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지구인 할리우드는 원래 인구가 천 명도 안 되는 동네였다. 이곳에 1900년대 초반 영화사들이 이주해오면서 미국 영화산업의 중심지 할리우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긴 역사는 인종과 성별 등에 대한 차별과 편견, 그리고 도전과 저항으로 가득 차 있다. 최근 미국의 유명 월간지 '베니티 페어'에는 '할리우드를 바꾼 여성들'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여기에 실린 여성들의 성취와 업적은 놀라울 정도이고, 남성중심적인 세계에서 이렇게까지 덜 알려져 있었다는 점이 더 놀랍다. '베니티 페어'에 실린 여성들의 이야기를 간추리고 살을 붙여서 소개해본다. 세상의 벽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용감하고 창조적인 여성들이 아니었다면 할리우드는 지금과는 다른,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다.
와이파이를 발명한 세기의 미녀, 헤디 라마 (Hedy Lamarr)
오스트리아 출신 배우 헤디 라마는 요즘 말로 ‘세젤예’였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체코슬로바키아 영화 <황홀경>에서 그녀가 펼친 우아한 알몸 연기는 영화 사상 최초의 누드로 기록돼 있다. 이와 함께 헤디 라마는 자신이 단순히 섹시한 미녀가 아니라 여배우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국내에서는 1961년작 <삼손과 데릴라>의 데릴라 역이 유명하다.
헤디 라마는 여섯 번의 결혼과 이혼을 할 만큼 사생활이 불안정했는데, 첫 남편은 무기 제조업자 프레드리히 만들이었다. 그는 훨씬 어린 아내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했고 심지어 사업 미팅까지 끌고 다녔다고 한다.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지만, 그 덕분에 헤디 라마는 과학에 대한 지식과 비전을 얻었다. 이혼 후 할리우드로 건너간 그녀는 조지 앤틸이라는 작곡가를 만난 것을 계기로 무선통신기술을 개발에 착수했다. 1942년 미국 특허에 등록된 ‘비밀통신시스템(Secret Communication System)’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무선으로 제어되는 어뢰를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무작위로 피아노를 치듯 88개의 주파수로 어뢰에 신호를 보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기술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비록 특허 만료 때문에 죽을 때까지 자신의 발명으로 어떤 이득도 얻지 못했지만, 그녀의 아이디어는 와이파이나 블루투스 같은 현대 무선통신의 핵심적인 기술이 되었다. 이는 1997년에서야 세상에 알려졌고 헤디 라마는 미국 전자프론티어재단(EFF)와 오스트리아에서 여러 과학 관련 상을 받았다.
90년대 할리우드 최고의 흥행사, 셰리 랜싱 (Sherry Lansing)
출처 : The Hollywood Reporter 모델과 배우로 데뷔한 셰리 랜싱은 자신의 진정한 소질을 영화 비즈니스에서 발견했다. 그녀는 1980년 20세기 폭스의 사장 자리에 오르면서 할리우드 역사상 메이저 스튜디오 최초의 여성 사장이 되었고, 1992년에는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회장으로 취임해서 12년 동안 재직했다.
셰리 랜싱이 활약한 90년대는 파라마운트 픽처스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과 일치한다. 당시 그녀가 제작을 주도한 영화들의 면면은 <포레스트 검프>, <라이언 일병 구하기>, <브레이브 하트>, <타이타닉>, <미션 임파서블> 등이다. 비록 임기 말년에 잇단 흥행 참패로 명성에 다소 금이 가긴 했지만, 흥행과 수상, 파급력 등에서 그녀와 비견될 만한 실적을 남긴 경영자는 여전히 찾기 힘들다. 게다가 셰리 랜싱의 진짜 능력은 블록버스터뿐만 아니라 흥행성 높은 저예산 영화를 발굴하는 탁월한 안목, 필요할 때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투자하는 승부사 기질이었다.
또한 셰리 랜싱은 강한 여성상을 주제로 한 영화에도 관심이 많아서 할리우드의 오래된 이슈인 성 평등 문제에도 기여했다. 그녀는 자기가 영화계에 뛰어들었을 때만 해도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었다며 “나는 죽을 때까지 여자가 영화사 대표가 되는 걸 못 볼 줄 알았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의 유명 영화전문지 ‘할리우드 리포터’에서는 매년 미국 연예계 여성 중 자기 분야에서 선구적 역할을 한 여성들을 선정해 ‘셰리 랜싱 리더십 상’을 수여하고 있다. 메릴 스트립, 조디 포스터, 오프라 윈프리 등이 이 상의 수상자다.
영화 성 평등 측정지수를 개발한, 앨리슨 벡델 (Alison Bechdel)
출처 : CSU English Department 영화계에서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를 측정하는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를 통과하기 위한 세 가지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두 번째, 이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것. 세 번째,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들어있을 것.
최근 영화계의 성 평등 문제가 세계적인 이슈가 되면서 벡델 테스트가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얼핏 보면 매우 간단한 듯하지만 이 테스트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영화들은 의외로 상당히 많다. 스웨덴의 경우 2013년 벡델 테스트를 영화 산업에 도입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됐다.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에는 인증마크가 붙고, 상영 전에 이 인증마크를 보여주는 극장과 케이블 채널도 있다. 벡델 테스트는 최근 국내에도 소개되어 활용되고 있는데, 이를 통과한 주요 흥행영화는 <암살>, <도둑들> 등이 있다.
벡델 테스트는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1985년 처음 고안했다. 이는 그녀의 작품 <주목해야 할 레즈비언들(Dykes To Watch Out For)>에 등장하는 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앨리슨 벡델은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동성애를 포함한 논쟁적인 소재를 예리한 통찰력과 위트로 파헤치는 작가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아왔다. 대표작으로는 국내에도 출판된 <재미난 집>이 있다.
오드리 헵번 스타일을 완성한 전설의 디자이너, 에디스 헤드 (Edith Head)
출처 : Reel Hollywood Legends 할리우드 영화감독들이 가장 사랑했던 인물 중 하나인, 에디스 헤드의 직업은 의상 디자이너였다. 그녀는 단순한 디자이너가 아니라 감독의 아이디어를 보완하고 실현시킨 인물이었다.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배제하면서도 배우의 분위기를 이상적으로 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했고, 코미디부터 스릴러, 느와르까지 장르 불문하고 영화와 정확하게 어울리는 의상을 만드는 전설의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렸다.
1930년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스케치 아티스트로 출발한 에디스 헤드는 1938년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고, 그때부터 그녀의 천재적인 감각은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알프레드 히치콕이 거의 모든 영화에서 협업할 정도로 신뢰했던 파트너였으며, 베티 데이비스, 엘리자베스 테일러, 마를렌 디트리히, 셜리 맥클레인, 잉그리드 버그만, 오드리 헵번 같은 당대 최고의 스타들과 일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불멸의 패션 아이콘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를 탄생시킨 주인공이 바로 에디스 헤드다. <사브리나>,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오는 그 유명한 ‘헵번 룩’이 그녀의 손을 거친 작품이다.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오드리 헵번은 평소에도 에디스 헤드의 옷을 즐겨 입을 정도로 그녀의 의상을 좋아했다고 한다.
에디스 헤드가 의상을 담당한 영화는 약 500여 편에 달한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1,000편 이상이라고도 한다. 그녀는 아카데미상 의상 부문에 34번 노미네이트되어 무려 8번이나 수상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일주일에 4천만 원을 벌었던 작가, 프랜시스 매리언 (Frances Marion)
출처 : Women Film Pioneers Project 20세기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 프랜시스 매리언이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건 16세 때였다. 아버지가 파산하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신문사 수습기자로 취직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때는 종군기자로 참가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영화사에 들어가서 여성 감독 로이스 웨버의 보조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고, 이후 써내는 작품마다 폭발적으로 히트하며 스타 작가로 떠올랐다.
프랜시스 매리언은 커리어를 통틀어 300편이 넘는 작품을 각색하고 130편이 넘는 시나리오를 썼으며, 그중 <큰 집>과 <챔프>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두 번 수상한 최초의 작가가 되었다. 그녀는 영화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배우의 매력을 살리는 시나리오를 쓰는데 탁월한 작가였다. 어린 시절 인연이 있었던 왕년의 스타 마리 드레슬러가 퇴물이 되어 어렵게 사는 걸 보고, 그녀를 주연으로 기용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주는 등 제2의 전성기로 이끈 스토리는 유명하다.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메리 픽포드와도 절친한 사이로, 전속 작가라고 해도 될 만큼 여러 차례 작업을 같이 했다.
프랜시스 매리언은 시나리오 작가의 모델을 만들었으며, 또한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정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때로는 감독이 되어 자신의 시나리오를 직접 연출했고, 시나리오 작법 서적을 출판하거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전성기였던 1930년대 그녀의 수입은 일주일에 약 3천 달러였다. 오늘날의 시세로 환산하면 4만 달러, 한화로 4천 5백만 원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