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인사 유감
새해가 밝아왔다.
동에서 떠오르는 오늘의 해가 어제의 해와 무어 다르련만 사람들은 일 년 삼백예순날을 매듭삼아 가는 해와
오는 해를 다르다 한다.
새해가 되면 어른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린다.
연말이 되면 오래 못 본 친구나 스승 일가친척들에게도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산 사람에게는 물론이요 세상을 하직한 조상의 무덤을 찾아 성묘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새해를 맞는 세시풍속에 생경한 풍경이 등장하고 있다.
수고로움은커녕 가볍기 그지없는 의례와 형식만이 살아있는 성의 없는 새해 인사법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기는 설날 고향을 찾아 성묘를 하는 수고로움도 역귀성에 밀려 눈에 띄게 줄고 있기는 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에 부동문자로 인쇄된 근사한 문안이 있음에도 서로의 관계나
형편에 맞는 자기만의 인사를 붓으로 써 보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었다.
그런데 금년 들어 부쩍 일말의 수고로움도 감지할 수 없는 새해 인사 풍속도로 바뀌고
있음을 실감한다. 페이스 북과 카카오 톡이나 트위터를 통한 간편 인사가 횡횡하고 있다.
몇 자 자판을 두드리는 글쓰기 마저 가뭄에 콩 나듯 쉽게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모티콘으로 대변되는 이 에스엔에스 세상에서 신년 인사마저도 사진 한 장으로 대신하고 만다.
그것도 누군가 괜찮게 만들었다 싶은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이 무한 복제되어 온 누리를 헤집고 다닌다.
복제가 복제를 낳는, 일말의 수고로움도 찾을 수 없는 이런 사이버 세상 풍속도가 왠지 낯설기만 하다.
이런 낯설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데 적응하지 못하는 '삼척동자' 나 같은 쉰 세대의 하찮은 푸념인 것인가?
그 낯설음이란 수고로움으로 표현되는 이른바 '진정성'이랄까 '성의' 부족이 아닌가 한다.
인사에 깃들어야 할 '진정성'이란 곧 성의를 일컫는다.
우리의 가슴에 크나 큰 상처를 남긴 지난해의 세월호 사태 때의 대통령의 사과나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을 일으킨 인사들의 사과가 뭍 여론의 비난을 샀던 것도 그 사과에 진정성을 찾을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바쁜 세상에 복제된 이미지 사진으로 하는 새해 인사를 크게 탓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거기에 덧붙인 따뜻한 나만의 인사말 한 줄이라도 덧붙여 보낸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때 난 김종길 시인의 '설날 아침에'라는 감칠맛 나는 정말 따뜻한 시를 생각한다.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인내하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시인의 말대로 새해는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따스한 온정을 느낄 수 없는 판박이 사이버 새해 인사는 받는 사람도 시큰둥하다.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