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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단이 걸어온길 】 ✏ ~ 1/6🐾
민단 역사 ㆍ민단이 걸어온길ㆍ게재에 앞서 생각합니다.
☆역사 !
그것은 사전적 수사인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 그 어떤 사실이 존재해 온 연혁』
이라고만 짧게 정리하기엔 재일교포의 가슴에 묻힌 💧한의 역사💧는 깊기만 하다.
임지현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라는 책에서도 말을 하지만 민족주의는 타자를 배척하는 도구로 많이도 역사에서 이용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우월적 자만을 가진 민족이 독일이라고 할 수있고, 제일 큰 피해자는 유대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도 자민족 우월주의는 조선에 피를 흘리게하는 식민지화를 가져왔고,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교포에게는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생존을 위협해왔다.
차별 !
인류의 〈인종차별의 역사〉를 보더라도 결코 우리 한민족만 차별을 받지는 않았다.
철학자 〈카를야스퍼스〉가 지칭한 기축시대는 인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종교와 철학이 나타났었다.
인류의 정신적 큰 스승 예수,석가,공자가 태어났다.
인간은 그들로부터 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도 긴 역사를 이어져 왔으나 여전히 차별은 존재한다.
그 수 많은 세월이 흐른 아직도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인류는 지구 어느한편에서 계속 피를 흘리며 진화의 과정을 걷고있다.
차별에 대한 우리의 아픔은 언제나 타인의 아픔보다 크게 느껴지는것. 진화라는 이름으로 한쪽으로 밀어 놓기에는 재일교포의 현실은 그렇게 우리를 편하게 해주고 있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더 더욱 조국이 아직도 이념의 분단이 존재하기에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재일교포의 과거사로 들어가서 타국에서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들여다 보자.
형제들간에 이념으로 싸워야 했던 과거사를 함께 알아보자.
피를 통한 혁명을 부르짖는 공산주의의 이념에 빼앗긴 같은 민족 북한을, 일본 속에서 규탄하며 싸운 과거 굴곡의 몸부림을 보자.
그리고 조국과 함께 번영을 꿈꾸는 재일교포의 삶을 들여다 보자.
✔6회에 걸쳐서 시대순으로 민단 중앙본부에서 정리한 사료史料이오니
꼭 정독하여 읽어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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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자료실日本' 밴드로 초대합니다.
https://band.us/n/a0a1X2Y0u9b0p
From 박정석ㆍ도쿄
📚【민단이 걸어온길 ! 】 ~ 2/6
♦2) 1950년대
가.1950년6월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한국동란이 발발함.
조련은 1949년 GHQ에 의해 해산 당하고 일본공산당 지도하에 「민전」을 조직하여 격렬한 무장 투쟁을 전개해 민단과도 치열한 대립투쟁이 일어남.
나. 1950년7월 민단은 644명의 재일청년학도를 중심으로 학도의용군을 조직하여 인천상륙작전 참가를 위시하여 조국전선에 파견함.
다.1953년7월 정전이후에도 각지에서 6·25때의 대립감정으로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1955년「재일본조선인총련맹」으로 노선전환과 탈바꿈한 구조련을 상대로 통일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함.
북송에 대해 전조직이 반대투쟁
라.1959년8월 민단은 일본적십자와 북한적십자 사이에 체결된 「재일조선인귀환협정」에 의해 조총련동포를 북한 공산치하에 북송하는 것은 인도적인 면에서도 용납될 수 없다하여 「북송반대투쟁」을 전개함.
#재일교포역사
📚【민단이 걸어온길 ! 】 ~ 3/6
♦3) 1960년대
가.본국에서 「4·19혁명」, 「5·16군사혁명」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민단내에서는 본국에 대한 자세 문제로 일시적인 혼란이 일어났고, 같은 시기에 민단에 대한 조선총련의 공세가 격심해짐.
365,000명 영주권 신청
나.1965년 「한일회담」 타결을 둘러싸고 민단내에서는 찬·반 양론으로 다소 혼란이 있었으나 본국의 발전을 위해 민단으로서는 대국적 견지에서 한일협정 내용에 순응키로 함.
다.1966년1월부터 1970년1월까지 한일협정에 의한 영주권신청운동에 역량을 경주,신청자가 36만5천여명을 돌파하여 대한민국의 재외국민으로서 명실공히 조직기반을 확립하게 됨.
📚【민단이 걸어온길 ! 】 ✏ ~ 4/6
♦4) 1970년대
가.1970년 오오사카(大阪) 만박시 본국인초청사업 등을 전개하여,본국과의 연대를 강화함.
나.1972년부터 1973년에 걸쳐 조선총연의 영향을 받은 일부 불순분자들에 의한 민단에 대한 파괴공작이 극심하여, 민단조직이 일시적으로 위기적인 상황에 직면하였으나 조국과 민단을 아끼는 단원들과 청년들의 노력에 의해 정상화됨.
다.민단조직 정상화와 더불어 본국에서 일어난 「새마을운동」에 부응하고자 민단도 새민단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본국의 150여개 부락과 자매결연을 맺고 10여억엔(일화)의 자금을 지원함.
라.1975년7월부터 조총련산하 동포들의 성묘단을 조직, 본국에 보내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약 4만8천명에 달하는 조총련동포들을 민단조직에 포섭함.
마.「새민단」운동을 전개하여 조직정비와 조직강화에 힘쓴 결과, 전국 49개 지방본부, 383개 지부, 약 5천개의 반조직을 구축(당시 1976년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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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80년대
가.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권익옹호투쟁을 전개하여, 1965년 한일협정에서 미비했던 법적지위와 처우상의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정부와 끈질기게 대립함.
공영주택 입주문제, 아동수당, 연금등의 복지문제, 국적에 의한 취직차별문제, 지문날인 문제 등의 외국인등록법의 인권침해문제 등과 일관하여 계속 대립함.
1986년 「지문날인철폐 100만명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180여만명의 서명을 획득, 권익운동의 계기를 마련하게 됨.
이는 1991년1월10일 한일외상간의 각서를 통해 일정부분에 있어 성과를 거두었음.
나.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민단을 중심으로 재일한국인들이 540 억원(한화) 에 달하는 성금을 모금하여 올림픽 개최를 지원하였으며, 일본인을 포함한 많은 인사들을 참관단으로 조직해 서울에 보내, 홍보활동에도 커다란 성과를 올리는 등 본국과의 유대감을 강화함
다.본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재일경제인을 중심으로 「재일한국인투자협회」를 조직하여 「신한은행」신설과 함께 금융면에서도 본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해 왔으며, 60년대말부터 70년대에 진출한 재일한국인 기업들을 후원함.
라.민단은 그 밖에 독립기념관 건설모금운동, 평화의 댐 건설모금, 수해의 연금, 바이 코리안운동 (한국물산구매운동), 대전엑스포 지원사업 등 본국에서 일어난 전국민적인 문제, 사업에는 언제나 본국 국민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 해 왔음
📚【민단이 걸어온길 ! 】 ✏ ~ 6/6
♦6) 1990년대
가.1991년1월10일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에 관한 한일외상간의 합의를 통해, 협정영주 3대이후의 기속적(羈束的)인 영주권부여가 확정되었으며, 지문날인 철폐등에도 일정한 성과가 있었음.
그러나, 처우에 있어서는 국적에 의한 취직 차별, 민족교육권 문제, 지방 자치체에 대한 참정권 문제 등 미비한 점이 아직도 남아 있음.
나.1994년5월, 「91년 문제」해결이후, 민단은 특수한 역사적인 연유로 인해 영주하게 된 재일동포가 일본지역사회에 생활자로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하고, 반세기에 이르는 무권리 상태를 지양하기 위하여 「지방자치체 참정권운동」을 개시함.
다.1996년10월3일 민단 창단 50주년을 기념하여 재일한국인은 일본사회에서 정주해 나갈 것을 내외에 밝히고, 한국인으로서 일본지역사회에서 「공생·공영」을 지향해 갈 것을 다짐함.
라. 1997년말 본국이 IMF위기에 처했을 때 재일동포는 국난 타개에 동참한다는 뜻에서 「외화송금운동」을 전개하여, 약 870억엔의 일화를 송금하였음. 이는 많은 민단 단원에게 본국의 외환위기 극복에 일조를 했다는 자부심을 안겨주었음
그리고 조국과 함께 번영을 꿈꾸는 재일교포의 삶을 들여다 보자.
✔6회에 걸쳐서 시대순으로 민단 중앙본부에서 정리한 사료史料이오니
꼭 정독하여 읽어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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