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칼빈의 믿음론, 기독교강요 제3권 2장 7(1559년 라틴어 최종판 완역, 문병호 옮김, PP.52-54)
7.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善)하심을 아는 지식(知識)에 기초(基礎)한 믿음
그러나 모든 하나님의 음성(音聲)이 사람의 마음을 경각(警覺)시켜 믿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으므로,
우리는 말씀 가운데서 믿음에 고유(固有)하게 관계(關係)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전히 찾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였다.
가인에게 하신 말씀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였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들로는 믿음을 세울 수 없을 뿐더러 아주 부적합하여 단지 믿음을 흔들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믿음이 언제, 무엇을,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그것의 직분은 하나님의 진리를 인준하는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의지하고 쉼을 누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믿음이 발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우리의 양심(良心)이 오직 분개와 보복만을 헤아린다면, 어떻게 그것이 떨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것이 두려워하는 하나님을 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을 찾아야 하며 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아직 믿음에 대한 완전한 정의(定義)에 이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만 헤아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간혹 슬픔의 전령(傳令)과 공포의 사자(使者)가 되는
하나님의 뜻의 자리를 그의 선하심과 자비로 대체시킨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런 점에서 분명 우리는 믿음의 본래적 특성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찾고자 이끌리는 때는 우리의 구원이 그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배운 후이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확정되는 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그 자신의 돌봄과 열심에 있다고 선포하실 때이다.
우리에게 은혜의 약속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약속을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가 관대(寬大)하시다는 증거를 얻는다.
이 외에는 우리가 그에게 접근할 요량이 없다.
사람의 마음은 오직 은혜(恩惠) 위에서만 쉼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시편은 도처에서 이 두 가지 곧 자비(慈悲)와 진리(眞理)를, 그것들이 서로 결합(結合)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로 묶는다(시 89:14, 24; 92:2; 98:3; 100:5; 108:4; 115:1등).
만약 하나님이 인자(仁慈)하게 우리를 그 자신에게로 이끌지 아니하시면 그가 진실하시다고 우리가 안다 한들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다음과 같은 자기의 음성으로써 자기의 자비(慈悲)를 우리에게 베풀지 아니하시면 그 자비를 우리가 포용한다 한들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주의 진리와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주의 인자와 진리를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보호하소서"(적용. 시 40:10-11).
또 다른 곳에서는,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구름에 사무쳤으며 "(적용. 시 36:5),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仁慈)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眞實)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7:2),
“내가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진리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을 찬양하오리니"(적용 시 138:2)라고 전한다.
나는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읽히는, 하나님은 자애로우시고 자기의 약속에 신실하시다는 선지자들의 말씀은 넘어가고자 한다.
만약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증언하시며 우리를 초청하셔서 자기의 뜻이 의심할 바 없고 모호하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 주지 아니하시는데도
우리가 섣불리 하나님은 관대(寬大)하신 분이라고 결론에 이르게 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유일(唯一)한 보증(保證)이시다.
만약 그가 계시지 아니하신다면 증오와 진노의 표징들이 위로나 아래로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의 선(善)하심을 아는 지식(知識)은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여 의지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과 혼합된 이해는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한 이해는 견고한 일관성이 결여되고 자체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신은 너무나 산란해져 그 자체로 눈이 멀고 어둠에 휩싸여 있으므로, 뚫고 올라가 하나님의 뜻에 이를 수 없다.
또한 그 마음은 그 자체로 끝없는 머뭇거림에 동요(動搖)하고 있으므로, 그 감화(感化)에 안전(安全)히 거하여 머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 완전한 믿음을 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데로부터 우리의 정신이 조명되는 동시에 우리의 마음도 강화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믿음에 대한 올바른 정의(正義)는 다음과 같이 칭해진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善)하심에 대한 견고(堅固)하고 확실(確實)한 지식(知識)이다.
이 지식(知識)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약속(約束)의 진리에 기초하는 것으로서,77)
성령(聖靈)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啓示)되고 우리의 심장(心臟)에 새겨진다.78)
77) Cf. Comm.. Jn. 6:40 (CO 47.148):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부터 믿음이 흘러나온다" (fidic ca lunat notitia fluere).
78) 이 정의(定義)는 믿음의 삼위일체론적 지평을 함의하고 있다. 칼빈은 제1차 신앙교육에서 다음과 같이 성부, 성자, 성령과 관련하여 믿음의 특성을 제시한다. "믿음은 '경이롭고 고유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믿음의 영원한 대상'이시다. 믿음은 성령의 깨우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