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축복에 이르는 문” 祝福に至る門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マタイの福音書 7章 13節~14節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いからです。そして、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いのちに至る門は小さく、その道は狭
く、それを見いだす者はまれです。」
아멘.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하는데, 이 문은 크고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하십니다. 좁은 문이야말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큰 일 납니다. 우리는 반드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좁은 문, 협착한 문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좁은 문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제가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들은 기분이 어떠십니까. 기쁨으로 충만하세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 의욕, 아! 정말 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겠다! 라고 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신가요?
이게 참 묘합니다. 이른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는 good news,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인데, 무슨 선지자나
사도들이 한 말이 아닌,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만, 이와 같은 말씀을 들으면 어딘지 모르게 찝찝해지고 인상이 살짝 굳어지기
마련입니다.
저도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물론 맨 처음에 떠오른 제목은 뭐였겠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였습니다.
그런데 제목을 이렇게 정하고 주보에 적어 넣으면, 교회에 오셔서 이것을 보셨을 때의 여러분 표정이 떠오릅니다.
일단 한 숨부터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표정이 좀 굳어지겠지요. 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구? 하이구, 대충 뭐 내용 알겠구만.
거, 헌금 많이 내고, 귀찮은 봉사도 많이 하고, 희생이다 뭐다 하면서 고생을 죽도로 하고 그래야 복 받고 천국 간다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하실 것 같았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제가 여러분을 나쁘게 평가해서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 같으면 바로 그랬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한다고 알고 계십니까.
요한복음 15장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父がわたしを愛され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愛しました。わたしの愛の中にとどまりなさい。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신다고 하십니까.
요한1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私たちが神を愛したのではなく、神が私たちを愛し、私たちの罪のために、なだめの供え物としての御子を遣わされました。ここに愛があるのです。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ったことにより、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身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어떤 시인이 쓴 시를 조금 바꾸어본다면, 그 누가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묻거든, 눈 들어 십자가를 보게 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를 미워하셨다면, 또는 우리가 고생을 하기를 원하시고, 힘든 일을 감당하길 원하셨다면, 그래야지만 구원을
허락하신다고 하셨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구원? 네 죄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런데 구원해달라고? 그래. 좋아. 구원해줄게. 너 내가 십자가에 달리는 것 봤지? 너도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 그러면 내가 구원해줄게. 그러지 않으셨겠어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토록 힘든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罪を知らない方を、私たちの代わりに罪とされました。それは、私たちが、この方にあって、神の義となるためです。
베드로전서 3장 18절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キリストも一度罪のために死なれました。正しい方が悪い人々の身代わりとなったのです。それは、肉においては死に渡され、霊
においては生かされて、私たちを神のみもとに導くためでした。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죽임을 당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힘든 일, 가장
어려운 일을, 우리를 대신해서 감당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좀
오해하고 있지나 않은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いからです。そして、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いのちに至る門は小さく、その道は狭
く、それを見いだす者はまれです。
여기 어디에 좁은 문은 힘들다고 적혀 있나요? 좁은 문은 험난하다고 말씀하시나요? 아닙니다. 단지 그 넓이가 좁다고 말씀하십니다.
좁을 뿐입니다. 좁기 때문에 눈에 잘 안 띄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에 이르는 길, 생명에 이르는 길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은 시간 관계상 두 가지로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첫째로 좁은 문은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른바 좁은 문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예를 들어서 남들이
알아주는 학교나 월급을 많이 주는 직장, 아니면 어려운 시험 같은 것이 바로 좁은 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가 왜
좁은 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입니다. 그 학교에 들어가면, 그 직장에 들어가면, 그리고 그 시험에 합격만
하면 좋은 미래,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지요. 그와 같은 시험장에 가 보면 반드시
합격하겠다고 하는 열정이 느껴집니다. 거기에는 시험 보기 싫은데 억지로 와서 앉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 들아 가기 싫다는 사람 있나요? 적어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들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좋은 소식과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이 있지요. 먼저, 좋은 소식부터 말씀 드립니다. 천국에는 정원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학교나 회사 같은 경우를 보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하더라도 무제한으로 합격자를 뽑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원이리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요. 하지만 천국은 어떻습니까.
요한복음 14장 2절~3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わたしの父の家には、住まいがたくさんあります。もしなかったら、あなたがたに言っておいたでしょう。あなたがたのために、わたしは場所を備えに行くのです。
わたしが行って、あなたがたに場所を備えたら、また来て、あなたがたをわたしのもとに迎えます。わたしのいる所に、あなたがたをもおらせるためです。
천국에는 우리가 있을 곳이 많다는 것입니다. 전세값 월세값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인가요? 아쉽게도 그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세례만
받았다고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취미 삼아 공부해서 합격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모두들 그 시험에 합격한다고 하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그 곳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上に召してくださる神の栄冠を得るために、目標を目ざして一心に走っているのです。
이 푯대가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는 이곳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전도도 있을 것이요, 섬김도 있을 것이요, 봉사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신지, 나에게 어떤 일 하기를 원하고 계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마음은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것입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光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
、後(のち)の雨のように、地を潤される。」
그냥 알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경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주소도 모르면서 처음 가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성경을 읽고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년도 우리 교회 목표는 모두가 최소한 성경을 1독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성령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는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고서 영화나 소설을 믿고,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사람들 말을 믿습니다. 그러니 온갖 사이비종교에 어이없이 빠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이 취미생활일 수는 없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고, 힘써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천국에 대한 분명한 목표의식을 갖고
천국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좁은 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들어가야 할 문입니다. 가끔 어떤 분을 보면 성경을 논할 때에 꼭 이스라엘에 집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예요. 성경을 풀어가는 데에 있어서 지금 중동에 있는 이스라엘을 자꾸 끌어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들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끝은 이스라엘이요, 이스라엘에 복음이 전파될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 이러면서 이스라엘 선교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되면 중동 이스라엘 쪽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어떻게
되고 저렇게 되고……하면서 마치 무슨 선지자가 되신 것처럼 말씀을 하시는 것을, 여러분께서는 들으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저는 그 점에 있어서 적지 않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봅니다.
로마서 4장 16장~18절입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そのようなわけで、世界の相続人となることは、信仰によるのです。それは、恵みによるためであり、こうして約束がすべての子孫に、すなわち、律法
を持っている人々にだけでなく、アブラハムの信仰にならう人々にも保証されるためなのです。「わたしは、あなたをあらゆる国の人々の父とした」と書いてあるとおりに、アブラハムは私たちすべての者の父なのです。
このことは、彼が信じた神、すなわち死者を生かし、無いものを有るもののようにお呼びになる方の御前で、そうなのです。
彼は望みえないときに望みを抱いて信じました。それは、「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と言われていたとおりに、彼があらゆる国の人々の父となるためでした。
여기서 16절 후반부에 보면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여기서 <율법에 속한 자>라고 하는 것이 육적인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하는 것이 영적인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고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육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사람이에요? 아브라함의
자손인가요? 족보에 보면 저는 유다 지파도 아니요 레위 지파라고 나와 있지도 않고, 베냐민 지파라고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본관은
남양 홍가이고, 시조는 홍은열이라는 사람이며, 제가 35대손이라고 되어 있어요. 육적으로는 이스라엘 피가 아마 조금도 섞여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육적으로는 한국사람, 일본사람, 어느 나라 사람이라 하는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영적으로는, 믿음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육적인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고, 우리들은 그 다음 가는 민족일 수밖에 없는 건가요? 이제 그런 생각을 좀 버리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1등 국민 다음 가는 2등 국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에요. 믿음의 시초인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은 우리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말의 반대되는 개념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이방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에 보면 <이방인>이라고 하는 단어가 3번 나옵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47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自分を愛してくれる者を愛したからといって、何の報いが受けられるでしょう。取税人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
また、自分の兄弟にだけあいさつしたからといって、どれだけまさったことをしたのでしょう。異邦人でも同じことをするではありませんか。
당시 세리들은 육적으로는 분명히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만, 여기서는 세리와 이방인을 동등하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7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また、祈るとき、異邦人のように同じことばを、ただくり返し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ことば数が多ければ聞かれると思っているのです。
だから、彼らのまねをし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の父なる神は、あなたがたがお願いする先に、あなたがたに必要なものを知っておられるからです。
그리고 마지막으로 6장 31절~32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そういうわけだから、何を食べるか、何を飲むか、何を着るか、などと言って心配
するのはやめなさい。こういうものはみな、異邦人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なのです。しかし、あなたがたの天の父は、それがみなあなたがたに必要であることを知っておられます。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이방인>이라고 하는 개념을 단지 국적이 어디이냐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 또는 믿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이방인>이라고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이방인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자손, 믿음의 자녀가 되었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믿음의 자녀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기도를 드릴 때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어떠한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일까요.
가끔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기복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복을 비는 것이 문제라는
것인가요? 주님한테 이것을 해주세요, 저것을 해주세요……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 죄인가요? 우리는 그럼 기도를 드릴 때 항상 세계
평화나 인류의 구원과도 같은 고상하고 거창한 기도만을 드려야 하는 것인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만났던 목사님이셨는데, 이 분은 저보다 나이가 몇 살 좀 많으셨습니다. 이 분도 아직 결혼을 안 하셨던
분이신데, 이 분은 당시 저와는 달리 결혼을 무척이나 하고 싶어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결혼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보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결혼에 대해서는 기도해본 적이 없으시대요. 음? 아니, 결혼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수준 낮은 기도입니까? 그래서 제가 물었죠. 아니, 왜요? 그러니까 그 목사님은 다시 말씀하시기를, 결혼에 대한
기도는 드린 적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유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목사님,
상당히 결혼하고 싶어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태복음 7장 7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捜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つかり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はそれをしましょう。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구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복신앙은 문제라고
하는데, 이는 어떤 것을 말하는가 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 무슨 병에 걸렸어요. 아니면 어디를 다쳤습니다. 그렇다면 병원에 가지요.
그런데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덕분에 다 나았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병원에 계속 가나요? 아니요. 병이 낫고 다친 곳이
회복 되었으면 더 이상 병원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교회도 생각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런 간증 들어보셨지 모르겠습니다. 취직도 안 되고 사업도 안
되고 해서 맨날 교회에 나와서 기도도 하고 믿음 생활도 성실히 했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셔서 취직도 되고 사업도 번창하게 되니까,
이제 바쁘고 시간이 없어서 교회에도 안 나오게 되고 믿음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대요? 생활 속에
또다시 시련이 닥쳐오고 어려움이 닥쳐와서 모든 것을 잃은 채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 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하면서 다시 교회에 나왔다는 간증, 여러분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비단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만의 일이 아닙니다. 구약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면
나라가 부흥합니다. 평안합니다. 그런데 차차 사람들이 타락합니다. 바알을 숭배하기 시작해요. 이방 신들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너희들 그러지 말아라. 하나님께로 돌아와라. 그렇게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를 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돌이키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다른 민족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치게 합니다. 괴롭히게 하시지요. 그러면 그제서야 회개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를 다니거나 하나님 섬기는 것을 무슨 병원에 다니는 것처럼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만 다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삶이야말로 기복신앙인 것입니다.
믿음의 자녀 된 우리는 그렇다면 주님께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성경에는 이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만, 우리는 우선 이것부터 해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 5장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넓은 문은 무엇입니까. 원수를 미워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복수하라. 이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넓은
문은 멸망으로 가는 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복을 빌라는 것입ㅂ니다. 그것이 바로 좁은 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으로 가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는 비결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안 가시나요? 한 가지 제안을 드립니다. 우리 마음 속에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주,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모르게 오직 주님을 향해서, 내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의 복을 빌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어떤 축복을 부어주시는지 시험해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께서는 응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닙니다. 믿음의
자녀이자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좁은 문입니다. 이 문은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이요, 축복으로 이어지는
길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문이 좁아서 잘 눈에 안 띄는 것입니다. 이 길로 가는 길을 못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압니다. 우리는 천국이라고 하는 분명한 목표,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힘써 여호와를 알고
주님을 알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방인처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자녀처럼 구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무슨 성인군자라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축복의 지름길,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자녀,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인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기쁨,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과 생명으로 가는 놀라운 기쁨을 모두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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