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시간은 참으로 신묘하다.
과거를 버리고 현재에 집착하며 언제나 미래를 넘본다.
출국 수속을 끝낸 후 티겟에 표식된 탑승구를 찾아 천천히 걸었다. 24번을 확인 하곤 멈추지 않고 끝까지 걸어 보았다. 그리고 되돌아 서서 천정에 걸린 시계를 보며 불현듯 조수미가 부른 노래를 떠올렸다. 애잔한 음율로 끝까지 평행선을 달리는 기차선로의 마주함처럼 열차의 출발시간이 지나면 다시 못볼 이별의 정경을 살린 노랫말이 저절로 마음으로부터 풀어져 나왔다. 음율에 몸을 실고 천천히 다시 돌아서서 걷다. 다시 돌아섰다.
아직은 이르다. 출구가 열리는 시간이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대형 유리창 넘어 활주로도 한가하다. 대기석도 빈공간이 가득하다. 빈 의자에 앉아 허리의 긴장을 푸는 순간 현재시간으로부터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어릴적 읽었던 오리엔트 특급열차에서 발생된 살인사건 속으로 나의 의식은 서서히 침잠되기 시작하였다.
오렌지 향기를 풀풀 날리며 (orang blossom special) 파리와 이스탄불 시르게리(sirkeci)를 오갔던 로맨틱한 오리엔트 특급열차(Orient Express)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즐거리를 생각하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스탄블은 유럽 여러나라 귀족들에게 로맨틱한 여행지였다. 이틀 동안 대륙을 힁단하여 시르케지 역에서 내린 귀족들은 이스탄블 고급호델 페라 펠리스(Pera palas hotel)에서 묵으며 동서양문화가 농축융합된 이스탄불의 독특한 정취를 즐겼었다.
애거사 크리스티도 1926년부터 1932년 동안 수시로 이곳에 머물며 작품을 구상하고 썼는데 이곳에서 탄생하여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은 책이 바로 오리앤트 특급살인사건이다. 지금도 탁심거리 근처에 남아 있는 페라펠리스 호텔 411호는 애거사 크리스티 룸으로 보존하고 있으며 문에는 다음과 글귀가 걸려 있다. :애거사 크리스타가 이곳에서 머무르곤 하였다"
1883년 이 열차는 운행이 시작되었는데 1차 세계대전 때 중단되었으며, 2차 세게대전 당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역을 페쇄하고 심플론을 동과하는 노선으로 다시 열차를 운행하여 심플론 오리앤트 엑스프레스라 불렀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항공기 수요가 늘자 1977년 5월 27일 전면 중단하게 된다. 1925년부터 터키는 오스만 고유의 복장을 버리고 양복을 비고 모자를 쓰는 것이 권장되기 시작한다. 이런 영향으로 이 기차는 모자와 유럽 양복 수송에 큰 기여를 한다. 한편으로는 2007년 9월2일 터어키국경을 넘어 에드리네에 도착하여 지금 이스탄블 역에 정차한 이 기차에는 99명의 승객을 태우고 도착하였었다. 1인당 5000파운드를 받았으며 손님들은 5일간 이스탄블을 관광하였다. 숙소는 과거에는 철도회사 Vagon -Li가 운영한 패라팔라스(Pera Palas)에 묵었다.
매년 9월만 되면 추억을 더듬으며 과거에 다녔던 길로 한번 운행 한다고 한다. 아련한 옛추억을 떠올리게 하려고 에뜨랑제들의 로맨틱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세계인들에게 로맨틱한 낭만을 제공했던 오리앤트 특급열차에 대한 마지막 운명에 대하여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더트지가 운행 종료해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었다.
유럽 철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철도인 오리엔트특급은 1883년 운행을 시작했으며 프랑스 파리에서부터 터키 이스탄불을 잇는 노선은 낭만적 여행을 꿈꾸던 유럽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 오리엔트
특급은 전쟁으로 몇 차례 운항이 일시 중단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꾸준히 사랑을 받아왔었다.하지만 자동차 보급 확대와 비행기 여행이 보편화된데다 비싼 요금으로 승객이 급속히 줄어듦에 따라 운명을 다하게 된 것이다.오리엔트 특급이 전성기를 누렸던 1930년대부터 파리부터 이스탄불까지 운항했지만 이스탄불로의 운항은 1977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까지 운항하는 오리엔트 특급은 여전히 인기를 끌었다.
2001년부터는 오스트리아 빈 동쪽으로의 운항도 중단됐다. 2007년부터는 파리 대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와 빈을 오가는 것으로 대체됐다. 그러나 이마저 오는 12월12일 오전 9시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하는 열차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게 됐다.
애거사 크리스타 영향 때문이였을까? 이스탄블 방문을 난 늘 마음에 지니고 살아었다.
출구가 열렸다. 가고 싶었던 곳을 향하여 나는 떠나려 공항 탑승석 출구로 나섰다. 제노베파와 나란히 의자에 앉은 후 신문을 뒤적거렸다. 그래도 온통 마음은 이미 이스탄불에 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게 될 미국에서 날아오는 친구들과 에게해 한적하고 낭만이 깊게 고인 항구도시 광장에서 만날 독일에서 날아 오는 친구들을 만나는 설레임 때문인지 제노베파도 조금은 상기된 모습이다.
유럽을 향하는 하늘 노선은 늘 지루하다. 이런저런 소일꺼리를 준비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시간이 된다. 난기류를 때문에 가끔 로링이 지루함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내린 이스탄불 공항, 이상하게 낮이 설지 않다. 동양남자가 동양의 땅 이스탄불에 와서 그런가? 마중나온 이동우 가이드와 조우후 호델로 향했다. 절차에 따라 모든 일을 끝내 후 조금 일찍 침대시트 안으로 들었다. 첫날밤의 잠, 아늑했다.
그리고 다음날
커피향이 아침임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야채를 접시에 담고 삼각은박지에 싸놓은 치즈가 맛이있다는 정보를 제노베파가
흘려준다. 다른치즈와 함께 세개를 집었다. 그리고 빵 몇개를...... 동남아에서 느꼈던 지독한 향이 없어 식탁을 대하는 마음이 편
했다. 이스탄불에서 처음 맛 보는 아침식사, 합격점이다. 이스탄불!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렀으며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
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중심적
인 도시가 되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다.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
불에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들이 분포해 있다. 이곳은 옛적부터 흑해와 지중해를 끼고 있
으며 발전한 경제, 문화, 정치의 도시다.
동서양의 문명이 공존하는 이스탄불을 영국의 유명한 인류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스탄블을 지붕없는 인류의 박물관이라 칭하였다.
인류 최초문명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발점이며 인류 오천년 역사의 주무대였으며 옛이름은 콘스탄티노풀이다. 1,600년간
로마,비잔틴제국, 오스만트르크 제국의 수도로 영광을 누렸으며 초기 기독교, 그리스정교, 이슬람문화가 이스탄블을 중심으로 번
성해 나갔었다. 그리스건축의 특징인 열주, 로마건축양식, 비잔틴양식, 이슬람 모스코가 반경 1km 이내에 공존하고 있는 도시가
바로 이스탄블이다. 이스탄블은 지중해와 흑해 사이인 유럽과 아시아 중간에 있으며 보스포러스 해엽의 남쪽 이스탄블시가지는
유럽지구와 아시아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아시아지구는 주거지구인 반면 유럽지구에는 히포드럼광장, 테오도시우스 성벽, 톱카
프궁전, 성소피아사원, 그랜드 바자르 등등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오늘은 이곳을 집중적으로 보기위하여 계획이 잡혔다.오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하여 황금으로 가는 길이란, 호텔을 빠져 나왔다. 어제 내가 묵었던 숙소 이름은 바로 gold way hotel
이었다. 그렇다. 문명의 황금이 가득한 이스탄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오늘의 일정이다. 메메드2세에게 함락당했던 비잔틴
제국 수도는 이스탄블로 바뀌지만 서양으로 부터 그렇게 부르기를 거부당하다. 결국 1930년대에 들어서서 서양으로부터 공인받게
된다. 이스탄블의 아침시간은 지독한 러시아워에 시달리고 있었었다. 70년대 서울의 러시아워처럼 지독했다. 온종일 어차피 이스
탄블과 친구되어야 한다면 느긋할 필요가 있었다.
문명은 과연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자문하며 성문으로 다가 갔다. 청동기가 만들어 지고 문자가 사용되면서 계급사회가 출현하
면서 도시가 만들어 져 가는 것을 문명이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인류의 지혜가 미개한 상태에서 벗어나 공동 사회
생활을 위한 제도와 기술의 발전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명과 다른 문명을 대하게 되면 서먹하고 긴장하게 되는 것은
이쪽 문명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서먹한 일들도 대부분 사람들을 접하고 문명을 실제로 보는 순
간 전부 사라진다. 성문 앞에서 양탄자 장사를 하는 거구의 현지인을 보는 순간 웃는 그의 얼굴울 보면서 사진촬영의 욕심이 생겼
다 단한번의 조건으로 샷다를 누룰 수 있었다.
목례로 화답하며 성안으로 들어섰다. 히포드럼 광장이 나타났다. 히포드럼은 원래 기원전 200년경 로마의 황제 세베루스에 의하여
검투사경기장으로 만들어 졌으나 비잔티움시대에 10만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전차경기장으로 바뀌었지만 십자군에 의한 정복 후
황폐화 되었다가 오스만 트르크에 의해 정복된 후 술탄마흐멧 광장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은 히포드럼광장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도시의 중심지역으로 역활을 수행하는 곳이 바로 이 광장이기도 하다.
이 광장에는 세개의 오벨리스크(Obelisk)가 있는데 오벨리스크란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숭배의 상징으로 세웠던 기념비를 말하는
것으로 네모진 돌기둥으로 위로 향 할수록 좁아지는 것이 특색이며 맨꼭대기 모습은 피라밋 모양이며 각 기둥면에는 상형문자를
이용하여 국왕의 공적을 적어 넣거나 기타 상형도안을 채워 놓았다. 로마 바티칸 베드로성당 광장 앞에도 서 있다.
이곳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5세기 이집트 파라오가 전쟁 승리를 위하여 만들어진 테우도시우스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60m이며 무게는 800톤 규모였지만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세 조각이나 꼭대기 부분만 남겨졌다. 그리고 940년경 콘스탄니티누스 7
세가 할아버지 바실레우스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콘스탄티누플 오벨리스크가 있으며 이 두개의 오벨리스크 사이에는 479년 델
포이의 아폴로 신전에서 들여 온 세펜타인 기둥은 청동무기를 녹여 만든 뱀3마리가 꽈배기처럼 서로 꼬여 기둥을 타고 오르는 형
상으로 맨상층부에는 황금 트로피가 있었으나 이스탄블로 옮겨 오기전 분실되었으며 뱀머리 하나는 사라졌으며 하나는 대영박물
관과 이스탄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태양을 숭배하고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졌다는 오벨리스크는 단순하면서도 위엄을
동시에 지닌 조형물로서 태양을 향한 상승미가 은근하게 드러나는 탑이다. 양쪽을 오가며 사방을 전부 돌며 감상하다 다시 청동
오벨리스크에 다가가 감상을 이어나갔지만 부러진 청동 오벨리스크는 어떤 감흥도 불러 일으키지 않았다. 한국에서 간 일행과 미
국에서 온 일행들을 불러모아 샷다를 눌러 보았다. 수많은 관광객을 피하며 사진을 찍어야 하는 관계로 화각과 빛의 방향에 신경
을 곤두세우며 찍어야 했다. 오벨리스크를 다시 한번 쳐다본 후 세계불가사의 중 하나로 비잔틴 시대의 대표적인 대표사원이자 현
존하는 가장 오래된 교회건축물인 성소피아 사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AD324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내란(內亂)에서 정적들을 죽이고 권력투쟁에 승리한다.그 과정서 장인 막시미아누스. 처남 막센티우스. 매부 리키리우스 등을 차례로 죽였다. 그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는 재위를 위해 군사적 재능이 월등한 장남 크리스푸스를 계모황후와 밀통했다는 죄목으로 죽였다.이 모든 사실을 아는 로마인의 따거운 눈을 피해 동방에 새로운 제국의 수도를 세우기로 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요충지 보스포루스해협 연안이며 그리스의 옛 도시 비잔티움을 제국의 수도로 정했다. 324年착공~330년 5.11일 준공. 6년 공사 끝에 완공했다. 건설한 새 수도는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렀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은 세모꼴의 해양 도시로 군사적으로 천혜의 요새였다. 동쪽은 마르마라 해로 북풍과 센 조류가 흘러 전함의 접근이 어렵고 서쪽은 황금 각 灣에 접해 한면만 육지로 이어지는 위치다.
비잔틴 제국은 제도는 로마적이지만 주민·언어·문화면에서는 그리스적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일찍이 로마 제국이 완수한 적이 없었던 전략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를 중심으로 소아시아와 이탈리아 해안의 여러 섬들을 포함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조직을 갖추고 그리스도교와 동방적 색채를 포함한 군주국가로서 완전히 성립된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 재위) 때였다. 12세기까지 비잔틴 제국은 중세의 국제정치무대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고 지중해 경제와 신앙·학문·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이후부터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정복지의 영역이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여러 종족간의 갈등, 종교적인 분열, 변방의 잦은 침입, 끊임없는 정복전쟁 등은 제국의 재정과 인력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결국 행정적 구조가 더이상 정복지에서의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어 제국은 마침내 붕괴 위기를 맞게 되었다.
현제 성 소피아성당은 성 소피아 박물관이라 불리지만 최초는 그리스도교 중심의 성당이었다. 로마에 베드로성당이 신축되기 전
에는 세게 최대의 비잔틴 건축 최고의 성당이었던 것이다. 비잔틴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최초로 공인하면서 수도로 정한 콘스탄티
누스 대제가 새로운 수도 큰사원으로 325년 하느님께 봉헌했던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나누스 대제에 이르러 532년부터 537년까
지 더욱 더 크게 개축하여 다시 봉헌된다. 그러나 그 지속을 인류의 역사는 용인하지 않았다. 1453년 메메드2세 슐탄에 의하여 정
복 당하면서 회교사원으로 변형된다. 성당외곽으로 미나레드가 세워지고 성당 안 성화에는 회 칠로 범벅이 되고 그 위에 새롭게
이슬람교 코란의 금 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져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성화들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나 1934년 성 소피아박
물관으로 이름이 바뀌며 시작된 복원작업을 통하여 비로서 오랜 세월 동안 회칠 속에 감춰졌던 각종 성화들이 화려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성당 중앙에 서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묘한 모습으로 오버랩되는 것을 쳐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학창시절 익
히고 배웠던 비잔틴문명에 대한 단편들이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기묘한 종교적 문명의 이중성이 참으로 묘하고 애잔하게 다
가 왔다. 이런 역사적 배경들이 현대사회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자 심란해 졌다. 성당의 넓이는 7,570 평방미
터 이고 천정 높이는 55.6m이며 기둥은 없다. 기둥역활은 40개의 창문 틀이 한다. 대단한 건축기술이다. 그리고 40개의 창문을 통
하여 들어 오는 빛은 성당을 더욱 더 화려하게 치장해 준다. 또한 성당 내부에는 계단이 전혀 없다. 경사진 길은 성당 어느곳이라
도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으며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건축가와 설립자의 겸손한
배려였다.
부친 무라드와 노예출신 사이에 세째로 태어난 메메드 2세 슐탄은 1451년 2월18일 19살의 나이로 슐탄이 된다. 그리고 2년 후 1453
년 5월29일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다. 그는 대단한 지략가였다. 불가침평화조약을 이끌어낸 후 슐탄은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한
다. 비잔틴제국의 재상과 비밀거래를하고 비잔틴제국에서 버린 대포 발명가가 찾아 오자 그가 요구하는 금액의 3배를 주면서 대포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지루한 접전이 벌어지자 모든 병사들에게 약속을 한다. 점령 후 3일 동안 약탈을 허가 한다며 병사
들을 독려하여 결국 성을 점령한다. 공포와 불안속에 성 소피아성당에 모여 기도를 하던 많은 수의 시민들과 수도자와 수녀들의
최후는 비참했다. 약탈과 겁탈, 그리고 노예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는다. 패전제국의 시민으로서 고통의 나락으로 빠질 수 밖에 없
었던 것이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엄청났다. 그것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한 동안 그 모습을 상상하며 머물다
밖으로 나왔다.
이 성화는 최후의 심판때 성모님과 세례자 요한이 탄원하는 모습이다.
위의 성화는 성모마리아를 중심으로 요하네스 황제2세와 이레네 황후 모자이크 성화로 성금주머니와 봉납 명세서를 들고 있는 모
습이다.
돔 천정에 있는 성모님의 모자이크를 보면서 나는 이 성전을 건립 후 헌당식에 참석한 유수티니아누스 황제는 너무나 성당모습에
톱카프궁전(Topkapi Palace)은 보스포라스 해엽 기슭 평지에 건설된 궁전이다. 1453년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트르크
제국의 슐탄 메메드2세는 이스탄블을 점령하면서 제일 먼저 신축한 궁전이다. 건립 후 4세기 동안 꾸준히 규모를 확장하여 4개의
정원을 만들고 21만평 규모로 확층해 나갔다. 15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오스만투르크의 이슬람건축양식의 변화와 규모를 살펴
볼 수 있는 멋진 궁전이다. 골든만과 마르마라해를 바라보고 보스포러스 해엽과 교차하는 언덕 평지에 세워진 궁전은 현재는 도자
기 박물관과 슐탄들이 사용했던 물품들과 그 밖의 생활용품과 왕비와 여자들이 사용했던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포란 의미를 지닌 TOP과 문이란 의미의 KAPI의 합쳐진 합성어인 톱카프는 대포문궁전이란 뜻이 된다. 약 400여년 동안 오스만
트르크 제국의 슐탄과 그의 가족들과 시종들 그리고 관료들 5만명이 거주했다는 대단위 궁전이 바로 톱카프궁전이다.
톱카프궁전은 볼 것이 다양했다. 궁전은 3개의 문과 4개의 정원으로 구분되어 있다. 첫째 정원은 예니체리 정원으로 불린다. 궁전
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숙소, 재무부 화폐창, 진료소, 제빵공장, 장작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둘째 정원은 디완정원으로 각료
들의 국무회의 장소, 주방, 마굿간, 하렘통로가 있다. 세째 정원은 튤립정원으로 슐타의 시종및 고관들만 출입이 가능했으며 궁
정학교와 오스만트르크의 각종 기관들이 있던 곳이다. 네쩨 정원은 슐탄과 그 가족들이 기거하는 내실이다. 각종 별관과 정자들
이 여럿 있는 곳이다. 하나 하나 체크하며 곳곳을 돌았다. 각종 보석을 전시하는 전시관을 보고 나오다 쪽빛처럼 황홀한 바다색채
에 이끌려 궁전 가장자리에 섰다. 해엽을 드나 드는 쪽빛 바닷물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비잔틴제국의 용병대장의 죽음이 떠 올랐
다.
지중해와 에게해에서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난공블락의 요새였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비잔틴의 마지막황제는 콘스탄티누스
11세로 팔라이온러구스였다. 성실하고 어질며 깨끗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평화 시 황제로서는 최상의 군주였으나 국가가 위험에
빠졌을 때 과단성과 지략이 없어 결국 오스만터어키에 제물이 된 비운의 황제다. 그에게는 간사한 재상이 있었다. 루카스 노타리
스다. 그는 재물밖에 모르는 인물이었다. 공무보다 자신의 재물을 위하여 자유무역을 통하여 엄청난 부를 거둬들였다. 슐탄으 침
략으로 황제가 곤경에 빠졌을 때 황제를 꼬득인다. 콘스탄티플을 포기하고 탈출 한 후 재기하라 하지만 황제는 듣지 않는다.
성이 함락 후 정복자를 찾아가 황금보화를 받치고 후대를 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몇개월 후 술탄의 병사들에 의하여 두 아들과 함
께 목이 베인다. 백성의 원성을 산자를 살려둔다면 민심이반이 생기는 것을 염려한 슐탄의 조치였다. 항상 반역자들은 자신의 영
화를 위하여 조국을 배신하지만 적국도 그 사실을 의심하며 필요한 것들만 빼내고 죽이는 것이 역사다. 재상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많은 사업체가 염려되어 딸과 돈을 유럽으로 피신시키는 것으로 대신하지만 비잔틴제국의 애국자의 손에 병원에 입원중
암살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한다. 노타리스는 총리시절 헝가리 무기제조업자 우르반을 만난다. 삼중 성벽을 파괴할 수 있는 대포를
설명하며 사줄것을 요구하지만 무전박대하며 내쫓아낸다. 이것이 바로 비잔틴제국의 불행 시작인 것이다.
1453년 4월12일 우르반이 만든 거포탄환이 콘스탄티노블 성벽에 부딪치자 성벽은 무너져 내렸다. 용맹으로 무장한 트르크용병들
은 성벽을 향해 끊임없이 공격하고 정규군들은 후퇴하는 용병이 있으면 가차없이 목을 베어었다. 일진일퇴의 백병전 50일간이나
지속되었다. 성안 병사들도 황제도 분전하였다. 서유럽국가에서 자신의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구원병을 보낼 것이라는 막연한 외
교적 기대만을 바랐으나 그의 바램은 허사였다. 트르크병사들의 공격은 다각적으로 더욱 더 거세졌다. 이젠 믿을 수 있는 것은 신
밖에 없었다. 성 소피아성당에는 기도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천사장 미카엘을 기다리며 이슬람교도들을 해엽으로 몰아 내주기
를 기다렸으나 끝내 기적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성안의 대장이 후방으로 실려 가는 모습을 본 병사들은 사기를 잃었다.
성안의 이런 모습을 눈치챈 술탄은 그 때까지 밀리던 병사들에게 약속을 던진다.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했던 콘스탄티노블
성을 점령한 후 3일간 무조건 약탈의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을 던져 에니체리군단을 사기 충천하게 만든다. 그리고 술탄은 소리
친다. 이제 이 도시는 우리의 것이다. 비잔틴제국의 국기가 내려졌다. 그리고 이어서 성탑 맨꼭대기에는 투르크 깃발이 올려
졌다.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적병속으로 뛰어 들어 최후를 맞는다. 이어서 배를 타고 지중해로 도망친 용병대장 주수티니아는
몸에 상처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부하들의 눈초리었다. 패장의 순간이 다가오더라도 적군과 싸워 전쟁터에서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장수로서 명예를 잃은 그는 3일만에 죽는다. 그리고 Constantinople 제국의 성은 3일간의 아비규환을 겪는다. 쪽빛바다
해엽에 서서 찬란한 태양의 빛을 마주하며 이곳 역사를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믿고 따르는 영원한 사부 성프란치스코
께서 평화를 위하여 술탄을 만나로 길고 긴 여정을 통하여 형제적 친교를 나누웠던 그 위대함에 대하여도 생각을 골몰했다.
평화란 우리들에게 항상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남은 궁전을
챙긴 후 점심을 먹으로 궁전 앞 터어키 식당으로 몰려 나갔다.
점심을 먹고 나오다 도너츠 모양 빵에 깨를 솔솔 뿌린 시미트 장사를 만났다. 먹을 기회는 없었지만 가이드에게 묻자 맛이 단백
하단다 사과차와 함께 점심대용으로 많이들 사먹는단다. 등짐으로 이용하는 나무기구 모양이 기묘했다. 우리나라 지게와는 다르
게 한쪽 어깨에 걸치고 시미트라 외치며 다니는 모습이 정겨웠다. 구도로를 따라 걸으며 큰 재래시장을 찾아갔다. Grand Bazaar
라 부르는 터어키 재래시장의 규모는 엄청났다. 러시아 마지막황제 식구들 중 간신히 러시아를 탈출하여 이곳까지 찾아와 지니고
온 재물들을 팔았다는 유명한 재래시장이다. 귀금속, 의류, 식품 등등 화려하게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반가운 일은 우리들이 하는
말소리만 듣고도 코리아하면서 싸이의 말춤을 춘다. 한사람의 힘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으며 국력에 대한 자부심도 느낄 수 있
었다.
바자르 구경을 마친 후 이스탄블 도심안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내일은 이른 아침 앙카라로 이동해야 한다.
숙소에 도착한 일행들은 배정된 방으로 입실한 후 다시 2층식당에 모였다. 여행중 중요한 일은 잠과 식사가 우선적으로 편해야 한
다. 그리고 여유로운 마음을 지녀야 여행내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되도록이면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갖으려 노력을
하였다. 식사를 끝낸 우린 숙소로 올라 와 샤워를 하고 아리랑 TV를 통해 한국의 뉴스를 본 후 일찍 잠이 들었다.
또 다시 하루해가 떴다. 분주하게 움직인 끝에 조식을 마치고 차에 올랐다. 6.25 동란 당시 터어키에서는 우리를 돕기 위하여 참
전을 해 주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서울 여의도에 앙카라 공원을 만들었고 앙카라에도 한국참전 기념공원을 만들었다. 그 공
원에 들러 잠시 감사와 위로의 기도를 드린 후 기념촬영을 한 후 지각변동에 의하여 만들어진 광활한 소금호수에 잠시 들렀다.
북쪽끝에서는 소금생산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소금호수 구경을 한 후 잠시 휴식을 취하며 흩으러진 행장을 수습했다.
이제는 소금호수를 떠나 갑파도키아로 가야 한다. 갑파도키아로 가는 도중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낸 지하도시 데린
구유(Derinkuyu Underground City) 살펴 본 후 점심으로 항아리게밥을 먹기로 하였다.
Derinkuyu는 깊은 우물이란 뜻이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엄청박해를 당해야 했던 신자들은 응집석회석으로 단층
을 이루고 있는 갑파도키아로 와서 지하굴을 만들어 지하 도시를 만들었다.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 미로처럼 서로 연결한 후 서로
의지하고 소통하며 살았다. 현재 80m 까지 복원한 상태지만 탐방객들의 안전을 위하여 지하 50m 까지만 탐방을 허락하고 있다.
좁고 낮고 어두운 지하굴에서 신학교를 만들어 운영하고 불을 지펴 음식을 조리하고 신앙생활 영위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경
외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깊은 우물이 있었으며 깊은 곳에서 숨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환기와 배기시설이 그만큼
잘 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세계 어디를 가나 하느님을 처음 믿는 다는 일은 기득권자와 기존의 가치들과 대립
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일은 항상 어려움이 따르고 철저한 자기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왜 그토록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힘들었을까? 땅과 하늘의 거리가 멀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귀하시고 위대한 거룩함을 지니신 존체
이시기에 쉽게 다가갈 수 없으며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랑을 하기 위하여는 박해라는 일정의 절차의 과정을 거치는 행위가
바로 박해의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하도시를 빠져 나온 후 점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항아리 게밥 집을 찾았다. 동굴을 파서 중앙에 홀을 만들고 방사형으로 룸을 만
들어 손님들을 받았다. 입구와 홀이 일직선으로 배치된 석굴에 자리를 잡았다. 야채셀러드를 뜸북 담아 먹으며 여독을 풀었다. 그
리고 갖고 다니는 물을 꺼내려다 태이블에 물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따라 마셨다. 갈증해소에서 오는 청량감이 너무 깊게 나
의 몸에 자리를 잡는다. 나는 종종 이럴 때 기분 좋은 쾌감을 느끼게 된다. 온 종일 이곳 저곳을 누비고 다니다 속은 허기지고 발품
은 어지럽고 마음마저 고단함으로 물이 들기시작할 무렵에도 나는 쾌감을 느끼는 버릇이 있다. 적당한 피곤함 보다 몇걸음 더 나
간 피곤함이엄습해도 나의 몸에서는 쾌감이 살아 난다. 적당한 피로는 노동에서는 오는 쾌감 같은 것이 아닐런지 모르겠다. 일상
적인 버릇처럼 속식으로 점심을 해결한 후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주변을 살폈다.
유목민들이라 그런지 터어키 양탄자는 문양이 다양하고 색은 무척 화려하다. 이동하는 중간에 양탄자 제조공장에 잠시 들러갔
다.식물성 안료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더욱 더 채색이 아름다웠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화학안료를 주로 사용하고 있지만 역시 채색
기술이 좋아 그런지 광물성 안료나 식물에서 채집하는 안료 못지 않는 화려함을 구성하고 있다.꼭두서니 뿌리에서 붉은 염료를 구
하고 카밀레꽃에서 노란색 염료를 추출한다. 그리고 쪽빛 아름다운 남색은 인디고에서 추출하여 실을 염색한 후 말려 문양 본을
만들어 틀에 걸어 놓고 씨줄과 날줄을 엮어 만드는 것이 바로 양탄자다. 이 직조는 섬세한 여성들의 몫이었다. 원시적인 색감을
지닌 붉은, 노란, 청색이 머금고 있는 색의 원형질에서 변형을 이루는 파스칼 유형의 색감도 절제와 차분한 인상을 전하며 직조되
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유목민들에게 양탄자는 긴요한 추위를 막아내는 바닥재었다. 여인내들은 밤마다 틈틈히 손으로 짜 시집갈 때 갔고 갔던 혼수품이
바로 양탄자다.많은 여인들이 틀에 앉아 직조에 메달리고 있었다. 일에 열중하던 여인이 인기척을 느끼고 뒤 돌아 본 순간이 카메
라에 잡혔다. 목례를 보내자 수줍게 웃는다.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우리나라 옛어른들께서 모시를 짜는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세계 어디를 가나 직조물과 염직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여인들이었다. 지고지순했던 삶의 열정과 가족들에 대한 사랑이 담긴 대부
분 직조물들은 연인들의 섬섬옥수에서 탄생되었다. 옛적에는 모든 본은 손으로 그려 사용하였다는데, 지금은 컴퓨터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마법의 돌 반도체의 영향을 받고 탄생되는 양탄자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양탄자 직조공장을 벗어나면서도
여인들의 공력을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전지 전능하신 신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이채롭고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카파토키아! 왜 수많은 여행객들
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지 알수 있을 것 같다. 자연을 만들어 주신 주님의 은총 없이는 이러한 자연의 탄생은 불가능하였을 것 같다
이곳은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기독교인들에게 훌륭한 피난처였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 왔던 기독교인들은 7세기경 이
슬람 교도들의 박해를 피해 굴을 파고 살면서 기독교문화를 만들어 높은 곳도 이곳이었다. 가장 신비로운 자연경관을 지니고 있는
카도피아는 원래 히타아트 왕조 중심권이었다. 터어키 중부 핵심지방으로서 아나톨리아 고원의 1000m 구릉으로 형성된 지역이다
수도 앙카라에서 약270km 떨어진 곳 카이세리, 네브쉐히르, 괴뢰메 등등의 지역을 아나톨리아의 카파도키라 부르는 것이다.
헤아리기 쉽지 않은 수많은 기암괴석들의 파노라마가 이어지는데 그 모양들이 각양각색으로 비바람이 만들어 낸 자연의 걸출한
작품들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연출할 수 있었던 조건은 화산폭팔로 용암이 뒤덮은 이곳을 수많세월이 이어지는 동안 비바람의
영향으로 침식이 이루워져 지금의 환경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이런 환경속에서도 굴을 파 교회를 만들고 숙식을 해결하며 믿음
을 지켜 왔던 기독교인들의 문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현재는 이런 동굴을 이용하여 여행객들을 위한 호텔로도 사용하고
있다.
카파도키아 지역에서는 버섯모양 집, 교회 등등을 볼 수 있는데 동굴을 판 목적은 최초에는 최소한 숙식생활과 기도 생활에 극한
한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늘어나자 공간의 규모가 점점커져 교회와 수도원을 만들어 종교적 공동체를 이뤄나가기 시작하였다.
암굴교회라 불렸던 이 곳은 1년을 뜻하는 365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수가 적다. 다만 관광객을 위하여
개방하는 곳은 30여개에 불과 하다.
카도피아를 순례하다 보니 벌써 석양빛이 석물 사이로 내리기 시작하였다. 성모님께서 기도하는 모습 앞에 잠시 섰다. 멀리서나
마 주모경을 드렸다. 그리고 낙타를 닮은 바위를 비롯하여 여러점의 석물을 향해 시선을 보내며 몇장의 사진을 만들었다.
더더욱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동굴호텔로 향했다.
해가 서쪽으로 떨어질 무렵 동굴호텔에 도착하였다. 옛수례가 인상적으로 다가 왔다. 1층 방을 배정받은 후 호텔주변을 돌아
보았다. 두 개의 풀이 철이 지나 그런지 적조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것이다. 그 때를 지나면 무언인가 생소하고 격이 맞지
않아 적막하게 보인다. 아침 일찍부터 쌓인 여독을 샤워로 풀어낸 후 저녁을 챙겼다. 그리고 잠시 후 터어키민속춤 공연
을 보기위하여 공연장을 칮았다. 평소 술을 즐기던 사람으로서 이슬람국가를 여행하다 보니 술을 접하기 쉽지 않았는데 공연장에
서는 맥주, 포도주, 터어키 고유주를 무제한 공급했다. 사진을 찍다. 마시고 다시 찍고 다시 마시며 민속춤과 발리춤에 빠져 들었
다. 춤이 활기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