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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3_마가복음39_2016년, 희망의 연주자
마가복음 10장 46–52절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새해 첫 신문 표지의 충격
2016년 새해 첫 주일 성찬예배로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는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배경으로 “2016년, 희망의 연주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저는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면서 이제 막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하시려고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해의 첫 신년예배 말씀으로 나누었습니다. 2016년이 거칠고 메마른 광야와 같을 지라도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축복, 그 얼굴빛으로 비추시듯 만나와 메추라기로 매일 돌보시는 은총의 축복, 광야일지라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의 나라에 거함에서 오는 평강의 축복이 우리 하늘빛 성도님들께 함께 하신다고 축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저를 통해 저희 공동체에 주시는 주님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1월 1일, 신년 새아침에 집으로 배달된 신문 표지에 실린 그림 한 장이 저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신문은 1946년에 창간된 경향신문이고 올해로 창간 70주년을 맞이합니다. 창간 70주년 새해의 첫 신문 표지에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을까요? 신문의 첫 페이지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그림은 오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청년세대의 시선이 어떠한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림의 제목은 ‘흙수저의 길’입니다. 경향신문의 4컷 만화를 그리고 있는 박순찬 화백이 그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돈 사회다. 금마차는 돈의 힘으로 달린다. ‘금수저’는 ‘금수저’를 낳는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끊어졌다. ‘흙수저’들은 세상을 떠받치며 가시밭길 위에서 그저 견디고 있다. TV를 틀면 금수저의 삶이 생중계된다. 쌀값 폭락 대책을 요구하려다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는 농민 이야기 같은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서민의 돈이 다시 한번 대기업에 빨려 올라간다. 심지어 아파서 병원을 찾는 순간에도... 새해가 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은 이 그림 속 어디에 있는가.”
이 한 장의 그림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단면을 아프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벽화풍으로 그려진 그림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가 이집트의 파라오 황제를 섬기기 위해 수많은 히브리 민족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애굽의 노예시대와 같다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2016년 새해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은 아니더라도 거칠고 메마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광야정도는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대다수 청년들의 눈에 비쳐진 대한민국의 현실은 이집트에서 출애굽도 하지 못한 노예의 삶이었습니다. 헬조선이니 금수저 흙수저와 같은 이야기들이 이러한 청년세대의 절망감을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는 자각을 청년들만큼 기성세대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기성세대들은 그래도 절망스럽지만 열심히 일하면 희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광야에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청년세대들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구조적으로 계급화되어 나날이 굳어져가는 한국사회가 출애굽 이전의 히브리 노예시대와 같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저는 신문이 창간 70주년을 맞이하면서 고심 끝에 대한민국의 현실을 이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불편하지만 올바른 현실인식 담겨져 있습니다.
불결함의 아들, 바디매오
그러나, 절망의 시대를 산다고 한탄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절망에 빠져 어두움의 세계를 살고 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디매오였습니다. 그 이름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람어 ‘바-’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바요나 시몬’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것은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말입니다. ‘바디매오, 디매오의 아들’ 이것이 실제 이름일 수 없습니다. ‘디매오’는 ‘불결한’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바디매오는 ‘불결함의 아들’입니다. 그의 이름은 그가 어떤 사회적 신분 가운데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불가촉천민’ 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맹인’이며 ‘거지’입니다. 둘중의 하나만 하더라도 절망스러울 것인데 ‘맹인 거지’입니다. 그에게 인생은 아무런 희망의 빛도 발견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일 뿐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동전 몇푼을 구걸하며 살아가는 죽지못해 사는 그런 비참한 인생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부터 희망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북쪽 갈릴리로부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분이 있는데 그가 자신처럼 소경인 사람의 눈을 열어서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로 새롭게 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바디매오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객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여리고 성문 앞에서 겉옷을 펴놓고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뉩니다. 신도시 여리고는 헤롯 대왕이 겨울을 지나기 위한 궁전 요새로 지었는데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30km 정도 거리에 있는 왕족과 상인들의 부요한 도시입니다. 바디매오는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부유한 여리고인들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객들에게 구걸을 통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난 이후부터는 기대감으로 예수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
유월절 명절이 가까워져서 점차로 순례객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있던 어느날 입니다. 마침내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그렇게 기다려왔던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려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왜 예수님이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들었는지를 한번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말입니다.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의 ‘여호수아, 호세아’에서 온 이름인데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분하는 뜻에서 나사렛 출신의 예수,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호칭은 조금 조롱과 비하하는 투가 담겨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삶의 실패자들이 모여살던 이스라엘의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겠느냐?’고 했던 것처럼,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나올만한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말은 바리새인이나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비천함을 나타내는 조롱과 멸시가 담긴 말입니다.
그러나 또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예수님이 누구를 대변해주는 분인가?’를 말해주는 호칭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삶의 실패자들, 변방에서 살아가는 세상의 나그네와 같은 난민들, 과부와 고아의 하나님처럼, 그들의 ‘대변자’ 라는 뜻으로 ‘나사렛 예수’로 불려졌던 것입니다. 그 ‘나사렛 예수’가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라는 사실은 그가 세우실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체제 전복적이고 혁명적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실 복음에 담겨진 메시지 자체는 대단히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1세기 초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동네인 베들레햄에 다윗의 별이 멈추어서 그 빛을 비춘 곳은 한 허름한 여관의 헛간, 그것도 초라하고 볼품없는 구유에 누운 한 가난한 목수 부부의 아기였습니다. 메시야가 이렇게 오셨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 큰 울림이 있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메시야와 같은 인물은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미처 깨닫지 못할 방법으로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왕의 탄생을 뜻하는 ‘복음, 유앙겔리온’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1:1)’ 마가복음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당시의 로마 황제를 비롯해서 이스라엘의 권세자들에게 이것이 복음일 수 있었을까요? 당시 권세자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헤롯 대왕은 복음의 주인공인 아기 예수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하고 베들레햄 주변의 태어난지 1,2년된 모든 아기들을 죽이도록 명령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복음이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복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고 자기의 기득권을 엎으려고 하는 불온한 반역의 사상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고 하는 소식은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정의와 공평과 사랑의 나라를 세우실 메시야가 오셨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로 인해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누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의 노래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의 찬송에서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1:52-53)”라고 노래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지금, 바디매오는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오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짖어 그를 찾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에 대한 칭호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바디매오가 사용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는 맹인 거지이며 불가촉천민의 아들인 바디매오의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제 곧 세우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믿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있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적절한 기도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일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맹인이며 거지인 바디매오처럼 자기 인생을 어쩌지 못하는 굴레에 갇힌 존재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재물과 권세만 있다면 세상을 마음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헛되고 교만한 생각입니까?
세상에서의 무력함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는 부르짖음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 기도가 2016년 이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기도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이고, 또한 절망의 시대에 눈물을 흘리는 모든 흙수저 바디매오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마가복음 10장에서 등장했던 여러 인물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바리새인들, 재물이 많아서 오히려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예수를 따르지 못했던 부자, 그리고 예수님의 좌우편 권력의 자리를 놓고 갈등을 빚은 제자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가 필요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우리가 서야할 기도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가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런 바디매오의 기도가 2016년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입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것들
기도의 삶을 살고자 하면서도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기도의 삶을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도의 삶을 방해하는 것은 외부에만 있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함에 대한 절박한 마음이 없습니다.
바디매오는 그래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잠잠하라고 꾸짖을 때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소리를 높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꾸짖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관심을 얻기 위해 시끄럽게 떠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권력자들은 그들에게 소요죄를 적용하고 싶어합니다. 그들의 간청은 세상이 관심을 두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고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의 관심이 필요하지만 언론에서 말해주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세월호 광장에서, 수십미터 높이의 고층건물 위에서, 밀양의 송전탑 아래에서 터져나옵니다. 권력자들은 이러한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바디매오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저는 지난해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해 연설하였을 때가 생각납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대통령에게 눈물로 하소연 하고자 가족들이 모였을 때, 대통령은 경찰의 벽을 세우고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로마 카톨릭의 수장인 프란시스코 교황이 방문했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의 미사를 위해 운집한 군중들 사이로 교황의 차가 지나갔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교황에게 그들의 아픔을 호소하기 위해 교황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교황은 그들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무엇이 더 예수님의 모습에 가까울까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시선과 마음이 머무는 곳을 향해 손을 내밀고 그곳에 함께 서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교회에 생명과 진리가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고 생명과 진리를 세상의 헛된 영광과 바꾸어 버릴 때 세상은 교회를 조롱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바깥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말입니다.
바디매오는 잠잠하라고 꾸짖는 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더욱 더 소리를 높였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내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서 일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나면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절박함에 멈출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으면서도 우리는 다른 곳에서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어서 기도를 쉽게 포기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답답한 현실이 기도의 힘을 모두 빼앗아 기도가 막히게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기도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짓누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에게 그런 것들은 모두 사치스런 생각입니다. 그에게는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할 분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확신과 지금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불러서 그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자신의 소원을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네가 이제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바디매오의 태도는 바로 믿음의 태도였고, 그가 구한 것 이상의 응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디매오는 보게되었고 곧 “예수를 길에서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 우리도 ‘바디매오의 기도’로 예수님을 만나는 한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2016년, 모든 상황들이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우리도 같이 절망하고 한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온 인류의 희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들이며 그분의 복음을 가진 희망의 메신저들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바디매오의 기도로 기도하고 이 시대의 바디매오들을 위한 중보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희망의 연주자
새해가 밝았지만, 이라크, 시리아를 포함한 여러 나라들은 아직도 테러와 전쟁의 공포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총과 칼 대신 '악기'를 손에 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난민들에게 '희망의 노래'를 선사하는 음악가들에 대한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왜 전쟁터의 폐허 속에서 목숨을 걸고 '음악'을 하는 걸까요?
IS의 위협과 전쟁과 테러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이라크는 자살 폭탄 테러가 일상이 된 공포의 땅입니다. 하지만 전쟁과 테러 속에 칼과 총이 아닌 악기를 든 사람이 있습니다. 폐허 더미 위에 홀로 앉아 아무 말 없이 첼로를 연주하는 한 사람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카림 와스피, 이라크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 입니다. 이라크 국립교향악단 지휘자였던 그는 지난 해 4월부터 홀로 거리에 나와서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음률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시리아에도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선 악사가 있습니다. 길거리 피아노맨으로 불리는 아이함 아흐마드입니다. 그는 자신의 피아노가 IS에 의해서 불태워지는 것을 보고도 길거리 연주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폐허 속에서 연주를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음악을 멈추지 않는 것은 폐허 속 음악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잃어버린 일상과 꿈을 되찾아주는 ‘희망의 노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총과 칼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음악이 ‘희망의 노래’가 되었던 일화가 있습니다.
1988년 팔레스타인 무장봉기 당시에 이스라엘 탱크에 돌을 던지는 모습으로 전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긴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1996년 봉사하러 온 미국 합주단의 연주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소년은 홀로 비올라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재능을 인정받아 프랑스로 유학까지 갔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총과 탱크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해 길거리 공연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2005년 음악학교를 세워 50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연히 접하게 된 음악이 한 소년의 인생을 바꿨고, 그는 또 수많은 아이들의 인생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렇게 테러와 전쟁으로 절망의 땅에서 ‘일상’과 ‘꿈’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음악 한 소절이 전하는 희망의 씨앗을 목숨을 걸고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뉴스를 보면서 작은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절망의 세상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절망에 빠진 누군가에게 희망의 노래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를 만나는 누군가에게 이 절망의 땅에서 마실 수 있는 생수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크고 대단한 일을 통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는 시간들이 누군가에게 희망의 선물로 전해지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상 가운데 그 일이 일어나게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눈이 뜨여진 바디매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