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내가 춘성군의 어느 조그만 시골 학교에 있을
때의 일이다.
새로 그 학교에 부임한 어느날 학교를 한바퀴 빙 돌아보았
더니 작고 허름한 부속 건물이 하나 있는데 "이발관" 이라
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나무로 짠 이발용 의자와 거울 하나
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채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이 이발관은 전임 어느 교장선생님의 뜻으로 세워져 전달부
아저씨들이 빡빡 깎는 머리나 깎아주던 곳이었는데 그 교장
선생님이 전근 가신 후에는 그것도 중단 되고 이발관은 쓸모
없는 빈 방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전에도 시골 학교에 있을 때 어린이들의 머리를 많이 깎아 준
일이 있었던 나는
"옳지. 저 이발관을 다시 내가 열어야지."
하고 이발관으로 들어가 조그만 설합을 열어보니 가위와 이
빌기계가 들어 있었다.
다른 설합에는 머리 깎을 때 두르는 보자기가 개어져 있었다.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을 둘러보았더니 머리가 긴 아이가 무척
많았다. 이 마을에는 이발소도 없고,돈도 이발 기술도 없기 때
문에 남자 어린이들의 머리는 거의 빡빡머리였다. 그나마도
이발기계가 있는 이웃 어른에게 깎아야 하니 제때 깎기가 매
우 힘 든 처지였다.
며칠 후 나는 이발관을 깨끗이 청소하고 빗과 두르는 보를 깨
끗이 빨았다. 이발기계와 가위도 점검해 보니 잘 들었다.
나는 우리 반 애들 중에서 머리가 제일 긴 어린이 3멸을 지명
하여 내일은 머리를 깎아줄 테니 머리를 깨끗이 감고 오라고
일렀다. 다음날 공부가 끝난 후 그 세 어린이를 이발관으로 데
리고 가서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그전에 몇 번 깎아본 서툰 솜씨로 상고머리를 깎았다.기계로
밑을 빙 둘러 깎아내고 그 위는 빗을 대고 가위로 층층이 깎
아냈다. 이발소에서 깎은것만은 못했만 그런대로 괜찮은 상
고머리가 되었다. 상고머리 깎는 것이 소원이던 아이들에게
상고머리를 깎아주니 그렇게 좋아 할 수가 없었다.촌티가 나
던 어린이들이 금방 촌티를 벗고 얼굴까지 예뻐진 듯 훤해 보
였다.
다음 날은 여자 어린이 3명을 남겨 컷트 머리로 깎아주었다.
머리가 눈을 내리덮던 어린이의 머리가 상큼한 컷트머리로
변신하고 보니 날아갈 듯 시원하고 예뻤다.
나의 이 이발사 작업은 그 후도 계속됐다.학교의 모든 어린
이의 머리를 깎 아줄 수는 없엇지만 다른 반 어린이라도 가
정형편이 어려워 머리를 깎을 수 없는 어린이의 머리는 깎
아 주었다.
머리를 깎아주는 일이 귀찮고 고되기는 했지만, 머리를 깎
고 예쁘게 변모된 어린이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어느듯 고
됨도 귀찮음도 사라지고 마음 속 엔 희열로 가득차곤 했다.
1970년 3월 10일 씀
*나는 이 글을 낡은 교단일기 노트에서 읽으며 정말로 격세
지감(隔世之 感)을 느꼈다.
애들을 1-2명만 낳아 온갖 갖고 싶은 것 다 사 주는 요즘 어
린이와 비교할 때 "그 땐 그랬구나!" "그런 때도 있었구나 "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이야 기를 들춰내어 적어봅니다.
.
한결
첫댓글 선생님의 글은 역사입니다...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그대로의 역사입니다...♧
선생님 정말 그런때도 있었습니다 선생께서 우뚝 서 계시던 그곳이 교육에 참 현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감되는 엣날 모습이 그려집니다.
바다해님, 백청님, 서명희님, 꼬리글 감사합니다. 내일은 즐거운 원족날! 어린애처럼 내일을 기다려 봅니다.
이발기계가 아닌 가위로 빡빡머리를 깍아주던 누님의 손길이 그리워 집니다. 깍고나면 가위자리가 너무 선명 했었지요. 쉬운것 같지만 아무나 할수없는 일이라 여겨 집니다. 제가 어릴때도 그런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