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삼국지에 얽힌 고사성어
나관중의 삼국지, 오승은의 서유기, 소소생의 금병매, 시내암의 수호지 등이 중국 사대기서라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데, 그 중 나관중의 삼국지에 얽힌 고사성어입니다.
※ 소소생의 '금병매'는 당시 음서로 박해를 받았으나 그 뛰어난 문학성과 사실적 필치로 인하여
중국 소설문학의 선구자 반열에 오른 작품으로써,
그 제목인 '금병매'는 작중 인물 중 '반금련, 이병아, 춘매'의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씩 차용된 것입니다.
1. 도원결의(桃園結義)
삼국지의 주역인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은 이야기에서 유래되어 "의리로 맺어져 죽음을 맹서하는 동지애"를 비유할 때, 이 "도원결의"는 자주 인용되고 있다.
황건적의 난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漢 조정에서는 각지에서 황건적을 토벌하기 위해 의용군을 모집한다는 방을 나붙이기에 이르렀다.
유비가 살고 있던 幽州(유주)의 琢縣(탁현)에도 이 방이 나붙어 어느 날 유비는 그것을 보고 한숨을 길게 내리 쉬고 있었다. 그때 한 사나이가 유비에게 다가와 싸울 생각은 않고 한숨만 내쉬고 있느냐고 고함을 쳤다. 그가 바로 연인 익덕 장비였다.
두사람은 수인사를 나누고 주막에 들어가 함께 나라일을 걱정하게 되었다. 얼마 후 이 주막에 한 거한이 들어왔으니 그가 바로 관운장이었다. 어딘지 늠름한 귀골이라 인사를 청해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무르익어 세사람은 마침내 의기투합, 나라를 위해 몸바쳐 일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유비의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마련한 음식을 들며 후원 복숭아나무 밑에서 의형제를 맺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곧 오늘까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저 유명한 "도원결의(桃園結義)" 의식이다.
2. 비육지탄(비肉之嘆)
漢王朝의 부흥을 외치며 관우, 장비와 더불어 일어선 유비는 처음에 명망이 올라가는 듯 했으나 힘이 모자라는 까닭에 결국에 조조에게 몰리게 되었다.
그는 각지를 전전한 끝에 종친인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날 유표는 유비를 초대해 주연을 베풀었다.
유비는 유표로부터 신야라는 작은 성을 받아 4년째 하릴없이 성주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사이 하북쪽에서는 조조와 원소가 끈질기게 밀고 밀리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술자리조차 흥이 날리 없는 유비는 멍하니 있다가 변소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유비는 자신의 넓적다리에 살이 많이 찐 것을 보고는 그 동안 웅지를 펴지 못한째 얼마나 안일하게 살아왔는가를 깨달았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비탄에 젖은 유비는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주연자리로 돌아온 유비를 보고 유표가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눈물의 흔적이····" 그러자 유비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난 시절에는 언제나 말을 타고 돌아다녀서 넓적다리에 살이 찔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오래 말 안장을 멀리해 살이 붙었습니다. 이렇듯 세월은 덧없이 가는데 아무 공업(功業)도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그저 비감할 따름입니다."
원래 "비육"이란 넓적다리에 살이 찐다는 뜻으로, 이 유비의 한탄에서 "비육지탄"이란 말이 유래되었다.
그 뒤 이말은 세상에 나와 공맹을 얻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는 것을 한탄하는 비유로 쓰이게 되었다.
3. 삼고초려( 三顧草廬 )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으로 곧 ①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해 진심으로 예를 다함[三顧之禮] ② 윗사람으로부터 후히 대우 받음의 비유.
후한 말엽, 유비[劉備:자는 현덕(玄德), 161∼223]는 관우[關羽:자는 운장(雲長), ?∼219], 연인 장비[張飛:자는 익덕(益德), 166?∼221]와 의형제를 맺고 한실(漢室)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을 통솔할 군사(軍師)가 없어 늘 조조군(曹操軍)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 날 유비가 은사(隱士)인 사마덕조 수경선생 사마휘(司馬徽)에게 軍師를 천거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伏龍)이나 봉추(鳳雛)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나 수경선생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후 영입한 책사 서서(후일 서서의 효심을 이용한 조조의 계락으로 유비를 떠나 조조에게로 가나 유비를 위하여 조조에게 계책하나 올리지 않았음, 서서의 어머니가 자결하면서 識字憂患이란 말을 했음)로부터 제갈량[諸葛亮:자는 공명(孔明), 181∼234]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가득 싣고 양양(襄陽) 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옥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저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나이도 젊다던데…‥. 그까짓 제갈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
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 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軍師가 되어 적벽대전(赤壁大戰 : 연환계를 이용한 화공)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魏)나라의 조조,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三分)하고 한실(漢室)의 맥을 잇는 촉한(蜀漢)을 세워 황제 [소열제(昭烈帝), 221∼223]를 일컬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었고 수없이 많은 출사표를 올리고 北伐에 나섰으나 일찍이 와룡강가 초옥에서 출사할 때 예측(공명은 이미 이때 자기가 후일 한 부흥의 대업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았으나 盡人事待天命이란 말로 대신하며 草屋을 나선다.)한 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장원에서 유성처럼 사라져 갔다.
※ 초한지의 항우 책사였던 '범증' 역시 항우가 대업을 이루지 못할 줄 뻔히 알면서도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항우를 보필하였으나 끝내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유성처럼 사라져 갔다.
→ 물론 유방에게 책사 장량, 군 지휘 통솔의 귀재 한신, 군수보급과 후방행정의 달인 소하가 있었던 것도
그 한 이유였지만 중요한 것은 하늘의 뜻이 누구에게 있느냐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원의 지략가 중의 지략가 공명과 범증은 이를 알면서도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코져 '진인사대천명'하였으나 끝내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할 수 밖에 없었다.
謀事在人 成事在天(모사재인 성사재천)
→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있다.(※아래의 ⑭번 참조 )
4. 수어지교 (水魚之交 )
물과 물고기의 사귐, 임금과 신하 사이의 두터운 교분, 부부의 친밀함,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 등으로 표현되는 아주 가까운 사이를 의미한다.
유비에게는 관우, 장비, 조운, 위연과 같은 용장이 있었지만, 천하경영의 方策을 세울 만한 책사(策士)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當代 현인 사마덕조 수경선생 사마휘가 "봉룡과 봉추(방통 : 적벽대전때 연환계를 완성한 책사, 후일 유비의 부군사로서 파촉을 공략중 전사)중 어느 한사람만 얻어도 천하는 그 사람 것이 되리라"고 갈파했었는데, 그중 봉룡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와룡강가 초옥에서 三顧草廬의 禮로서 얻었으므로, 유비의 기쁨은 몹시 컸다.
그리고 제갈공명이 천하삼분지책을 제시하며 금후에 취해야 할 방침으로,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눌러서 그 곳을 근거지로 할 것과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을 어루만져 뒤의 근심을 끊을 것과 내정을 다스려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실리를 올릴 것과, 손권과 결탁하여 조조를 고립시킨 후 시기를 보아 조조를 토벌할 것 등의 천하 평정의 方略을 말하자, 유비는 그 계책에 전적으로 찬성하여 그 실현에 힘을 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제갈공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어 두 사람의 교분은 날이 갈수록 친밀해졌다. 그러자 관우나 장비는 불만을 품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젊은 제갈공명(이 때 공명의 나이는 28세 정도)만 중하게 여기고 자기들은 가볍게 취급 받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 등을 위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갈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즉 나와 제갈공명은 물고기와 물과 같은 사이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자, 관우와 장비 등은 더 이상 불만을 표시하지 않게 되었다.
5. 회귤고사(懷橘古事) / 조홍시가
吳에 육적이라는 자가 있었다.
여섯 살 때 원술이라는 사람을 찾아갔다가 그가 내놓은 귤에서 세 개를 몰래 품속에 넣었다가 하직 인사를 할 때 그 귤이 품 속에서 굴러나와 발각이 되었다.
그 때 원술이 사연을 물으니, 육적은 집에 가지고 가서 어머님께 드리려 하였다 하므로 모두 그의 효심에 감격하였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두고두고 회귤고사 또는 육적 회귤이라고 하여 "부모님에 대한 효성의 뜻"으로 널리 인구에 회자되었다.
☞ 선조 34년 노계 박인로가 한음 이덕형의 집을 찾아갔을 때, 한음으로부터 조홍감을 대접받았는데,
효자인 그는 위와 같은 중국의 육적회귤의 옛 일이 불현 듯 생각나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과
못다한 효심을 읊은 '조홍시가'가 있다.
「반중(소반 가운데) 조홍감(일찍 익은감)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귤이나 유자가 아니라도 품어 가고 싶지만,
품어가도 반길 사람이 없으니 절로 서럽구나.」
6. 괄목상대(刮目相對)
삼국시대(三國時代) 초엽, 오왕(吳王) 손권(孫權 : 182-252)의 신하 장수 중에 여몽(呂蒙)이 있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전공(戰功)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어느 날 여몽은 손권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지(戰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手不釋券)" 학문에 정진했다. 그 후 중신(重臣) 가운데 가장 유식 한 재사 노숙(魯肅)이 전시 시찰길에 오랜 친구인 여몽을 만났다.
그런데 노숙은 대화를 나누다가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진 데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여보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자네는 이제 오나라에 있을 때의 여몽이 아닐세 (非復吳下阿夢) 그려." 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때, 눈을 비비고 대면할(刮目相對)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법이라네."
「至於今者 學識莫博 非復吳下阿夢曰 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
7. 鷄肋(계륵)
삼국 정립시대가 출현하기 직전인 後漢의 헌제(獻帝) 24년에 있었던 일이다.
익주(益州)를 점령한 유비가 한중(漢中)을 평정한 다음, 그를 토벌하기 위하여 출병해 온 위나라 조조의 대군을 맞아 역사적인 대전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여러달에 걸쳐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유비의 병참은 후방의 요소요소를 제갈량이 용의주도한 전략으로 확보해 놓은 데 반하여, 조조는 병참을 소홀히 하여 질서가 문란하고 도망병이 속출하기에 이르렀다. 진격이냐, 수비냐 하는 판단을 내려야 할 고비에 섰는데도 저마다 안절부절 조조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자 조조는 계륵(鷄肋)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계륵이라니, 대관절 이게 무슨 뜻일까."하고 조조의 막료들은 어리둥절했다. 그 중에 다만 양수(陽修)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양수는 원래 흥농사람이며 관도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하북의 실권을 조조에게 빼앗긴 원소의 아우 원술의 생질이었으나 고겸에게 천거되어 낭중을 거쳐 주부의 벼슬에 오른 인물이다. 조조의 측근에 수수께끼의 명수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고, 학문도 어지간했으며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다.
전에 강남에 갔을 때 조조와 비(碑)라는 글자의 은어풀이를 겨루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양수는 막히는 법이 없이 척척 풀어 냈으나 조조는 서른 걸음을 걸은 뒤에야 겨우 문제를 풀었다.
"나의 재능은 너보다 뒤떨어지기 삼십리로다."
어쨌든 양수는 조조의 명령을 듣자 혼자서 주섬주섬 봇다리를 꾸렸다. 수도 장안으로 돌아가기 위한 행장이었다. 모든 참모들이 놀라서 그 까닭을 물었을 때, 양수는 다음과 같이 해석을 내렸다.
"닭의 갈비는 먹으려 하면 먹을 것이 없고, 그렇다고 버리려면 아까운 것이오. 한중을 여기다 비유해서 승상께서는 일단 철수하기로 결정하신 것이오. 과연 조조는 위나라 전군을 불러모아 한중으로부터 철수했다.
그러나 나중에 조조의 둘째 아들을 위나라 왕위 계승자로 만들기 위해 왕래했던 일을 모함받아 억울하게도 조조에게 죽음을 당했다.
8. 백미(白眉 )
魏蜀吳 삼국 정립시대에 이름은 마량(馬良), 字는 계상(季常)이라고 하는 蜀漢의 뛰어난 策士가 있었다.
마량은 호북사람으로서 공명(제갈량, 봉룡)의 天下三分之計 헌책으로 현덕 劉備가 蜀國을 일으켜 황제에 즉위하자 시중에 임명되었다. 유현덕은 마량에게 남방의 야만인들을 공략케 하였는데 마량은 변설로서 이들을 심복시켜 마침내 신하로 거두는데 성공하였다.
마량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字에 常자가 들어 있어서 五常으로도 불려졌다.
이 다섯 형제가 모두 슬기롭고 학문도 높았는데 그 중에서도 마량이 가장 뛰어났다고 평판이 났다. 마량은 태어날 때부터 눈썹에 흰털이 나서 별명도 백미라고 불리워졌는데, "마씨 오상은 모두 뛰어났으나 하얀 눈썹(白眉)이 가장 훌륭하다"고 하여 후대 까지 두고 두고 "백미"라는 고사성어가 人口에 회자(膾炙)되었다.
그러나 무협(巫峽)이라는 곳에서 반년이라는 지리한 吳軍과의 전투에 초조한 나머지 軍師인 공명과 상의도 없이 함부로 군사를 진격시킨 劉備의 실책으로 白眉 馬良은 전사하고 만다.
9.읍참마속/泣斬馬謖(울며 마속을 베다.)
蜀漢 건흥(建興) 5년 3월, 諸葛孔明은 魏나라를 공략하기 위하여 三軍을 이끌고 成都를 떠나 북진, 漢中으로 나가서 위군을 각지에서 무찌르고 그 해 겨울 장안을 치기 위해 군사를 기산으로 진격시켜 渭水 서쪽에다 진을 치고 魏의 大都督 조진의 군사 20만을 무찔러 위수에서 후퇴하게 하였다. 이때 위나라는 급히 관직에서 쫒겨나 시골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던 사마의(중달)를 재 등용하여 새로이 20만 대군으로써 공명의 침공을 막게 한다.
사마중달은 우선 신성에서 모반한 맹달을 치고 번개같이 기산의 들판에 촉군을 대비한 부채꼴 진을 폈다. 이를 격퇴시킬 공명의 작전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허나 상대가 조진을 대신한 중달이니만큼 공명으로서는 한군데 불안한 곳이 있었다.
그것은 촉군 군량 수송로인 街停이었다. 만약 그 곳이 위군으로 넘어간다면 전선의 촉군은 꼼짝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그 가정을 누구에게 방비케 하느냐에 공명은 고민했다. 이때 스스로 그 요충지 가정을 맡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장수가 마속(馬謖)이었다. 마속은 白眉로 유명한 마량의 동생으로서 재기가 뛰어나 공명이 남몰래 그의 대성을 기대하며 친아우처럼 사랑을 주고 있던 부하였다. 그러나 중달과 대적하기에는 너무 어려서 주저하던 공명에게 "실패하면 자신은 물론이요, 일문권속을 모두 군법에 처하더라도 원망치 않겠다."는 군령장을 쓰면서 까지 간청하여 허락을 하고 만다.
그러나 왕평을 부장으로 삼고 가정으로 달려간 마속은 "산기슭 길을 사수하여 위군을 접근시키지 말라."는 공명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왕평의 간언 또한 물리치고 자신의 병략을 과신하여 "적을 끌어들여 역습한다."는 전술로 산 위에 진을 쳤다.
그 결과 산기슭을 위군에 포위당하여 식수가 끊기자 궁지에 빠진 촉군이 산위에서 공격해 내려오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위군이 공격하여 마침내 촉군의 참패로 끝났다. 가정이 위군에게 넘어가자 공명은 마속을 보낸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할 수 없이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전군을 일시적으로 한중에 철수시켰다.
그리고 유선황제의 사자로 와 있던 장원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울면서 사랑하는 마속을 참형에 처했다. "마속이여, 용서해 다오. 정말은 나에게 죄가 있는 것이다. 내가 똑똑하지 못한 데에 있는 것이다. 허나 나는 내 목을 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살아서 촉을 위해 너의 죽음을 살리도록 도모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마속의 목은 진중에 걸렸다.
일곱 번 풀어주었다가 일곱 번 사로잡다. 상대를 제압하되 강압적이기보다는 마음으로 굴복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관우와 장비도 죽고 昭烈帝(소열제) 유비마저 세상을 뜬 蜀漢(촉한)의 운명은 이제 諸葛亮(제갈량)의 두 어깨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제갈량은 한마음 한뜻으로 後主 유선을 보필하면서 천하통일의 대업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남쪽 운남지방에서 蠻族(만족) 추장 孟獲(맹획)이 들고 일어났다. 맹획은 용맹한 데다 만족사이에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위협을 느낀 제갈량은 먼저 남방을 평정한 뒤 北伐(북벌)을 하기로 하고 南征(남정)의 길에 올랐다.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瀘水(노수)를 건너 맹획을 추격하면서 그를 생포하려고 했다. 산 중턱에서 촉한군을 맞은 맹획은 진두에서 용감히 싸웠는데 얼마가 지나자 촉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맹획은 퇴각하는 촉한군을 뒤쫓았다. 유인작전에 말려든 맹획은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항복을 권하는 제갈량의 말에 맹획은 이렇게 큰소리쳤다.
“내가 진게 아니고 비겁한 책략에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촉한군 진영이 이 정도라면 대단할 것도 없다. 정면으로 대결한다면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제갈량은 웃으며 맹획을 놓아주었다. 맹획을 죽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만족의 원한을 사서 오히려 반항세력이 더 커질 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맹획은 진용을 가다듬어 다시 공격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생포되는 신세가 되었다. 마지막 오과국 등갑군에 희망을 걸었던 맹획은 공명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반사곡이라는 계곡에 매설해 놓은 폭약의 화광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제갈량은 결국 "일곱번 놓아주고 일곱번 붙잡았다(七縱七擒)" 또 한번 풀어주려고 했지만 맹획은 투구를 벗어 던지고 제갈량 앞에 엎드렸다. 心腹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운남지방도 평정되었다.
맹획이 살아있는 동안에 배반하는 일은 아마도 없으리라.
*********************
이윽고 남만왕 맹획의 극진한 환송을 받으며 귀국길에 올랐으나 심한 풍랑으로 瀘水(노수)를 건너지 못하고 묶여 있었다.
"저 강에는 옛부터 황신(荒神)이 살면서 화를 이르켜 49명의 목을 제물로 바치면 풍랑이 가라앉아 건널 수 있다."면서 맹획이 그 목을 준비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공명이 그것을 제지하고 즉시 그 지방의 최고 요리사에게 명하여 사람 머리형상을 한 빵 49개를 만들어 노수의 황신과 죽어간 병사들의 영령에 바치고 수많은 남만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후 노수의 물결은 거짓말같이 잠잠해졌다.
특별히 제물을 바쳐서가 아니라 잠잠해질만해서 잠잠해진 것이리라. 하지만 미개한 남만인의 눈에는 거센 풍랑이 만두로 인하여 가라앉은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것이 饅頭(만두)의 시초가 되었다.
11.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다.
제갈량은 한중의 오장원에서 죽기전에, 후퇴하는 일을 교묘하게 준비했다.
그의 사후에 촉군의 후퇴를 안 위군 도독 사마의는 두 아들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오장원으로 쳐들어갔다. 사마의는 스스로 선두에 서서 산기슭까지 쫓아갔다. 촉군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좋아서 추격했다.
그러나 즉시 산 그늘에서 포성이 울려 퍼지며 함성이 일어났다. 갑자기 촉군이 방향을 바꾸어 쫓아왔다. 나무 그늘에서 흔들리는 중군의 큰 깃발에는 한승상무향후제갈량(漢丞相武鄕侯諸葛亮)이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사마의는 갑자기 얼굴색이 변해 적을 바라보았다. 중군에 속한 수십 명의 대장이 한대의 사륜거를 둘러싸고 나타났다. 수레에 단정히 앉아있는 사람은 윤건을 쓰고 학창흑대의 복장에 학우선을 든 제갈량이었다.
"제갈량이 아직 살아 있었던가? 계략에 빠졌구나!"
그는 서둘러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강유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적장은 도망치지 마라! 이미 우리 승상의 계략에 빠졌다!"
위군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마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앞다투어 도망쳤다. 도망치다 서로 부딪혀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사마의는 50리 남짓 도망친 후에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내 목이 아직 붙어 있는가?", "도독! 진정하십시오! 촉병은 멀리 갔습니다."
사마의는 이 말을 듣고 겨우 안정을 찾았다.
이틀 후에 그 지방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제, 수레에 있던 제갈량은 나무로 만든 상이었습니다."
사마의는 한탄하며 말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계략을 걸 수가 있겠지만, 죽은 사람이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촉에는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다."라는 속담이 생겼다. 그럼 역사상 정말로 그러한 일이 있었는가?
정사가 기술하는 바로는, 제갈량의 사후에 대장인 강유와 양의는 고인의 분부대로 죽음을 숨겨 상을 공표하지 않고, 전군을 침착하게 후퇴시켰다. 사마의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자, 양의는 군사를 되돌려 위군에 공격을 가하며 반격하는 척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의 함정에 걸릴 것을 두려워하여 그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촉군은 침착하게 후퇴하여, 야곡에 들어가 죽음을 공표하고 발상(發喪)하였다.
더욱이 배송지 주에는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인용하여, 사마의가 제갈량이 죽어 촉군이 후퇴했다는 소식을 그 지방 사람에게서 입수했다고 쓰여있다.
그렇다면 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제갈량이 죽어 촉군이 후퇴했을 때에 사마의는 추격을 하기는 했다. 그리고 도중에 군사를 수습하여 물러났지만, 그것은 사마의가 행군에 있어서 세심하고 신중했기 때문이며, 나무로 깎은 제갈량의 상에 놀란 일은 전혀 없었다.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았다"는 속담은 제갈량에 대한 경의와 동경에서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이다.
둘째, 삼국지연의에서 사소한 역사 사실에 근거하여 이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제갈량을 우상화하고, 사마의를 악역으로 만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제갈량을 이상할 정도로 뛰어난 지혜를 가진 것으로 과장하였기 때문에, 역으로 독자에게 의심을 품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을 지도 모른다.
12.식자우환(識字憂患)
식자우환(識字憂患) : 글자를 아는 것이 오히려 걱정을 끼친다는 말로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도 그만큼 많다는 의미로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유비에게 제갈량을 소개했던 서서(徐庶)가 유비의 군사로 있으면서 조조를 많이 괴롭혔다.
조조는 모사꾼인 정욱의 계략에 따라 서서가 효자라는 것을 알고 그의 어머니를 이용하여 그를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다. 서서의 어머니 위부인은 학식이 높고 의리가 투철한 여장부로 서서에게 현군을 섬기도록 격려하였다.
그러나 조조는 위부인의 글씨를 모방한 거짓편지를 써서 서서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나중에 위부인은 서서가 조조의 진영으로 간 것이 자기에 대한 아들의 효심과 거짓편지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여자가 글씨를 안다는 것부터가 걱정을 낳게 한 근본 원인이다.(女子識字憂患)”라며 한탄하였다.
소동파의 시에 “인생은 글자를 알 때부터 우환이 시작된다.(人生識字憂患始).”라는 구절도 있다.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쓸데없는 근심도 그만큼 많이 하게 되는 것, 또는 어줍잖은 지식 때문에 일을 망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한국속담에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13. 모사재인(謨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제갈공명의 탄식,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만 일의 성패는 하늘의 뜻에 달렸다." .. 즉,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성경구절과 동일하다. 이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촉나라의 제갈량이 숙적 위나라의 사마의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이던 때입니다. 제갈 량(제갈공명)이 호로곡(葫蘆谷)에서 화공작전을 펼쳐 사마의(司馬懿) 삼부자를 꼼짝없이 죽게끔 만들었으나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려 사마의 부자가 살아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때 제갈 량이 하늘을 우러러 "모사재인(謨事在人)이오, 성사재천(成事在天)이로다."라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호로곡 전투를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 제갈량이 조조의 위나라 정벌을 위해 위나라의 군사요충지 기산 지역으로 수차례 출정했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흔히 육출기산(六出祁山)이라 회자되는 제갈량의 위나라 정벌 시도 패인으로 갖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는 위나라의 무대응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제갈공명에 맞선 위나라 장수 사마의의 탁월한 지략과 식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제갈량의 신출귀몰한 능력을 감지한 위나라 장수 사마의는, 수적인 우위를 앞세운 위나라 병사들의 거센 출격 요구와 많은 불만들을 잠재우며, 시종 침묵을 유지하던 사마의도 딱 한 번 제갈량의 꾐에 빠져 성문을 열고 나온 적이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호로곡 전투의 서막이다. 혹시 모를 제갈량의 계략에 주저하면서도 촉나라 군사를 쫓던 사마의의 위나라 군사는 호로곡이라는 좁은 협곡에 접어든다.
ⓒ 호로곡의 바닥은 제갈량의 지시에 따라 기름과 유향을 묻힌 장작더미들로 은폐되어 있었고, 위나라 군사가 호로곡 깊은 골짜기에 온전히 들어섰을 때, 절벽 위에서 떨어굴러 떨어진 돌들로 협곡의 양쪽 통로가 차단되었다. 위나라 군사들이 호로곡에 완전히 갇히는 형국이 된 것이다. 이제 위나라 군사들을 섬멸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불화살이 날아들었고 유황과 기름에 묻힌 장작더미들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제갈량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위나라 사마의는 사마사, 사마소 아들 형제들을 부둥켜안고, 제갈량의 꼬임에 빠진 자신의 어리석음을 울부짖으며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거센 소나기에 불을 꺼졌고, 위나라 병사들의 수적 우위에 직접적 전투를 벌일 수 없었던 제갈량의 촉나라 군사들은 위나라 병사들이 호로곡을 빠져나가는 것을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기막힌 상황을 지켜보며 제갈량이 중얼거렸다는 탄식이 바로 “謀事在人, 成事在天”(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이나,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이다.
ⓔ 자신의 능력으로 당시의 판도를 바꾸려 헌신했던 제갈량의 이 마지막 한 마디는, 결코 극복할 수 없었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위로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모사재인, 성사재천,” 이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제갈량의 탄식과 사마의의 기사회생 눈물이 교차하며 묘한 내면의 떨림이 있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에 한 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제갈량의 회한과 탄식이 삼국지를 떠올릴 때면 아직도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는 구절이 불현 듯 떠오른다.
ⓕ 제갈량의 天(하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무엇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힘과 시대의 흐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
14.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
출사표는 임금에게 출병(出兵)할 것을 아뢰는 글이며, 사(師)는 군사(軍師)의 의미이고, 표(表)는 문체의 한 가지로 신하로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다. 시인으로서의 제갈 량의 면목은 "출사표"에서 전모가 드러난다. 출사표를 읽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글"일까? 아니다. "행동"일 따름이다.
출사표가 지금도 우리를 움직인다면, 그것은 명문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글과 행위를 넘어선 현실 자체, 순수 행위이기 때문이다.
선제(先帝)께서는 창업의 뜻을 반도 이루시기 전에 붕어하시고,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거기다가 우리 익주(益州)는 싸움으로 피폐해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걸린 위급한 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하되 곁에서 폐하를 모시는 신하는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된 무사는 밖에서 스스로의 몸을 잊음은, 모두가 선제의 남다른 지우를 추모하여 폐하께 이를 보답하려 함인 줄 압니다.
마땅히 폐하의 들으심을 넓게 여시어, 선제께서 끼친 덕을 더욱 빛나게 하시며, 뜻있는 선비들의 의기를 더욱 넓히고 키우셔야 할 것입니다.
결코 스스로 덕이 엷고 재주가 모자란다고 함부로 단정하셔서는 아니되며, 옳지 않은 비유로 의를 잃으심으로써 충성된 간언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셔서도 아니됩니다.
폐하께서 거처하시는 궁중과 관원들이 정사를 보는 조정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벼슬을 올리는 일과 벌을 내리는 일은 그 착함과 악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궁중 다르고 조정 달라서는 아니됩니다.
간사한 죄를 범한 자나 충성되고 착한 일을 한 자는 마땅히 그 일을 맡은 관원에게 넘겨 그 형벌과 상을 결정하게 함으로써 폐하의 공평하고 밝은 다스림을 세상에 뚜렷하게 내비치도록 하십시오.
사사로이 한쪽으로 치우쳐 안(궁중)과 밖(조정)의 법이 서로 달라지게 해서는 아니됩이다.
시중벼슬 시랑벼슬에 있는 곽유지·비위·동윤은 모두 선량하고 진실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되고 깨끗합니다. 선제께서는 그 때문에 그들을 여럿 가운데서 뽑아 쓰시고 폐하께까지 넘겨주신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궁중의 일은 일의 크고 작음을 가림없이 그들에게 물어 그대로 따르심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빠지거나 새는 일 없도록 폐하를 보필하여 이로움을 넓혀 줄 것입니다.
장군 상총은 그 성품과 행동이 맑고 치우침이 없으며 군사를 부리는 일에도 구석구석 밝습니다. 지난날 선제께서도 그를 써보시고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신 바 있어 여럿과 의논 끝에 그를 도독으로 삼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군사에 관한 일이면 크고 작음을 가림이 없이 그와 의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반드시 진중의 군사들을 화목하게 하고 뛰어난 자와 못한 자를 가려 각기 그 있어야 할 곳에 서게 할 것입니다.
어질고 밝은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한 까닭에 전한은 흥성하였고, 소인을 가까이 하고 어진 신하를 머리 한 까닭에 후한은 기울어 졌습니다. 선제께서 살아 계실 때 이 일을 논하다 보면 환제·영제시절의 어지러움을 통탄하고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시중상서 장사 참군 자리에 세 사람은 곧고 발라 절의를 지켜 죽을 만한 신하들입니다. 폐하께서 그들을 가까이 하시고 믿어 주시면 한실이 다시 융성하기를 날을 헤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아무런 벼슬 못한 평민으로 몸소 남양에서 밭 갈고 있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목숨이나 지키며 지낼 뿐 조금이라도 제 이름이 제후의 귀에 들어가 그들에게 쓰이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의 낮고 보잘 것 없음을 꺼리지 않으시고, 귀한 몸을 굽혀 신의 오두막집을 세 번이나 찾으시고 제게 지금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물으셨습니다. 이에 감격한 신은 선제를 위해 개나 말처럼 닫고 헤맴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뒤 선제의 세력이 엎어지고 뒤집히려 할 때 신은 싸움에 진 군사들 틈에서 소임(싸움에 진 군사를 되살리는)을 맡고 위태롭고 어려운 지경에서 명(그 위태로움과 어려움에서 구해 달라는)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스물하고도 한 해,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성실함을 알아 주시고, 돌아가실 즈음하여 신에게 나라의 큰일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명을 받은 이래,
아침부터 밤까지 신이 걱정하기는 두렵게도 그 당부를 들어 드리지 못하여 선제의 밝으심을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5월에는 노수를 건너 그 거친 오랑캐 땅 깊이까지 들어갔습니다.
이제 다행히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싸움에 쓸 무기며 인마도 넉넉합니다. 마땅히 3군을 격려하고 이끌어 북으로 중원을 정벌해야 합니다. 느린 말과 무딘 칼 같은 재주나마 힘을 다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고 한실을 부흥시켜 옛 서울(장안)로 되돌리겠습니다.
이는 신이 선제께 보답하는 길일 뿐만 아니라 폐하께 충성하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이곳에 남아 나라에 이롭고 해로움을 헤아려 폐하께 충언올리는 것은 곽유지와 비위·동윤의 일이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에게 역적을 치고 나라를 되살리는 일을 맡겨 주시옵소서. 그리고 신이 만약 제대로 그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 죄를 다스리시고 선제의 영전에 알리옵소서. 만일 폐하의 덕을 흥하게 할 충언이 없으면 곽유지와 비위·동윤을 꾸짖어 그 게으름을 밝히옵소서.
폐하 또한 착한 길을 자주 의논하시어 스스로 그 길로 드시기를 꾀하소서. 아름다운 말은 살피시어 받아들이시고 선제께서 남기신 가르치심을 마음 깊이 새겨 좇으시옵소서.
신은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이제 먼길을 떠나거니와, 떠남에 즈음하여 표문을 올리려 하니 눈물이 솟아 더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선제(先帝)께서 창업하신 지 반도 안 되어 중도에 돌아가시고 이제 천하는 셋으로 나뉘어 익주가 피폐하니, 이는 진실로 위급한 일로서 존망의 때입니다.
그러나 시위(侍衛)하는 신하가 안에서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충지(忠志)의 무사(武士)가 밖에서 신명을 잇고 있는 것은 대개 선제의 특별한 대우를 추모하여 이것을 폐하에게 갚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마땅히 성스런 귀를 크게 열어 그로써 선제의 유덕(遺德)을 밝게 하며 지사(志士)의 기절(氣節)을 크게 넓히도록 할 것이요, 망녕되이 스스로 엷다하여 비유를 끌어 의리를 잃어서 그로써 충간(忠諫)의 길을 막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궁중과 부중(府中)이 하나로 한몸이 되니 선악을 올리고 벌주는 것에 틀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간사함을 지어 죄를 범하거나 충선(忠善)을 하는 이 있거든 마땅히 사직(司直)에 붙여서 그 형벌과 은상을 논정하여 그로써 폐하의 공평하고 정명(正明)한 다스림을 밝게 할 것이요, 사정(私情)에 치우쳐서 안과 밖으로 하여금 법을 달리 해서는 안 됩니다.
시중(侍中)과 시랑(侍郞)인 곽유지(郭攸之)와 비위, 동윤(董允) 등은 모두가 선량하고 신실하며 지려(志慮)가 충실하고 한결 같습니다.
이로써 선제가 가려 뽑으시어 폐하에게 끼쳐 주셨으니, 우(愚) 생각건대, 궁중의 일은 일의 크고 작음 할 것 없이 다 이들과 함께 의논하신 뒤에 시행하신다면 반드시 능히 빠진 것을 돕고 채워 널리 이익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략)
16. 육출기산(六出祁山)
제갈량은 건흥(建興) 6년(228)부터 시작하여 여섯 차례에 걸쳐 북벌을 감행한다.
첫 번째는 기산(祁山)으로 출병하여 위나라의 부마 하후무(夏侯楙)를 대파하고 천수(天水) · 남안(南安) · 안정(安定) 등 세 군을 탈취한 뒤 다시 위군의 대도독 조진을 격파한다. 그러나 후에 마속(馬謖)이 가정(街亭)전투에서 패하는 바람에 한중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얻었던 세 군을 다시 잃어버린다.
두 번째는 진창(陳倉) 길목으로 나아가지만 위장 학소(郝昭)가 결사적으로 저항한다. 위에서는 아군이 적은 진창을 지원하기 위해 용장 왕쌍(王雙)을 파견한다. 제갈량은 위연을 남겨 왕쌍을 막게 한 다음,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기산을 공격하여 조진을 연파한다. 후에 양식이 다해 군사를 물리면서 계책을 세워 왕쌍을 벤다.
세 번째는 학소가 중병이 든 기회에 진창을 기습하여 다시 기산에 이른 다음, 강유와 왕평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어 무도(武都)와 음평(陰平)을 빼앗게 한다. 이에 위에서는 사마의를 도독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한다. 제갈량은 사마의를 연파하지만, 장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이 나는 바람에 초연히 군사를 물린다.
네 번째는 위에서 조진과 사마의를 정(正) · 부(副)도독으로 삼고 한중을 공격토록 하였으나, 연일 큰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철수한다. 제갈량은 군사를 두 길로 나누어 기곡(箕谷)과 야곡(斜谷)을 통해 진격한다. 조진군을 격퇴시킨 제갈량은 조진의 화를 돋우어 죽음에 이르게 한 다음, 다시 사마의를 격파한다. 굳게 지키기만 하고 나오지 않던 사마의는 항복한 촉장 구안(苟安)을 성도(成都)로 보내 제갈량이 황제 자리를 찬탈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한다. 후주의 조서를 받은 제갈량은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물려 돌아간다.
다섯 번째는 다시 기산으로 나아가 연이어 사마의를 격파한다. 그러나 군량과 말먹이 건초를 제때에 완비하지 못한 도호(都護) 이엄(李嚴)이 오나라에서 촉을 공격하려 한다는 거짓말로 위급을 고한다. 이에 제갈량은 황급히 군사를 철수시키다 도중에 위의 대장 장합을 활로 쏘아 죽인다.
여섯 번째는 군사를 다섯 길로 나누어 다시 기산으로 진격한 제갈량은 위장 정문(鄭文)이 거짓 항복하는 기회를 역이용하여 위군을 대파한다. 그러고는 다시 상방곡(上方谷)을 불사르고 위수(渭水) 남쪽을 탈취하지만, 사마의는 굳게 지키기만 하고 나오지 않는다. 오장원(五丈原)에 주둔하던 제갈량은 오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하직한다.
(제갈량의 북벌 시 지도)
17. 제갈량의 북벌은 육출기산(六出祁山) 용무지지(用武之地)
제갈량은 여섯 차례나 대군을 이끌고 기산(祁山)으로 나와 위나라를 정벌하려다가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육출기산'이란 고사만 남기고 오장원에서 죽었다.
육출기산(六出祁山)이란 제갈량이 북벌을 할 때 기산에서 여섯 차례나 위나라와 싸운 일을 말한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위나라를 공격할 때 무엇 때문에 기산을 택했을까?
제갈량이 부장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장수들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장안을 점령하려면 여러 곳으로 공격할 수 있는데, 승상께서는 왜 오직 기산만을 공격하시는지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니, 제갈량은 "기산은 바로 장안의 머리로, 병력을 이동할 때 이곳이 요충지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는 위수를 굽어보고 뒤로는 경사진 계곡과 접해 있어 왼편 오른편으로 드나들며 마음대로 군사를 매복시킬 수 있으니, 바로 '용무지지'다. 이 때문에 나는 기산을 먼저 취하여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용무지지(用武之地)란 무력(武力)을 쓸 만한 곳이라는 뜻으로, 즉 전쟁을 하기에 적당한 곳을 말한다.
만약 관우가 형주 땅을 오나라에 빼앗기지만 않았다면, 북벌을 형주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렇게 했다면 중원과의 거리도 가깝고 군량 조달도 용이했겠지만 형주를 잃은 현실에서 멀고도 험한 기산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기산은 땅이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여 평원을 이루고 있어 현지에서 군사를 양성하며 농경과 전투를 병행하기에 매우 유리한 곳이다. 기산은 촉군이 먼 길까지 군량을 운반해야 하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 제갈량이 북벌 실패의 원인 중, 가장 큰 애로가 군량미 조달이 제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었다.
기산이 비록 '용무지지'라고는 하나 제갈량이 첫 번째 북벌에서 이곳으로 나온 후부터 위나라 쪽의 방비가 철저히 강화되는 바람에 제갈량의 이후 북벌은 공격 노선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북벌이 '육출기산'으로 유명하게 묘사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다. 실제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여섯 번의 북벌이 아니라 230년의 4차 전투는 오히려 위나라에서 한중으로 공격해온 전투이므로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한 북벌은 다섯 차례이며, 그 다섯 번 중에서도 오직 두 차례만 기산을 거쳐 출병했던 것이라고 한다.
기산은 북벌의 요충지라는 지역적 중요성도 있지만, 촉나라의 위치적 입지가 중국의 서쪽 변방에 있는 입장에서 중원으로 진출하는 길목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비유다. 중국에서는 장안(오늘 날 서안, 西安)과 낙양을 중원이라 하며, 역대 중국 왕조는 중원을 차지하는 세력이 중국 천하를 호령해왔었다.
【참고 1】복룡과 봉추
당대 은거기인 수경선생 사마휘가 "복룡과 봉추 중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이루리라"고 그들의 능력을 높이 평한 바 있다. 봉추 방통이 전란을 피하여 강동에 있을 때, 조조의 남침을 맞아 적벽의 화공을 앞두고 연환계를 성공시키고자 장간을 앞세우고 건너가 조조를 설복하여 배와 배를 모두 쇠사슬로 묶어놓게 만들었다.
원래 그의 생김새는 들창코에 얼굴은 검고 못생겼기 때문에 손권은 그를 중용할 줄 몰랐다. 오나라 노숙이 그를 촉한에 천거하였을 때도 마침 제갈량(복룡, 와룡선생 : 와룡강가 초옥에서 은거시 붙여진 이름)이 지방순찰중이었고 유비 역시 그의 풍채를 보고는 뇌양현의 작은 현령자리를 주었을 뿐이다.
부임하자 일은 않고 술에 묻혀 지냈는데 순찰차 나온 장비가 대해 보니 천하기재라 비로서 중용되었다.
서촉 공략전에 군사로서 출정하였다가 아깝게도 낙봉파(落鳳坡:봉추라는 이름과 묘하게 얽혀 있어서 그의 죽음에 신비를 더함)에서 난전에 맞아 죽으니 이때에 나이 겨우 36세였다.
【참고 2】 저루마와 낙봉파
유비는 천리마 한 마리를 얻게 되는데, 말을 잘 보는 신하가 그 말을 보고, "이 말은 눈 아래 눈물자국이 있으므로 '저루마'라고 부르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 주인을 반드시 죽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주군께서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주었다가 그가 죽고 난 다음에 다시 이 말을 타면 그때는 죽을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간하였습니다.
유비는 인간이 그럴 수는 없다고 하면서 그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서촉을 정벌하러갈 때, 그의 군사 방통이 막 출발하려 할 때, 방통이 탄 말이 쓰러지고.
그래서 유비는 자신의 천리마인 저루마를 무심코 빌려줍니다. 방통의 군사가 협곡을 지날 때, 이상한 기운을 느껴 군사들에게 이 지역의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다. 그 지역은 '낙봉파(落鳳坡)'라는 지명이었다.
즉, 봉추가 떨어져 죽는다는 말이다. 그가 막 뒤돌아 도망하려는 순간 적들의 화살에 의하여, 그 지역에서 그는 저루마 위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참고 3】 방통과 낙봉파
방통은 평소 복룡을 같은 천하 기재 반열의 입장에서 흠모하고 존경하였으나 마침내 유비를 주군으로 함께 모시게 되었을 때, 그도 인간인지라 항상 공명을 능가하지 못하고 참모로서 2인자의 위치에 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곤 했다.
그러나 곧바로 후회하고 공명과 함께 한 부흥의 대업을 이룩하자고 맹서(盟誓)하곤 하던 중원의 진짜 사나이였다.
일련의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공명을 제치고 스스로 파촉공략의 총책임을 지고 나섰다가 자신의 별호와 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낙봉파(落鳳坡)에서 유비로 오인한 파촉군사들의 집중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그 무한한 경륜을 펼쳐보기도 전에 바람처럼 유성처럼 사라져 갔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유비 곁에 공명 외에 방통이 계속해서 보필하였다면 삼국지의 역사는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오호! 통재라!!!
【참고 4】 적벽대전은 촉/오 책사들의 연합 전략과 전술에 의한 종합예술
적벽대전은 제갈공명(복룡:伏龍)과 주유가 화공책, 봉추인 방통(鳳雛)이 주유의 반간계를 이용한 연환계, 그리고 황개가 고육책으로 사항계(거짓 항복하는 계책)를 마련함으로서 완성된 것으로서 어느 한사람 만의 작품이 아닌 여러 사람의 종합예술품인 것이다.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유현덕의 軍師로 있다가 조조의 계략에 말려서 울면서 조조에게로 넘어간 서서가 이 연환계를 알아차렸으나 유비와의 의리를 생각하여 발설하지 않고 방통이 마련하여 준 계책으로 서량방어를 책임지고 변방으로 나감으로서 적벽대전의 화를 면했다.(방통이 마련해준 계책에 따라 서량에서 반란을 도모한다는 소문을 내고 조조에게 자청해서 서량방어에 나섰다.)
즉, 공명과 주유가 화공책이라는 대전략을 수립하고, 방통과 황개, 그리고 서서가 반간계, 연환계, 고육책, 사항계 등 그 세부 전술을 마련함으로써 20만의 촉오 연합군이 100만이라는 조조 대군을 격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간계 (反間計)
북방 출신인 조조의 군대는 기마전에는 능했지만 수전(水戰)에는 약하였다. 채모와 장윤은 조조에게 투항한 형주의 장수들로, 수전에 능하여 조조의 군대를 조련하였다.
이른바 적벽대전이 시작되기 전, 주유가 내심 이를 걱정하고 있던 차에 조조의 참모로 주유와 동문수학한 장간이 항복을 권하러 주유를 찾아왔다.
주유는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자는 척하면서 탁자 위에 채모와 장윤이 보낸 것처럼 꾸민 편지를 놓아두었다. 장간은 이 편지를 보았고, 또 주유가 다른 장수와 나누는 밀담에서 채모와 장윤에 대하여 말하는 것도 들었다. 장간은 편지를 훔쳐 빠져나와 조조에게 고하였다.
조조는 채모와 장윤을 오나라의 첩자로 오인하여 목을 베게 하였다. 이로써 조조의 군대는 수전의 약점을 보완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조조는 주유의 반간계에 넘어가 전력이 매우 우세하였음에도 대패하고 말았다.
연환계 (連環計)
방통은 조조의 첩자 ‘장간’을 역이용하여 조조의 진영으로 초대된다. 평소 인재를 후하게 대접했던 조조는 방통을 반기며 조조군 진영에 대한 의견을 듣는다.
방통은 북방 지역의 병사들인 조조의 병사들이 뱃멀미가 심해 제대로 싸울 수 없으니 쇠사슬로 배를 연결해 배가 흔들리는 걸 방지하는 ‘연환계’를 제안하고, 조조는 연환계를 받아들여 수군 군선들을 모두 연결한다. 유비와 오의 동맹군은 이를 이용해 화공책으로 조조의 군선을 한 번에 불태워 조조군 을 대파한다.
반간계(反間計), 고육지계 (連環計), 사항계(詐降計)
후한말(後漢末)에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형주(荊州)의 유비(劉備)가 연합하여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대군을 맞아 싸우는 적벽전투(赤壁戰鬪)가 벌어지기 직전의 일이었다.
조조의 백만 대군을 목전에 둔 연합군의 총사령관 주유(周瑜)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당해 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바야흐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방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의 진영에는 채중(蔡中)·채화(蔡和) 형제가 있었다.
조조가 주유의 계략에 빠져 그들의 형 채모(蔡瑁)를 참살하고 크게 후회한 나머지 두 사람을 달래 거짓으로 항복시켜 오나라로 밀파한 자들이었다.
물론 주유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지만 역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모른척 하고 있었다.
자신이 거짓 정보를 조조의 군중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또 하나의 계략인 셈이다.
주유의 심복인 황개(黃蓋)가 찾아와 화공(火攻)을 건의했다.
사실 주유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진중에는 조조의 첩자 채씨 형제가 있어 노련한 주유가 화공 같은 중요한 작전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먼저 거짓으로 항복하는 이른바 사항계(詐降計)를 생각해냈다. 문제는 그것을 행동에 옮길 사람이었다. 그러자 황개가 선뜻 자청(自請)하고 나섰다. 이 일은 살갗이 터지는 고통없이는 할 수 없는, 이른바 고육계(苦肉計)였다. 황개는 그것마저 감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둘은 치밀한 계획을 마련했다. 그것은 황개로 하여금 거짓 항복을 건의토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작전회의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이때 황개가 “누가 보아도 조조를 꺾는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없소.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항복하느니만…….” 하고 말했다.
그 때 주유의 벽력(霹靂)같은 질책(叱責)이 떨어졌다. 물론 각본이었다. 즉시 황개는 끌려나와 형틀에 묶였다. 곧이어 곤장 소리와 함께 비명(悲鳴)소리가 들려왔다. 백여 대를 맞은 황개의 엉덩이는 허물어졌다. 그 동안 황개는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
그날 밤 만신창이가 된 황개에게 심복 감택(감澤)이 와서 걱정스런 눈초리로 물었다. 황개가 사실을 말하자, 감택은 혀를 찼다. 그야말로 의표를 찌르는 계책이었던 것이다.
황개는 감택을 시켜 조조에게 투항서(投降書)를 작성해 밀사를 통해 조조에게 은근히 전달했다. 물론 황개가 곤장을 맞았다는 사실은 채씨 형제에 의해 조조의 진영(陣營)에 벌써 알려져 있었다.
밀사를 만난 조조는, “흥! 이것은 고육책이다.” 하며 믿지 않았으나, 직접 현장을 목격한 간첩 채씨 형제의 보고와 다방면에 걸쳐 접수된 간첩들의 정보가 일치한다는 것을 듣고 황개의 투항선(投降船)을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한 그날 밤, 황개는 기름을 잔뜩 실은 투항선단을 이끌고 조조의 대선단앞에 나타나 빠른 속도로 거대한 전투함의 선단을 들이박고 기름에 불을 붙여 조조의 대함대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황개의 투항선 앞에는 대못을 박아놓았으므로 부딪치기만 하면 못이 박혀 꼼짝달싹 못하고 같이 불에 타게끔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노려 연합군의 수군들이 총공격하여 조조의 군사를 닥치는 대로 살륙하여 적벽전투를 대승리로 이끌었다.
위와 같은 고육책은 간첩을 이용하여 역정보를 흘린 계책이었으므로 소위 반간고육계[反間苦肉計]라고 한다.
적벽대전의 승리로 인하여 손권은 강남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유비는 파주(巴州)와 촉주(蜀州)를 얻었으며 촉왕조(蜀王朝)를 세우는데 기초가 되었다.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