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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張錫南)
1965년 ~ 인천광역시 덕적도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 인하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
현재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교수(2003~)로 재직
신서정파
수상
1992년 제11회 「김수영문학상」
1999년 제44회 「현대문학상」
2010년 제10회 「미당문학상」
2012년 제23회 「김달진문학상」
2013년 제28회 「상화시인상」
2018년 제18회 「지훈문학상」
2018년 제28회 「편운문학상」
《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 1991)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지성사, 1995)
《젖은 눈》(솔, 1998) 개정판 (문학동네, 2009)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 2001)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2005)
《뺨에 서쪽을 빛내다》(창작과비평사, 2010)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2012)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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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심장(意味深長) / 장석남
돌 위에도 물을 부으면
그대로 의미심장
내게 온 소용돌이들이
코스모스로 피어 흔들리는
병후(病後) 문밖에
말뚝이 서넛 와 있다
오늘 밤 내 머리맡에는
티눈 같은 웃음들이 모일 것 같다
길 잃은 웃음들이, 막차 놓친 웃음들이
갈데없이 모일 것 같다
찔레 넝쿨도 바람 불면
그대로 의미심장
하문(下門) 1 / 장석남
눈 오는 날엔/ 말을 트자
눈 속 / 드문드문 / 봄동 배추 / 그렇게 / 말을 트자
눈이 녹으면서 다시/ 서로는 / 말을 높이자
그리하면 / 나는 / 살이 없으리
// 그리하면 너도 / 살이 없으리
// 기름진 것 먹지 말고 / 말을 트자
가난을 모시고 / 장석남
오늘 나는 가난해야겠다
그러나 가난이 어디 있기나 한가
그저 황혼의 전봇대 그림자가 길고 길 뿐
사납던 이웃집 개도 오늘 하루는 얌전했을 뿐
우연히 생겨난 담 밑 아주까리가
성년이 되니 열매를 맺었다
실하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어디 또 그런 데 가서 그 아들 손주가 되겠다
거짓마저도 용서할
맑고 호젓한 가계(家系)
오늘도 드물고 드문 가난을 모신,
때 까만 메밀껍질 베개의
서걱임
수(壽)와 복(福)의
서걱임
가을 저녁의 말 / 장석남
나뭇잎은 물든다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군불 때며 돌아보니 제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꾸물대는 닭들
윽박질린 달이여 // 달이 떠서 어느 집을 쳐부수는 것을 보았다
주소를 적어 접시에 담아 선반에 올려놓고
//불을 때고 등을 지지고/ 배를 지지고 걸게 혼잣말하며/ 어둠을 지졌다
장마 때 쌓은 국방색 모래 자루들 / 우두커니 삭고/ 모래는 두리번대며 흘러나온다
모래여/ 모래여 / 게으른 평화여
말벌들 잉잉대던 유리창에 낮은 자고/ 대신 뭇 별자리들 잉잉대는데
횃대에서 푸드덕이다 떨어지는 닭, /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나뭇잎은 물든다
호 수 / 장석남
단추를 한 다석 개쯤 열면 돼요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리고
근심처럼 흐르는 안개를 젖히면 그만이에요
갈대나 물결 / 새나 바람 / 평수 많은 밤
어디서 오는지
아주 커다란 보석이죠? / 익숙한 별자리가 무어예요? / 가령
웃거나 울던 하늘 기슭 같은 것 말이에요 / 그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해요
단추를 한 다섯쯤 풀면 / 지나던 매아리가 멈춘 듯 / 어디서 왔는지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 그 호수를 찾는 일이
불 임 / 장석나
한 남자가 골목을 나서자
라일락이 피었습니다
향기가 둥글게 굴러갑니다
골목은 한 남자를 뱉어내고
자물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구름 그림자가 자물쇠를 더듬어보다가 갑니다
하늘이 몇 잎으로 나뉘어 떨었습니다
중 년 / 장석남
복숭아는 분홍을 한 필
제 발들 둘레에 펼치었는데
마당은 지글거리며 끓는데
하산(下山)한 우리는 된 그늘을 두어 필씩 펼쳐놓고서
먹던 물 대접 뿌려서 마당귀 돌멩이들 웃겨놓고서
민둥산을 이루었네
저물녘
- 모과의 일
장석남
저물면 아무도 없는 데로 가자
가도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고요의 눈망울 속에 묻어둔
보석의 살들 – 이마 눈 코
깨물던 어깨,
점이 번진 젖, 따뜻한 꽃까지 다 이루어서
잠시 골라 앉은 바윗돌아 좀 무겁느냐?
그렇게 청매빛으로다가 저문다
결국 모과는 상해버렸다
옥수수밭의 살림 / 장석남
옥수수밭가에 와 살고부터
나는 지금 옥수수밭가에 살고 있구나 생각했다
옥수수밭의 수런거림과 두근거리는 살림을 살피고부터
나도 저 옥수수밭의 살림이구나 생각했다
폭풍우가 검은 스크럼으로 덮지는 여름밤
조용히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그리고
사랑이 없던 때도 생각했다
이 옥수수밭을 떠나 살고부터
이 옥수수밭을 생각할 것이다
그때는 옥수수밭 사이로 반딧불이들도 날을 것이다
허밍처럼 눈시울 속을 날을 것이다
물미역 씻던 손 / 장석남
한밤
물미역 씻는 소리는
어느 푸른 동공(瞳孔)을 돌아나온 메아리 같네
간장에 설탕을 넣고 젓는 소리는 또
그 메아리를 따라나온 젖먹이 같네
한밤에 찬장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를 아는가?
밥 위에 내려앉은 백열들 불빛을 아는가?
울음 세 개 간직한
물미역 씻던 손
낮은 목소리 / 장석남
더 작은 목소리로
더 낮은 목소리로, 안 들려
더 작은 목소리로, 안 들려, 들리질 않아
더 작은 목소리로 말해줘
라일락 같은 소리로
모래 같은 소리로
풀잎으로 풀잎으로
모래로 모래로
바가지로 바가지로
숟가락으로 말해줘
더 작은 목소리로 말해줘
내 사랑, 더 낮은 소리로 말해줘
나의 귀는 좁고
나의 감정은 좁고
나의 꿈은 옹색해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너의 목소린 너무 크고 크다
더더 낮고 작은 목소리로 들려줘
저 폭포와 같은 소리로
천둥으로,
그 소리로
멧새가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 장석남
내 작은 열예닐곱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이제 겨우 막 첫꽃 피는 오이넝쿨만한 여학생에게 마음 닷마지기 땅을 빼앗기어 허둥거리며 다닌 적이 있었다.
어쩌다 말도 없이 그앨 만나면 내 안에 작대기로 버티어놓은 허공이 바르르르르 떨리곤 하였는데
서른 넘어 이곳 한적한, 한적한 곳에 와서 그래도 차분해진 시선을 한 올씩 가다듬고 있는데 눈길 곁으로 포르르르르르 멧새가 날았다.
이마 위로, 외따로 뻗은, 멧새가 앉았다 간 저,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차마 아주 멈추기는 싫어 끝내는 자기 속으로 불러들여 흔들리는 저것이 그때의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
외따로 뻗어서 가늘디가늘은, 지금도 여전히 가늘게 흔들리어 가끔 만나지는 가슴 밝은 여자들에게는 한없이 휘어지고 싶은 저 저 저 저 심사가 여전히 내 마음은 아닐까.
아주 꺾어지진 않은 만큼만 바람아,
이 위에 앉아라.
어디까지 가는 바람이냐.
영혼은 저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가늘게 떨어서 바람아
어여 이 위에 앉아라.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장석남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 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 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 가운데다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아니, 여러 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뺨의 도둑 / 장석남
나는 그녀의 분홍 뺨에 난 창을 열고 손을 넣어 자물쇠를 풀고 땅거미와 함께 들어가 가슴을 훔치고 심장을 훔치고 허벅지와 도톰한 아랫배를 훔치고 불두덩을 훔치고 간과 허파를 훔쳤다 허나 날이 새는데도 너무 많이 훔치는 바람에 그만 다 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엔 그녀가 나의 붉은 뺨을 열고 들어왔다 봄비처럼 그녀의 손이 쓰윽 들어왔다 나는 두 다리가 모두 풀려 연못물이 되어 그녀의 뺨이나 비추며 고요히 고요히 파문을 기다렸다
옛 노트에서 / 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쫓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배를 밀며 /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득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드는 배여
번 짐 /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희 밝힌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 장석남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떼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
2
누군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 너무 뻑뻑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무도 없는데
아궁이 앞이 환하다
시감상 최형심
찌르라기는 잠을 자기 위해 나무에 앉기 전에 집단으로 춤을 추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봄날, 아직 해가 환한 대낮인데 난데없이 찌르라기 떼가 시끄럽게 울어댑니다. 화자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그는 새 떼를 바라보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화자는 찌르라기를 저승사자이자 동시에 고단한 삶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줄 구원자로 보는 듯합니다. 고단한 일상의 삶에 갇혀 세상 밖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가련한 존재…… 가슴 아프지만, 이 땅에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https://naver.me/xKEcaJtl
[조용호의 문학공간] "그들의 왕이 쫓겨난 것은 오래전 일이다"
그렇지 않고는 삶 내내 앓아온 그리움이 꼭 그 노을을 닮았을 리가 없습니다/ 찬란히도 타들어가며 흐르던 그 노을을 닮았을 리가 없습니다부모와 형제들은 모두 육지로 떠나고 할머니와 섬에
m.kpinews.kr
KPI뉴스
2025-02-10 08:42
[조용호의 문학공간] "그들의 왕이 쫓겨난 것은 오래전 일이다"
8년 만에 펴낸 장석남 새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
전통 서정시에서 '벼락 같은' 서정시로 나아가는
초기의 현실 고민으로 돌아와 더 깊어지고 신랄한
완숙한 시편들이 주는 감동과 현실을 돌아보는 전율
그렇지 않고는 삶 내내 앓아온 그리움이 꼭 그 노을을 닮았을 리가 없습니다/ 찬란히도 타들어가며 흐르던 그 노을을 닮았을 리가 없습니다
부모와 형제들은 모두 육지로 떠나고 할머니와 섬에 남아 노을을 바라보던 소년 시절을 시인은 지나왔다. 그는 "대여섯 살 때부터 집 뒤 언덕에서 날마다 보아왔던 노을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늘의 한때만은 아니었던 듯" 하다면서 "진홍과 보라가 뒤섞여 어디론가 고요히 흘러가기도 하고 타들어가기도 하던 그 빛깔들의 찬란한 운행이 저편 어딘가에는 여전히" 있었다고 쓴다.
▲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1991) 이후 9번째 시집을 내면서 '망명이 끝났다'는 장석남 시인. 그가 이번 시집에서 지향하는 새로운 '서정시'는 벼락처럼 순간의 진실을 비추는 것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장석남 시인이 8년 만에 내놓은 새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창비)에 수록한 '노을'이다. 노을에 깃든 '삶 내내 앓아온 그리움'의 서정은 9번째 펴낸 이번 시집에서 그 빛깔이 보다 깊어지면서 새로운 서정으로 나아간다. 오래 노래해온 자연의 서정은 익을 대로 익었다.
꽃나무는 심어놓고/ 잊었더니만// 어느 날/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꽃나무여/ 첫 꽃 핀 꽃사과여/ 그 꽃의 중량을 가늠해보니/ 세상에 와서 처음 업어보는 연인의 무게만 하겠네/ 상기된 미소, 그 무게만 하겠네/ 숨이 막히도록 무거운 피어남들//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꽃나무여/ 꽃 떨구고 하늘로 솟을라나?/ 혼이 난 김에 아주 솟아 갈라나?/ 숭굴숭굴한 진자줏빛 무게여// 꽃의 무게로 일생이 휘는 일이여
_ '꽃이 무거운 꽃나무여' 전문
'꽃의 무게로 일생이 휘는 일'이라니! '대숲 아침 해'는 "굶주린 호랑이처럼 쏟아져 들어와/ 내 넘치는 불면의 살들을 내주니/ 서둘러 먹고는 입술을 핥으며/ 남쪽으로 돌아가"고, "또 한번 창에 들이닥치는/ 허기진 눈빛 있으면/ 서로를 핥으며/ 어둠을 덮으리"라. 물에는 노래를 심는다.
물에 노래를 심다니요/ 그것도 지금 노래가 아니라 훗날/ 하지 때의 그 노래를 심다니요/ 매일 아비를 잃는, 그믐마다 어미를 잃는/ 울음 아닌 노래를 심다니요// 물에서 피는 꽃이라니요/ 꽃에서 나는 노래라니요// 쌀농사가 아닌 노래 농사라니요/ 매년 풍년의 노래 농사라니요
_ '연꽃 심을 때' 전문
전통적인 서정시의 기준에서 보면 자연 풍광의 정수를 이만큼 숙성시킨 경지에 올려놓기도 쉽지 않은데, 그는 자꾸만 돌아보며 '가면'을 쓴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본다.
오늘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 족해/ 중얼거리며 거울을 보네/ 분 뚜껑을 열고 조용히/ 나를 지우기 시작하네// 오늘 하루/ 걷고 먹고/ 말한 모든 것이/ 나를 지워가던 일// 귀갓길에서 모란의 몰락을 보았네// 오늘은 아주 조금 나를 걷어낸 것으로 족해/ 거울 앞에서/ 얼룩진 부분부터 지우네/ 저녁은 지워지지 않네
_ '분장실에서' 전문
지난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를 낼 때도 "운명적으로 더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았고 그런 장면들이 더 많은 게 이전과 다른 점"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번 시집이야말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대학로 카페에서 만난 시인은 이제 조금 더 노골적으로 자신을 응시하게 된 거라고 말한다.
"그 전보다는 그렇다. 그 전에는 뺨에 서쪽을 빛내면서 노을에 비친 나의 부끄러움이나 꽃을 매개로 이야기했는데, 이제 내가 가면적 존재라는 사실을 더 노골적으로 직시하려고 한 거다. 이 세계와 진짜 타협하면서 적응하면서 산다는 게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삶인데, 그래서 분장을 지운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제 인간이 되는 것으로 족해, 뭐 이런 얘기들도 쓰고 그런 건데, 그걸 더 인식한 거다. 우리 모두 가면 쓰고 사는데 가면을 벗으면 나을까 뭐 이런…"
이런 준열한 자아 성찰은 그동안 써온 서정시에도 관철된다. 이른바 서정시라는 것이 정말로 진솔한 감정을 담아내는 도구인지, 아니면 감정을 가공하고 왜곡하는 또다른 가면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문학적 가면'을 벗어던진, 그가 생각하는 진짜 '서정시'란 어떤 것일까.
서정시를 쓰십니까?/ 아니요 벼락을 씁니다/ 벼락 맞을 짓이라는 말을 들어봤나요?/ 벼락 맞을 짓을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벼락에 고하는 글을 씁니다// 벼락에 고하는 글/ 화평한 서정시를 쓰고 싶습니다/ 위선과 비열, 몰염치와 야비, 교활하기까지 한/ 그 가면들을 순간의 빛 속에 가두고/ 때리는// 서정시를 쓰십니까?/ 아니요 '서정시'를 씁니다/ 벼락같은 _ '서정시를 쓰십니까? 전문
그는 이 시편 제목 아래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일부를 제사(題詞)로 부기해놓았다. 사회적 혼란과 폭력 속에서 전통적인 서정시를 쓰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토로한 것인데, 장석남이 브레히트를 인용한 이유는 근년의 한국 사회 안팎을 돌아보면 자명해진다.
"벼락이 칠 때 번갯불에 순간 비쳐지는 모습이 환하게 가둬버리는 진실, 그것이 서정시일 것이다. 과욕이겠지만, 불가능하겠지만 그런 서정시를 쓰고 싶다. 그 벼락불이 물리적으로 진짜 모습을 계속 비출 수는 없겠지만 순간이라도 진짜 모습을 보게 한다."
그는 그동안에도 이런 서정시를 지향해왔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비극의 시대에 고통받았던 브레히트나 두보, 성삼문, 기형도 같은 이들을 떠올리면서 보다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새로운 '서정시'를 고민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물들은 4부에 집결돼 있다.
눈이 오면/ 눈만 오지 않아/ 푸르스름한 메아리 같은 것이 눈발 저편 허공에는 맴돌며 떠 있지// 조광조는 파랑/ 파랑 소나무/ 아직도 파랑/ 소나무// 눈 오는 날엔 더 이쁘고/ 말이 있고 문장이 얹혀 쌓이지 희고 또/ 조용하고/ 선천적으로 정중하지/ 눈이 오다 그치면/ 눈만 그친 것은 아니야/ 붉은 메아리가 하늘을 덮은 적이 있거든/ 소나무는 우뚝, 지나던/ 하늘의 말(馬)처럼 서 있지// 좀스러운 인간들 이야기는 없지
_ '조광조(趙光祖)' 전문
조선 중종 시대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정치 개혁을 시도한 상징적인 조광조(1482~1519)를 아예 제목으로 내세운 시편을 쓴 배경은 오래전 개혁가와 성씨가 같은 인물의 수난 때문이었다. 개혁가이지만 시대를 이기지 못해 훈구파에게 억울하게 당한 그이였고 순순한 신념을 가졌지만 허무하게 사라진 인물이었는데, 시대를 넘어 반복되어 희생되는 존재들을 떠올렸다고 했다. '서울, 2023, 봄'은 봄볕마저 '유골함의 온기' 같은 것이었다고 기록한 그는 작금의 법과 그 법으로 마술을 부리는 기득권자들의 놀이판을 들여다보며 신랄하게 풍자하는 '서정시'로 거듭 나아간다.
나는 법이에요/ 음흉하죠/ 하나 늘 미소한 미소를 띠죠/ 여러개예요 미소도/ 가면이죠/ 때로는 담벼락에 붙어 어렵게 살 때도 있었지만/ 귀나 코에 걸려 있을 때 편하죠/ 나는 모질고 가혹해요/ 잔머리 좋은 종들이 있거든요/ …/ 나는 만인 앞에 평등해요 헤헤/ 음흉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죠/ 원칙이 있지만 아주 가끔만 필요하죠/ …/ 나는 물처럼 맑고 평등하다고 말하죠/ 유죄도 무죄도 다 나의 밥이죠/ 너무 바빠요 너무 불러대니 쉴 틈이 없죠/ 나는 법이에요/ 양심 같은 건 우습죠 이득 앞에서/ 그깟것 금방들 버려요 시류에 어긋난 소리죠
_ '법의 자서전' 부분
▲ 장석남은 "나는 살아왔다 나는 살았다/ 살고 있고 얼마간 더 살 것이다"면서 "거짓말/ 그러나 내가 사랑할 거짓말'이라고 표제시에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이른바 '법 기술자'들에게 법이란 절대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는 마술을 부리는 도구인 셈이다. 장석남은 그 법이 운용되는 재판정을 '마술 극장'에 비유한다.
지난 공연 대본 중 하나가 유출되었다 공동창작이었는데 단역 겸 참여 작가 중 일부가 이탈했다 그럼에도 공연은 그대로 진행되어 흥행했다 비극의 주인공은 재상을 지낸 거물이었다 늘 그렇듯 공생하던 흥행 광고업자들의 힘이 컸다 이 극장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 각본 없이 어느 날 무대 위로 끌려 나온다는 점이다 (…) 드라마의 백미는 대반전이지만 이 극에서 그런 일은 없다 대본가와 공연자들이 모두 같은 먹이사슬 안에 있기 때문이다 _ '마술극장2-압구정 옛주인 같이'부분
대본가란 검사들이고, 그들이 작성한 공소장이 대본인 셈인데 나중에 진실이 판명된다 해도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그는 써나간다. '역사에서 반전을 이루겠지만 먼 훗날의 역사 따위는 이 극장에서는 인기 대본가들의 야식용 냄비 받침일 뿐'이라는 것이다. '법과 권력의 연극'이 끝난 뒤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정에서 마술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장미 정원에 공연이 한창이다/ 대본 따위는 없다/ 장미가 관통해온 길을/ 저 마술 극장의 대본가들은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왕인 이해득실 전하가 쫓겨난 것은 오래전 일이다/ 마술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_ '마술 극장 3-장미 정원' 부분
https://naver.me/GoD4k6jq
망명한 봄이 돌아오는 소리, 눈부신 시의 미학적 성취 - 문학뉴스
[문학뉴스=백승 기자] 탁월한 언어 감각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서정시의 지평을 넓혀온 장석남 시인의 신작 시집 이 나왔다. 2025년 새해 창비시선의 출발을 알리는 첫번째 시집으로, 시인의 아홉
www.munhaknews.com
망명한 봄이 돌아오는 소리, 눈부신 시의 미학적 성취
장석남시인 아홉번째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 창비시선 512
탁월한 언어 감각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서정시의 지평을 넓혀온 장석남 시인의 신작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이 나왔다.
2025년 새해 창비시선의 출발을 알리는 첫번째 시집으로,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이다.
나는 살아왔다 나는 살았다
살고 있고 얼마간 더 살 것이다
거짓말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거짓말
나는 어느 날 사타구니가 뭉개졌고 해골바가지가 깨졌고
어깨가 쪼개졌고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누군가에게 구조되었다
거짓말, 사실적인……
그러나 내가 사랑한 거짓말
나는 그렇게 내가 사랑한 거짓말로
자서전을 꾸민다
―「내가 사랑한 거짓말」 부분
편운문학상·지훈상·우현예술상 수상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이후 8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오랜 정진을 통해 도달한 시경을 활달하게 전개하는 원숙함”과 깊고 투명한 철학적 사유가 빛나는 비범한 신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또 그의 시는 자연을 향한 진득한 응시가 자아와 본연의 인간에 대한 웅숭깊은 탐색으로 아득하게 이어진다.
덧붙여 냉철한 현실 인식이 담긴 정치시도 선보인다. 작금의 현실을 예견한 듯한 풍자와 알레고리가 서정에 바탕을 둔 시인의 고유한 개성과 정교하게 맞물려 독자들에게 벼락같은 울림을 선사하고 있는 것.
언덕
파란 눈썹과 같은 언덕
나는 언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무엇이든 그 언덕을 넘어서 왔거든
나는 언덕을 넘어오는 한 사람으로부터 나였으니까
그 한 사람을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지
그리하여 한번도 부르지 못하고
나는 그 언덕의 노래였으면 했지
주인이 없거든 노래는 갇히지 않지
그 언덕과 같지 노을 속에서
멀리 사랑이 보이지 붉게 타는 노을
사랑이 보이는 그 긴 언덕을 나는 사랑하지
―「언덕」 부분
자연과 교감하는 아름다운 서정의 풍경을 그려내는 장석남의 시는 무심의 경지에 이른 듯 보인다. “삼월 마지막 날이 사월 첫날을 맞아들이는 듯한 순전한”(「느티」) 마음이 피어나고, 아침 해가 “굶주린 호랑이처럼 쏟아져 들어”(「대숲 아침 해」)오는 고즈넉한 풍경 속에는 생명의 신운(神韻)이 생동한다.
간결한 언어로 수놓인 세밀한 풍경 속에는 시를 쓰기 시작한 이래로 시인이 쉼 없이 이어온 자문자답의 자취가 선명하게 스며 있다.
뿐인가. 시인의 시선에 담긴 풍경은 ‘물에 심은 노래’처럼 은은하고 아름답다. 시인은 삶과 시를 오가며 본연의 인간이 어떠한 모습인지를 진득하게 묻고 자연은 그런 시인의 질문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언덕」과 「느티」, 그리고 「노을」을 비롯한 1부의 시에는 오랜 사유 속에서 찬란하게 영글은 시인의 사유가 편편이 녹아 있다.
시인은 또 “살아온 내력의 울음 섞인 이야기”(「느티」)를 담담하게 노래한다. 낡은 책상 서랍에서 “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만 남은 아버지의 목도장을 발견한 시인은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목도장」)도록 애쓴 아버지의 고된 삶 앞에서 문득 울컥하고, 중학생 시절 아버지의 옷을 입어보다가 “왼쪽 안주머니 앞에 수놓인 노란 아버지 한자(漢字) 이름이/심장에 닿아 따끔거렸”던 기억을 소환한다.
이어 지금-여기의 삶을 되돌아보며 “희미한 불씨 같은”(「아버지 옷」) 추억에 젖는다. 세대를 아우르는 기억과 해후하며 삶의 이력을 곰곰이 되짚는 이러한 시편들에서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순간을 감각적으로 포착해낸 시인의 미학적 성취가 눈부시다.
시인 박연준은 추천의 글에서 “장석남의 시는 두어걸음 떨어져 읽으면 ‘훤’하고 ‘환’하여 양기로 충만한 꽃나무 같다. 그 잘생김에 마음이 끌려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번엔 온통 서쪽이다. 무엇이든 기울어지는 곳, 노을빛이 전부인 곳, 캄캄한 그림자가 “모란의 몰락”을 지켜보는 곳. 안팎의 다름이 흑백의 대비처럼 절묘하여 읽는 사람은 ‘저쪽’이 되었다가 이윽고 ‘이쪽’이 된다“고 말한다. 이어 ”시 속의 돌, 꽃, 춤, 선(線)을 따라가다보면 “언덕을 넘어오는 한 사람”이 보인다. 오래된 얼굴이나 아직 부끄러움이 떠나지 않은 얼굴이다“고 장석남 시를 평한다.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인 시인 장석남은 1965년 인천에서 출생했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뺨에 서쪽을 빛내다』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를 냈다.
산문집으로 『물의 정거장』 『물 긷는 소리』 『시의 정거장』 『사랑하는 것은 모두 멀리 있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