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보다 가까이서 강화도를 만나다
-2024년 봄, 국제문단 역사문화탐방 참여기-
최명숙
여행을 떠나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혼자 여행을 다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작가 40명과 함께하는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강화도에서 선사시대부터 문화의 중요한 이동 경로로 소용돌이치는 역사 속 우리 문화유산을 강화도 일원에서 돌아보는 2024년 역사문화탐방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 문단의 원로이신 도창회 선생, 한국문인협회 이홍구 이사 등 전국의 국제문단문인협회 작가들이 즐겁게 만난 하루 여정이었으니 글 한 편을 담아온 이들도 있었으리라.
“사면이 바다로 넓은 들, 오랜 역사가 남아 있는 뜻깊은 곳이다. 오신 분들이 문학적 사색과 소재를 찾길 바라며 오늘 기행이 즐겁고 보람 있었으면 한다.”고 한 남현우 회장의 인사말이 문학기행의 의미와 목적을 잘 말해주었다.
문학기행은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강화전쟁박물관 관람을 시작으로 아픈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고려궁지’ 강화도령 철종이 19살 때까지 살았다는 ‘용흥궁’, 한국 최초의 한옥성당인 ‘대한성공회강화성당’ 그리고 새로운 명소로 뜨고 있는 교동도의 화개정원과 연산군 유배지, 6·25전쟁 당시 피난 온 실향민들이 정착하여 형성된 골목시장 ‘대룡시장’등 강화도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탐방지마다 강화군청의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있어 흥미롭고 즐거웠다. 선사시대부터 문화의 중요한 이동통로이자 수차례 외세 침략을 극복해 뛰어난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낸 강화도의 역사에 우리가 몰랐던 혹은 잘못 알고 있는 이면들을 새삼스럽게 알게 될 때는 역사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하면서 재미를 더했다.
‘강화전쟁박물관’에서는 강화도에서 일어난 전쟁과 관련된 유물들을 관람 후 원도심으로 이동하여 도착한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강화천도 후 궁궐이 있었던 터다. 서기 1232년 몽골침략에 대비하여 강화천도를 단행한 후, 1234년 정궁을 세웠던 곳이며 38년간 궁궐로 사용되다가 모두 허물어진 그 자리에 1631년 행궁과 강화유수부, 외규장각 등을 세웠으나 거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1688년에 제작된 보물 제11호 강화동종(銅鐘)과 조선시대 강화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프랑스에서 반환되어 복원된 외규장각이 남아 있다. 강화 고려궁지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국난극복의 역사적인 상징으로 입구에 섰던 사백 년 된 느티나무가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일러주는 듯했다.
철종이 19살 때까지 살았다는 용흥궁은 강화도령으로 드라마의 기억이 남아 있어 친근했다.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여 불렀다고 한다. 용흥궁을 살펴보다, 보니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가 생각나고 거가(巨家)에 살던 철종의 소박하고 순수한 모습을 그려보게도 되었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집임을 표시한 비석과 비각 앞에서는, 철종이 우리가 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강화도령이 아니라 군주의 오를 만한 풍모를 갖추고 백성들과 함께 산 경험으로 백성을 살피는 왕이었을 것이라고 바람이 스쳐 갔다.
용흥궁 바로 위에는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다. 늘 다시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성당을 들어서면서 필자는 중학교 때 교감 선생님이 그리워졌다. 강화가 고향이던 선생님은 문예반 활동을 하던 나를 기특해하시고 고향의 성당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다.
이번 문학기행 도중에 오래전 고인이 되신 선생님을 추억하면서 시 한 편을 썼다.
성공회강화성당
강화 토박이 아흔 살 김 작가의 말에 따르면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격인 통제영학당이 서면서
영국 교관을 따라온 영국 선교사들이 갑골 나루터에 살았다.
얼마 안 있다가 성당 한 채가 섰고
김 작가 할아버지는 파란 눈의 신부가 어서 오라고 문 여는
온수리 강화읍 성당이라 불렀지만
어린 김 작가는 보리수나무 커가는 절이거나, 아버지가
유학을 배우던 큰 서당일지도 모른다는 믿음 없는 상상도 했다.
철이 들 무렵부터 기와지붕 위에 십자가가 보이고
노아의 방주를 닮은 성당엘 들어가게 되었단 거다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읽은 철 난로에 대하여, 물었다.
그 작던 난로가 성당을 따뜻한 온기로 채우진 못했어도
옷깃 여미며 보던 미사는 밝음으로, 충만하지 않았겠냔다.
본당 안 세례 대에 한자로 적힌 말
“修己(수기), 洗心(세심), 去惡(거악), 作善(작선)
자신을 닦고 마음을 씻어 악을 떨치고 선을 행한다”
심오하게 일어나는 큰 울림은
어느 종교엔들 통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지붕 위 십자가 앞에는 철새가 헌화한 홀씨가 꽃을 피웠고
보리수나무는 본당을 바라보며 그림자를 키운다.
마지막 역사문화 탐방의 여정은 6.25전쟁 당시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이 정착하여 형성된 골목시장 ‘대룡시장’이었다. 전쟁이 나자 황해도 연백군에서 교동도로 잠시 피난 온 주민들이 한강하구가 분단선이 되어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향의 연백 시장을 재현한 골목시장이다. 50여 년간 교동도 경제발전의 중심지였으며 지금은 시장을 만든 실향민 어른들이 거의 다 돌아가시고 인구가 줄면서 시장의 규모도 상당히 줄었다고 한다. 교동 제비집이 있다고 하는데 보지 못하고 날아가는 제비만 서너 마리 보았다.
탐방이 진행되는 동안 추억을 남기고자 하는 여러 모습들이 보였다. 특히 국제문단의 이수연 홍보 대기자의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영상촬영하는 모습은 후에 편집된 좋은 영상으로 문화탐방을 다시 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지역 토속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한강에 지는 노을을 등지면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아름다운 하루, 역사와 문학을 찾는 즐겁고 보람 가득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