의 필자는 청년부 장관이 콘-방디와 '접촉'했으며, 3.22운동에 자금이 건네졌다고 주장했다. 이런 비난은 완전히 날조된 것으로 매우 불순한 상상력의 극치였다. 물론 공산당이 이런 류의 전술에 의존하기는 이번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소르본느는 마르크스, 레닌, 마오의 포스터가 전면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오래된 기둥들을 장식함에
따라 밤새 변해갔다. 흑적기가 베트콩 깃발과 나란히 걸렸다. 트로츠키, 카스트로, 체 게바라 사진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었다'라는 구호와 함께 나란히 벽을 도배하였다. 소르본느의 이러한 사진들은 학생운동의 이데올로기적 혼란상태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15인
점거위원회가 5월 14일 선출되었며, 위원회의 활동은 24시간으로 제한되었다. 중앙 원형극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정치토론으로 요동쳤다.
시험제도는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되는 의식'으로 비판받았다. 3.22운동은 더 많은 노동자의 자식들이 자본가가 되기보다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구별이 철폐되기를 바랬다.
혁명적 수집품
예술학교(Ecole de Beaux Arts)는 5월 14일에 점거되었다. 매일 아침 자유주제로
집회가 열렸다. 그리고 나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만든 포스터가 제작되었다. 이 포스터들이 거의 즉각적으로 수집가들의 수집품목이 되어 부잣집에서나
발견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이다. 포스터들은 '인류는 최후의 자본가가 최후의 관료와 함께 처형된 후에라야 자유롭게 살 수 있다', '1인
독재자에 반대하는 보편적 의지(The general will against the will of the general)', '상품은 인민의
아편이다' 등과 같은 슬로건으로 뒤덮였다.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는 급진적 의사, 건축가, 작가들의 점거가 이어지고 있었다. 1968년에는 장 뤽
고다르와 프랑스와 트뤼포가 전국적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영화제 홀을 장악하는 바람에 깐느 영화제까지도 중단되었다.
파업
5월 14일 낭트 근처, 남부항공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였다. 뒤이어 클레옹, 플렝, 르 망,
불로뉴가 모두 파업에 들어갔다. 클레옹의 청년 노동자들은 작업 교대시 공장을 벗어나길 거부하고서 경영진을 사무실에 감금하였다. 노조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분위기에 눌려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남부항공 같은 곳에서는 노조 간부의 자문 없이도 무기한 파업을 결의하였다. CGT지도부는 완전히
기습을 당했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주도적으로 요구 안을 제시하고 행동을 이끌었다. 노조
지도부는 짧은 시간이지만 주인을 지키는 개처럼 따라다녔다, 왜냐하면 이것이 노동자들에 대한 얼마간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5월 16일 몇 천명의 학생들이 35,000명의 노동자가 파업 중인 불로뉴 비이앙꾸르로 몰려갔다. CGT 간부들은 교류를
저지하기 위해 공장출입문을 봉쇄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장지붕에 올라가 환호성을 외쳤으며, 위험한 철제난간에서까지 토론이 벌어졌다. 연대란
바로 이런 것이었으며, 소수가 가로막고 출입문을 봉쇄한다고 해서 막을 수는 없었다. 노르망디, 파리, 리옹의 공장은 집단적으로 사실상 문을
닫았다. 5월 18일 석탄생산이 중단되었고, 파리의 공공운송 또한 멈췄다. 전국철도가 뒤이어 파업에 동참했다. 가스, 전기부문 노동자들도 직장을
장악했지만 가정용은 계속 공급하였다. 만 명이 일하고 있는 생 나제르 조선소에 적기가 내 걸렸다. 5월 19일 주말에는 파업노동자가 이 백만
명, 122개 공장이 점거 중이었다고 보고되었다.
파업의 물결
프랑스은행의 파업 가능성이 사람들을 패닉상태로 몰고감에 따라 예금인출은 500프랑으로 제한되었다. 운송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자 석유비축분이 곧 바닥을 드러냈다. 5월 20일 월요일 해협을 운항하는 여객선이 뜨지 않았으며, 여행객들은 브뤼셀, 제노바, 바르셀로나로 가는 버스나 긴급수송차량을 타기 위해 줄지어 있었다.
포르투갈, 북부 아프리카, 유고 출신의 이민노동자들이 많은 시트로엥 공장은 여전히 가동 중이었다. 5월 20일 아침 6시, 이민노동자들은 작업교대를 위해 공장으로 가는 길에 그들을 환영하는 학생들의 피켓시위을 만났다. 외국인 청년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리플렛을 보고 출근을 망설이고 있을 때, 인근 공장에서 동료들의 시가행진이 들이닥쳤다. 시트로엥 공장도 그렇게 파업에 들어갔다. 5월 21일 금요일, 섬유산업과 파리의 대형백화점들도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총파업의 물결에 동참했다. 오를리 공항의 항공관제사와 프랑스TV(OPTF)는 이미 그 전날 목요일에 투표를 통해 파업에 돌입했다.
5월 20일 프랑스TV 스탭진은 다음과 같은 요구 안을 제출했다.
1. 일주일 40시간 근무
2. 퇴직연령 하향조정
3. 1963년에 제정된 파업금지법 폐지
4. 최소임금 일주당 1000프랑 보장
5. 정부간섭 철회
총파업
2주간에 걸친 총파업에 9백만 이상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어떤 사람은 "수요일에는 장의사까지도
파업했다. 지금은 죽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노동자들은 위대한 능력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가스와 전기부문 노동자들은
파업에 동참했지만, 몇 번의 짧은 공급중단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파리에서 식료품 공급은 초기엔 중단되었으나 정상으로 재개되었다. 체신노동자들은
긴급전보를 배달하는데 동의했다. 인쇄노동자들은 TV와 라디오의 미디어 독점을 원하지 않았으며, 신문사가 '정보전달이라고 하는 본연의 역할을
객관성을 가지고 수행'하는 한에서 신문을 찍는데 동의했다. 일부에서는 신문을 인쇄하기 전에 헤드라인과 기사내용의 수정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일은
대개 '르 피가로'나 '라 나시옹' 같은 우익 신문에서 일어났다. 어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생산이 이루어졌다. 브레스에 있는
CSF공장에서 노동자들은 파업참가자들이나 시위자들 모두에게 중요한 워키토키를 생산했다. 생 우엥의 왱더 건전지공장 파업위원회는 CGT의 개혁주의
노선에 찬성하지 않았으며, 노조관료들과 대화하려하기 보다는 관계를 끊기로 결정했다.
노동자 도시
1968년의 모든 운동과 사건들은 낭트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 5월의 일주일간 그 도시와 그 외곽지역을 노동자가 혼자 힘으로 통제하였다. 권력과 정권의 낡은 바람막이들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과 도시를 장악하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방관하였다. 5월 24일 농민들이 노동자와 학생들간의 연대에 대해 항의함에 따라 도시 둘레에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운송 노동자들이 도로 장애물을 차지하고 모든 진입차량을 통제했다. 가솔린 공급도 통제를 받아 노동자들의 허락 없이는 유조차가 들어 올 수 없었다. 유일하게 가동되는 가솔린 급유기는 의료용으로 확보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음으로써 식료품 가격을 인하할 수 있었다. 80쌍띰므였던 우유가 이제는 50쌍띰므에 팔렸다. 토마토는 킬로당 48쌍띰므로 떨어졌다. 이같은 가격인하를 보증하기 위해, 가게는 파업위원회가 만든 스티커를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야만 했다. 그 스티커에는 "이 가게는 영업을 허가 받았습니다. 이곳의 가격은 조합에서 항상 감독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교사와 학생은 탁아소를 차려서 휴교기간 중에 파업노동자의 아이들을 보살폈다. 여성들은 도시 곳곳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파업에 참여하는 것뿐 아니라 식품공급을 담당하는 위원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짧았던 낭트에서의 일주일은 그렇게 상이한 조건에서도 노동자들이 지역을 접수해서 사회주의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최고의 본보기이다. 사회를 다양한 방식으로 창조할 수 가능성은 낭트 한 곳에 그쳤으며, 불행하게도 68년의 그날 이후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가 버렸다.
개혁과 변화를 위한 조치
정권유지에 두려움을 느끼며 사라져가는 권력을 무디게 관망하고 있던 드골은 5월 24일 텔레비젼을 통해 전국에 연설을 하게 된다. 그는 '국민들의 보다 광범위한 시위참여와 그러한 행동으로 초래될 결과에 대해 보이고 있는 직접적인 관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리고 나서 드골은 '개혁과 변화를 위한 조치'로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같은 날, 3.22운동은 3만명이 바스띠유 궁까지 행진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경찰은 정부청사(the Ministries)들을 최루가스나 경찰을 동원하여 방어하였으나, 증권거래소는 무방비상태로 방치되었다. 이즈음 도끼, 각목, 쇠파이프로 무장한 다수의 시위대가 증권거래소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일부 좌익그룹의 기가 꺽인 것도 이즈음이었다.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JCR(혁명적 공산주의청년단)은 시위대를 라텡 지구로 되돌렸다. 전국학생연합과 통일사회당 같은 그룹은 재무부, 법무부 건물의 장악을 막고 나섰다. 콘-방디는 이 사건을 두고서, '우리(3.22운동)가 보기에, 이 모든 하찮은 것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만약 5월 25일에 파리의 가장 중요한 정부청사들이 점거되었더라면, 드골 정권은 그 즉시 짜부라져 버렸을텐데...'라고 말했다. 콘-방디는 그날 밤 이후 강제로 추방당했다.
이러한 점거로 3.22운동 소속의 학생들이 드골 체제를 붕괴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보여준 투쟁정신에 고무되었던 대다수 전투적 청년노동자들의 의식은 고양시켰을 것이다. 학생들의 투쟁은 비록 혼란스러웠고 가지각색의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포괄하고 있었지만 시사하는 바가 컸다. 다이너마이트가 있었고 학생 봉기는 그 도화선이었다.
정부청사를 점거했더라면 사회혁명을 향한 일보전진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파업 중인 1,200만 노동자 가운데 이전부터 조합과 관련 있던 노동자는 단지 3백만명 뿐이었다. 전국을 마비시켰던 총파업 과정에서 제출된 노동자들의 요구는 노조 지도자들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였다.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시위의 물결 속에서 노동자들의 기대치는 상승하였다. 정부청사를 점거했더라면 투쟁의 목적이 단지 자본가와의 경제적 협정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행동이 취해졌더라면 노동자들을, 당시 관건은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지 단지 그것을 어떻게 땜질할 것인가의 문제는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좀 더 접근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1968년에 목격했던 모든 봉기에서, 여론전의 승리를 획득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러한 의식을 행동으로 촉발시켜 무엇을 획득할 수 있는지, 어떤 승리가 가능한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조직화된 그룹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학생운동이 만약 정부건물을 장악했더라면 이러한 방향으로 한 발자욱 나가는 것이었으리라.
노동자들이 가두의 학생들이 벌인 투쟁에 고무되었다면, 전투적 노동자들은 관청 점거에 힘을 얻을 수 있었을텐데. 그리고 자본가로부터 임금
인상말고도 더욱 많은 것을 쟁취할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더라면 프랑스를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었을텐데.
종결
5월 27일 월요일, 정부는 최저임금 35%, 통상임금 10%의 인상을 보장했다. 이틀 후
CGT 지도부는 50만 노동자가 파리를 가로지르는 가두행진을 조직했다. 파리는 '인민의 정부'를 요구하는 포스터로 뒤덮였다. 불행하게도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 스스로가 장악하려 나서기 보다는 지배자를 교체하려는 관점에서 사고하고 있었다. 드골과 그의 충복들은 혁명의 가능성에
질겁해서 생 디지에 전투비행장으로 피신했으며, 육군참모총장과 협의를 통해 만약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육군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면 의지할 수
있을런지 타진하였다. 5월 30일 그는 다시 프랑스 텔레비젼에 나타나서 국민투표 계획을 철회하는 대신 40일 내의 총선거를 약속했다. 드골은
상투적인 방식으로 만약 '학생들의 공부를 방해하고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세력(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때문에 프랑스 국민들이
정상생활을 하지 못하고 고생을 한다면', 더욱 강력한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공언했다. 드골의 연설이 있고 나서, 공장에 남아있는 파업노동자들을
해산하기 위해 CRS가 파견되었다. 6월 5일, 대부분의 파업이 끝나고 자본주의 내부에 평상시 같은 분위기가 다시 찾아들었다. 그날 이후까지
계속된 파업들은 무장차량과 화기가 동원된 군사작전으로 파괴되었다. 고립되어 벌이는 각개전투들은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눈앞에서 날아가 버린 승리
모든 거리시위가 금지되고, PCF는 잔존하고 있는 행동위원회를 파괴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체면을 차리려 하였다. 6월 말경 대학은 다시 문을 열었고, 흑적기는 소르본느에서 끌어내려졌다. 사람들은 이러한 패배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보수주의의 확실성으로 돌아섰다. 총선거에서 드골은 투표의 60%를 획득했다. 권력 장악력은 다시 강화되었다. 1968년 당시의
사회체제는 오늘날 대다수 서구 유럽국가에 복제되었다. 5월 소요기간 중에 그 체제는 격랑에 휘말렸고, 드골은 대중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해야 할거라고 예측했었다. 그랬더라면, 거리는 5년후의 칠레처럼 유혈이 낭자했으리라. 콘-방디와 3.22운동은 지시자와 복종자 간의
노동분업이 사라진, 노동자평의회에 기반한 무계급 사회를 고무하였다. 그러나 명백하게도 미래사회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다른 좌파와 공유되지
못했으며, 그들이 수행한 역할은 기존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난관을 조성했다. 국가권력이 붕괴되어 가자 낭트의 경우처럼,
노동자계급이 직접 주도하여 도시를 제어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다. 가장 활동적인 파업 노동자는 가장 진보적이었으며 노조
지도자들보다도 더욱 통찰력이 깊었다. 노동자계급은 단순한 요구 이상으로 쟁취해야 할 것을 보여주었으며, 그러한 투쟁으로 자본가와 맞섰다.
스탈린주의자
궁극적으로 68년 혁명은 왜 실패하였는가? 사태가 결정적인 국면에 이르렀을 때 의견, 혹은 전술상의 협조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당한 영향력이 있던 PCF는 선거에서 자신들의 의석이 늘어나리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이 통제하고 있지 못한 운동들에 대해서는 모두 적대적이었다. 노조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관심을 '빵과 버터'에 국한시킴으로써 그들의 요구를 가라앉혔으며, 폭넓은 정치적 이슈들로부터 멀어지도록 조장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열정을 가졌지만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풍부하게 사고하고 있지 못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우연에 내맡겨졌고, 전체 운동은 터널 끝에 존재할 것만 같은 자유의 횃불을 필사적으로 찾아나서는 눈먼 장님처럼 휘청거리는 듯 했다. 68년 반란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는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가 민중들의 전체제에 대한 문제제기 속에 반란의 격랑에 휘말리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의 기개와 대담함에 불이 붙은 노동자계급이 현 체제의 한계 내에서는 수용될 수 없는 요구를 제기함에 따라 68년 사건은 매우 급속하게 전개되었다. 총파업은 노동자계급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아주 단호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더 많은 협력과 조직이 필요하였다.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 간 연대조직의 건설과 대표자가 실질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메커니즘을 창조하길 원했다.
타협에서 반란으로
반권위주의 좌파는 비록 매우 활동적이었지만, 파업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너무나 미약했다. 파업
중인 여러 노동자들은 행동을 통일하여 국가를 무너뜨리려 하였다. 프랑스는 이미 경제적으로 혼란에 휘말렸으며, 국가는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노동자위원회와 작업장의 실질적 민주주의 덕분에 좀 더 강력하게 협상에 임할 수 있었으며, 드디어는 전면적인 반란을 가능하게 하였다. 일단 공장이
자주관리 상태에 들어간다면, 국가는 패배하는 꼴이 된다. 앞서 설명한 바대로 자주관리안은 제출되지 못했다. 기층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대변해줄 효과적인 민주주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원했다. 노조 지도부는 이를 두려워하여 교묘하게 회피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적으로 선출된 대표자를
통해 공장위원회는 국가가 수용할 수 없는 요구사항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누가 프랑스를 책임져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자본가의 가면을 벗길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잡아채야만 한다. 체제가 약점을 노출했을 때, 그것을 파괴하고 대체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한 길일 것이다.
2. 프랑스 68혁명의 원인과 의의
그 동안 5월 혁명의 원인에 관해서는 혁명직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이나 당시 혁명참가자, 언론 등에서 수없이 많은 이론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3가지 원인에 있어서는 대략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첫째 원인 - 대학이 당면한 문제들
프랑스 대학이 당시 고등교육정책에서 실패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대학은 학생수의 양적 팽창으로 상류층에서 중산층 자녀들이 대거 대학에 진학하여 대중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변화를 거부하고 따라서 효율적인 고등교육의 기능을 수행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전후 1945∼1950년의 베이비붐 세대 때 출생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자 대학생들 수는 급격히 늘어나 1961년에 23만 명이었던 데 비해 1968년이 되면 2배 이상 증가하여 약 6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법학부와 인문학부는 각기 3백 퍼센트와 2백50퍼센트의 증가율을 보였다. 하지만 대학당국은 이들에게 적절한 교육시설을 지원해주지도 못하고 있었다.
대형강의실, 낡은 건물, 구태의연한 강의내용과 평가제도, 암기와 주입식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교수법, 기숙사 시설과 대학교원 수의 절대적인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정부당국이나 정책전문가들이 대학이 처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당시 교육부장관이었던 알랭 르피트의 회고에 따르면 개혁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대학의 실권담당자들이나 교육부 관료들의 저항으로 실행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적으로 증가한 대학생수로 인해 신세대들은 졸업 후 과거의 선배들처럼 사회의 상층으로 신분상승을 할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이유로 당시의 대학생들이 사회의 주변부로 소외되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따라서 당시의 대학생들은 대학이 허구적인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양산해 낸다고 보고, 일찍이 기존사회를 비판하면서 저항하였던 선배, 폴 니장이 설파하였던 '부르주아 사회를 충직하게 지키는 개'가 되는 것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기존 지식인들을 철저히 경멸하였고 그들에게 더 이상 경의를 표하지 않았고 완전한 단절을 택하였다. 대신 새로이 등장한 소장연구자들이나 대학의 조교들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혁명당시의 대학생들은 알뛰세르, 레비스트로스, 라깡의 저서들을 읽고 있었으며 신학문조류였던 제3세계 연구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둘째 - 드골의 관료주의
드골의 권위주의적 관료주의 역시 혁명의 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10년 동안 유지되어온 드골 정권의 정치적 권위에 대한 반대가 주요한 이유라는 주장이다. 드골은 2차대전기에 프랑스의 구원자, 그리고 이후 대통령 재직기간 동안 강국 프랑스의 이미지를 느끼게 해준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기까지에는 그의 역할을 일정부분 인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이 시기에 국한될 뿐, 60년대말이 되면 그는 사회의 다양한 욕구와 변화를 충족시키는 정책을 펴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정책으로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었다. 즉 그는 변화를 읽어내는 데 실패했으며 테크노크라트와 권위주의에 의존한 정치로 인해 지나친 관료화가 빚어낸 부작용을 제때에 개혁하지 못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프랑스의 국내정치를 혁명의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하는 사람들은 소수이다. 5월 혁명이 국내적 정치요인으로는 제대로 해석해낼 수 없는 한계가 워낙 분명하기 때문이다. 혁명당시에도 드골 정권 타도구호가 그렇게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
셋째 - 5월혁명의 국제적 성격
5월혁명 참가자들은 중국혁명이나 쿠바혁명에서 새로운 혁명모델을 찾기 시작하고 미국과 서유럽 나아가 소련의 제국주의에 반대했으며 체 게바라를 영웅시하는 등, 60년대 말 세계가 당면한 문제들을 한꺼번에 제기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로써 5월 혁명은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부학자들은 68세대, 또는 5월 혁명세대라 칭하기보다 이러한 국제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식스티즈라는 용어를 즐겨 쓰기도 한다.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에게는 60년대 초기부터 프랑스가 철수한 베트남에 미국이 개입하자 즉시 이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미국의 베트남 북폭 중단과 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주장하면서 베트남 민족해방을 지지하였다. 이미 1965년부터 사르트르, 보부아르, 비달나케 양켈레비치, 쟝 셰노 등과 같은 지식인들이 대거 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5월 혁명 도중에 북 베트남의 깃발이 나부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67년 10월,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반대하는 시위에는 38개 운동단체가 약 3만5천명의 군중을 동원할 정도로 강도 높게 전개되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과정에서 지식인들과 대학생, 고등학생들은 정치적 역량을 배양하였고 이것이 고스란히 68혁명에 이전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한 이유로는, 우선 알제리 전쟁을 반대한 전력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알제리는 2백년 동안이나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알제리는 프랑스의 총독이 파견되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프랑스의 3개 도로 분류되고 있었고 3백만 명이나 되는 프랑스인들이 알제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알제리가 민족해방 전쟁을 시작하자 프랑스 지식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군부와 우파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알제리 해방운동을 지지하였다. 알제리는 결국 1965년 프랑스로부터 해방된다. 알제리 전쟁을 계기로 소장학자들 사이에 제3세계연구가 굉장한 열기를 가지고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스탈린주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던 당시 프랑스 공산당과 공산당 산하기관으로 간주되던 노동총동맹(CGT)의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도 당연히 거부반응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혁명 이후의 안락한 생활을 헌신짝처럼 벗어던지고 제3국에 가서 다시 위험하고 고된 혁명운동에 뛰어든 체 게바라는 대학생들의 우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전도 유망한 프랑스의 청년 레지스 드브레가 목숨을 걸고 게바라의 혁명전선에 참여한 것은 대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게바라가 68혁명이 발생하기 직전 1967년 10월 독재권력과 미국 CIA 의 개입으로 총살당하자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면서 지식인들과 대학의 단체들은 연대감을 느꼈고 이미 이론무장을 한 뒤 정치적 토론에서 정부나 우파 지식인들의 논리적 궤변을 바로 지적해낼 수 있었으며, 앞서 지적한 바대로 이러한 연대감과 정치의식은 고스란히 68혁명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이러한 68혁명의 국제적 성격은 혁명 당사자들이 꼭 드골 정부의 타도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넷째 - 대량 소비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
무제한적인 소비와 이윤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거부반응도 혁명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는 마르쿠제의 현대사회 비판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혁명 와중에 나타난 유인물이나 대자보를 살펴보면 여성에 대한 억압과 흑인들의 비참함, 인종 차별등을 고발하고 있으며, 강대국 중심의 패권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혁명 직후 일부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1968년 3월의 금융위기를 혁명의 주요한 원인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2차 대전 이후에 프랑스는 유례없는 경제적 호황기를 구가한다. 그러다가 1966년부터 경제적 성장이 둔화되고 1968년에 접어들면 실업률이 갑자기 증가한다. 여기에 그 동안 경제불황으로 적자가 누적되었던 영국과 미국의 여파로 고정환율제가 무너지면서 전세계적으로 찾아온 금융위기가 가중되자 세계 자본주의가 구조적 모순을 야기한 것으로 평가되었고 이것이 혁명의 주요한 촉발원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른바 경제위기설인 이 이론에 의존할 경우 왜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주장에 공감하면서 대거 파업과 시위에 돌입하게 되었는가를 더욱 용이하게 설명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5월 혁명, 미완의 혁명인가
프랑스 5월 혁명은 학생들의 저항, 노동자 가세, 노동자 저항의 실패라는 3단계 과정으로 전개되었고 결국 이 운동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던 것이 전통적 해석이다. 장기적인 국면에서 볼 때 누구나 인정하는 대학교육의 대중화, 성의 혁명을 동반한 여권의 성장, 엘리트 문화의 대중화를 꼽고는 있다. 그러나 혁명에 도달하려던 그 원대한 포부는 실패하고 말았다고 보던 것이 일반론이었다. 전략 전술의 실패요인으로부터 대중적 저항이 노동조합의 경제적 투쟁으로 흡수됨으로써 실패하였다고 보는 견해 등 무수하나 여기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두 가지 견해만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는 5월 혁명으로 인해 결국 자본주의가 자체 점검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더욱 이론을 정교화하고 교묘한 수법으로 자신의 지배를 강화시켜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5월 혁명은 결국 미완의 혁명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혁명세력이 자본주의 사회가 대거 강요한 여성노동에 항의하자 자본주의는 여기에 걸맞는 여성의 지위를 부여해주었고, 중앙집권화의 비효율성에 대해서는 즉시 지방분권을 대안으로 삼았으며 기타 재판제도를 새로 정비하고, 교육제도를 재편함으로써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모든 요구들이 자본주의 착취제도에 용이해지도록 흡수 재조정하였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생명력이 더욱 연장되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대량소비사회인 자본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오히려 소비사회를 강화시킨 결과가 되고 말았다는 역설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5월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채 자본주의의 대리인이 되고 말았으며 혁명 자체도 자본주의 체제가 초래한 결과물일 뿐이며 부르주아적 개인주의 발전의 한 단계일 뿐이라는 해석이다. 둘째는 68혁명에 대한 문화적 해석이다. 즉 혁명참가자들의 주장을 자유주의와 대중주의의 요구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대학생과 고등학생, 교원노조원들이 기존사회와 기존의 가치관에 저항한 것은 권위주의에 대한 반대라기보다 자유주의의 요구라고 보는 관점이다. 다시 말해 혁명이후의 사회를 관찰할 때 모더니즘 사회가 끝나고 포스트 모던 사회가 도래했다는 결론을 유출하기 위해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는 듯하다. 60년대를 통해 절제와 억압에 기초를 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저항하여 육체적 쾌락과 성의 자유가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며, 영화와 출판물에 있어서도 포르노화, 폭력과 잔인함이 강화되고 일반화되었으며 마약과 환각제가 대중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 문화와 공리주의적 가치관과의 결별로서 기존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68혁명은 목적없는 혁명이었으며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이 없었고 과거의 혁명과는 달리 동지도, 적도 없는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주장을 근거로 문화적 해석은 68혁명을 계기로 전통적인 모더니즘 사회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이행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적 해석에서 독창성을 찾을 수 있지만 또한 강한 염세주의도 엿볼 수 있다.
68혁명의 성과
5월혁명 직후 68년 6월 총선에서 드골 정권이 승리하였다. 이를 이유로 많은 연구자들로부터
국민들이 안정을 택함으로써 혁명은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5월 혁명은 패배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겨우 이듬해 1969년 국민투표에서 드골이
패배하자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이의 직접적인 원인을 68혁명에서 찾는 데는 동의하고 그래도 혁명의 성과는 부분적일 뿐이라는 주장이
다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68혁명의 성과를 단기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이후 20∼30년의 간격을 두고 장기적인 시각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혁명이후 프랑스 사회는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였고 68세대들도 이후 그들의 작업을 지속했기 때문에 혁명 이후의 과정이
모두 감안되어야 한다는 시각이다. 68혁명과정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에는 몇 개의 이슈라기보다 프랑스 사회가 처한 그리고 세계 자본주의사회가
처했던 거의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68혁명이 제기하였던 문제들을 '프롤레타리아', '육체적 욕망', '구조'라는 세
개의 등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혁명세대와 지식인들은 그 이후 이들에 대한 이론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68혁명 이후에도 『지식인에 대한 변명, 1972』을 출간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과 대중과의 대화를 계속했으며(1970), 알튀세르는 자본론을
다시 읽으면서(1971) 공산당원으로 머물러 있기는 했지만 『루이스에 대한 답변』에서 당의 고루한 도그마를 비판하였고(1973), 미셸 푸코와
롤랑 바르트는 68혁명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더욱 발전적으로 전개시켜 서구체제의 허약성과 전통적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3. 결론
이상에서 프랑스 68혁명의 역사와 그 의의를 살펴보았다. 비록 이 리포트는 사실의 파악과
기존해석을 정리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한가지는 확실한 것 같다. 즉, 프랑스 68혁명이 남한의 진보운동에 줄 수 있는 메시지는 프랑스
68혁명이라는 것이 어떤 특별하고 미래에 우리가 겪을 어떤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80년대를 통해 겪어왔고, 또한 지금도
진행중인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 참고문헌 ■
편집부 편, [프랑스 5월 혁명], 백산서당
정수복, [새로운 사회운동과 참여민주주의], 문학과 지성사
월러스틴, '1989, 1968년의 연속', [반체제운동], 창작과 비평사
이가진, "연재기획 - 30주년 맞는 프랑스 68혁명의 오늘" [길], 1998년 1월-3월
신진욱, 허준석, '1968: 거부된 과거, 감추어진 미래', [학회평론] 11호, 1995.
뤽 페리, 알랭 르노, [68사상과 현대 프랑스 철학], 인간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