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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羅世) 연보
나세(羅世, 1320년 고려 충숙왕(忠肅王) 7년 생~1397년 조선 태조(太祖) 6년 음력 9월 17일 몰; 향년 78세)
본관 나주(羅州) 나주 나(羅) 씨
나주 나 씨 나주인(羅州人)
―1960년대 교과서에 세계 최초의 해상 포격전 서천 진포 대첩의 총사령관(해도원수)으로 기록
나주 나 씨 선조 5대조
나주 나 씨 연안군파(서천파) 파조
여말선초(고려 후기~조선 전기) 수군장 원수
고려 후기의 문신(문과 급제•한림상원사•문하평리)
―고려 공민왕 초기 문과 급제 후 한림상원사를 역임했으며, 왜구의 잦은 출몰과 침공으로 최영(崔瑩) 장군, 조선 태조 이성계 등과 같이 무장으로 출전
고려 후기 서천 진포 대첩의 고려군 총사령관
세계 해군사 최초 서천 진포 대첩 함포 포격전의 총지휘관(해도원수)
―세계 해전사 최초로 군함에 함포를 장착한 포격전을 총지휘하고 승리한 우리나라의 수군장
―세계 두 번째 화약 제조국 기록
―화통도감 제조 최무선이 제작한 화약과 화포를 수군 실전에서 처음 사용한 진포 대첩 총사령관(나세 해도원수, 최무선 서해도부원수)
고려 공민왕조 문과 급제•한림상원사•판개성부사•판숭녕부사•판도판서•종2품 문하평리•연안군•조선 참찬문하부사 역임.
고려 교동만호•도병마사•동지밀직사사•경상도부원수•밀직부사•서해도상원수 겸 도순문사•전라도상원수 겸 도안무사•판개성부사•판숭녕부사•해도원수•문하평리(문하부 종2품)•동강도원수•경상도조전원수•조선 병선조선절제사•조선 참찬문하부사•조선 도추포사 등 역임.
연안군 봉호
고려의 장군•고려의 원수
고려 공민왕•우왕•창왕•공양왕•조선 태조조 문신•무신
『고려사』 「열전」 「나세(羅世) 편」의 주인공
―『고려사』의 기록 “羅世, 本元人也.”를 근거로 원나라 귀화인이라는 설
―재원 교포 2세(나주인 원나라 유학생)라는 설도 있다.
나조 나씨 시조 고려 정의대부 감문위상장군 나부(羅富)의 후예
고조부 나주 나 씨 중시조 1대조 고려 영동정 나득규(羅得叫)
증조부 나주 나 씨 2대조 고려 영동정 나중윤(羅仲允)
조부 나주 나 씨 3대조 고려 영동정 나송기(羅松奇)
부 나주 나 씨 4대조 고려 진사 영동정 나수영(羅守永)의 다섯 아들 가운데 넷째 아들
―나주 나 씨 4대조 고려 진사 영동정 나수영의 다섯 아들에서 5분파 1남 호조전서 제수•금양처사 나위(羅位) 전서공파(典書公派), 2남 중서시랑 나계(羅桂) 시랑공파(侍郎公波), 3남 사온서직장 금양군 나석(羅碩) 금양군파(錦陽君派), 4남 한림상원사•판도판서•전라도상원수•해도원수•연안군 나세(羅世) 연안군파(延安君派), 5남 사온서직장 영동정 나원(羅源) 직장공파(直長公派) 분파
―나주 나 씨는 현재 70여 파로 분파되어 있다고 한다.
본인 나주 나 씨 5대조 고려 진사 나수영의 넷째 아들 한림상원사•판도판서•전라도상원수•해도원수•연안군 나세(羅世) 장군
처 전서군 이준의 여식 통의군부인 덕수 이(李) 씨
자녀 2남 1녀
첫째 아들 나궤(묘역. 충남 서천군 마서면)
둘째 아들 고려조 참봉 나인
여식 1녀 형조판서•찬성 윤임(尹任)의 처
후손
맏형 나위의 아들 사헌부집의•증주목사 나동길(羅東吉)
다섯째 동생 나원의 아들 공조전서 나진(羅璡)
손주
나세의 둘째 아들 고려 참봉 나인의 장자 조선 태종조 진사 나찬
나세의 둘째 아들 고려 참봉 나인의 차자 조선 성조판서동지상사 나인주(羅仁柱)
증손주 나주 나 씨 연안군파 8세손
나세의 둘째 아들 고려 참봉 나인의 장자 조선 태종조 진사 나찬의 장자 조선 세종조 참봉•동지의금부사 나효기(羅孝基, 충남 서천군 마서면 정착)
고손주 나주 나 씨 연안군파 9대손
참판공 나세경(羅世經)
―나주 나 씨 참판공파(參判公派)로 분파
나주 나 씨 연안군파 11세손 나치명(羅致明, 공주 세거)
나주 나 씨 연안군파 13세손 나의국(羅義國, 보령 세거)
현대의 후손 서천군수 나소열(羅紹烈) 등 다수의 인물들
집성촌
나주 나 씨 연안군파 집성촌
―충남 서천 금강 유역 등지
1320년 1세 고려 충숙왕(忠肅王) 7년 경신년 나주 나 씨 5대손으로 나주 나 씨 4대손 고려 진사 나수영과 덕수 이 씨 사이의 5형제 가운데 4남으로 출생(1319년 고려 충숙왕(忠肅王) 6년 출생설도 있다.). 영민하고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자람.
1350년~1392년 31세~73세 고려 충정왕(忠定王) 2년~고려 공양왕(恭讓王) 4년 사이 42년 간 우리나라 역사상 왜구가 가장 창궐한 시기
1351년 32세 고려 공민왕(恭愍王) 원년 문과 과거 급제
1361년 42세 이전 고려 공민왕 초기 10년 한림상원사, 판도판서 역임.
1361년~1362년 42세~43세 공민왕 10년~공민왕 11년 홍건적의 난. 원수 나세 장군이 홍건적의 난 토벌
1362년 43세 공민왕 11년 낙천와 고려 지제고•조선 우의정 제수 나중우(羅仲佑, 최초의 나주인 이조판서 나득강의 부) 문과 과거 급제
1363년 44세 공민왕 12년 홍건적의 난 진압의 공로로 2등공신. 이때부터 문신 직위(문하평리 찬성사)에 있다가 왜란이 있을 때마다 무신(원수, 도병마사)으로 출전
1364년 45세 공민왕 13년 갑진년 1월 요양성의 군사로 압록강을 건넌 최유의 난 당시 도병마사 임명(정주(定州)에서 적군에 생포된 홍선(洪瑄) 후임). 찬성사 최영 장군, 조선 태조 이성계 등과 같이 최유의 난 진압. 판도판서 나세 장군이 장수 찬성사 안우경(安遇慶, 출생 연도 미상~1372년 몰)•밀직부사 이귀수(李龜壽)•지밀직사사 지용수(池龍壽) 등과 고려군 좌익 담당(태조 이성계•판개성부사 이순(李珣)•삼사좌사 우제(禹磾)•밀직사 박춘(朴椿, 출생 연도 미상~1366년 몰) 등이 고려군 우익 담당, 최영 장군이 중군(中軍) 담당)
1374년 이전 55세 이전 교동만호 당시 왜구를 막지 않고 도망친 죄로 순위부 투옥
1374년 55세 공민왕 23년 우왕 원년 갑인년 경상도부원수로 명나라에 말 2천 필을 바치라는 고려 조정의 명령을 어기고 3백 필만을 바친 제주 목호(牧胡)들을 최영(崔瑩) 장군과 같이 토벌한 지휘관(경상도원수 지윤(池奫)). 공민왕 시해. 9월 전라도상원수 겸 도안무사로 왜구가 왜선 50척으로 우인에 침략하자, 9월 10일 왜적 격파
1375년 56세 고려 우왕(禹王) 2년 8월 고려에 입국하려는 심왕(瀋王) 탈탈불화(脫脫不花)와 그의 어머니를 호종해서 고려를 침략하려던 북원(北元)의 군사를 막은 군사 지휘관의 공로로 서해도상원수 겸 도순문사 임명(밀직부사 박보로(朴普老)는 서해도부원수 겸 도체찰사 임명).
1376년 57세 우왕 3년 정사년 3월 왜구 강화도 침략, 9월 전라도상원수 겸 도안무사, 10월 왜구 50척의 전함이 부령현을 침공하고 고려군과 대치하자, 나세 장군이 왜구가 불태운 동진교(東津橋)를 대신해 변안열(邊安烈)•조사민(趙思敏) 등과 밤새 다리를 놓고 왜구를 공격해 행안산(幸安山)에서 왜구를 물리쳤다. 이 전투의 공로로 연안군(延安郡) 봉호
1377년 58세 우왕 4년 3월 왜구가 강화도를 침공했으며, 판개성부사 나세 장군이 우왕에게 왜구 토벌을 자청해서 우왕이 내구마(內廏馬)를 1차 2필, 2차 10필을 하사했다. 나세 장군이 조사민, 이원계(李元桂), 강영(康永), 박수년(朴壽年) 등과 강화도 왜구 토벌(나세 자원 출정). 5월 왜구가 남양, 안성, 종덕을 침공했고, 강화도를 전함 50척으로 공격해 강화부사 김인귀(金仁貴)가 전사했으며, 고려 군사 1천 명이 생포당했고, 급기야 왜구가 수원까지 침략해 들어왔다. 고려 조정 철원 천도설. 나세 장군은 전함 50척을 거느리고 원수 양백연(楊伯淵, 출생 연도 미상~1379년 몰)과 같이 강화도에서 왜구를 몰아냈고, 어느 여자의 신고로 적군이 숨은 집을 불태워 적군 29인을 적멸시키기도 했다. 6월 왜구가 전함 45척으로 신주(信州), 옹진(瓮津), 문화(文化) 등지의 현을 침략하자, 나세 장군이 원수 조인벽(趙仁壁), 심덕부(沈德符) 등과 같이 왜구를 물리쳤다. 8월 왜구가 서해도 신주(信州), 문화(文化), 안악(安岳), 봉주(鳳州), 해주를 침략하자, 판개성부사 나세 장군이 도순문사 심덕부, 원수 찬성사 양백익(梁伯益), 지문하 박보로와 같이 싸웠으나 왜구를 막지 못하고 원군을 청했으며, 고려 조정이 조선 태조 만호 이성계(李成桂), 문하평리 임견미와 변안열, 밀직부사 유만수와 홍징 등을 조전원수로 임명해 원군으로 파병해서 해주 대전에서 왜군 격파. 그 공로로 해도원수 임명.
1378년 59세 우왕 4년 무오년 8월 왜구가 연안부(延安府)와 해주, 금주(衿州), 양천(陽川)을 침공하자, 나세 장군이 심덕부와 같이 왜구를 공략했다.
1379년 60세 우왕 5년 기미년 4월 왜구가 연안부를 침공하자, 김해군 김유(金庾)와 같이 전함 52척으로 왜구를 방어했다. 5월 나세 장군은 용강현(龍岡縣) 목곶포(木串浦)에서 왜선 2척을 섬멸시켰다.
1380년 61세 우왕 6년 경신년 8월 서천 진포 대첩(현 충남 서천 금강 입구)에서 해도원수•서해도상원수로 참전해 서해도부원수 최무선(崔茂宣) 장군, 서해도원수 심덕부(沈德符) 장군 등과 같이 전함 1백 척으로 왜선 5백 척을 섬멸하고 고려인 포로 330여 인을 구조했다. 『고려사절요』 기록에 따르면, 왜구는 대부분 바다에서 배와 같이 불타 섬멸되었으며, 옥주(沃州) 내륙으로 도망친 왜구들이 이산(利山)과 영동(永同)현 등지를 불태우고 무차별로 양민 학살을 감행해 희생된 시체가 산을 이루었으며,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었으며, 약탈한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면서 길에 흘린 쌀이 한 자(3치, 15cm) 높이로 길바닥에 쌓였다고 한다. 왜군이 배 5백 척을 동아줄로 연결해서 해진(海陣)을 치고 내륙으로 침공했다. 이 해전은 최무선 장군의 화약 무기를 사용한 세계 최초의 해상 포격전이었다고 한다. 지휘관은 해도원수 나세 장군이었다. 그 공로로 나세 장군은 종2품 문하평리 겸 동국도원수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우왕은 진포 대첩의 승리로, 개선 장군 서해도상원수 나세, 서해도원수 심덕부, 서해도부원수 화포 담당 최무선 장군 등에게 금 50냥씩, 승전 소식을 전한 진무(鎭撫) 정용(鄭龍), 윤송(尹松), 최칠석(崔七夕, 출생 연도 미상~1394년 몰) 비장들에게 은 50냥씩을 하사했다. 내륙으로 침투한 왜구들은 병마도원수 이성계가 다른 장수들과 같이 섬멸시켰다. 진포 대첩 당시 왜구의 숫자는 중함 50명 탑승 기준 500척 3만 명 이상의 대군이었다고 추산된다. 진포 대첩은 고려 후기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으로 하여금 화약 무기를 개발해서 이를 실전에 사용한 최초의 전투였다.
1381년 62세 우왕 7년 동강도원수(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1383년 64세 우왕 9년 계해년 2월 해도원수, 6월 경상도조전원수로서 축산도(丑山島) 침공 왜구들을 물리치라는 우왕의 명을 주저했다는 이유로 광주(廣州)에 잠시 투옥되었다. 6월 해도원수로 복직하여, 단양, 제천, 영주 등지 왜구 토벌 출정
1392년 73세 고려 공양왕(恭讓王) 4년•조선 태조(太祖) 원년 도병마사. 고려 멸망 후에도 조선의 무관으로 복무한 여말선초의 무신
1393년 74세 조선 태조(太祖) 2년 계유년 4월 21일 병선조전절제사(병선 건조 책임)로 임명되어 친군위 군사를 모집해 거느리고 해안 지역 파견. 참찬문하부사 치사
1395년 76세 태조 4년 을해년 4월 19일 검교 참찬문하부사 최무선 장군(화약국 제조, 진포 대첩 서해도부원수, 조선 검교 참찬, 추증 의정부우정승•영성부원군, 아들 군기소감 최해산(崔海山)) 사망
1397년 78세 태조 6년 정축년 7월 3일 도추포사로 임명되어, 경기도, 풍해도, 서북면 등지 해적 토벌, 8월 14일 왜구가 용주(龍州)를 침략하자, 나세 장군 파견.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8일) 전쟁터 군영에서 참찬문하부사 나세 장군이 무신 복무 중 노령으로 병으로 서거, 향년 78세. 배위 전서군 이준의 여식 통의군부인 덕수 이(李) 씨. 『태종실록』에 나세 장군이 순직하자 한양성에 조기가 내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묘역 실전
연안군파 파조 묘역 설단
―1957년 정유년 충남 서천군 마서면 옥산리 소재
―음력 3월 17일 연례 세일제 개최
서천군 장항읍 원수리(元水里) 지명
―충남 서천군 장항읍 원수리는 나세 상원수에서 유래한 지명
진포 대첩 해전지
―서천군 장항읍 원수리 일대설(서천의 남쪽)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서천군 장항읍 원수리 일대설
―서천군 장암리 일대설
―군산항 일대설(당시에는 군산이 없었고, 군산도라는 섬이 있었으며, 해안 지역도 바닷물이 낮아 배의 접안에 용이하지 않았다. 서천 지역이 해안에 접해 있었으며, 물의 깊이가 배가 접안하기 용이해서 당시에는 진포(현 서천)가 해상항 기능을 했다. 따라서 해전지가 군산항 일대라는 설은 맞지 않다.)
서천 장암진 장암진성(長巖鎭城)
―진포 대첩의 승전지
―서해도 수군진영성
―고려조 서해 전망산(前望山)과 후망산(後望山) 지역 변방경비대 석성
1957년 정유년 충남 서천군 마서면에 연안군파 파조 묘역을 설단하고, 음력 3월 17일 연례 세일제 개최
1996년 나주 나 씨 5대조 선조 나세 장군 진포대첩비 건립
―비문. “고려 해도원수 나세 진포대첩비”
―소재지. 충남 서천 금강 하구언 성주산 팔각정 아래
―건립위원. 제19대 해군참모총장 김홍열, 나주 나 씨 연안군파 후손 나동균, 서천군수 박형순
1999년 군산 개항 100주년 기념의 해에 금강호 시민공원에 진포대첩비 건립(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성산면 강변로 477)
2013년 10월 26일 중국 예장 나 씨 시조 나주공(羅珠公) 사당 충효사(忠孝祠) 준공식(중국 항주 남창시 소재, 사당, 나주공 동상, 분향소, 전시장, 대문 등). 시조 등 4인과 700여 신위 안치
2015년 5월 19일 전남 나주에서 한국나씨총연합회 창립, 11월 9일 한국나씨총연합회 충남 서천군 지회 창립
* 나주인(羅州人)과 원인(元人): 조선 시대 세종조에 “최초의 나주인” 이조판서 나득강(羅得康, 1378년 생~1444년 몰)의 탄생 이전에는 나주 나 씨는 여황 나 씨 등으로 분파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본관을 표기하지 않거나 각기 다르게 표기했다. 이 당시에 나주인을 표기하는 여러 가지 방식 가운데 원인(元人)이라고 표기하기도 했으며, 먼 선조를 표기하는 방식이었다. 원인이란 나주 나 씨가 조선 전기에 생성되기 이전, 나주인(羅州人)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이전 전라 지역 여황 나 씨 등을 일컫는 다른 이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려사』 「열전」 「나세 편」에 기록된 원인 나세에 대한 중국의 기록이나 자료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고려 시대 나주인의 이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원수 나세 장군은 1375년 우왕 2년 8월에 군사 지휘관으로서 고려로 입국하려는 심왕(瀋王) 탈탈불화(脫脫不花)와 그의 어머니를 호종해서 고려를 침략하려던 북원(北元)의 군사를 막았으며, 그 공로로 서해도상원수 겸 도순문사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나세 장군이 원인이 아니라 나주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한편, 나세 장군이 재원 교포 2세라는 설도 있다. 당시 나주 지역 유생들은 중국 유학이 흔했으며, 아주 어려서부터 중국에서 유학 생활과 과거 시험 및 관직 생활을 하고, 나이가 들어서 고려로 입국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는 중국에서 조기 유학과 과거 시험을 치르고 간단히 관직을 마친 후에 젊어서 고려로 입국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천 진포 대첩에서 최무선 장군이 개발한 화약 무기는 사실은 나세 장군이 원나라 유학 시절 연구한 분야라는 설도 있다.
또한, 신라 시대 또는 신라 시대 이전부터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그리고 일제 강점기까지도 한반도 해역에는 왜구의 출몰이 끊이지 않았고, 한반도 내륙으로의 왜구의 침공도 마찬가지로 끊이지 않았다. 이들의 출몰과 침공은 한반도 역사상 항상 드러나는 현상이었고, 이들 왜구를 내쫓는 유일한 해결책은 중국의 당나라, 원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청나라 군사를 유인하거나 한반도로 끌여 들여서 중국 군사와 연합해서 왜구를 몰아내야만 했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조명연합군이 그러한 역사적 사례이며, 아마도 한반도 역사상 내내 그러한 연합군이나 조력군의 협력이 있어야만 왜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구를 몰아낼 거의 유일한 수단인 중국 군사 또는 중국 군사를 대신하는 역할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조선 시대 세종조 “최초의 나주인” 이전에 한반도 전역의 여러 분파로 자유자재로 자신의 본관을 표기하거나 또는 본관 표기를 거부했던 여러 본관의 나 씨들이 자칭 또는 타칭으로 표기하는 이칭의 하나가 원인으로 해석된다. 조선 시대 여황 나 씨가 나주 나 씨로 나주로 세거(世居)되기 전 단계의 본관을 대체하는 표기법이다. 또한 임진왜란 등 왜구와의 역사적인 대치와 싸움에서 그 지난한 복수전(復讐戰)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물론, 왜구를 물리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중국의 군사적 조력이나 연합이었다. 무엇보다, 신라와 고려, 조선에 걸쳐 중국으로의 조기 유학이 대세였고, 중국과 고려에서 과거 시험을 중복해서 보고 중국과 고려에서 관직을 겸하기도 했던 시대적 조류가 반영되었을 것으로 본다.
나세 장군이 종2품 문하평리에 오른 후에 왜구의 출몰과 침공에도 불구하고 전투 참여를 포기하다가 잠시 투옥되었던 사실은 당시 왜구의 침략이 얼마나 극심했으며, 이들과 다퉈야 하는 장수의 고뇌하는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덧붙여, 원수 나세 장군에 대한 기록이 중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며, 그러므로 고려 나주인이 확실하다고 한다.
* 원수 나세(羅世) 장군: 1320년 고려 시대 충숙왕(忠肅王) 7년 경신년에 나주 나 씨 고려 진사 나수영과 덕수 이 씨 사이의 5형제 가운데 4남으로 나주 나 씨 5대손으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자랐다. 1350년에서 1390년 사이 40년간은 우리나라 역사상 왜구가 가장 창궐했던 시기라고 알려져 있다(임진왜란, 정유재란 제외). 나세는 1351년 32세에 고려 공민왕(恭愍王) 원년 문과 과거에 급제했다. 그 후로 1361년까지 10년간 고려 공민왕 초기 한림상원사와 판도판서를 역임했다. 1363년 44세 공민왕 12년 홍건적의 난 진압의 공로로 2등공신이 되었다. 왜란이 극심한 시절이라서 이때부터 문신 직위에 있으면서, 왜란이 있을 때마다 무신으로 각종 전투에 출전했다. 1364년 45세 공민왕 13년 갑진년 1월 요양성의 군사로 압록강을 건넌 최유의 난 당시 도병마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판도판서 나세 장군이 장수 찬성사 안우경(安遇慶, 출생 연도 미상~1372년 몰)•밀직부사 이귀수(李龜壽)•지밀직사사 지용수(池龍壽) 등과 고려군 좌익을 담당했고, 태조 이성계•판개성부사 이순(李珣)•삼사좌사 우제(禹磾)•밀직사 박춘(朴椿, 출생 연도 미상~1366년 몰) 등이 고려군 우익을 담당했으며, 최영 장군이 중군(中軍)을 담당했다. 1374년 55세 이전 교동만호 당시 왜구를 막지 않고 도망친 죄로 순위부 투옥되었다. 1374년 55세 공민왕 23년 우왕 원년 갑인년에 경상도부원수로 임명되어 제주 목호(牧胡)들을 최영(崔瑩) 장군과 같이 토벌했다. 전라도상원수 겸 도안무사로 왜구가 왜선 50척으로 우인에 침략하자, 왜적을 격파했다. 1375년 56세 우왕 2년 8월 고려에 입국하려는 심왕(瀋王) 탈탈불화(脫脫不花)와 그의 어머니를 호종해서 고려를 침략하려던 북원(北元)의 군사를 막은 군사 지휘관의 공로로 서해도상원수 겸 도순문사로 임명되었다. 1376년 57세 우왕 3년 정사년 9월 전라도상원수 겸 도안무사로, 10월 왜구 50척의 전함이 부령현을 침공하고 고려군과 대치하자, 나세 장군이 왜구가 불태운 동진교(東津橋)를 대신해 변안열(邊安烈)•조사민(趙思敏) 등과 밤새 다리를 놓고 왜구를 공격해 행안산(幸安山)에서 왜구를 물리쳤다. 이 전투의 공로로 연안군(延安郡)에 봉호되었다. 1377년 58세 우왕 4년 3월 왜구가 강화도를 침공했으며, 판개성부사 나세 장군이 우왕에게 왜구 토벌을 자청해서 우왕이 내구마(內廏馬)를 1차 2필, 2차 10필을 하사했다. 나세 장군이 조사민, 이원계(李元桂), 강영(康永), 박수년(朴壽年) 등과 강화도 왜구 토벌을 자원해서 나세 장군이 자원 출정했다. 5월 왜구가 강화도를 침공해 고려 조정의 철원 천도설이 있었고, 나세 장군은 전함 50척을 거느리고 원수 양백연(楊伯淵, 출생 연도 미상~1379년 몰)과 같이 강화도에서 왜구를 몰아냈다. 6월 왜구가 전함 45척으로 신주(信州), 옹진(瓮津), 문화(文化) 등지의 현을 침략하자, 나세 장군이 원수 조인벽(趙仁壁), 심덕부(沈德符) 등과 같이 왜구를 물리쳤다. 8월 왜구가 서해도 신주(信州), 문화(文化), 안악(安岳), 봉주(鳳州), 해주를 침략하자, 판개성부사 나세 장군이 도순문사 심덕부, 원수 찬성사 양백익(梁伯益), 지문하 박보로와 같이 싸웠으나 왜구를 막지 못하고 원군을 청했으며, 고려 조정이 조선 태조 만호 이성계(李成桂), 문하평리 임견미와 변안열, 밀직부사 유만수와 홍징 등을 조전원수로 임명해 원군으로 파병해서 해주 대전에서 왜군을 격파했고, 그 공로로 해도원수에 임명되었다. 1378년 59세 우왕 4년 무오년 8월 왜구가 연안부(延安府)와 해주, 금주(衿州), 양천(陽川)을 침공하자, 나세 장군이 심덕부와 같이 왜구를 공략했다. 1379년 60세 우왕 5년 기미년 4월 왜구가 연안부를 침공하자, 김해군 김유(金庾)와 같이 전함 52척으로 왜구를 방어했다. 5월 나세 장군은 용강현(龍岡縣) 목곶포(木串浦)에서 왜선 2척을 섬멸시켰다. 1380년 61세 우왕 6년 경신년 8월 서천 진포 대첩(현 충남 서천 금강 입구)에서 진포 대첩의 총사령관인 해도원수•서해도상원수로 참전해 서해도부원수 최무선(崔茂宣) 장군, 서해도원수 심덕부(沈德符) 장군 등과 같이 전함 1백 척으로 왜선 5백 척을 섬멸하고 고려인 포로 330여 인을 구조했다. 『고려사절요』 기록에 따르면, 왜구는 대부분 바다에서 배와 같이 불타 섬멸되었으며, 옥주(沃州) 내륙으로 도망친 왜구들이 이산(利山)과 영동(永同)현 등지를 불태우고 무차별로 양민 학살을 감행해 희생된 시체가 산을 이루었으며,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었으며, 약탈한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면서 길에 흘린 쌀이 한 자(3치, 15cm) 높이로 길바닥에 쌓였다고 한다. 왜군이 배 5백 척을 동아줄로 연결해서 해진(海陣)을 치고 내륙으로 침공했다. 이 해전은 최무선 장군의 화약 무기를 사용한 세계 최초의 해상 포격전이었다고 한다. 지휘관은 해도원수 나세 장군이었다. 그 공로로 나세 장군은 종2품 문하평리 겸 동국도원수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우왕은 진포 대첩의 승리로, 개선 장군 서해도상원수 나세, 서해도원수 심덕부, 서해도부원수 화포 담당 최무선 장군 등에게 금 50냥씩, 승전 소식을 전한 진무(鎭撫) 정용(鄭龍), 윤송(尹松), 최칠석(崔七夕, 출생 연도 미상~1394년 몰) 비장들에게 은 50냥씩을 하사했다. 내륙으로 침투한 왜구들은 병마도원수 이성계가 다른 장수들과 같이 섬멸시켰다. 진포 대첩 당시 왜구의 숫자는 중함 50명 탑승 기준 500척 3만 명 이상의 대군이었다고 추산된다. 진포 대첩은 고려 후기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으로 하여금 화약 무기를 개발해서 이를 실전에 사용한 최초의 전투였다. 1381년 62세 우왕 7년 동강도원수(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383년 64세 우왕 9년 계해년 2월 해도원수가 되었다. 6월 경상도조전원수로서 축산도(丑山島) 침공 왜구들을 물리치라는 우왕의 명을 주저했다는 이유로 광주(廣州)에 잠시 투옥되었다. 6월 해도원수로 복직하여, 단양, 제천, 영주 등지 왜구 토벌에 출정했다. 1392년 73세 도병마사로, 고려 멸망 후에도 조선의 무관으로 복무한 여말선초의 무신이었다.
1393년 74세 조선 태조(太祖) 2년 계유년 4월 21일 병선조전절제사(병선 건조 책임관)로 임명되어 친군위 군사를 모집해 거느리고 해안 지역에 파견되었다. 노령으로 참찬문하부사로 치사되었다. 1397년 78세 태조 6년 정축년 7월 3일 도추포사로 임명되어, 경기도, 풍해도, 서북면 등지 해적을 토벌했고, 8월 14일 왜구가 용주(龍州)를 침략하자, 나세 장군이 파견되어, 9월 17일 전쟁터 군영에서 참찬문하부사 나세 장군이 무신 복무 중 노령으로 병으로 서거했다. 향년 78세였으며, 배위는 전서군 이준의 여식 통의군부인 덕수 이(李) 씨였다. 『태종실록』에 나세 장군이 순직하자 한양성에 조기가 내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 세계 최초 해상 포격전의 총사령관 나세(羅世) 장군: 1380년 우왕 6년 경신년 8월에 서천 진포 대첩(현 충남 서천 금강 입구)이 발발했다. 나세 장군은 진포 대첩의 총사령관인 해도원수•서해도상원수로 참전했고, 서해도부원수 최무선(崔茂宣) 장군, 서해도원수 심덕부(沈德符) 장군 등이 동참했다. 고려 수군은 전함 1백 척으로 왜선 5백 척을 섬멸하고 고려인 포로 330여 인을 구조했다. 왜구가 배와 같이 불타 섬멸되었으며, 내륙으로 도망친 왜구들이 무차별로 양민 학살을 감행했다. 내륙으로 침투한 왜구들은 병마도원수 이성계가 다른 장수들과 같이 섬멸시켰다. 진포 대첩 당시 왜구의 숫자는 중함 50명 탑승 기준 500척 3만 명 이상의 대군이었다고 추산되었다. 이 해전은 최무선 장군이 제조한 화약 무기를 사용한 세계 최초의 해상 포격전이었다. 지휘관은 해도원수 나세 장군이었다. 그 공로로 나세 장군은 종2품 문하평리 겸 동국도원수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한편, 진포 대첩은 고려 후기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통도감 제조•서해도부원수 최무선 장군으로 하여금 화약 무기를 개발해서 이를 실전에 사용한 세계 최초의 해상 포격 전투였다. 또한, 고려는 화약 무기를 개발한 세계 두 번째 나라가 되었다.
* 나주 나 씨 연안군파 파조 나세(羅世) 장군 가문: 고려 수군 원수 나세(羅世) 장군은 고려조 해도원수와 종2품 문하평리를 역임한 나주(羅州) 나 씨 나주인(羅州人)이다. 나주 나 씨 시조 고려 정의대부 감문위상장군 나부(羅富)의 후예이며, 고조부 나주 나 씨 중시조 1대조 고려 영동정 나득규(羅得叫)의 후손이다. 나세 장군의 고조부는 나주 나 씨 1대조 고려 영동정 나득규이며, 증조부는 나주 나 씨 2대조 고려 영동정 나중윤(羅仲允)이고, 조부는 나주 나 씨 3대조 고려 영동정 나송기(羅松奇)이다. 부는 나주 나 씨 4대조 고려 진사 영동정 나수영(羅守永)이며, 다섯 형제 가운데 넷째 아들이다. 참고로, 시조 나부는 전라 여황현(옛 나주) 출신이며, 중국 예장 나 씨 시조 나주(羅珠)가 조선의 지명 나주를 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항구 지명 나부(羅浮)를 칭하는 것으로 지리학적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나주 나 씨 4대조 고려 진사 영동정 나수영의 다섯 아들에서 5분파로 나주 나 씨가 분파되었다. 부 나수영의 1남 호조전서 제수•금양처사 나위(羅位)는 전서공파(典書公派)로, 2남 중서시랑 나계(羅桂)는 시랑공파(侍郎公波)로, 3남 사온서직장 금양군 나석(羅碩)은 금양군파(錦陽君派)로, 4남 한림상원사•판도판서•전라도상원수•해도원수•연안군 나세(羅世)는 연안군파(延安君派)로, 5남 사온서직장 영동정 나원(羅源)은 직장공파(直長公派)로 분파되었다. 그 후로 나주 나 씨는 현재 70여 파로 분파되어 있다고 한다.
고려 진사 나수영의 넷째 아들 한림상원사•판도판서•전라도상원수•해도원수•연안군 나세(羅世) 장군은 부인이 전서군 이준의 여식 통의군부인 덕수 이(李) 씨이며, 후손으로 첫째 아들 나궤(묘역. 충남 서천군 마서면)와 둘째 아들 고려조 참봉 나인이 있고, 여식 생원 윤임(尹任)의 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세의 딸이 생원 윤임과 성혼했으며, 행 사직 송염(宋廉)의 누이(권진(權軫)의 처)가 중매를 섰다고 한다. 그 밖에도 맏형 나위의 아들 사헌부집의•증주목사 나동길(羅東吉), 다섯째 동생 나원의 아들 공조전서 나진(羅璡) 등이 있다. 손주로는, 나세의 둘째 아들 고려 참봉 나인의 장자 조선 태종조 진사 나찬이 있고, 나세의 둘째 아들 고려 참봉 나인의 차자 조선 성조판서동지상사 나인주(羅仁柱)가 있다. 증손주로는 나주 나 씨 연안군파 8세손 나세의 둘째 아들 고려 참봉 나인의 장자 조선 태종조 진사 나찬의 장자 조선 세종조 참봉•동지의금부사 나효기(羅孝基, 충남 서천군 마서면 정착)가 있다. 나주 나 씨 연안군파 9대손 참판공 나세경(羅世經)은 나주 나 씨 참판공파(參判公派)로 분파되었다. 나주 나 씨 연안군파 11세손 나치명(羅致明, 공주 세거)이 있고, 나주 나 씨 연안군파 13세손 나의국(羅義國, 보령 세거)이 있다. 현대의 후손으로는 서천군수 나소열(羅紹烈) 등 다수의 인물들이 있다.
참고로, 나주 나 씨 연안군파의 집성촌은 충남 서천 금강 유역 등지이다.
* 본관 나주(羅州) 소재 성씨: 본관 나주(羅州)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는 60여 성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현재 알려져 있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나주(羅州) 강(姜) 씨, 나주 김(金) 씨, 나주 나(羅) 씨, 나주 내(奈) 씨, 나주 노(盧) 씨, 나주 독고(獨孤) 씨, 나주 류(柳) 씨, 나주 문(文) 씨, 나주 박(朴) 씨, 나주 방(方) 씨, 나주 배(裵) 씨, 나주 백(白) 씨, 나주 서(徐) 씨, 나주 성(成) 씨, 나주 손(孫) 씨, 나주 송(宋) 씨, 나주 신(申) 씨, 나주 아(阿) 씨, 나주 양(梁) 씨, 나주 엄(嚴) 씨, 나주 염(廉) 씨, 나주 오(吳) 씨, 나주 이(李) 씨, 나주 임(林) 씨, 나주 임(任) 씨, 나주 장(張) 씨, 나주 전(全) 씨, 나주 정(鄭) 씨, 나주 정(丁) 씨, 나주 조(趙) 씨, 나주 주(朱) 씨, 나주 추(秋) 씨, 나주 한(韓) 씨, 나주 호(扈) 씨, 나주 홍(洪) 씨, 나주 황(黃) 씨 등(가나다순). <끝> <1차 2024년 1월 29일, 수정 2024년 11월 10일; 나종혁 글>
* 참고 자료: 『고려사』 114권 「열전」 27권 「나세 편」; 민병하, 「나세」, 『민족백과』; 「나세」, 『위키백과』; 이름없는풀뿌리, 05역사의 뒤안길. 「羅世(1320~1397) 延安君 일대기/조선왕조실록 나세 기록/나주 나씨 근원/서천 나주 나씨」, <http://kanghan8.tistory. com/>; 나천수, 「진포 대첩 사령관 나세와 현대판 진포 대첩」, 나주나씨족의 발자취, <http://cafe.daum.net/>; 박수환, 「[기획] 금강하구 서천 장암진성은 백제시대부터 군사요충지」, 『sbn뉴스』, 2023-05-26; 기타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