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1530년 6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알 5세와 수많은 제후와 사람들 앞에서 루터파들이 그들의 견해와 입장을 밝히기 위하여 제출한 신조(信條)로 7명의 제후들과 2명의 자유 도시 대표들이 이에 서명하였는데
● 색손의 군주 선제후(1525~32) 요한 ● 브란덴부르크의 후작 게오르그 ● 뤼네부르크의 군주 언스트 ● 헷세의 영주(領主) 필립 ● 색손의 군주 한스 프레데릭 ● 뤼네부르크의 군주 프란쯔 ● 안할트의 주공(主公) 볼프강 ● 뉴른베르크주(州)의 시장 및 행정부원 ● 로이트링겐주의 시장이었다.
주로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에 의해 씌어졌는데 그는 가급적이면 반 개혁적인 세력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이 전체 고백서에 잘 나타나 있다. 비록 몇군데 부분에서 오류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떤 저술가의 표현대로 “사도시대 이래로 이보다 더 위대한 사업과 이보다 더 훌륭한 신앙고백이 있었던 적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의 고백서였던 것은 분명하다.
루터는 당시 파문 중이었으므로 의회에 나갈 수 없었고 2시간에 걸쳐 낭독된 이 고백서는 28개 조항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라틴어와 독일어로 기록되었다. 교황수위권의 문제, 성자숭배, 연옥설, 화체설, 만인제사장설 등의 논쟁거리가 되는 문제는 모두 삭제함으로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내용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이신칭의 문제 등 28가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발표했다. 비록 황제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고 가톨릭 에크 박사에게 반박문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여 그의 발표문을 받아들였지만, 루터파의 역사에서 볼 때 1530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다. 1530년 6월 25일, 이날은 개신교 진영인 루터교의 역사에서 비텐베르크의 종교 개혁 기념일인 1517년 10월 31일 다음으로 뜻깊은 날이 된 것이다.
당시 개혁파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자칫, 생명을 잃고 재산을 몰수당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선택이었다. 따라서 정치적인 문제로 확전되는 것을 염려한 신학자들이 제후들의 서명을 막아서면서 너무 깊이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제언을 받았을 때 제후들과 당시 개혁 진영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거기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아니다. 나는 나의 지위에 상관없이 정당한 일이라면 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다. 나도 주 여호와를 믿는 마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선후로서의 나의 지위를 나타내는 모자와 의복은 나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귀중한 것이 아니다.” 이같이 말을 마치고, 그는 서명하였다. 또 다른 제후 한 사람은 붓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필요한 일이라면 나는 나의 재산과 생명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또 계속하여 “나는 이 고백서에 나타나 있는 교리 이외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신분을 포기하고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국토도 버리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조국에서 쫓겨나는 길을 택하겠다”*고 말하였다.”(쟁투, 207)
우리는 지금 이처럼 진리와 원칙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잃어버리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길 각오까지 한 숭고한 사람들의 희생과 결단으로 인하여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진리와 자유는 결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하기까지 결심하지 않으면 저절로 신앙의 자유는 찾아오지 않는다.
(눅 18: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눅 18: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주님의 나라를 원하면서도 용기를 내지 않으며 천국의 기쁨을 바라면서도 결단하지 않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개혁자들의 용기와 그 결단하는 마음을 주시고 오늘도 그 정신과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