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5장 천하 기재 (3)
그 무렵, 후대에 머물며 치중을 관리하고 있던 관중(管仲)은 싸움 결과가 궁금했다. 막 척후병을 내어 알아보려는데 노장공이 제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비록 자신을 조롱하고 박대한 노장공이었지만, 그래도 공자 규(糾)를 돌보고 있는 후원자가 아닌가.
"노장공(魯莊公)을 도와야겠다.!"
관중(管仲)은 병차 수십 대를 거느리고 건시 들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그는 달려가는 도중에 병사 복장을 하고 초라하게 도망해오는 노장공과 장수 진자를 만났다. 병차와 군사를 점호해보니 열 명 중 일곱을 잃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피해가 훨씬 컸다.
관중(管仲)은 길게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노나라 군사는 예기가 꺾였다. 더 이상 싸우는 것은 더 큰 피해만 자초할 뿐이다."
노장공도 더 싸울 마음이 일지 않았다. 그는 전군에 명을 내렸다.
"영채를 거두어 본국으로 귀환하라!"
노장공(魯莊公)을 비롯한 패잔병들이 건시 들판을 벗어났을 때였다.
별안간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일대 병차가 있었다. 제군(齊軍) 장수 성보와 동곽아가 이끄는 별동대였다. 그들은 건시 들판을 우회하여 노나라로 이어지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다가 초라한 모습으로 귀환하고 있는 노군(魯軍)을 발견하고 일시에 병차를 몰아 덮쳐든 것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제군의 공격을 받게 된 노장공(魯莊公)은 절망하여 탄식했다.
"아아,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그때 뒤를 따르던 좌군대장 진자가 방천극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주공께서는 속히 달아나십시오. 신은 이 곳에서 죽겠습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병차를 몰아 동곽아와 성보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모한 돌진이었으나 죽기를 각오했음인지 그 기세가 엄청났다. 동곽아와 성보는 진자의 그러한 돌진에 잠시 주춤했다.
"지금이다!"
관중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노장공을 호위하면서 재빨리 병차를 왼편으로 틀었다. 소홀 또한 공자 규(糾)를 보호하며 그 뒤를 따랐다. 필사적인 도주가 시작되었다.
"노장공(魯莊公)을 잡아라."
제군이 일제히 그 뒤를 쫓았다.
노장공과 규는 다급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홍포를 입은 젊은 장수 하나가 맨 앞에 서서 노장공의 뒤를 바싹 추격해왔다.
"활을 쏘십시오."
관중(管仲)이 외쳤다.
노장공(魯莊公)은 정신을 차리고 들고 있던 활을 들어 뒤쫓아오는 홍포 장수를 향해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홍포 장수의 이마에 가서 꽂혔다. 단말마 비명과 함께 병차에서 떨어져 길가로 굴러떨어졌다. 그래도 제군(齊軍)의 추격은 늦춰지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 잡혀 포로가 될 판이었다.
관중(管仲)은 안되겠다싶어 한가지 꾀를 내었다.
그는 노장공 곁을 달리면서 노나라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모든 군사는 치중과 무기와 갑옷과 말을 모조리 길에 버려라!"
노군(魯軍)은 영문도 모르고 관중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뛰쫓던 제나라 군사들 사이에 일대 혼란이 일었다. 길가에 버려진 노군의 치중과 무기와 갑옷 들을 줍느라 서로 밀치고 당기고 하는 것이었다.
그 틈을 이용해 노장공(魯莊公)과 공자 규, 관중, 소홀 등은 제군의 추격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동곽아와 성보를 상대로 싸우던 진자는 끝내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노장공(魯莊公)은 이번 건시 전투에서 좌우군 대장을 모두 잃었다. 뿐만 아니라 문수 상류에 있는 문양 땅까지 빼앗기는 대참패를 당했다. 노(魯)나라 건국 이래 최대의 치욕이었다. 공자 규(糾)를 위해 군사를 일으킨 대가치고는 그 손실이 너무나 컸다.
이때의 패배에 대해 후세의 한 사가는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노장공(魯莊公)이 건시 싸움에서 패배한 것은 당연하다. 그에게 공자 규(糾)는 원수의 동생인데, 그는 어찌하여 군사까지 일으켜 도우려했단 말인가. 만일 노장공이 아버지 노환공을 죽인 원수를 생각했다면 차라리 규보다는 공손무지를 도왔어야 했다.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한편, 단 한 번의 싸움에서 노나라 기세를 완전히 눌러버린 제환공(齊桓公)은 의기양양했다.
- 이로써 나의 군위(君位)는 확고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공자 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당시의 상식대로라면 군위 다툼에서의 패배자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제환공(齊桓公)은 이에 대해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비록 임금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인 경쟁자이긴 했지만, 두 사람의 우애는 나쁜 편이 아니었다.
'국내에 머물러 있다면 모를까, 노(魯)나라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환공의 보좌관 출신인 포숙(鮑叔)의 생각은 달랐다.
"두 영웅은 나란히 설 수 없는 법입니다. 규 공자가 노나라에 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규(糾) 공자가 살아 있다는 것은 주공뿐만 아니라 우리 제(齊)나라에게까지도 내내 근심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은가?"
제환공(齊桓公)의 물음에 포숙은 아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지금 곧 사람을 보내어 규 공자를 죽이라고 명하십시오."
"노장공(魯莊公)이 나의 말을 들을까?"
"노나라는 패전국입니다. 규 공자에 관한 한 주공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노나라가 말을 듣지 않을 것이 염려되신다면 신이 3군(三軍)을 거느리고 노나라 국경까지 가서 위압하겠습니다. 그러면 노장공은 두려워서 반드시 규를 죽일 것입니다."
포숙(鮑叔)은 제환공을 임금 자리에 오르게 한 일등 공로자였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제환공은 공자시절부터 포숙을 스승처럼 믿고 따랐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과인은 모든 백성들과 함께 그대 말을 좇을 뿐이오."
포숙은 물러나기에 앞서 다시 제환공에게 말했다.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규(糾) 공자를 모시고 있는 관중과 소홀을 죽이지 말고 우리나라로 데려 오십시오."
"그것이 무슨 어려운 일이겠소. 그렇지 않아도 그를 산 채로 데려와 내 친히 갈기갈기 찢어버리려 했던 참이었소."
제환공은 관중 이름이 나오자 예전에 화살을 맞았던 일을 생각하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포숙(鮑叔)은 고개를 저었다.
"신이 관중을 데려오려는 것은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관중을 살리다니? 그대는 관중이 나를 활로 쏘아 죽이려 했던 사실을 잊었단 말이오?"
"관중(管仲)이 주공을 활로 쏘았던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신이 주공을 모실 수 있게 된 것 도한 관중 덕분임을 주공께서는 아시는지요?"
"그대가 나를 모실 수 있게 된 것이 관중 덕분이라니요?"
"지난날의 일입니다. 제희공께서 신을 주공의 보좌관에 임명하셨을 때 신은 불만을 품고 관직에서 물러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관중이 주공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장차 제나라를 구할 사람은 공자 소백(召白)뿐이다. 그러니 그대는 반드시 소백 공자를 모셔야 한다'라고 신을 설득하였습니다. 일이 이러하거늘 오늘날 신이 주공을 모시게 된 것이 어찌 관중 덕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주공께서는 부디 관중과 소홀을 용서하시어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포숙(鮑叔)의 이같은 말에 제환공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오? 나는 관중이 내게 그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소. 좋소. 그대의 청을 들어줄 터이니, 관중과 소홀을 제나라로 데려오시오."
포숙(鮑叔)은 크게 기뻐하며 병차와 군사를 거느리고 기세등등하게 문양땅으로 진군해갔다.
문양에 이르러 포숙(鮑叔)은 당장에라도 쳐들어갈 듯 병차를 전투 대형으로 배치했다. 그런 후에 공손습붕을 불러 제환공의 서신을 내주며 말했다.
"이것을 노장공에게 전하되 반드시 공자 규(糾)의 목을 확인하시오. 그러나 관중은 천하의 기재(奇才)외다. 내 장차 주공께 관중을 천거하여 쓸 작정이니 그대는 어떻게 해서라도 관중이 죽지 않도록 하여 본국으로 데려오시오."
공손습붕이 물었다.
"관중(管仲)이 규 공자를 따라 자결하거나 노장공이 자기 손으로 관중을 죽이겠다고 하면 그땐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포숙(鮑叔)이 대답했다.
"관중은 결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 것이오. 만일 노장공이 관중을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하면, 그땐 관중이 활을 쏘아 우리 주공의 허리띠 갈고리를 맞추었다는 것을 강조하시오. 그러면 노장공은 우리 주공이 관중을 직접 죽이려 하는 줄로 알고 순순히 내줄 것이오."
공손습붕은 제희공의 아버지 제장공(齊莊公)의 증손자이다.
그래서 공손(公孫)이란 말이 앞에 붙어 있는 것이다. 그는 공족으로서 국정에 참여한 지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학식이 높고 사람 보는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조당에 들기 전부터 관중의 능력과 인품에 매료되었고, 그와 가까이 사귀려고 애를 써왔다. 따라서 공손습붕 역시 관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포숙이 관중을 살려 제환공에게 천거하려는 마음이 있음을 알고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한 가지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무엇이오?"
"듣자하니 노나라 대부 시백은 지헤로운 사람인 모양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시백이 관중의 재능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습니다. 만일 그가 관중(管仲)을 설득해서 노나라 국정을 맡기려 든다면 그때는 참으로 남감한 일이 될 것입니다."
포숙(鮑叔)은 놀라는 얼굴로 공손습붕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대의 안목이 보통이 아니구려. 사실 나도 그 점을 가장 염려했었소. 하지만 나는 관중을 믿소. 그는 결코 제나라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오. 또한 시백이 관중을 천거한다 하더라도 노장공은 결코 관중을 쓰지 않을 것이 틀림없소. 만일 노장공이 관중의 기량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이번 건시 전투에서 그의 계책을 중히 썼을 것이오. 하지만 노장공(魯莊公)은 관중을 후대로 빼돌려 치중을 맡기는 어리석음을 범했소. 이것은 노장공이 관중의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요.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오. 그는 결코 관중을 쓰지 않을 것이오."
포숙(鮑叔)의 말에 공손습붕은 안심이 된다는 듯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포 대부의 통찰력은 대단합니다."
이렇게 감탄하고 나서 그는 제환공(齊桓公)의 서신을 들고 노나라 땅으로 들어갔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