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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강의(經史講義) 10 ○ 논어(論語) 3
헌문(憲問)
이 장의 《집주》에 “원헌(原憲)의 견개(狷介)는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에 국록(國祿)을 받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참으로 알았지만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국록만 받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은 반드시 아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였다. 도가 없을 때에 국록을 받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이미 알았다면, 도가 있을 때에 국록만 받는 것이 부끄러움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서형수(徐瀅修)가 대답하였다.]
나라에 도가 있는데 국록만 받는다는 것은, 세상은 잘 다스려지는데 행할 만한 도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고, 나라에 도가 없는데 국록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이 어지러운데 지켜 나가는 절조가 없음을 말합니다. 원헌의 지조는 청렴하고 근실하며 가난을 편안히 여겼으니, 도가 없는 나라에서 국록을 받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에 대해서는 참으로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었지만,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서 도를 행하는 일은, 지혜가 세상을 경륜하기에 충분하고 재능이 만물을 다스리기에 충분한 사람이 아니라면 잘 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자(夫子)의 이 가르침은 바로 그 불위(不爲)의 지조를 미루어 넓혀서 유위(有爲)의 경지로 나아가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극벌원욕(克伐怨欲)을 행하지 않음[不行]이 반드시 극기복례(克己復禮)만 못한 것이 아닌데도 공자가 그것을 인(仁)이라고 인정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성인 문하에서 인(仁)을 말한 것이, 전체(全體)를 가리켜 말한 것도 있고 사공(事功)을 가리켜 말한 것도 있다. 생각건대 이 불행(不行)이라는 두 글자는 전체에 붙이자니 미흡한데, 사공에 붙이면 안 될 바가 없겠는가?
[성종인(成種仁)이 대답하였다.]
불행(不行)과 사물(四勿)은 같지 않습니다. 물(勿)이라는 것은 깨끗하게 쓸어 내어 싹을 완전히 잘라 버려서 극벌원욕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음이고, 불행(不行)이라는 것은 막고 눌러서 멋대로 행하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으나 그래도 행하는 바가 그 안에 남아 있음이니, 이것이 부자가 그 인(仁)을 허여하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만약 사공(事功)으로 인(仁)을 논한다면 관중(管仲)에게도 오히려 인(仁)을 허여하였는데 이 장에 말한 것이 어찌 인(仁) 자를 얻기에 넉넉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이것은 이 장의 본의가 다만 마음의 본체를 따라 인(仁)을 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도(有道)와 무도(無道)의 두 도(道) 자의 뜻을 상세히 말할 수 있겠는가? 도(道)가 있는 나라이거나 도가 없는 나라이거나를 막론하고 말이 진실되고 미쁘고[言忠信] 행실이 독실하고 경건하면[行篤敬]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강직한 말과 강직한 행실[危言危行]’을 해야 하며 또한 어찌 반드시 ‘강직한 행실과 공손한 말[危行言孫]’을 해야 하는가? 또 행동을 할 때에 말을 돌아보고[行顧言] 말을 할 때에 행동을 돌아보는 것[言顧行]이 군자의 도리이니, 아마 행실은 강직한데 말만 공손하거나 말은 공손한데 행실만 강직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성인이 굳이 “행실은 강직하고 말은 공손해야 한다.”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말이 진실되고 미쁘고 행실이 독실하고 경건하다는 것은 언행(言行)을 위주로 말한 것이니 반 걸음도 떨어져서는 안 된다[跬步不可離]는 의미이고, 강직한 말과 강직한 행실, 강직한 행실과 공손한 말이라는 것은 세도(世道)를 위주로 말한 것이니 몸가짐을 단속하여 해를 멀리하는 방법입니다. 위주로 말한 것이 본디 같지 않습니다. 공손[孫]이라는 말도 또한 낮추고 굽혀서 아첨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그 바름을 잃지 아니하되 다만 조금 부드럽게 하는 것이니, 부드러운 가운데에서도 굳세게 스스로 지켜 나가는 것은 본디 변함없는 그대로인 것입니다. 또한 어찌 강직함과 공손함이 서로 상치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덕(德)과 인(仁)은 같은가, 다른가? 만약에 같다고 한다면, 혹은 유덕(有德)이라고도 하고 혹은 유인(有仁)이라고도 하여 말에 각기 달리 가리킴을 두어 대응시켜 말한 것이니, 어디에 그 같음이 있는가? 만약 다르다고 한다면,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어질고 어진 자는 반드시 덕이 있어서 덕 바깥에는 인이 없고 인 바깥에는 덕이 없으니, 어디에 그 다름이 있는가?
[서형수가 대답하였다.]
덕(德)과 인(仁)이 비록 차이가 없으나, 덕(德)이라는 것은 도(道)를 행하여 마음에 얻음이 있음이고, 인(仁)이라는 것은 심덕(心德)의 완전함입니다. 도를 행하여 얻음이 있는 것이라고 하고 보면, 그 얻은 바가 얕거나 깊거나 간에 모두 덕(德)이 될 수가 있는 것이고, 심덕의 완전함이라고 하고 보면, 온갖 선(善)이 모두 충분하여 하나의 흠도 존재하지 아니한 뒤라야 바야흐로 인(仁)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분명하게 두 가지로 나눌 수는 없지만 또한 섞어서 하나로 삼아도 안 되는 것입니다.
남궁괄(南宮适)의 질문이 어찌하여 덕(德)을 숭상함이 되는가? 덕을 숭상하지 아니하면 군자라고 할 수가 없는데, 성인이 이미 군자라고 말해 놓고 또 덕을 숭상한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집주》에는 “군자인 사람으로서 덕을 숭상하는 마음을 지녔다.[君子之人 而有尙德之心]”라고 하였는데, 어찌 일찍이 덕을 숭상하지 아니하는 군자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반드시 하나의 이(而) 자를 군자지인(君子之人)이라는 넉 자 아래에다가 놓아서, 마치 이미 군자인 데다 또 덕을 숭상할 줄 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해 놓은 것은 어째서인가?
[이현도(李顯道)가 대답하였다.]
덕(德)을 아는 자가 드문데 남궁괄의 말이 이러하였으니, 부자가 군자라고 인정하고 덕을 숭상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한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군자라는 말은 자질(資質)로 말한 것이고 덕을 숭상한다는 말은 마음의 덕[心德]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주》에서도 “군자인 사람으로서 덕을 숭상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군자라는 말과 덕을 숭상한다는 말은 본디 각각 가리키는 바가 있습니다.
소인(小人)이면서 어진 자는 참으로 없겠지만, 군자이면서도 어질지 못한 자가 있음은 어째서인가? 사씨(謝氏)는 말하기를, “군자는 인(仁)에 뜻을 둔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라도 마음이 인에 있지 아니하면 불인(不仁)이 됨을 면치 못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석 달을 인(仁)을 어기지 아니한 안자(顔子)는 참으로 군자로서 어진 자라고 할 수 있는데, 석 달이 지난 뒤에 마음에 혹시라도 인을 어김이 있었으면 또한 군자로서 어진 자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인가?
[조제로(趙濟魯)가 대답하였다.]
장손(臧孫)의 지혜를 두고도 부자는 삼불인(三不仁)이라고 배척하였고 자문(子文)의 충심을 두고도 부자는 “어찌 인(仁)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으니, 이들이 이른바 군자이면서도 어질지 못한 자들입니다. 안자가 석 달이 지난 뒤에는 인을 어김이 없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경우는 다만 큰 불화로 속에 하나의 눈송이가 떨어진 것[洪爐之點雪]과 같음이니, 정자(程子)의 말대로 ‘미화(未化)’라고 하거나 장자(張子)의 말대로 ‘심추(心麤)’라고는 그래도 말할 수 있겠으나, 어찌 ‘미인(未仁)’이라는 말을 그에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의 노(勞) 자는 노심(勞心)을 말함인가, 노력(勞力)을 말함인가? 그리고 애(愛)와 충(忠)은 선유들의 의논이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다만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고 신하가 임금께 충성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형이 아우에 대해서와 선비가 친구에 대해서와 임금이 신하에 대해서와 스승이 제자에 대해서도 또한 이렇게 사랑해야 하며, 신하가 임금께 충성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아들도 아버지에게 충성해야 하며 선비도 친구들에게 충성해야 하며 무릇 남을 위해서 의견을 내는 것도 충성에서 나와야 한다.”고 하였다. 두 학설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
[이면긍(李勉兢)이 대답하였다.]
여기의 노(勞) 자는 사실 심(心)과 력(力)을 포괄하는 것이니, 한쪽으로만 붙여서는 안 될 듯하며, 충(忠)과 애(愛)에 대한 해석은 두 학설이 모두 근거가 있습니다. 이 장의 정의(正義)로 말하자면 아비가 아들을 사랑하고 신하가 임금께 충성함을 말하는 것입니다만, 남은 뜻으로 미루어 보자면 자신보다 윗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충성해야 하지 않겠으며 자신보다 아랫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현(聖賢)이 자산(子産)을 논한 것이 각기 다름이 있다. 부자는 “은혜로운 사람[惠人]이다.”라고 하여 허여하였고, 맹자는 “은혜롭기는 하나 정치를 할 줄 모른다.[惠而不知爲政]”라고 말하였다. 어째서인가?
[윤행임(尹行恁)이 대답하였다.]
부자가 이른바 ‘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자산의 심덕(心德)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맹자가 이른바 “은혜롭기는 하나 정치를 할 줄 모른다.”라는 것은 자산의 정치하는 재능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 “가난하면서도 원망이 없기는 어렵고 부자이면서 교만함이 없기는 쉽다.”고 하였다. 대개 그 곤궁함과 풍족함을 인하여 그 어려움과 쉬움을 구별한 것이다. 그러나 원망하는 마음을 갖기 쉬운 가난한 자가 원망이 없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교만한 마음을 갖기 쉬운 부유한 자가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가난하면서도 원망하지 않음’을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음’에 견주어 본다면 ‘원망하지 않음’이 어려운 일이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음’을 ‘부유하면서도 예(禮)를 좋아함’에 견주어 본다면 ‘교만하지 않음’이 쉬운 일인데, ‘원망하지 않음’과 ‘교만하지 않음’을 비교하여 논해 본다면 어렵고 쉬운 구별이 없을 듯하다. 그런데도 성인의 말씀이 이러한 것은 어째서인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학설 가운데, 어떤 이는 “가난함은 역경(逆境)이고 부유함은 순경(順境)이다. 순경에 지내기는 쉽고 역경에 지내기는 어렵다.”라고 하고, 어떤 이는 “조금만이라도 자신을 아끼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또한 교만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곤궁함을 당해서도 마음이 형통한 자가 아니면 원망이 없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학설들이 모두 뜻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원(無怨)이라는 두 글자는 비록 낙(樂)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더라도 또한 이미 무첨(無諂)의 경계는 뛰어넘은 것입니다. 이른바 무교(無驕)라는 것이 본래 무첨(無諂)과 같은 예라면 여기서 그 어렵고 쉬움, 얕고 깊음을 아주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공작(公綽)으로 말하자면, 조씨(趙氏)나 위씨(魏氏) 집안의 가로(家老)가 되기에는 넉넉하나 등(滕) 나라나 설(薛) 나라의 대부(大夫)는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덕(德)이 넉넉해도 재능이 부족한 자에게 이미 나라의 정치를 맡길 수가 없다면 재능이 넉넉해도 덕이 부족한 자인 경우에도 또한 나라의 정치를 맡길 수 없는 것인가? 《대학(大學)》의 혈구장(絜矩章)에서 진서(秦誓)의 이른바 ‘일개신(一介臣)’을 인용하여 사람을 쓰는 의리를 밝혔는데, 이른바 일개신은 비록 오로지 진실되기만 하고 다른 기예가 없더라도 그래도 자손과 백성을 보전하고 나라에 이로움이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자면,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덕이 넉넉한 자에게는 본디 나라의 정치를 맡길 수가 있는 것인데, 공작(公綽)이 등 나라나 설 나라의 대부가 될 수 없음은 어째서인가?
[김희조(金煕朝)가 대답하였다.]
덕은 넉넉한데 재능이 부족한 자와 재능은 넉넉한데 덕이 부족한 자는 정치를 하면 위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일개신(一介臣)의 오로지 진실되기만 하고 다른 재능이 없음에 대해서는 비록 노옥계(盧玉溪)의 ‘덕은 있으나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는 학설이 있습니다만, 다만 ‘남이 재능을 가진 것을 마치 자신이 가진 것처럼 여김’을 보면, 이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의 선[衆善]을 모아서 선(善)을 행하는 것이니, 백성들이 보전되는 까닭과 국가가 이롭게 되는 까닭이 어찌 재능과 덕이 겸하여 갖추어진 가운데에서 이루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인(成人)의 뜻을 상세히 말할 수 있겠는가? 변장자(卞莊子)는 본디 용자(勇者)이지만, 성인(聖人) 문하의 여러 제자들 가운데 용기(勇氣)라면 자로(子路)만 한 이가 없었고 이것은 또 자로가 물은 질문이니, 자로의 용기를 가지고 그의 질문에 답했다면, “용기를 좋아함은 나보다 나으나 일의 이치를 헤아려 의리에 맞게 함은 없다.[好勇過我 無所取材]”라고 한 가르침으로 헤아려 볼 때에, 다른 사람을 끌어다 비유하는 것보다 더욱 알아듣기 쉬운 대답이었을 듯한데, 단지 변장자만을 들어 말하고 ‘너의 용기’라고 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신복(申馥)이 대답하였다.]
이 장의 성인(成人)이라는 것은 대개 자로(子路)가 미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해 준 것입니다. 만약 성인(成人)의 극치를 논하자면 성인(聖人)이 된 뒤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변장자의 용기는 비록 자로와 마찬가지이지만, 부자가 이미 “용기를 좋아함이 나보다 낫다.”라는 말로 자로를 경계시켰으니, 어찌 여기서 도리어 그의 용기를 허여하여, 맨손으로 범을 잡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는[暴虎馮河] 그의 무모한 병통을 더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을 협박하는 것은 죄악 가운데 큰 죄악이다. “나는 믿지 않는다.[吾不信]”는 말은, 비록 “이것이 《춘추(春秋)》 주심(誅心)의 법이니, 또한 결국 내포된 뜻이 있는 것이다.”라고는 하나, 성인은 윤리 강령을 붙들어 세우고 징계 토벌을 엄하게 하니 이런 의리로 볼 때 마땅히 임금을 협박한 그 죄를 바로 배척해야 할 것인데도, 도리어 이렇게 완곡하게 말을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익진(李翼晉)이 대답하였다.]
이 장에서 “후계자 세우기를 요구하였다.”라고만 하지 아니하고 굳이 ‘방(防) 땅을 가지고’라는 말을 달았고, “후계자 세우기를 계씨(季氏)에게 요구하였다.”라고 하지 아니하고 굳이 “후계자 세우기를 노(魯) 나라에 요구하였다.”라고 하였으며, “계씨를 협박하였다.”라고 하지 아니하고 굳이 “임금을 협박하였다.”라고 하였고 보면, 장문중(臧文仲)은 노 나라의 신하이고 방(防) 땅은 노 나라의 고을이고 임금은 노 나라의 임금인데, 그 신하로서 그 고을을 점거하고 그 임금을 협박한 것이니, 임금을 무시하고 윗사람을 무시한 죄를 어떻게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그것이 완곡하게 말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휼(譎) 자의 뜻을 상세히 말할 수가 있겠는가? 환공(桓公)과 문공(文公)은 마음이 모두 휼이부정(譎而不正)했던 자들이고 보면, 여기서 이른바 휼이부정이니 정이불휼(正而不譎)이니 하는 것은 그 일을 가지고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다만 공자가 마음과 일을 나누지 아니하고 휼과 불휼만을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심진현(沈晉賢)이 대답하였다.]
정현(鄭玄)은 사(詐)로 휼을 풀이했는데 주자(朱子)는 고쳐서 궤(詭)로 풀었습니다. 대개 사(詐)는 바로 사위(詐僞)나 기편(欺騙)을 말함이고 궤(詭)는 바로 궤기(詭機)나 음비(陰秘)를 일컬음이니, 주자가 버리고 취한 데에는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일을 나누는 문제는, 여기 정이불휼(正而不譎)이라고 한 것은 단지 진 문공(晉文公)에 비해서 다소 정(正)이라고 할 수 있고 다소 불휼(不譎)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일 뿐이지, 반드시 마음과 일을 상대적으로 말한 것은 아닐 듯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정과 부정은 모두 마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휼과 불휼은 모두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일 듯합니다.
관중(管仲)은 바로 하나의 ‘인을 빌린 자[假仁者]’이다. 공자가 일찍이 인(仁)을 사람들에게 가벼이 허여한 적이 없었는데, 인(仁)을 빌린 관중에게는 두 번씩이나 ‘여기인(如其仁)’이라고 말하여 깊이 허여한 것은 어째서인가? ‘인인(仁人)이 될 수는 없지만 인(仁)의 공(功)이 있다’는 것이 과연 《집주(集註)》에서 논한 바와 같다면, 관중은 인인이 아니다. 이미 인인이 아니라면 비록 인(仁)의 공(功)이 있더라도 허여할 만한 것은 아닐 듯한데, 그냥 허여만 했을 뿐만이 아니라 굳이 두 번씩이나 말하여 깊이 허여하였으니, “관중이 예를 안다면 누군들 예를 모르랴?”라고 배척한 것과 어찌 그리도 크게 서로 반대가 되는가?
[서형수가 대답하였다.]
인(仁)은 덕(德)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공(功)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덕(德)을 가지고 말하자면, 마음에 사사로움이 없고 일이 이치에 합당한 자가 아니면 거기에 해당시킬 수가 없지만, 공(功)을 가지고 말하자면, 참으로 은택이 사람들에게 미쳐 가고 은혜가 먼 후대에까지 끼쳐지는 자는 모두 그렇게 일컬을 수가 있습니다. 관중이 제후들을 규합할 때 위력(威力)을 빌리지 않고 인(仁)을 빌렸습니다. 비록 빌린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인자(仁者)의 공효(功效)가 됨은 큽니다. 그렇다면 이 장의 인(仁)은 전체(全體)의 인(仁)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깊이 허여한 까닭은 어찌 성인이 사람 때문에 공(功)까지 폐하지는 않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문자(文子)가 선(僎)을 천거한 일은 세 가지 선(善)을 아울러 지닌 것이니, 지(智)라고 일컬어도 되고 공(公)이라고 일컬어도 되고 충(忠)이라고 일컬어도 되는데, 굳이 “문(文)이 될 만하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 글을 논하는 자는 혹 “부자가 들은 것은 문자가 선을 천거할 때였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 “부자가 들은 것은 문자가 시호를 받은 뒤였다.”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또한 분변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진현이 대답하였다.]
여기서 지의(智矣), 공의(公矣), 충의(忠矣)라고 하지 아니하고 굳이 문의(文矣)라고 한 것에서, 부자가 들은 것이 문자가 이미 시호를 받은 뒤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개 성인이 공숙문자(公叔文子)에 대해서 공명고(公明賈)의 대답을 듣고도 오히려 그러리라고 믿지 아니했던 것은 그 위공(衛公)에게 향연을 베푼 일과 하구(瑕丘)에 묻히고 싶어 한 일 등의 몇 가지 일들이 모두 큰 잘못이 됨을 면치 못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에 위(衛) 나라 사람들이 정혜문자(貞惠文子)라고 시호를 주니 부자는 또한 필시 의심을 하기를 ‘정(貞)과 혜(惠)는 그래도 괜찮으나 어찌 문(文)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여겼다가, 선(僎)을 천거하여 함께 조정에 오른 이 일을 듣고는 비로소 의문이 풀려서 이르기를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문(文)이 될 수가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앞뒤의 물음과 대답으로 보건대, 처음에는 그 지나친 칭찬을 의심했다가 나중에 그 실제적인 자취를 알게 된 것이니,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가볍고 무거운 것을 분변하여 논해 보자면, 마땅히 치종묘(治宗廟)를 머리에 말하고 다음에 치군려(治軍旅)를 말하고 다음에 치빈객(治賓客)을 말해야 할 듯한데, 치빈객이 도리어 치종묘의 위에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익진이 대답하였다.]
세 신하의 재능의 폭이 넓고 좁음이 있었고 세 가지의 직무가 품명(品命)이 있었습니다. 그 재능을 논하자면, 문자(文子)가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한 것이 축타(祝鮀)가 말을 잘한 것과 왕손(王孫)이 속되었던 것보다 반드시 나았고, 그 직무를 논하자면, 우정(虞廷)의 질종(秩宗)은 구관(九官)의 으뜸에 있지 않았고 주관(周官)의 대축(大祝)도 또한 육경(六卿)의 아래에 있었습니다. 앞뒤의 순서는 아마 인품의 높고 낮음과 직무의 높고 낮음으로써 보아야 할 듯합니다.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직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라면, 비록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실천하기가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렇게 큰소리만 치는 사람은 처음부터 실천하려는 의지가 없으니, 이는 바로 말만 하고 실천은 아니하는 사람이다. 어렵다든지 쉽다든지 하는 말로 논할 것이 없을 듯한데, 부자가 “실천하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고 굳이 “실천하기가 어렵다.”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조제로가 대답하였다.]
큰소리만 치고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본디 일찍이 실천하려는 뜻이 없는데, 성인이 “실천하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고 “실천하기가 어렵다.”라고 한 것은 대개 또한 말을 박절하지 않게 한 것이니, 이것은 “말 잘하고 얼굴 꾸미는 사람치고 어진 사람은 드물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자로(子路)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대놓고 간쟁하는 일[犯之]은 어려운 일이 아니며 마땅히 더 힘써야 할 바는 속이지 않는 일[不欺]이었다. 그렇다면 부자의 대답은 마땅히 ‘속이지 말라’고만 말해 주어서 그로 하여금 마땅히 힘써야 할 바를 더욱 힘쓰게 했어야 할 듯한데, ‘대놓고 간쟁하라’는 말을 겸하여 해 준 것은 어째서인가?
[김계락(金啓洛)이 대답하였다.]
자로의 병통은 이치를 살피는 것이 밝지 못하고 모르는 바를 안다고 우기는 데에 있었으니, 먼저 ‘속이지 말라’고 경계시킨 것은 참으로 마땅한데, 단지 ‘속이지 말라’라고만 말하고 만다면 자로에게 고해 주는 말로야 참으로 좋지만, 그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서는 여전히 말이 극진하지 못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인의 말은 닿는 곳마다 모두 통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상달(上達)이야 달(達) 자를 쓰는 것이 마땅하지만, 하달(下達)에도 달 자를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달 자는 그 자체가 좋은 글자이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에 이른바 달도(達道), 달덕(達德), 달천덕(達天德)이라는 것과 《논어(論語)》에 이른바 “나라에 있어서도 반드시 달이 되며 집안에 있어서도 반드시 달이 된다.[在邦必達 在家必達]”라는 것은 가리켜 말하는 바는 비록 각기 다르지만 모두가 군자(君子) 쪽을 따라서 말한 것이며, 이 밖에도 경전(經傳)에 보이는 달 자들은 좋은 제목(題目)이 아닌 게 없으니, 여기의 달 자는 아마 날로 더럽고 낮은 곳으로만 내달리는 소인(小人)에게 쓰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도 부자의 말이 이와 같다. 모름지기 이미 주자(朱子) 및 여러 유자(儒者)들의 학설이 있다고 하지만 말고 분명하게 분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서형수가 대답하였다.]
달(達)이라는 글자는 끝까지 도달했다는 뜻이 있어서 ‘지극한 선(善)에 닿아 그쳤다[止至善]’라는 것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무릇 경전(經傳)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가 군자 쪽을 따라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인의(仁義)처럼 정명(定名)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논어》의 재방필달(在邦必達), 《맹자》의 달불리도(達不離道), 《예기》의 추현이진달(推賢而進達)의 달(達) 자는 글자의 뜻이 이것과 같지 아니하고, 또한 《중용》의 달도(達道)니 달덕(達德)이니 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달(達)은 곧 빈(賓)이고 도(道)와 덕(德)이 바로 주(主)입니다. 이 장에서 상달(上達)이니 하달(下達)이니 하는 것도 또한 달도니 달덕이니 하는 것과 같이 정신(精神)의 귀취(歸趣)가 오로지 상(上)과 하(下) 두 글자에 있는 것이니, 《논어》 이인(里仁)에 유어의(喩於義)니 유어리(喩於利)니 한 것의 유(喩) 자라든지 《맹자》의 자자위선(孶孶爲善)이니 자자위불선(孶孶爲不善)이니 한 것의 자자(孶孶)라는 글자와 같은 예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을 할 때에 빈(賓)이 되는 글자에 구애받지 아니하는 것은 경전의 문체가 대체로 그러합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마땅히 위기(爲己)의 학문을 해야 하지만, 《대학》의 도(道)가 명덕(明德)을 밝힘과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니, 옛날의 학자들이 어찌 다만 자기에게만 얻음이 있고자 했겠는가. 또 장차 미루어서 다른 사람에게도 미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이른바 ‘위기(爲己)’라는 두 글자는 비록 ‘위인(爲人)’에 대응시켜 말한 것이기는 하지만, 《대학》의 가르침에 비교해 볼 때에 혹 상세하고 소략한 차이가 없지 않은가?
[신복이 대답하였다.]
천하의 온갖 일들이 어느 것인들 자기 직분 안의 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집안을 다스리는 자는 바로 나에게 집안을 다스리는 책무가 있고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바로 나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책무가 있으며, 백성들이 나의 동포인 데[民吾同胞]에 이르면 이 백성들로 하여금 각기 그 알맞은 자리를 찾게 하는 것이 또한 위기(爲己)이고, 사물이 나와 함께하는 바인데[物吾與也]에 이르면 이 사물들로 하여금 각기 그 삶을 이루게 하는 것이 또한 위기(爲己)입니다. 만약 가(家), 국(國), 천하(天下)를 직분 밖의 일로 간주한다면,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는 학문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 허물을 줄이고자 하는데 아직은 잘하지는 못합니다.”라고 한 것은, 비록 더욱 스스로 겸손해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다만 허물을 줄이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면 그 허물이 많은 것이다. 만약 거백옥(蘧伯玉)이 스스로 말한다면, 자겸(自謙)의 뜻으로 논하건대, 참으로 이렇게 해야 마땅하겠으나, 사자(使者)가 이렇게 대답을 한 것은 좀 문제가 있을 듯하다. 그런데도 성인(聖人)이 두 번씩이나 사호(使乎)라고 하여 거듭 칭찬한 것은 어째서인가?
[정만시(鄭萬始)가 대답하였다.]
허물을 줄이고자 한 것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않음이고 아직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은 스스로 만족하지 않음입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성찰(省察)하는 생각을 항상 미치지 못한 듯이 하고, 스스로 만족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극치(克治)의 공부를 오직 혹시라도 모자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나면서 알고 편안히 행하는 성인이 아니라면 어찌 염려(念慮)의 어긋남과 언행(言行)의 실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겸양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스스로 수양하는 거백옥의 독실함을 잘 형용한 말이니, 부자가 거듭 말하여 찬미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위(位) 자는 《중용》의 소기위(素其位)의 위(位) 자와 같은가, 다른가? 만약 같다고 한다면, 위(位)라는 글자는 비록 같으나 이 장에서는 “생각이 그 위(位)를 벗어나지 않는다.[思不出其位]”라고 하고 《중용》에서는 “현재의 위치에 따라 행한다.[素其位而行]”라고 하여, 행(行)이라고도 하고 사(思)라고도 하여 말이 각기 같지 않고, 만약 다르다고 한다면, 이 장에서 이미 “생각이 그 위(位)를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중용》에서는 또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不願乎其外]”라고 하였으니 그 말뜻을 따져 보건대 차이를 알 수가 없다. 같음과 다름에 대해 분명한 의논을 듣고 싶다.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여기의 위(位) 자는 《중용》의 소기위(素其位)의 위(位) 자와 같은 위(位) 자인데, 여기서는 사(思)라고 하였으니 사(思)는 행동하기 전에 있는 것이고 《중용》에서는 행(行)이라고 하였으니 행(行)은 이미 생각한 뒤에 있는 것입니다. 사(思)는 행(行)의 근본이 되고 행(行)은 본디 사(思)에 기인하는 것이니, 이것이 또 그 공부를 하는 차례에 있는 약간의 차이입니다.
치기언 과기행(恥其言 過其行)에 대해서 《집주》에서는 두 가지 일로 풀이하였는데, 치기언(恥其言)은 ‘실천이 말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한다[恥躬之不逮]’와 말뜻에 같지 않음이 있는 듯하고, 과기행(過其行)은 주자가 비록 ‘초상은 슬픔을 지나치게 하고 비용은 검소를 지나치게 한다[喪過乎哀 用過乎儉]’라는 말을 인용하여 역행(力行)의 뜻임을 밝혔지만 후세의 학자는 또한 중도(中道)가 아니라고 의심하였다. 또한 호씨(胡氏)의 학설 가운데 혹자가 이른바 ‘그 말이 행동보다 지나치게 됨을 부끄러워한다’라는 것은, 결국 어느 한쪽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의논인가?
[신복이 대답하였다.]
말을 내뱉기는 쉽기 때문에 반드시 충분히 머뭇거린 뒤라야 바야흐로 함부로 내뱉지 아니할 수가 있고, 힘써 실천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충분히 과격한 뒤라야 바야흐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혹자의 학설이 다소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말은 미처 못할까를 염려하지 아니하고 실천은 그 지나치게 됨을 염려하지 아니한다’는 뜻에는 끝내 잘 맞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자(知者)는 불혹(不惑)하고 용자(勇者)는 불구(不懼)한다는 것은 말이 된다만, 인자(仁者)에 대해서 어찌하여 불우(不憂)라고 말하는가? 주자가 이미 자한편(子罕篇)의 지(知), 인(仁), 용(勇)을 새기면서 “이(理)가 사(私)를 이기기에 충분하다.”라는 말로 불우(不憂)의 뜻을 풀었는데, 사(私) 자는 곧 공(公) 자의 상대가 되는 글자이고 보면, “공(公)이 사(私)를 이기기에 충분하다.”라고 하지 않고 굳이 “이가 사를 이기기에 충분하다.”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리고 정자(程子)가 이른바 ‘낙천(樂天)’이라는 두 글자는 참으로 불우에 딱 맞는 글자인데 《집주》에 붙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서형수가 대답하였다.]
인심(人心)이 하고자 함이 있으면 구함이 있고 구함이 있으면 얻음이 있고 잃음이 있어서 우환이 생겨납니다. 오직 인자(仁者)만이 마음이 툭 트이어 크게 공정해서 그 자리에 맞게 행동을 하는 것이니, 이것이 그 근심을 아니하는 까닭인데, 주자가 이(理)라고 말하고 공(公)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공(公)은 일에 드러나서 밖에 있는 것이고 이(理)는 성품에 갖추어져서 안에 있는 것이니, 이(理)로 인(仁)을 풀이한 것이 아주 알맞고 맛이 있음을 더욱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정자가 말한 낙천(樂天)이라는 두 글자는 참으로 불우(不憂)의 실상이 되는데, 이른바 낙천이라는 것도 또한 ‘이가 사를 이기기에 충분하다’라는 한 구절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주자가 《집주》에 붙이지 않은 것은 또한 이 때문일 것입니다.
불가(不暇)라는 두 글자는 바로 성인이 자기 자신을 끌어다 대어 깊이 억제한 말씀이다. 대저 부자처럼 나면서부터 알고 편히 행하며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도리에 맞는 분에게 어찌 겨를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의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제씨(齊氏)가 이른바 ‘분발하여 밥 먹는 일도 잊고 즐겨서 근심도 잊는다[發憤忘食 樂而忘憂]’라는 것 및 기타 여러 학자들이 이른바 ‘부자는 일생 동안 옛것을 좋아하여 서둘러 구하였고[好古敏求] 아래를 배워서 위를 통달하였으니[下學上達] 어찌 겨를이 있었겠는가’라는 것 등의 학설은 마치 정말로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것 같다. 이것이 과연 어떠한가?
[정만시가 대답하였다.]
성인은 지극한 정성으로 쉼이 없고[至誠無息] 순수함에도 또한 멈추지 아니하니[純亦不已], 이것이 비록 자공(子貢)을 경계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본디 겨를이 있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문왕(文王)도 또한 나면서부터 아는 성인이었는데도, 어찌 “날이 저물도록 밥 먹을 겨를도 없었다[日昃不遑]”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장의 내용은 모두 네 번 나오는데 글이 각기 다름이 있다. 글이 각기 이미 다르다면 뜻도 반드시 같지 않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이른바 다름 가운데 같음이 있고 같음 가운데 다름이 있다는 것이다. 네 개의 문장을 함께 살펴서 그 같음과 다름을 분명하게 분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논어》 안에 한 가지 말이 두 번 나오는 것은 본래 있지만, 이 장의 경우는 두 번만 나올 뿐이 아니라 네 번씩이나 나오니, 어째서인가?
[이현도가 대답하였다.]
이 장의 내용은 여러 차례 나오는데 주장하는 바의 뜻이 조금씩 다릅니다. 혹 지인(知人)에 무게를 두기도 하고 혹 능(能) 자에 무게를 두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문인(門人)들이 각기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이라고는 하나, 성인이 여기에 반드시 간곡하게 권면한 것은, 어찌 자신의 몸에 돌이켜 스스로를 다스리라는 은미한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미리 짐작하지 않고 미리 억측하지 않고도 사람들의 진정과 허위를 저절로 먼저 깨닫는 사람은 참으로 현자(賢者)이다. 다만 이른바 선각(先覺)이라는 것이 바로 지(知) 쪽을 따라 말한 것이고 보면, 마땅히 지호(智乎)라고 하거나 명호(明乎)라고 해야 할 듯한데, 굳이 현호(賢乎)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김계락이 대답하였다.]
선각(先覺)이라는 것이야 본디 지(知) 쪽을 따라서 말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의 진정과 허위를 짐작이나 억측을 하지 않고도 자연히 깨닫는 것은 비록 하늘로부터 타고난 자질이 고명(高明)한 까닭이기도 하겠으나 또한 학문이 정미롭게 된 데 말미암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현(賢)’이라는 것은 사실 하늘로부터 타고난 자질과 학문으로 이룬 것을 겸하여 말하는 것이어서 오로지 지(知) 한쪽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기(驥)가 기(驥)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은 참으로 잘 길들고 양순한 덕(德) 때문이지만,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것이 기(驥)의 재능이고 보면, 어찌하여 ‘그 재능을 일컬음이 아니라[不稱其才]’고 하지 않고 굳이 ‘그 힘을 일컬음이 아니라[不稱其力]’고 한 것인가? 더구나 이 장의 취지가 기(驥)로 군자를 비유한 것인데 군자가 군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까닭이 덕 때문이지 재능 때문이 아니니 재(才) 자가 력(力) 자보다 더 적합할 듯한데, 성인의 가르침이 이와 같은 것은 어째서인가?
[김계락이 대답하였다.]
기(驥)가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것은 본디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멀리 갈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그 힘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므로 《시경》에 비물사려(比物四驪)라고 하였는데 비물(比物)이란 그 힘을 가지런히 하는 것이고, 《주역》에 승마인중(乘馬引重)이라고 하였는데 인중(引重)이란 그 힘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장의 취지가 비록 기(驥)로 군자를 비유한 것이기는 하지만, 기(驥)에게 있어서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공로가 있기 때문에 힘이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기예(技藝)의 재능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재능이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니, 그 나누어 말한 바가 어찌 이른바 각기 그 법도에 마땅하다[各當其則]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以德報怨]’는 것이 비록 노씨(老氏)의 학설이기는 하지만 충후(忠厚)의 도(道)가 되기에 해로울 것이 없는데, 성인이 그르게 여긴 것은 어째서인가? 원한에 크고 작은 것이 있으니, 보답하는 방법도 각기 다름이 있을 듯하다. 임금과 아비의 원수라면 본디 덕으로 갚아서는 안 되겠으나, 아주 작은 원한 같은 것이라면 덕으로 갚는 것이 어찌 충후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주자는 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을 의도가 있는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미 덕(德)이라고 했으면 공(公)일 뿐이지 사(私)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 듯한데, 사(私)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원망하거나 은혜롭게 여기는 것은 사람이 면할 수 없는 바인데, 보답함에 각기 합당함이 있어야 하는 것은 또한 이치로 보아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는 노씨의 학설은 겉으로 보면 비록 충후한 듯하나 그 사실은 상대와 내가 서로 뚜렷하고 취사(取舍)에 공평함을 잃은 것이니, 성인이 배척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원한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합당한 방법으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아주 작은 원한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그 합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갚는다면, 곧음으로써 갚으라는 성인의 가르침에 어찌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집주》에 이른바는, 이 덕(德) 자가 덕성(德性)의 덕이 아니라 은덕(恩德)의 덕이기 때문에 사(私)라고 한 것이니, 대개 의도적인 데에서 나와서 도리어 지공(至公)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하학상달(下學上達)은 정자가 “뜻이 말 바깥에 있다.”고 하였다. 이른바 ‘말 바깥’이라는 의미는 주자(朱子) 문하의 질문과 대답에 본디 이미 말해 놓은 것이 있지만, 후학이 이것을 인하여 뜻을 드러내 밝히는 것도 상달(上達)의 공부라고 할 것이다. 상세히 변증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 상달(上達)이라는 두 글자는 군자상달(君子上達)의 뜻과 같은가, 다른가?
[서형수가 대답하였다.]
삼가 일찍이 정자가 이른바 “아래로 사람의 일을 배우면 곧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게 된다.”라고 한 가르침과 주자가 이른바 “이치 바깥에 일이 없고 일 바깥에 이치가 없다.”라고 한 학설을 거듭거듭 참고하여 따져 보았더니, 그 요체는 단지 ‘현(顯)과 미(微)는 간격이 없고 체(體)와 용(用)은 근원이 하나이다[顯微無間 體用一原]’라는 여덟 글자에 있었고, 사람의 일과 하늘의 이치가 묵묵히 서로 딱 들어맞는 오묘함은 또한 말로 형용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이른바 ‘뜻이 말의 바깥에 있다’는 것일 겁니다. 상달(上達)이라는 두 글자는, 이 장에서는 하학(下學)을 상대로 하여 말한 것이고 앞 장에서는 하달(下達)을 상대로 하여 말한 것이니, 글은 비록 서로 같으나 뜻은 사실 조금 다릅니다.
부자가 명(命)을 말하고 천(天)을 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이 명(命) 자를 주자는 ‘기(氣)가 운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인도 또한 기수(氣數)를 말하는가? 비록 중인(衆人)을 위해서 말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찌하여 하늘의 이치로 깨우치지 아니하고 굳이 기수(氣數)로 말을 하였는가?
[이면긍이 대답하였다.]
천(天)은 이(理)로 말하는 것이고 명(命)은 기(氣)로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명(命) 자는 무지명의(無之命矣)나 불행단명(不幸短命)의 명(命)과 함께 기수(氣數)에 속하는 것입니다. 성인은 명(命)을 말하지 아니하지만, 일이 어찌할 수 없는 곳에 이르면 명을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명에 편안하면서도[安於命], 또한 중인을 위해서는 말을 하는[爲衆人道] 까닭입니다.
‘어지러운 나라를 떠나 다스려지는 나라로 가는 것[去亂國 適治邦]’이 곧 이른바 피지(辟地)라면, 천하가 무도한 때를 당하여 갈 만한 곳이 없어서 몸을 숨기고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는 것은 이것은 바로 현자(賢者)가 피세(辟世)를 하는 것인데, 《집주》에서는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을 해당시켜 말하였다. 백이와 태공은 처음에는 비록 주(紂)를 피해서 바닷가에 가서 살았지만 나중에는 또 서백(西伯)에게로 돌아왔으니 이것은 또한 피지이다. 피세라고 할 수 없는데도 《집주》의 학설이 이와 같은 것은 어째서인가?
[조제로가 대답하였다.]
백이와 태공이 주(紂)를 피해서 바닷가에 가서 살았던 것은 바로 피세(辟世)한 일입니다.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문왕(文王)에게로 돌아온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바닷가에서 지낼 때에는 참으로 이미 세상을 피해 살면서 마음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으니, 문왕이 노인을 잘 봉양할 줄을 어떻게 미리 알아서 돌아올 생각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작(作) 자의 뜻에 대해서는 이미 이씨(李氏)의 학설을 인용하였으니 지금 다시 의논할 것 없고, 또 이 장의 글뜻도 참으로 굳이 지나치게 따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 장이 위 장과 아래 장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에 이씨(李氏)는 ‘일어나 은둔하려 떠나가다[起而隱去]’로 작(作) 자의 뜻을 풀었는데, 작(作) 자에는 단지 기(起) 자의 뜻만 있는 것이니, 은거(隱去)라는 두 글자를 첨가한 것은 끝내 의문이 없을 수 없다. 일곱 사람이 누구인지는 우선 제쳐 두고라도, 하나의 작(作) 자가 은거(隱去)가 되는 까닭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이익진이 대답하였다.]
이 장이 비록 피세(辟世)와 신문(晨門) 두 장 사이에 있지만, 본디 스스로 하나의 장이 된 것이니, 작(作) 자의 새김을 은거(隱去)로 한 것은 과연 의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이공(張爾公)은 일민장(逸民章)에서 죽간(竹簡)이 끊어진 것이라는 학설을 주장하였으니, 대개 작자칠인(作者七人)을 일민(逸民) 일곱 사람 뒤에 연결하면, 칠인(七人)이라는 말이 분명한 근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작(作) 자의 새김도 이씨의 학설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은거(隱去)의 뜻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자로(子路)가 신문(晨門)에 대해서, 어디서 왔느냐는 그의 질문에 답하여 이미 그와 더불어 수작을 하였다면, 신문이 공씨(孔氏)를 기롱할 때에 의당 대답을 했어야 할 텐데,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아니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곤수(李崑秀)가 대답하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에 공씨에게서 왔다고 대답한 것은, 신문(晨門)이 장저(長沮)나 걸닉(桀溺) 같은 부류의 사람인 줄을 알지 못한 것이고, 성인을 기롱하는 그의 말을 듣고 다시 그와 더불어 변론하지 않은 것은, 도(道)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의논할 수 없기[道不同 不相爲謀] 때문이었습니다.
그 경쇠 소리를 듣고 그 마음을 알았으니, 도(道)는 비록 같지 않더라도 사람은 수준 높은 사람이다. 공자가 접여(接輿)에 대해서는 수레에서 내려서 그와 말을 해 보고자 하였고, 하조장인(荷蓧丈人)에 대해서는 자로(子路)로 하여금 다시 돌아가서 뵙도록 하였는데, 이 사람에 대해서는 문 앞을 지나가도록 내버려 둔 것은 어째서인가?
[윤행임이 대답하였다.]
접여가 공자 앞을 지날 때 공자가 그와 더불어 말을 하고자 한 것은 접여의 노래가 공자를 위하여 부른 것이므로 공자가 그의 뜻에 대답을 아니할 수가 없어서였고, 하조장인이 자로를 머물게 하고 대접하여 공자가 자로로 하여금 다시 가서 뵙도록 한 것은 장인(丈人)이 장유(長幼)의 예(禮)를 행하였으므로 자로가 그 예에 답하지 아니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하궤은사(荷蕢隱士)의 경우에는, 공자의 경쇠 치는 소리를 듣고 스스로 품평을 한 것일 따름이고 일찍이 부자에게 예를 차린 것도 아니고 부자에게 뜻을 부친 것도 아니니, 부자 또한 어찌 그 득실(得失)만 논하고 그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모두 그러했다면, 《상서(尙書)》에서 다만 고종(高宗)에 대해서만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리고 강왕(康王)이 즉위할 때에 가복(嘉服) 차림으로 제후(諸侯)들을 만났고 또 승황(乘黃)과 옥백(玉帛) 같은 폐백을 받았으며 바로 이때에 나가서 응문(應門) 안에 있었다. 그렇다면 양암(諒陰)의 제도는 옛날에는 그러했지만 내려와 성왕(成王)과 강왕에 이르러서는 또한 다 잘 그렇게 시행되지 못한 것인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고종 때에 상례(喪禮)가 무너져서 시행되지 않았는데 고종이 시행하였으므로 《대기(戴記)》에 고종의 효도를 특별히 말하고 덧붙이기를 “효심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았기 때문에 고종(高宗)이라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양암을 말하면서 고종을 특별히 말한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일 것입니다. 강왕(康王)의 일은, 이것은 바로 즉위하여 처음 조회를 보는 예이니, 고종이었더라도 그 처음 조회를 보는 예는 또한 필시 이러했을 것입니다.
주자가 예(禮) 자를 풀이할 때엔 반드시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고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예 자에 대해서는 다만 사씨(謝氏)의 학설을 인하여, “달(達)하여 분수가 정해짐이다.”라고 풀이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리고 자유(子游)가 부자에게 들은 바는 “소인은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小人學道則易使]”라는 것인데, 이 장에는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을 부리기 쉬워진다.”라고 하였다. 부자의 앞뒤 가르침이 각기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강세륜(姜世綸)이 대답하였다.]
천리의 절문과 인사의 의칙이라는 것은 예(禮) 자의 정의(正義)이고 달하여 분수가 정해진다는 것은 예를 좋아하는 효험인데, 호례(好禮)와 학도(學道)가 비록 위아래의 구분이 있지만 도(道)와 예(禮)는 처음부터 두 갈래가 아니니, 앞뒤의 가르침에서도 또한 그 같지 않은 바를 보지 못하겠습니다.
위는 헌문편(憲問篇)이다.
[憲問]
此章集註曰憲之狷介。邦無道穀之可恥。固知之矣。至於邦有道穀之可恥。未必知也。旣知無道穀之可恥。則不知有道穀之可恥。何也。瀅修對。邦有道而穀者。世治而無可行之道也。邦無道而穀者。世亂而無能守之節也。憲之狷介有守廉謹安貧者。其於無道穀之可恥。固已講之熟矣。而至若世治而行道。非知足以經世。才足以濟物者。不可得以能之。夫子此訓。正欲推廣其不爲之志。以進於有爲之域也。克伐怨欲之不行。未必不如克己復禮。而孔子不許其仁。何也。聖門言仁。有指全體而言者。有指事功而言者。惟玆不行二字。屬之全體則未也。屬之事功。無所不可耶。種仁對。不行與四勿不同。勿者掃除廓淸。痛斷苗脈。無克伐怨欲之可言。不行者。禁制裁抑。毋至肆行。而猶有所行者在中。此夫子所以不許其仁。而若以事功論仁則管仲尙許之。此章所云。豈不優得仁字。惟是此章本義。直從心體上論仁故也。有道無道兩道字之義。可詳言之歟。勿論有道無道之邦。言忠信行篤敬。可以行矣。何必危言危行。亦何必危行言孫乎。且行顧言言顧行。君子之道。則恐未有行危而言獨孫。言孫而行獨危者。而聖人必曰危行言孫者何也。種仁對。言忠信行篤敬。主言行而言其跬步不可離之意也。危言危行。危行言孫。主世道而言其持身遠害之道也。所主而言者。固自不同。而孫之爲言。亦非卑屈而取容也。蓋不失其正。而特少致委曲焉。則委曲之中。其毅然自守者固自如。又豈可謂危孫之不相顧也。德與仁。同歟異歟。若謂之同則或曰有德或曰有仁。言各有指。對待說去。烏在其爲同乎。若謂之異則有德者必有仁。有仁者必有德。德外無仁。仁外無德。烏在其爲異乎。瀅修對。德與仁。雖無異同。而德者行道而有得於心者也。仁者心德之全也。旣謂之行道有得。則隨其所得淺深。皆可爲德。旣謂之心德之全。則萬善具足。一疵不存。然後方可爲仁。雖不可判爲二物。 而亦不容混而一之也。适之問。何以爲尙德歟。不尙德則不可謂君子。而聖人之旣曰君子。又曰尙德者何也。集註曰君子之人而有尙德之心。曷嘗有不尙德之君子。而必下一而字於君子之人四字之下。有若以爲旣是君子而又能尙德者何也。顯道對。知德者鮮。而适之言如此。則宜夫子之許以君子許以尙德。而君子以資質言。尙德以心德言。故集註亦曰可謂君子之人。而有尙德之心。君子與尙德。固各有所指也。小人而仁者。誠無之矣。至於君子而有不仁者何也。謝氏曰。君子志於仁。然毫忽之間。心不在焉。未免爲不仁。然則三月不違之顔子。固可謂君子而仁者。而三月之後心或有違。則亦不可謂君子而仁者歟。濟魯對。臧孫之知而夫子有三不仁之斥。子文之忠而夫子有焉得仁之訓。此所謂君子而未仁者也。知顔子之不能無違於三月之後。特其洪爐之點雪。則程子所謂未化。張子所謂心麤。猶之可也。豈可以未仁之目加之乎。此勞字。勞心之謂歟。勞力之謂歟。且愛與忠。先儒之
論。各自不同。或以爲只言父之愛子臣之忠君。或以爲不但是父之愛子。兄之於弟士之於友君之於臣師之於弟子。亦如是。不但是臣之忠君。子亦忠於父。士亦忠於友。凡爲人謀亦忠。兩說孰是。勉兢對。此勞字。實包心與力。恐不可偏屬一邊。而忠愛之釋。兩說俱皆有據。以此章正義言之。父之愛子臣之忠君是已。若以餘意推之。自敵以上。何往不忠。自敵以下。何往不愛。聖賢之論子產。各有不同。夫子則許以惠人。孟子則言其惠而不知爲政。何也。行恁對。夫子所謂惠人。以子產之必德而言也。孟子所謂惠而不知爲政。以子産之政才而言也。此云貧而無怨難。富而無驕易。蓋因其窮足而別其難易。然貧者易怨。而能無怨。是誠難矣。富者易驕。而能無驕。不亦難乎。以貧而無怨。較貧而無諂則無怨難。以富而無驕。較富而好禮則不驕易。而以無怨無驕。比而論之。則似無難易之別。聖人之訓如此者何也。種仁對。諸家之說。或謂貧是逆境。富是順境。處順易而處逆難。或謂稍欲自好則亦能無驕。而非處 困心亨。不能無怨。數說皆足以發明。而且無怨二字。雖不及樂底地位。亦已超無諂境界。若所謂無驕。本與無諂一例。則卽此而其難易淺深。較然明甚。以公綽言之則優於趙魏老。而不可爲滕薛大夫。然德有餘而才不足者。旣不可任國政。則才有餘而德不足者。亦不可任國政乎。大學絜矩章引秦誓所云一介臣。以明用人之義。而所謂一介臣雖斷斷無他技。尙能保其子孫黎民。有利於人國。以是推之。才雖不足。德能有餘者。固可以任國政。而公綽之不可爲滕薛大夫者何也。煕朝對。德有餘而才不足。與才有餘而德不足者。均之從政則殆。而一介臣之斷斷無技。雖有盧玉溪有德無才之說。第觀其人之有技若己有之。此便是集衆善以爲善者。則黎民之所以保。國家之所以利。豈非才德兼備中做得來者耶。成人之義。可以詳言歟。卞莊子固是勇者。而聖門諸子之中。勇莫如子路。此又是子路所問也。以子路之勇。答其所問。則揆以好勇過我。無所取材之訓。似尤切近於引喩他人。而特擧卞莊。不曰爾之勇者何也。馥對。此章成人。蓋就子路之可及者告之。若論成人之極致。聖人而後可也。至於卞莊之勇。雖與子路一般。夫子旣以好勇過我戒子路。則豈容於此反許其勇。以益其暴虎馮河之病哉。以臣要君。罪之大者也。吾不信三字。雖云是春秋誅心之法。亦終有包含意。以聖人扶倫綱嚴懲討之義。宜乎直斥其要君之罪。而猶爲此婉辭者何也。翼晉對。此章不曰求爲後。而必曰以防。不曰求爲後於季氏。而必曰求爲後於魯。不曰要季氏。而必曰要君。則紇魯臣也。防魯邑也。君魯君也。以其臣
據其邑要其君者。其無君無上之心。將安所逃乎。臣未見其爲婉辭也。譎字之義。可以詳言歟。桓,文之心。皆是譎而不正者。則此所云譎而不正。正而不譎。可知其以事言。而但孔子不分心與事。但言其譎不譎者何也。晉賢對。鄭玄以詐訓譎。而朱子改以詭。蓋詐乃詐僞欺騙之謂。詭是詭機陰祕之稱。則朱子之所取舍。其義有可見矣。若其心與事之分則此云正而不譎者。特視晉文差可謂正。差可謂不譎云爾。恐未必以心與事對說。以臣愚見。正不正。似皆指心而言。譎不譎。似皆指事而言也。管仲卽一假仁者也。孔子未嘗以仁輕許於人。而至於假仁之管仲。則再言如其仁而深許之者何也。未得爲仁人而有仁之功。果如集註所論。則管仲非仁人也。旣非仁人則雖有仁之功。恐不足許。而不但許之而已。必再言而深許之。何其與孰不知禮之斥。大相反耶。瀅修對。仁有以德言者。有以功言者。以德則非心無私而事當理者。不可以當之。以功則苟澤及人而惠推遠者。皆可以稱之。管仲之糾合諸侯。不假 威力。雖是假仁。其爲仁者之功效則大矣。然則此章之仁。與全體之仁有異。而其所以深許之者。豈非聖人不以人發功之意耶。文子之薦僎。幷有三善。則稱之以智可矣。稱之以公可矣。稱之以忠亦可矣。而必曰可以爲文者何也。論此者或曰夫子之聞之。在於文子薦僎之時。或曰夫子之聞之。在於文子旣諡之後。此又不可不辨也。晉賢對。此不曰智矣公矣忠矣。而必曰文矣者。可見夫子之聞之在於文子旣諡之後。蓋聖人之於公叔文子。聞公明賈之對。而猶不信然者。以其享 衛公葬瑕丘數事。俱不免爲大過也。及其沒也。衛人以貞惠文子諡之。則夫子亦必疑之曰貞與惠。猶可也。何以謂之文也。及聞此薦僎同升之事。始乃釋然曰。卽此一事。可以爲文。以前後問答觀之。始疑其溢美。而終得其實迹者。尙何疑乎。論以輕重之別則似當首言治宗廟。次言治軍旅。次言治賓客。而治賓客反居於治宗廟之上者何也。翼晉對。三臣之才有廣狹。三事之職有品命。若論其才。文子之勤學好問。必勝祝鮀之佞。王孫之俗。若論其職。虞廷秩宗。不在九官之首。周官大祝。亦列六卿之下。先後之序。恐當以人之高下職之尊卑看。
非言之難。行之惟難。則雖非言不怍者。爲之豈不難乎。况此大言之人。初無爲之之意。則是乃徒言而不爲之者也。恐不足以難易論。而夫子不曰不爲之。而必曰爲之難者何也。濟魯對。大言不怍之人。固未嘗有爲之之意。而聖人不曰不爲。而曰爲之難者。蓋亦辭不迫切。此與巧言令色之鮮仁同。子路好勇者也。犯之非所難。而所當加勉者。在於不 欺。然則夫子之答之也。似當只言勿欺。使之益勉其所當勉。而兼言犯之者何也。啓洛對。子路之病。在於燭理未明。强所不知。則固當先戒以勿欺。而但言勿欺而已。則告子路者固善矣。其於事君之道。猶有說不盡者。尙可謂聖人之言。觸處皆通乎。上達當用達字。下達亦言達字何也。達字自是好箇字也。是以中庸所謂達道達德達天德者。論語所謂在邦必達在家必達。所指而言。雖各不同。皆從君子邊說。而此外達字之見於經傳者。莫非好題目。則此 達字恐不宜用於日趨汙下之小人。而夫子之言如此。須無謂已有朱子及諸儒說而明辨之。瀅修對。達者有窮到極至之意。與止至善相似。故凡見於經傳者。皆從君子邊說。然未嘗如仁義之爲定名也。如論語在邦必達。孟子達不離道。禮記推賢而進達之達字義。與此不同。而且以中庸之達道達德言之。達是賓也。道與德是主也。此章之上達下達。亦如達道達德。精神歸趣。專在上下二字。則與夫里仁之喩於義喩於利之喩字。孟子之孶孶爲善孶孶爲不善之孶孶字。一例看可也。立
言之不拘於賓字。經傳之體。大抵然也。爲學者固當爲己。而大學之道在於明新。則古之學者奚但欲得於己。又將推以及人。然則此所云爲己二字。雖對爲人而言。較之大學之訓。或不無詳略之別歟。馥對。天下萬事。何莫非己分內事。齊家者是我有齊家之責。治國者是我有治國之責。以至民吾同胞則使斯民各得其所。亦爲己也。物吾與也則使是物各遂其生。亦爲己也。若以家國天下。看作分外之事。不幾於有體無用之學乎。欲寡其過而未能云者。雖是愈自卑約之言。但不能寡過。則其過多矣。若使伯玉自言之。則論以自謙之義。固當如此。而使者之以此對之。恐涉如何。聖人之再言使乎以重美之者。何也。萬始對。欲寡過者。不自是也。而未能者。不自足也。不自是。故省察之念。常若不及。不自足。故克治之工。惟恐或歉。知非生如安行之聖人。安得無念慮之差言行之失。此非謙退之辭。乃善形伯玉自修之篤。宜夫子重言以美之也。此位字。與中庸素其位之位字。同歟異歟。若謂之同
則位字雖同。而此章則曰思不出其位。中庸則曰素其位而行。曰行曰思。言各不同。若以爲異則此章旣曰思不出其位。中庸又曰不願乎其外。究其語意。未見有異。同異之間。願聞明的之論。種仁對。此位字與中庸之素其位。同一位字。而此曰思則思在於未行之前。中庸曰行則行在於旣思之後。思爲行之本。而行固因於思。此又其下工次第之少異者也。恥其言過其行。集註釋爲兩事。而恥其言與恥躬之不逮。語意似有不同者。至於過其行。朱子雖引過乎 哀儉之說。以明力行之意。而後儒亦以非中道疑之。抑胡氏說中或者所云恥其言之過乎行者。終是不可偏廢之論耶。馥對。放言易。故必要十分羞澀。然後方可以不放。力行難。故必要十分過激。然後方可以有進。或說非不粗通。而其於言不患不及。行不患其過之義。終覺齟齬。知者不惑。勇者不懼可也。仁者何以言不憂。朱子已於子罕篇知仁勇之訓。以理足以勝私。解不憂之義。而私字卽公字之對。則不曰公足以勝私。必曰理足以勝私者何也。且程子所云樂天二字。誠襯切於不憂。而不附之集註者何也。瀅修對。人心有欲則有求。有求則有得有失而憂患生焉。獨仁者之心。廓然大公。素其位行。此其所以不憂。而朱子之曰理不曰公者。公則見於事而在外。理則具於性而在中。以理訓仁之效。益覺親切有味。至於程子樂天二字。誠得不憂之實。而所謂樂天者。亦不外於理足以勝私一句。則朱子之不附集註。抑以是歟。不暇二字。卽聖人所以自引而深抑之之辭也。大抵 夫子之生知安行。從容中道。安有暇不暇之可論。而齊氏所云發憤忘食。樂而忘憂。及其他諸儒所謂夫子一生好古敏求。下學上達。安得有暇等說。似若眞以爲不暇者然。此果何如。萬始對。聖人至誠無息。純亦不已。此雖戒子貢之言。而其實固未始有暇也。文王亦生知之聖。而豈不曰日昃不遑乎。此章凡四見。而文各有異矣。文旣各異則義必有不同者。此眞所謂異中有同同中有異者。可以參考四章。明辨其同異耶。且論語中一言而重出者固有之。而至於此章。不但重出。至於四見者何也。顯道對。此章屢見。而所主之意少異。或重在知人。或重在能字。雖曰門人之各記所聞。聖人於此。必丁寧勸勉者。豈非出於反躬自治之微旨乎。不逆不億而自然先覺於人之情僞者。誠是賢者。而但所謂先覺。是從知邊說則似當曰智乎。或曰明乎。而必曰賢乎者。何也。啓洛對。先覺固從知邊說。而人之情僞。不待逆億而自然覺得者。雖緣天姿之高明。亦由學問之精到。所謂賢者。實兼天姿與學問說。不專指知一邊而已。驥之所以得驥之名者。誠以其調良之德。而一日而千里。卽驥之才也。則何不曰不稱其才。而必曰不稱其力乎。况此章之旨。以驥比君子。而君子之所以得君子之名者。以德不以才。則才字似緊於力字。而聖人之訓如此者何也。啓洛對。驥之一日千里。固可謂才。而所以致遠則其力也。故詩曰比物四驪。比物者。齊其力也。易曰乘馬引重。引重者任其力也。此章之旨。雖以驥比君子。而在驥則有任重之功。故力爲美。在人則用技藝之能。故才爲美。其所分言。豈非所謂各當其則乎。以德報怨。雖是老氏之說。不害爲忠厚之道。而聖人之非之者何也。怨有大小。則所以報之者。似各不同。君父之仇則固不可報之以德。而至於纖芥之怨則報之以德。豈非忠厚之道乎。朱子以以德報怨。謂出於有意之私。旣曰德則似可謂公耳非私。而謂之以私者何也。種仁對。有怨有德。卽人所不能免。而報各有當。亦理之所必然也。老氏以德報怨之說。外面觀之。雖 似忠厚。其實物我相形。取舍失平。則聖人之斥之宜矣。怨無大小。報之宜循其道。雖曰纖芥之怨。苟以其不當報者報之。豈不乖於聖人以直之訓乎。至於集註所云。此德字非德性之德。卽恩德之德。故謂之私。蓋以其出於有意。而反害至公也。
下學上達。程子以爲意在言表。所謂言表之意。朱門問答。固已言之。而後學之因是發明。亦可謂上達之工。可詳辨之歟。且此上達二字。與君子上達之義。同歟異歟。瀅修對。竊嘗以程子所謂下學人事。便是上達天理之訓。朱子所謂理外無事。事外無理之說。反覆參究。則其要只在於顯微無間體用一原八字。而人事天理。默契相合之妙。又不可以言語形容。此其所謂意在言表者歟。至於上達二字。此章則對下學言。前章則對下達言。文雖相同。意實稍異矣。夫子言命而不言天者。何也。此命字。朱子以爲氣之所運。然則聖人亦言氣數耶。雖云爲衆人言之。何不以天理曉之。而必以氣數爲說歟。勉兢對。天以理言。命以氣言。此命字。與無之命矣不幸短命之命。同屬於氣數。聖人不言命。而事到無可奈何處。不得不言命。此所謂安於命。而亦所以爲衆人道者也。
去亂國適治邦。卽所謂辟地。則當天下無道之時。無處可適。而隱身不出者。此乃賢者之辟世。而集註以伯夷太公言之。伯夷太公。始雖辟紂於海濱。終又歸來於西伯。則是亦辟地也。不可謂辟世。而集註之說如此者何也。濟魯對。伯夷太公之辟紂海濱。正是辟世之事。若其聞養老歸文王。卽後來事。當其居海濱之時。固已遯世無悶。則文王之善養老。豈能先知而思歸哉。作字之義。旣引李氏之說。則今無容更議。且此章文義。誠有不必過求者矣。然此章間於上下章。故李氏以起而隱去。解作字義。而作字只有起字意。則添之以隱去二字。終不能無疑。七人之爲誰何姑捨是。一作字之爲隱去。可明言之歟。翼晉對。此章雖在於辟世晨門兩章之間。而固自爲一章。則作字之訓以隱去。果不能無疑。故張爾公有逸民章斷𥳑之說。蓋以作者七人。係之於逸民七人之後。則不但七人之說。明有根據。作字之 訓。不待李氏之說。而隱去之義。明白易見矣。子路於晨門。答其奚自之問。旣與之酬酢。則及晨門之譏孔氏。宜有所答。而默然無一言者何也。崑秀對。問其奚自而答之以孔氏者。不知晨門之爲沮溺者流也。旣聞其譏聖人之言。而不復與之辨論者。道不同不相爲謀故也。聞其磬而知其心。道雖不同。人則高矣。孔子於接輿。下其車欲與之言。於荷蓧。使子路反而見之。而至於此人。任其過門而去者何也。行恁對。接輿過孔子而孔子欲與言者。接輿之歌。 爲孔子發。而孔子不可不答其意也。荷蓧留子路。而孔子使子路反見者。丈人行長幼之禮。而子路不可不答其禮也。至於荷蕢則聽孔子之擊磬。而自爲之評品而已。未嘗致禮於夫子。寄意於夫子。夫子亦安得不論其得失而止哉。古之人皆然則尙書只言於高宗何也。且康王卽位之時。以嘉服見諸侯。又受乘黃玉帛之幣。而于斯時也。出在應門之內。然則諒陰之制。古則然矣。而降及成康之際。亦不能盡然歟。種仁對。高宗之時。喪禮廢缺不行。而高宗能行之。 故戴記特言高宗之孝。而系之曰孝高於人。故謂之高宗。諒陰之特言於高宗。豈以是歟。至於康王之事。此乃卽位始朝之禮。雖高宗。其始朝之禮。則亦必如此也。朱子之釋禮字。必曰天理之節文。人事之儀則。而此禮字則特因謝氏之說。以達而分定釋之者何也。且子游之所聞於夫子者。則曰小人學道則易使。此章則曰上好禮則民易使。夫子前後之訓。各自不同者何也。世綸對。天理之節文。人事之儀則。禮字之正義也。達而分定。好禮之效驗也。而好禮學道。雖有上下之分。道與禮。初無二致。則前後之訓。亦未見其不同也。以上憲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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