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남 두륜산
2023년 10월 22일(일요일)
산행코스 : 오소재쉼터(09:50) - 노승봉(11:10) - 가련봉(11:25) - 두륜봉(12:00) - 진불암(12:55) - 북미륵암(13:20) - 대흥사(14:10) - 주차장(15:00)
산행거리 : 13km
오소재
오소재약수터에서 오심재로 바로 올라갈수 있습니다.
고계봉
오소재 쉼터
나무사이로 고계봉이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노승봉 방향 파노라마
저멀리 노승봉과 너덜지대가 보입니다.
당겨본 노승봉
고계봉
고계봉과 전망대, 솔개바위
너덜지대에서 바라본 주작산 방향 파노라마
좌측 저멀리 흑성산, 월출산이
만덕산, 주작산, 천관산, 강진만
점점 가까워지는 노승봉
만덕산, 주작산, 천관산
너덜지대
너덜지대를 지나면 바로 노승봉입니다.
노승봉에서 바라본 가련봉 방향 파노라마
가련봉
두륜봉, 대둔산, 도솔봉
대둔산, 도솔봉, 연화봉
노승봉 0.1km, 오심재 0.8km, 두륜봉 1km, 가련봉 0.2km
강진만
가련봉
투구봉, 위봉 그 뒤로 완도 상왕봉
저멀리 대흥사가 보입니다.
대둔산, 도솔봉, 연화봉과 좌측 저멀리 달마산이
두륜봉, 도솔봉
당겨본 새바위???
도솔봉
투구봉, 위봉과 그 뒤로 완도
뒤돌아본 가련봉
만일재
오심재 1.5km, 가련봉 0.5km, 대웅전 2.4km, 오심재 1.4km, 천년수(만일암터) 0.2km
지나온 가련봉
올려다본 두륜봉
구름다리를 향하여 올라갑니다.
투구봉, 위봉
구름다리
두륜봉 정상이 보입니다.
두륜봉
두륜봉 정상에서 바라본 가련봉 방향 파노라마
향로봉, 고계봉과 중앙 저멀리 월출산이
고계봉, 노승봉, 가련봉
당겨본 노승봉, 가련봉
가련봉, 주작산, 천태산
강진만
두륜봉 정상에서 바라본 투구봉 방향 파노라마
해남군 북일면
투구봉, 위봉, 상왕산, 우측 저멀리 한라산이
보길도, 달마산, 대둔산, 도솔봉
진불암갈림길
두륜봉, 대흥사 2.2km, 가련봉 0.8km, 천년수 0.5km, 대흥사 2.05km, 진불암 0.8km
대둔산, 도솔봉, 연화봉
표충사 갈림길
가련봉 1.5km, 두륜봉 0.7km, 표충사 1.4km, 진불암 0.1km
표충사 갈림길
두륜봉 0.8km, 북미륵암 0.8km, 오소재주차장 2.8km, 표충사 1km
진불암
진불암 응진당
응진당 안에는 조선 초기의 목조 16나한상(羅漢像)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특이합니다. 원래 이 나한상은 50m 상방에 위치했던 고진불암(古眞佛庵)에 있었다고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강진에 살던 어부 서씨(徐氏)가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서쪽나라의 배를 만났는데, 그 배 안에 16나한상이 실려 있었으므로 두륜산방(頭輪山房)에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삼세후불탱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보호수
오심재 1.4km, 북미륵암 0.6km, 표충사 1.5km, 진불암 0.2km
북미륵암 갈림길
대웅전 1.3km, 일지암 0.5km, 가련봉 1km, 두륜봉 0.8km, 북미륵암 0.4km, 천년수 0.3km
오심재 1km, 북미륵암 0.4km, 대웅전 1.3km, 진불암 0.4km, 노승봉 1.2km, 가련봉 1km, 두륜봉 0.8km, 천년수 0.3km
오심재 0.9km, 북미륵암 0.3km, 진불암 0.8km
북미륵암
용화전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전각의 이름은 용화전(龍華殿)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마애여래좌상이 미륵불로 알려지기도 하였습니다.
대흥사 북미륵암마애불좌상(국보 제308호)
대흥사 북미륵암의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입니다. 전체 높이는 4.85m, 몸길이는 3.5m에 이릅니다. 이 마애불은 2005년에 보물 제48호에서 국보 제308호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동안 보호각인 용화전에 가려졌던 일부가 2004년 용화전 해체보수 과정에서 상단부와 하단부 전체가 드러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연화좌(蓮花座)에 결가부좌한 마애불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여래좌상입니다. 광배에는 두광과 신광뿐만 아니라, 4구의 천인상이 대칭으로 화려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아래쪽 2구 공양 천인상은 한쪽 무릎은 세우고 다른 다리는 꿇은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얼굴은 위를 향하고, 한 손에 지물(持物)을 든 채 연화좌에 앉아 있습니다.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북미륵암에 2기의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그 중 용화전 바로 옆에 있는 탑이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입니다.
이 탑은 전체 높이 4.35m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에 따른 고려시대의 석탑입니다. 이 탑은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11세기)과 같은 시기인 고려시대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다른 석탑 1기는 암자에서 약 50m 떨어진 산등성이에 있습니다. 대흥사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이라고 합니다.
대웅전 갈림길(대흥사 방향)
두륜봉 1.1km, 천년수 0.6km, 대웅전 1.6km
대웅전 0.9km, 가련봉(오심재경유) 2km, 북미륵암 0.7km
가련봉 2.6km, 북미륵암 1km, 흔들바위 2.06km, 대웅전 0.6km, 두륜봉 2.1km, 가련봉 2.3km, 천년수(만일암터) 1.6km, 일지암 0.5km
임도를 따라갑니다.
호국대성전
정면 9칸, 측면 5칸에 다포집 겹처마 팔작지붕의 호국대전은 한창 불사 중입니다.
보현전
표충사 호국문
보련각
초의선사가 1852년 조사들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건립했습니다. 현재22위의 진영을 공동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냅니다.
1944년 중수, 대광명전 뒤에 있던 것을 2009년 현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표충사
1788년 사액사우 건립을 추진해 표충사로 지정되었고, 정조가 직접 쓴 표충사 편액이 내려집니다. "어서각"이라는 편액은 임금의 글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곳의 편액이 정조대왕의 글씨임을 증명합니다.
중앙 서산대사 휴정, 좌우로 전란에서 공을 세운 서산대사 제자인 사명당 유정스님과 뇌목당 처영 스님 진영
표충각비
건물은 1860년에 표충사를 이건할 때 지은 것입니다.
조사전
세 폭의 진영도가 걸려있는데, 한 폭에는 6명을, 나머지 두 폭에는 5명씩 진영을 배치하였습니다.
관음33응신전
관음 33이라는 숫자는 한정된 33이 아니라 무한수를 나타냅니다.
관음전 벽면에는 중생이 원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투신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관음보살
화려한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양손으로 연꽃 가지를 길게 늘여 쥐고 있고,
뒤에 걸려있는 후불탱화는 천수관음도로,
커다란 원형 광배가 화면을 가득 채웠으며, 광배 안에는 버들가지를 꽂은 정병과 책, 연꽃 등을 든 천 개의 손과 눈이 표현되어 있고, 색 띠를 그려 상서로운 기운을 묘사하였습니다.
가허루
가허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풍판이 달린 주심포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천불전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출입문입니다.
가허루(駕虛樓)라는 현판 글씨는 창암 이삼만(1770~1845)이 썼습니다.
천불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
1811년(순조11)에 불탄 것을 1813년 중건한 것으로, 6년에 걸쳐 경주 옥돌로 만든 천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이 봉안 되어 있습니다.
천불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입니다.
석조천불상(보물 제1807호)
조선 순조 11년(1811) 대흥사에 큰불이 일어나 가허루, 천불전, 대장전, 용화당, 팔해당, 적조당, 지장전, 약사전, 향로전 등 아홉 동의 건물이 불에 타고 단지 세 동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이에 완호 윤우 스님이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1812년 극락전, 용화당, 지장전 등을 중건하였고, 1813년에 중건된 천불전에 봉안하기 위한 천불을 경주 기림사에서 옥석(玉石)으로 조성하였습니다.
천불이 완성되자 1817년 10월 23일 3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해남으로 향했는데, 그중 완호 윤우가 탄 배는 오륙도 앞바다에서 표류하여 일본의 나가사키현에 닿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이게 웬 떡이냐며 절을 짓고 천불을 봉안하려고 난리를 떠는데, 왜놈 꿈에 이 불상들이 나타나 해남 대흥사에 봉안될 불상이다 하였으므로 1818년 6월 일본을 출발하여 8월 15일 마침내 대흥사 천불전에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이때의 일로 천불 중에는 어깨에 일(日)자가 찍힌 불상이 있습니다.
이 일을 1821년 일본 표해록(日本漂海錄)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천불전 목조삼존불
중앙 석가모니불, 좌우 협시불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용화당(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
전남 유형문화재 제93호 용화당(龍華堂)은 정면 8칸, 측면 3칸에 주심포 익공 양식의 팔작지붕 건물로,
강당 겸 선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완호 윤우 대사가 조선 순조 13년(1813)에 건립하였습니다.
연리근
높이가 20m이고, 둘레는 4.4m에 수령은 약 500년 된 느티나무로, 201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습니다
수령이 오백여년 된 느티나무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래 세월 담아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왼쪽은 차분한 "음"의 형태이며, 오른쪽은 활발한 "양"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침계루
침계루의 현판은 원교 이광사 글씨입니다.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1665년(현종6)부터 1666년에 걸쳐 심수가 중창했는데,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집으로 내부는 단조로우며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 글씨입니다.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추사 김정희가 1840년에 제주도로 귀양가다가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렀습니다. 그때 추사는 대웅보전 편액을 새로 써서 이광사 편액 대신 걸게 했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귀양살이가 풀려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자신의 편액을 떼고 이광사의 글씨를 걸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주불로서 중생에게 설법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전각입니다.
대웅전과 대웅보전의 차이를 조사해 보니 대웅전은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님, 왼쪽에는 문수보살, 오른쪽에는 보현보살을 모신 곳이고, 대웅보전은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님, 왼쪽에 아미타불 부처님, 오른쪽에 약사여래 부처님의 삼계불을 모신 곳으로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 부릅니다.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釋迦如來三佛坐像)은 임진왜란 전란 과정에서 의승군의 최고 지도자로 활약했던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승려의 가사와 바리때)이 1606년 대흥사에 봉안되고 난 6년 후에 이루어진 불사로 우협시불상(약사여래불)의 크기가 170cm에 이른 대형 불상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한 좌우의 협시(본존인 여래를 모시는 것) 불상에서 발견된 ‘소성복장기(塑成腹藏記)’에는 1612년이라는 정확한 조성 시기와 태전을 비롯한 제작에 참여한 10명의 조각승, 불상 제작에 필요한 시주 물목(물건의 목록)과 참여했던 380여 명의 사부대중(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거사)․ 우바이(보살)이 모두 기록되어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석가여래삼불좌상은 우리나라 불상 중 380명이라는 최다 시주기록을 가지고 있는 불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863호)
수미단 위에는 중앙의 석가모니불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로 구성된 보물 제1863호 해남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고,
약사여래불과 아미타여래불은 아미타여래 9품인 중 하품중생(또는 중품하생)의 수인을 하고 있습니다.
삼세불 뒤의 후불탱화는 석가모니불과 약사여래불 및 아미타불을 각각 그린 삼불회도가 걸려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상단에 마하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배치하였고, 약사여래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상단에 4대 제자와 두 신장을 넣었으며,
아미타여래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상단에 4대 제자와 두 신장을 넣었습니다.
명부전
명부(冥府)는 사람이 죽은 뒤에 가는 곳이고, 명부를 관리하는 보살이 지장(地藏)보살입니다. 지장(地藏)이 땅(地) 속에 있다(藏)는 뜻이니, 지장보살이 대지(大地)의 덕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윤회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해주는 존재임을 알겠습니다.
지장보살 우측에는 짝수(2,4,6,8,10) 대왕과 판관, 녹사, 사자 및 인왕이 배치되어 있고, 좌측에는 홀수(1,3,5,7,9) 대왕과 판관, 녹사, 사자 및 인왕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지장보살
아미타여래 9품인 중 하품중생의 수인을 한 지장보살을 가운데로 좌우에 합장한 도명존자와 두 손을 도포 자락 안에 넣은 무독귀왕이 서서 협시하고 있고, 지장보살 뒤에는 1901년 금어 경선 응석이 그린 지장 후불탱화가 걸려있습니다.
좌측 응진당, 우측 산신각
응진전에 해사 김성근이 쓴 응진당 현판을 걸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는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협시보살 좌우에는 관음과 세지의 보살패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삼존불 뒤의 후불탱화는 1901년 금어 석옹 철유 외 5인이 조성한 영산회상도로,
석가모니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마하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협시하고, 주변에 6대 보살과 8대 제자 및 사천왕을 그렸는데, 누가 속을 썩였는지 영산회상도의 석가모니불 나발이 하얗게 셌습니다.
산신각에는 1901년 금어 석옹 철유 외 5인이 조성한 산신탱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대흥사 풍광
좌측 부처님발, 중앙 부처님 가슴, 우측 부처님 얼굴
해탈문
해탈문에는 " 頭輪山大興寺 (두륜사대흥사)"라고 적혀 있고 해사 김성근의 끌씨이고 안쪽 "解脫門(해탈문)"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입니다.
해남 대둔사 해탈문 앞쪽에 걸려있는 '두륜산 대흥사' 편액에는 특이하게도 ‘해사(海士)’, ‘김성근인(金聲根印)’이라는 2과의 방인 도서를 액판 좌, 우측에 나누어 찍었습니다.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는 두 번에 걸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는데 이 편액의 글씨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이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쯤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편액의 글씨는 준일(俊逸)한 필치의 행서로 점획의 비수(肥瘦)와 경중(輕重)을 조화롭게 썼습니다.
대흥사 해탈문에는 사천왕상이 없고 대신에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있습니다.
북쪽의 영암 월출산, 남쪽의 송지 달마산, 동쪽의 장흥 천관산, 서쪽의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사천왕상을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꽃 가지를 길게 쥐고 푸른 사자 등 위에 올라 탄 문수동자는 지혜를 상징하고,
흰 코끼리 등 위에 올라 탄 보현동자는 실천을 상징합니다.
반야교
부도전
낮은 담장 안에는 대흥사 13 대종사(大宗師)와 13 대강사(大講師) 등의 부도와 비를 포함해 대부분 조선 시대 후기에 건립된 여러 형태의 54기 부도와 27기 탑비가 다소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대흥사 일주문
일주문 뒤쪽 현판 "禪林敎海滿華道場(선림교해만화도장)"은 선종이 숲을 이루고 교종이 바다를 메우니 모두가 어우러진 도량이라는 뜻입니다.현판은 운암 조용민의 글씨이고,. 행서와 초서의 명필이라고 합니다.
일주문
"頭輪山大興寺(두륜산대흥사)" 현판 글씨는 여초 김응현의 글씨입니다.
장승
대흥사 일주문 앞에 금귀대장(禁鬼大將)과 수조대장(受詔大將)이 세워져 있습니다.
사찰을 수호하는 장승으로, 나주 불회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하원당장군과 주장군과 성격이 유사합니다.
유선여관
카페 유선으로 변했습니다.
물소리길의 삼나무숲
일주문
대흥사 오르는 길에 두륜산 대둔사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새로 세워져 있습니다.
"頭崙山大芚寺(두륜산대둔사)"라는 현판은 강암 송성용의 글씨 입니다.
원래 사찰명이 대둔사(大芚寺)였기 때문에 산 이름도 대둔산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절 이름이 대흥사(大興寺)로 바뀌자 산 이름도 대흥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편찬한 대둔사지(大芚寺誌)에 백두산의 두(頭)와 중국 곤륜산의 륜(輪)을 따서 두륜산이라고 했다고 소개하면서 지금은 두륜산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대흥사 불교문화유산 안내소
장춘1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