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정과 양궁의 역사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그 해 10월 대한궁도협회 간부들을 호출 합니다. 그 당시 대한궁도협회(“조선궁술연구회”가 모태) 간부들은 황학정 사원들이 대부분이였기에 사무실도 황학정(대한체육회설립과 동시에 무교동으로 이전)에 두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이미 “국제양궁연맹”에 가입했는데 당신들은 뭐 하는 것이냐는 질책이였다.
그리하여 “국제양궁연맹”에 1963년7월27일 먼저 가입 한 일본과 자유중국(대만)의 추천과 지지로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석호정(남산 활터) 사원이던 석봉근(石奉根. 당시 성동 중학교 체육교사)씨가 개인적으로 양궁보급에 열중하고 있었으며 그는 체육 교사로써 학생들에게 교육할 새로운 스포츠 종목을 개발 하던 중 양궁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는 양궁사법과 경기규칙등을 독학으로 파고들었으며,그 당시 미군부대에서나 흘러 나오던 양궁은 구하기도 어려웠을뿐만 아니라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중 1962년 여름 미8군의 “미란 이 롯드”중령이 당시 장충단 공원안에 있던 석호정을 방문하여 양궁시범을 보이고 그 양궁을 석호정에 기증하였다고한다.
석봉근은 이 양궁을 가지고 황학정으로 찾아와 대한궁도협회를 방문하여 당시 김정대회장(황학정 사원)에게 양궁보급을 적극적으로 해 줄것을 간청하게 된다.
이리하여,1963년 10월18~20일간 수원 연무대에서 열린 제6회 전국활쏘기대회 때부터 양궁 경기도 함께 열리게 되었다.
1963년 11월,규약 개정과 양궁경기규칙을 채택하고 대한궁도협회가 주최하는 전국활쏘기대회에서는 반드시 양궁경기도 함께 진행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황학정에서 대한궁도협회가 주최한 전국활쏘기대회(67년부터70년대 초까지 해마다 개최)때마다 양궁경기를 황학정과 인접한 매동 초등학교에서 하게 되었다.
개량궁(국궁) 개발에 몰두해 오던 “모던 산업” 대표이자 황학정 사원이던 차경헌(車敬賢 당시 대한궁도협회 양궁부장)씨에 의해 국산양궁 개발의 시대가 최초로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1969년 당시 일본 궁도협회이사장이던 아사히궁구 주식회사 대표이던 오노마 히데오시(일본궁도8단)와 접촉, 그로부터 지원을 받아 2년간에 걸쳐 여러번 차경헌씨의 초청으로 국산양궁 제조를 위한 기술지도와 양궁사법도 전수받으며 일본어판 양궁교본도 번역 출간하여 양궁보급의 활성화를 꾀하였다.
1972년 수입양궁보다 품질이 우수하다는 상공부 장관의 상까지 받으며 국산양궁 보급에 박차를 가한다. 또 한, 국산양궁 개발과 더불어 양궁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양궁사법을 지도 할 양궁교본을 발간 하기도 했으며 이를 통해 지도자 육성도 함께 진행해 왔던 것이다.
이 후, 1972년 양궁경기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 되면서 대한궁도협회임원들은 문교부에 양궁을 학교체육 육성종목으로 건의하였다, 당시 문교부는 화랑도의 계승이라는 민족교육정신에 입각하여 국궁을 학교체육 육성종목으로 채택하는 문제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국궁은 사거리가 멀고 각궁이라 장소확보와 다루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되어 양궁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양궁을 학교체육의 육성종목으로 채택한 것은 그 후 한국양궁이 세계제패의 밑거름이자 원동력으로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올림픽에서 보여지는 양궁의 세계제패 밑바탕 속에는 차경헌씨와 석봉근씨 같은 선배궁사들의 노고와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양궁사법의 이론속에는 우리의 국궁사법(조선의 궁술-1929년 황학정 발간)의 장점들도 취합하여 만든 것으로 압니다. 이전(離箭 밀고 당기기에 관한 국궁사법의 중추적 발시이론)이라하여 콘스탄트 모션(constant motion)이라는 한국만의 독특한 양궁사법을 개발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기존 서양에서 보여지는 사법(stop and start)과는 차별화되고 진보적인 사법으로써 양궁제패의 큰 요인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이런 요인들로 인하여 오늘날 한국양궁이 세계인의 찬사를 받는 것 아닐까요?..
이렇듯 훌륭한 선배 궁사들의 노고에 힘입어 국궁이 밑바탕이 된 양궁의 발전이 있었음에도 후학들은 이를 모르고 지나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옛 선배들의 업적을 국궁인,양궁인들은 길이 보전하고 홍보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자료출처 :황학정 10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