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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1 (계 20:11-15)
지난 5월 29일 "Mother Tongue"이라는 연극을 보았습니다.
미미라는 중국에서 이민온 가정이야기입니다.
미미의 홀어머니는 오직 중국말만 할줄알고 16살먹은 동생은 어려서 귀가먹어 수화로만 의사가 전달됩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수화를 모르기 때문에 그집에서는 오직 미미를 사이에 두어야 겨우 의사가 소통됩니다.
남동생이 귀가먹은것도 어려서 고열로 병원을 가야하는데 영어를 모르는 어머니로인해 시기를 놓쳐 버렸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대로 평온을 누리며 살아오던 이 가정이 미미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아 멀리 가족과 함께 살던 벤쿠버를 떠나게 되자, 가족의 다리역활을 해 겨우 유지되던
어머니와 남동생의 세대차와 수화를 모르는 어머니와 귀가먹어 듣지못하는 동생의 의사소통과 중국전통과 현실 캐나다 관습을 고집하는 모자사이의 갈등으로 미미는 진퇴양난의 어려움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런 어려움속에서 갈등하며 괴로워하던 미미가 간간히 생각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즐거웠던 추억속에 아버지와 온가족이 꿈꾸던 새세상의 꿈을 되새기며 그 아버지의 지혜를 찾아 해결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5월 9일부터 시작해 6월3일, 지난주까지 Factory Theatre에서 공연한 이 연극은 한국 청년배우 2명이 출연한다고 해서 신문에 기사도 나왔지만, 실은 변변치못한 아들놈 Paul이 출연했기에 꼼짝못하고 끌려가듯 억지로 소환되어 가본 연극이었습니다. 연극하는 아들덕분에 별로 흥미는 없지만 이렇게 일년에 한두번은 의무적으로 연극을 보러가는 고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극이 끝나면 기다려 아들을 만나고 아들은 함께 연기한 연기자들은 물론이요, 뒤에서 수고한 스텝들을 하나하나 인사시켜줍니다. 이런중 놀라운 사실은 4명의 배우가 출연해 1시간남직 진행되는 이 연극을 위해 20명이나 되는 뒷 스텝들의 일사불란하게 자신들의 임무수행에 충실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일생을 이와같은 연극에 비교하여 연극은 인생의 축소판이라 말씀하십니다. 연극은 그 모든 줄거리가,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의 인간관계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연극은 배우만으로 만들어 지는것이 아닙니다. 조금전에 말씀드린대로 연극은 무대뒤가 더 중요합니다. 연극을 있게만드는 각본이 있고 모든 것을 총감독하는 연출자가 있습니다. 배우는 물론이고 수많은 스텝들이 총감독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연극을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연극이 다 끝나면 등장한 배우들이 무대에 나와 관객들에게 머리를 굽혀 인사를 합니다. 그때 뛰어난 연기로 관객에 큰 감명을 준 배우들에게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주어질것입니다. 한번만 아니고 두 번, 세 번, 네 번 박수가 주어집니다. 기립박수를 받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출연진은 나시나와 만면의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고 더욱 깊이 머리를 숙입니다. 얼마나 보람된 일입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뻣뻣이라는 별명을 가진 연극배우가 있었습니다. 그의 맡은 역할은 아주 나쁜 악한역이였습니다.
연극 마지막 장면에서 피투성이가 된 주인공이 그의 총을 빼았아 그에게 총을쏘면 총에 맞아 쓰러저 죽는 배역이였습니다. 언제나 주인공이 총을 쏘면 쓸어저 죽게되고 그러면 우레와 같은 박수가 관객으로부터 터저나왔습니다. 이것이 늘 불만이던 이 배우는 어느날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총을 쏘았지만 쓸어지며 죽지를 않고, 뻣뻣하게 그냥 서 있는것이였습니다. 주인공은 쓰러지는 시기를 놓쳐 그런줄 알고 대사에도 없는 말로, "첫발은 빗나갔지만 이번만은 용서없다" 소리치며 다시 총을 쏘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배우는 꿈쩍도않고 그냥 그대로 서있는 것이였습니다. 이에 당황한 주인공은 "예잇!" "예잇!" 하며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했지만 이 악한은 장승처럼 뻣뻣하게 선체 쓰러저 죽지를 않습니다. 화약을 터뜨리던 막뒤의 스텝도 준비한 화약이 다 떨어저 더 이상 총소리 조차 나지 않습니다. 자 연극이 어떻게 돼었겠습니까? 뻣뻣이라는 이 별명의 배우는 그후 어떤 대접을 받았겠습니까?
우리인생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 인생뒤의 총 연출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이라는 무대위에 등장 시키십니다. 세상무대위에 오른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이 쓰신 각본대로 무대위를 살아갑니다. 그리고 연극이 다 끝나면 모두 무대앞으로 나가 서게됩니다. 훌륭한 연기를 한 배우는 열열한 관객의 박수와 환호를 받을 것이요, 뻣뻣이처럼 제생각, 제멋대로 연극을 한 배우는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연극에 참여한 모든사람이 연극이 끝나면 다 총감독 앞에 서서 잘하고 못한것에 대한 평을 받듯이 이세상에 한번이라도 숨을 쉬고 살았던 자들은 모두 다시 등장하여 인생의 총감독이신 하나님앞에 서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그 부분입니다. 연극이 다 끝났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모두 다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한번이라도 숨을쉰 모든 사람이 이제 하나님앞에 불려나옵니다. 단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불려나와 서게됩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던 상관이 없습니다. 편안이 죽어, 좋은 관을 쓰고, 명단자리 무덤에 묻혔든, 교통사고로 우리가 보기에 꿈찍한 모습으로 죽었던, 죽은지 오래되어 묘속에 남은 것이 하나없이 다 썩어있든 또는 바다에 빠저 시체조차 찾지못했던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사람을 다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에게 임할 최종적인 심판입니다. 여기서 우리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고 갈라지게 됩니다.
지난 6일 수요일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하시던 영신군 아버님 박성식성도님의 장례식이 Rosar-Morrison Funeral Home에서 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요일 아침 9시 St. James Cremator 에서 하관예배가 있었습니다. 조문객은 비록 많지않았지만 진정 마음으로 고인과의 이별을 애도하며, 진심으로 천국 가심을 축하하며 환송하는 아름다운 성도의 이별을 보았습니다. 이와같은 한 믿는 의인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에게 닥처올 이 엄청난 대 심판, 마지막 심판을 대비하는것이 우리가 준비해야만 할 확고하고 중요하며 꼭 필요한 신앙이 아닌가 생각되어 이렇게 오늘 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인류역사의 마지막 종착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행기던 기차던 버스로 가던 종착지가 있습니다. 중간 기착지에서는 내리고 타는 사람이 있지만, 마지막 종착지 에서는 모두가 다 내려야만 합니다. 더 이상 갈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류역사의 맨 마지막 종착지는 어디일가요? 그것은 원자탄이나 수소탄으로 인한 파멸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환경의 파괘로 무너지는 자연의 재난이 아닙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크고 흰 보좌앞 입니다. 11절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하나님은 우리인간에 생명을 주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분이 언제고 우리의 생명을 걷어가십니다. 주신분이 하나님이시게에 걷어가는이도 하나님이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시작하신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인류의 역사를 마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인류의 역사가 더이상 가고자해도 갈수없는 최종적인 종착지는 하나님께서 이세상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크고 흰 보좌앞입니다. 크다는 것은 그심판이 대단히 권세가 있어 모든 피조물에게 미친다는 말씀이요, 희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다는 것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반드시 최종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며 그 심판은 대단히 권세있고, 공정한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의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을바에야 못할것이 무엇이냐는 끔찍한 생각까지 하게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땅과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피하여 간곳이 없더라"
크고 흰 보좌앞에서 이세상의 땅과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앞을 피하여 간곳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연극이 모두 끝나면 무대장치는 걷어 치우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고있는 이땅과 이 하늘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때 까지 존재하다가 그 때가 되면 이제 아무소용없게 되어 무대장치 치워버리듯 간곳이 없어집니다.
이때 무대뒤에 계시던 총 연출자이신 하나님이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앞에 나오게 됩니다.
무대에 등장했던 어떤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오래 살았던 짧게 살았던 상관이 없습니다.
주연을 했던 조연을 했던 단역을 했던 아무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다 맡겨진 배역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땅의 삶을 어떤식으로 살았는지, 왜 그런식으로 살았는지 하나님앞에 낱낱이 고해야 할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땅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여
이세상의 삶이 전부인양 이렇게 속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땅의 작고 별것아닌 편안이나 기쁨이나 만족을 위해 영원한 축복과 상급을 마다하며 불쌍하게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다시한번 하나님 말씀안에서 우리는 나를 정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땅에서 어떤사람은 많은 것을 받아 기쁘며, 보람되며, 부러움을 받으며 살수있습니다 또 어떤사람은 적게 받아 어렵고, 힘들며, 남을 부러워하며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고 맡겨진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님앞에서 책임져야한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일에 하나님은 권세가 있으시고 공정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로마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각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아니하고 불의를 쫓는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롬2:6-8)
이는 사람이 죽어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12절입니다.
"또 내가보니 죽은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앞에 섰는데.." 지위고하를 막논하고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은 다 크고 흰 심판의 보좌앞에 서게됩니다.
마지막 보좌앞 심판을 받기위하여 모두 살아납니다. 죄인은 심판을 받아 죽음으로서 모든 죄값을 치룰 것 같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죽을 축복마저 가질수 없습니다.
그래서 13절입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어떻게 죽었던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사람은 무덤에 너무 오래있어서 시체가 완전히 썩어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죽은사람은 모두 다시 살아납니다. 어떤사람은 불에 그 시체가 다 타버렸습니다.
그래도 죽은사람은 다시 살아납니다. 어떤사람은 바다에 빠저죽는 바람에 시체도 찾지못했습니다.
그래도 바다가 그 죽은사람을 내어 줍니다.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서게됩니다. 죽는 것이 끝이 아니오, 오히려 새로운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와같은 마지막 날의 심판은 우리에 늘 의문을 주던 이땅에서의 악인의 형통함으로, 세상심판의 공정성 논란과 의인이 이땅에서 당하는 고난의 문제에 바른 해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를 절대로 보지못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사망과 음부도 함께 사용하십니다.
14절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사망 곧 불못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망이 끝이라 생각하나 사망까지도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사용하시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사망과 음부는 지금까지 불순종하고 죽은 모든 영혼들을 가두어 두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역사가 다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망과 음부도 버리십니다. 버리시기에 다시는 사망과 음부가 없습니다. 다시는 사망과 음부가 없어 모두 살아납니다. 그러나 무서운 불못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저나 여러분은 불못이 어떤곳인지,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이 불못에서 얼마나 무섭게 이루어지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불못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총이나 자비나 은혜가 전혀없는 곳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이 함께하는 이땅에서는 악한자가 형통할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이 전혀없는 불못에서는 영원한 분노만이 있을뿐입니다. 이 고통과 이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이 얼마나 심했으면, 오른손이 범죄하면 짤라버리라 하셨겠습니까? 오른쪽 눈이 범죄하면 빼어 버리라 하셨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않는 곳이요, 빛이라고는 하나도없는 어둠속의 이갊음이 있는곳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없이 산 사람들을 심판하는 책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책들은 그들의 모든 행위가낱낱이 기록된 책들입니다.
"또 내가보니 죽은자들은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잇고 또 다른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자들이 자기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그리고 15절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심판받는 사람들의 모든 행위가 기록된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저지른 온갖 더럽고 추악한 행위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고 행한 나쁜 행위들입니다. 이 기록대로 죽은자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의 예외도 없는 이 행위의 심판은 매우 공의로운 반면 조금의 자비도 있을수 없는 무서운 심판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땅에서의 우리는 늘 나에 관해서는 관대하나 남에 대해서는 엄한 것이 상레였습니다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앞에서는 우리의 숨겨지고 감춰졌던 모든 악한 행위들이 그어느것 하나빠짐없이 변명이나 용서도없이 죄악의 온갖죄과들이 모조리쏘다져 나올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또하나의 다른 책이 소개됩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생명책"입니다. 생명책이란 하나님의 구원에참여된 모든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된책입니다 이 생명록에 기록된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릴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책에 누가 기록되어 있는지 우리가 미리 알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아무도 알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수가 있을뿐입니다. 그것은 어떤행위로나 어떤 능력으로 이루어지는것이 결코 아니기때문입다.
<마7장21절 이하입니다>
"나더러 주여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여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렇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이름을 가진 어떤사람도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였건,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슨 엄청난 권능을 행하였던 그런 것은 아무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불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 죄가 첨가될뿐입다.
다만 하나님의 영, 성령이 내안에 거하심으로만 그가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깨닭게 하심으로 비로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수 있으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이름이 생명록에 기록됨을 알수가 있는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정말 짧은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시간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가는길엔 순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땅에서 힘들게 어렵게 살아가다가 영원한 저 세상에서까지 죽지도 못하는 불못신세가 된다면은 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일이겠습니까?
잠간있다 사라질 안개와 같은 이땅에서 장차 올 새세상을 준비할수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축복된 사람들이 겠습니까? 구원은 오직 믿음에서 오며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우리모두 구원받아 생명책에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이름을 올라 마지막 백보좌 심판때에 우리 모두, 새하늘 새땅에 들어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는 우리모두 될 수있도록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