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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혁명 당시 일본이 어떤 무기를 사용해서 동학농민군을 학살했는지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과 청군의 무기를 살펴보자.
조선 출병시 청국군이 인천이 아니라 아산에 상륙한 것은 출병의 목적이 조선의 남부지방에서 봉기한 동학의 진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홍장의 군대는 본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성장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의 실전경험은 열강의 정규군과의 전투가 아니라 농민반란군과 싸운 경험이 대부분이었다. 말하자면 치안유지군의 성격이 농후했고 현대적인 정규군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들이 조선에 올 때는 동학농민군이 자기들의 상대인 줄 알고 있었으며, 이들의 임무도 동학농민군의 진압과 토벌이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전주화약에 의해 동학란은 표면적으로는 해결된 상태였으며, 동학란은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청국과 일본이 패권을 다투는 전쟁으로 비화해 버렸다. 청국군의 상대도 자연 남쪽의 동학농민군에서 등 뒤의 한성에 진주한 일본군으로 바뀌었다.
농민군이 상대라면 청국군도 자신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의 적은 일본군이었다.
그것도 병력에서 청국군의 두 배였다.
이홍장도 전쟁에 서툰 사람이 아니었고, 전쟁의 대비에 태만하지도 않았다.
고승호의 증원병력이 도착하기만 했더라면 조선 내에서의 전력은 최소한 대등할 수 있었다. 병력은 여전히 적었겠지만 고승호로 보내려던 14문의 대포는 포병의 화력에서 청국군이 압도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증원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이홍장이 내릴 수 있는 지시는 ‘철수’뿐이었다. 그러나 제독 엽지초와 총병 섭사성은 해로에 의한 철수를 거부했다. 한번 싸워보고 육로로 평양을 간다 하더라도 결국 바닷길로 철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하는 생각이기도 했다.
진지를 점령하고 기다리고 있는 청국군의 코앞에 일본군이 모습을 나타낸 것은 7월 29일이었다. 일본군은 보병 4개 대대, 기병과 공병 4개 대대로 모두 8개 대대의 병력과 야포 8문을 가지고 공격을 개시했다.
기병이라고는 해도 당시 일본의 기병은 체격이 큰 아랍종이나 사라브렛 같은 기병용 군마가 도입되어 있지 않았고 몽고말도 아니었다. 다리가 작달막한 토종왜말을 역시 체구가 자그마한 일본인이 올라탄 미니 기병이었다. 그래도 선진외국 기병의 흉내를 내어 칼만큼은 니뽄도가 아닌 서양식 샤벨을 휘둘러댔다.
그러나 삼지창이나 청룡도를 든 청국의 기병보다는 신식군대의 냄새가 났다.
1880년(고종 17, 명치 13)에 개발된 총이라 13년식 소총이라고 한다.
양군의 비교에서 특히 차이가 크게 난 것은 바로 소총이었다.
일본은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고 정확하기로 유명한 무라타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선발대격인 오시마 여단은 18년식 단발이었지만 대청 선전포고 후에 본격적으로 조선에 상륙한 사단들에는 22년식 무라타 연발소총이 일부 장비되어 있었다.
훗날 일본군의 제식소총으로 오랫동안 사용된 38식의 원형이 되는 물건이다.
무라타 소총의 발명자인 무라타 쓰네요시(村田經芳)는 1838년생으로 싸스마번 출신으로 막부 시절에 이미 소총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사쓰바번의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다. 1875년 소령 때 세계 각국을 돌면서 소총과 그 생산 공장들을 돌아보고 온 후에 1880년 일본 최초로 근대적인 유저식(遊底式) 소총을 발명하였다.
이것이 바로 13년식 무라타 소총이라는 것으로 구경은 11mm에 길이는 129.4cm인 단발총이었다. 이 총은 출현 당시의 기준으로 세계 1류의 물건이었으나, 왜소한 일본인에게는 지나치게 무겁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것의 작동부와 약실을 개량해서 18년식 소총이 나오게 되었다.
이때 구경은 14.5mm로 확대되었고 길이는 137.5cm였지만 무게는 4kg로 13년식보다 오히려 약간 가벼워졌다.
18년식 무라타 소총이 개발되기 1년 전에 프랑스에서 무연화약(無煙火藥)이 발명되었고 그 2년 후부터 일본은 이것을 소총탄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포병회의연구실에서 국산화에도 성공하였다. 무연화약 이전에는 총의 발사시에 흰 연기가 쏟아져 나와 사수의 시야를 가렸고, 흑색화약에 함유된 유황이 총강 내에 쌓여 몇 발을 발사하고 나면 반드시 꼬질대로 총강내부를 청소해야만 했다.
이것이 연발소총을 만들지 못한 주된 이유였다.
무연화약이 발명되자 무라타는 바로 소총의 개량에 착수해서 메이지22년인 1889년에 마침내 연발소총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구경은 8mm, 길이는 122cm에 무게는 4.17kg였다.
급탄 방식은 공간식전상관탄창(槓杆式前床管彈倉)이라는 것으로 약실 하부에 긴 홈을 파고 그 속에 탄환을 재두었다가 격발시 걸개가 한발씩 끌어내어 약실로 올리는 구조이다. 탄환의 최대 비거리가 2,200m에 달했다.
반면에 청국군은 소총이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미국제 앤필드 소총, 독일제 드라이제 소총, 모제르 소총 등 각국의 다종다양한 총기류가 혼재되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사병의 개인화기에 있어서는 일본군이 우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