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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학모임 (한국SGI, 창가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왕자
교학입문
《교학입문》은 창가학회(創價學會)가 신봉하는 니치렌(日蓮) 대성인 불법의 가르침과 실천을 배우기 위한 입문서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의 생애’를 비롯한 근본법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니치렌 불법의 목적인 ‘일생성불(一生成佛)과 광선유포(廣宣流布)’, 행복을 여는 생명론인 ‘십계(十界)’ 사상 등, 기초가 되는 가르침과 실천을 배웁니다.
<법련>에서는 교학부 임용시험을 위한 학습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학입문》 ‘제1부’를 1월~3월까지 3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교학입문
니치렌 대성인의 생애
남묘호렌게쿄
일생성불과 광선유포
십계
삼증(三證)
신행학(信行學)
난을 극복하는 신심
숙명전환
신심즉생활
니치렌 대성인의 생애
니치렌 대성인은 한결같이 전 인류의 불행을 근절해 모든 사람에게 부처의 경애를 열게 하려는 서원(誓願)과 자비의 마음으로 묘법(妙法)을 홍통하는 일생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민중의 행복을 저해하는 일체의 악을 끝까지 가책해 대난에 이은 대난을 겪은 생애이기도 했습니다.
① 탄생, 출가, 유학
니치렌 대성인은 1222년 2월 16일, 아와 지방 나가사군 도조향의 기타우미(현재의 지바현 가모가와시)라는 어촌에서 탄생하셨다고 전합니다. 어업으로 생계를 꾸리는 서민 출신이었습니다.
열두 살 때부터 아와 지방에 있는 세이초사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 대성인은 “일본 제일의 지자(智者)가 되게 하소서”(어서 888쪽)라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부모 그리고 민중을 구하기 위해 생사(生死)의 근본적인 괴로움을 이겨내는 불법(佛法)의 지혜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불법을 깊이 연구하기 위해 열여섯 살 때, 세이초사의 도젠보(道善房)를 스승으로 삼아 출가하였습니다.
그 무렵 “명성(明星)과도 같은 지혜(智慧)의 보주(寶珠)”(어서 888쪽)를 얻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불법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묘법’에 관한 지혜라고 생각됩니다.
대성인은 가마쿠라, 교토, 나라 등 각지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히에이산에 있는 엔랴쿠사를 비롯한 여러 유명 사찰에서 많은 경전을 공부해 각 종파가 설하는 교의의 본질을 파악하셨습니다.
그 결론으로 법화경만이 모든 불교 경전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경전이고, 자신이 깨달은 남묘호렌게코(南無妙法蓮華經)야말로 법화경의 간요(肝要)이자 만인의 고뇌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법이라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남묘호렌게쿄를 말법의 사람들을 구제하는 법으로써 넓힐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말법’은 석존의 불법이 구제의 힘을 잃어버리는 시대를 말하며, 그때를 석존이 입멸하고 2000년 이후라고 했습니다. 이 설을 토대로 ‘말법에 들어선 해’를 1052년으로 추정합니다.>
② 입종선언
유학 생활로 묘법홍통의 사명과 그 방도를 확인한 대성인은, 대난이 일어날 것을 각오하고 묘법을 홍통하는 첫걸음을 내디디셨습니다.
1253년 4월 28일 ‘오시(午時, 정오 무렵)’, 세이초사에서 염불 등을 파절(破節)하고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불러 민중을 구제하는 유일한 정법(正法)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입종선언(立宗宣言)’입니다.
입종이란 종지(宗旨, 중요한 교의<敎義>)를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서른두살 때였습니다. 이때부터 스스로 ‘니치렌(日蓮)’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이 입종선언을 하자 염불의 강신자이자 이 지역의 지두(地頭, 경찰권과 세금징수권 등을 행사한 막부<幕府>의 관리)인 도조 가게노부는 대성인이 염불종의 교의를 강하게 비판하자 크게 격분했습니다.
그로 인해 대성인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했지만, 대성인은 가까스로 그 난을 모면했습니다.
그뒤, 대성인은 당시 정치의 중심지 가마쿠라로 갔습니다. 나고에 근처(마쓰바가야스라고도 전해짐)에 초암을 짓고 본격적인 홍교를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가마쿠라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친 염불종과 선종(禪宗)의 잘못을 파절하면서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넓혔습니다.
이 홍교 초기에 도키 조닌, 시조 깅고(요리모토), 이케가미 무네나카 등이 입신했습니다.
③ <입정안국론> 제출과 법난
대성인이 가마쿠라에서 홍교를 시작하셨을 때, 해마다 기상이변과 대지진 등, 천재지변이 잇달아 일어나 대기근(굶주림), 화재, 역병(전염병) 등이 끊임없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1257년 8월에 가마쿠라 지방을 덮친 대지진으로 가마쿠라 전역에서 주요 건물이 모조리 무너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대성인은 이 지진을 계기로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을 밝히고, 그것을 근절하는 길을 세상에 밝히기 위해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1260년 7월 16일, 당대의 실질적인 최고권력자 호조 도키요리에게 이 <입정안국론>을 제출합니다. 이것이 대성인의 첫 국주간효(國主諫曉)입니다(제1회 국주간효). 국주간효는 나라의 주권자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정의를 밝혀 간언(諫言)하는 일입니다.
<입정안국론>에서는 천재지변이 계속되는 원인은 온 나라 사람들이 정법(正法)을 위배하고 사법(邪法)을 믿는 방법(謗法, 정법을 비방하는 것)에 있다며, 최대 원흉은 호넨이 설한 염불의 가르침에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악법에 귀의하는 것을 멈추고 정법을 신수하면 평화 낙토가 실현되지만, 악법에 계속 귀의한다면 경문에 나와 있는 삼재칠난(三災七難) 등, 갖가지 재난 중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자계반역난(自界叛逆難, 내란)과 타국침핍난(他國浸逼難, 타국의 침략)이라는 두가지 재난도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하루속히 정법에 귀의하도록 간언했습니다.
<삼재칠난은 곡귀(穀貴, 흉년이 들어 곡물가격의 폭등), 병혁(兵革, 전란<戰亂>을 말함), 역병(疫病, 전염병의 유행)의 세가지 재앙과 성수변괴난(성숙변괴난(聖宿變怪難, 별의 운행과 빛이 흐트러지는 것), 비시풍우난(非時風雨難, 때아닌 풍우 재해가 일어남) 등의 일곱가지 재난을 말함.>
그러나 막부 요인은 대성인의 지극 정성한 간효(諫曉)를 무시하고, 염불자들은 막부 요인의 엄밀한 승날 하에 대성인을 박해했습니다.
<입정안국론>을 제출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어느 날 밤, 염불자들이 대성인을 죽이려고 초암을 습격했습니다.(마쓰바가야쓰법난)
대성인은 다행히 난을 모면하고 잠시 가마쿠라를 떠나게 됩니다.
이듬 해 1261년 5월 12일, 막부는 가마쿠라로 돌아온 대성인을 체포하여 이즈 지방 이토로 유배를 보냈습니다.(이즈유배)
1263년 2월, 이즈유배에서 사면되어 가마쿠라로 돌아온 대성인은 그 이듬 해 어머니를 병문안 하러 고향인 아와 지방으로 갔습니다.
1264년 11월 11일, 대성인 일행은 아마쓰에 살고 있는 문하인 구도의 저택으로 가는 도중, 도조향 마쓰바라에서 지두인 도조 가게노부가 이끄는 병사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대성인은 이마에 상처를 입고 왼팔에 골절상을 당했습니다. 문하 중에는 사망자도 나왔습니다(고마쓰바라법난)
④ 다쓰노구치법난과 발적현본
1268년, 몸고(‘몽고’란 역사적 호칭으로 몽골제국을 가리킴)가 보낸 국서가 가마쿠라에 도착했습니다. 국서에는 몽고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하겠다는 뜻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입정안국론>에서 예언한 타국침핍난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대성인은 당시 싯켄(執權)인 호조 도키무네를 비롯한 막부 요인과 가마쿠라의 주요 사찰의 승려들, 도합 11개소에 편지(<십일통어서>)를 보내 예언이 적중했음을 알리는 동시에 여러 종파 승려들에게 공적인 장소에서 법론을 벌이자고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막부와 여러 종파는 대성인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막부는 대성인의 교단을 위험하다고 여겨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몽고 침략을 물리치려고 조복(調伏, 적을 무찌르고 복종시키는 일) 기도를 올리는 진언승(眞言乘)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또 진언율종(眞言律宗)인 고쿠라쿠사 료칸(닌쇼)이 막부와 결탁하여 강력한 힘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대성인은 민중과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여러 종파를 가차없이 파절하기 시작합니다.
1271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료칸이 기우제를 올리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대성인은 료칸에게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만약 료칸이 7일 이내에 비를 내리게 한다면 대성인이 료칸의 제자가 되고, 만약 비가 오지 않는다면 료칸이 법화경에 귀복하라’는 내용입니다.
그 결과는 료칸이 기우제를 올린 첫7일간은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7일 연장할 것을 청하여 기도했지만 비는커녕 폭풍이 불어 닥치는 결과로 료칸이 크게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료칸은 자신의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지 않고, 대성인을 더욱 적대시 하고 수하에 있던 염불승의 명의로 대성인을 고소하거나, 막부 요인들과 그 부인들을 움직여 권력으로 탄압하려고 했습니다.
료칸은 당시 사람들에게 덕이 있는 고승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러나 실체로는 권력과 결탁하여 권세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해 9월 10일, 대성인은 막부의 소환을 받아 사무라이도코로(侍所, 군사와 경찰을 담당하는 관청) 쇼시(所司, 차관. 장관은 싯켄이 겸직)인 헤이노사 에몬노조 요리쓰나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때 대성인은 헤이노사 에몬노조에게 불법의 법리에 따라서 나라를 다스려야 할 지도자의 바람직한 모습을 설하고 간언했습니다.
이틀 뒤인 1271년 9월 12일, 헤이노사에몬노조가 무장한 병사를 이끌고 초암을 습격해, 대성인을 반역자처럼 취급하고 포박했습니다. 이때 대성인은 헤이노사에몬노조에게 “‘일본의 기둥’인 니치렌을 박해한다면 반드시 자계반역, 타국침핍의 두 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강하게 간효하셨습니다.(제2회 국주간효)
대성인은 한밤중에 갑자기 호송되어 가마쿠라 변두리에 있는 다쓰노구치로 연행되었습니다. 헤이노사 에몬노조 등이 은밀히 대성인을 참수하려고 모의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형을 집행하려는 그 찰나, 갑자기 에노시마 방향에서 ‘공’처럼 커다란 불빛나는 물체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서북 방향으로 날아갔습니다. 병사들은 이를 보고 겁에 질려 결국 형집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다쓰노구치법난)
이 법난은 대성인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대성인은 다쓰노구치법난을 무사히 이겨내고 숙업(宿業)이나 고뇌를 안은 범부(凡夫)라는 적(迹, 임시의 모습)을 열어서, 범부의 몸과 생명에 구비된 본원적인 자비와 지혜 넘치는 부처(구원원초<久遠元初>의 자수용보신여래<自受用報身如來>)라는 본래의 경지(境地, 본지<本地>)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를 ‘발적현본(發迹顯本, 적을 열어서 본을 나타냄)’이라 합니다.
이 발적현본 이후, 대성인은 말법(末法)의 어본불(御本佛)로서 행동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만인이 근본으로 존경하고 귀의할 어본존(御本尊)을 도현하셨습니다.
⑤ 사도유죄
다쓰노구치법난 뒤 얼마 동안, 막부는 대성인에 대한 처우를 정하지 못하고 약 한 달 동안 대성인을 사가미 지방의 에치(현재의 가나가와현 아쓰기시 북부)에 있는 혼마 로쿠로 자에몬 시게쓰라(사도 지방의 슈고다이<守護代, 가마쿠라 시대 영지에서 치안과 경비를 맡았던 직책>의 저택에 유치(留置)했습니다. 그 사이 대성인 문하에게 방화, 살인 등의 누명을 씌우는 등, 갖가지 탄압을 가했습니다.
결국 사도유배가 결정되어 대성인은 1271년 10월 10일에 에치를 출발하여 11월 1일에 사도 쓰카하라의 공동묘지에 있는 몹시 허름한 삼매당(三昧堂, 장례용 사당)에 들어갔습니다. 대성인은 살을 에는 엄동설한에 옷가지와 식량마저 부족했습니다. 사도의 염불자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는 등 혹독한 상황에 처해졌습니다.
탄압은 가마쿠라 문하에게도 미쳐, 땅굴에 갇히거나 추방되고, 소령 몰수 등의 처분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문하가 대성인 불법에 의심을 일으켜 겁쟁이들은 몸을 사리고 퇴전했습니다.
이듬해인 1272년 1월 16일과 17일에는 사도뿐만 아니라 호쿠리쿠, 신에쓰 지방에서 여러 종파 수백 명이 작당하여 대성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때 혼마 시게쓰라가 말려서 법론대결이 이루어졌습니다. 대성인은 각종의 사의(邪義)를 모조리 논파하셨습니다.(쓰카하라문답)
2월에는 호조 집안에 내란이 일어나서 가마쿠라와 교토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2월 소동<二月騷動>, 호조 도키쓰케의 난<亂>). 대성인이 다쓰노구치법난 때 예언하신 자계반역난이 불과 150일 뒤에 일어났습니다.
같은 해 초여름에 대성인의 귀양지가 쓰카하라에서 이치노사와로 옮겨졌지만 변함없이 염불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는 위험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도유배 동안 닛코상인은 대성인을 상수급사(常隨給仕)하여 고난을 함께하셨습니다. 또 사도에서도 아부쓰보, 센니치니 부부를 비롯해 대성인에게 귀의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대성인은 사도에서 중요한 어서를 많이 집필하셨는데, 특히 중요한 어서가 <개목초(開目抄)>와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입니다.
1272년 2월에 쓰신 <개목초>는 니치렌 대성인이야말로 법화경에서 예언한 대로 말법의 ‘법화경 행자’이고, 말법의 중생을 구하는 주사친(主師親)의 삼덕(三德)을 갖춘 말법의 본불이라고 밝힌 인본존개현(人本尊開顯)의 서(書)입니다.
또 1273년 4월에 쓰신 <관심본존초>는 말법의 중생이 성불을 위해 수지(受持)해야 할 남묘호렌게쿄의 본존(本尊)을 설한 법본존개현(法本尊開顯)의 서(書)입니다.
1274년 2월, 대성인이 사면되어 3월에 사도를 떠나 가마쿠라로 돌아오셨습니다.4월에 헤이노 사에몬노조를 대면한 대성인은 몽고조복(蒙古調伏) 기도를 진언(眞言) 등의 사법(邪法)에 따라 실시하는 막부를 강하게 간언함과 동시에 헤이노 사에몬노조의 질문에 대답해 몽고의 내습은 반드시 연내에 일어난다고 예언하셨습니다(제3회 국주간효)
이 예언대로 같은 해 10월에 몽고의 대군이 규슈 지방을 습격했습니다(문영<文永>의 전역<戰役>).
이것으로 <입정안국론>에서 예언하신 자계반역난과 타국침핍난의 두 난이 모두 적중했습니다.
이처럼 막부를 상대로 직접 간효하여 국난을 예언한 일은 이것으로 세 번째가 됩니다.(첫번째는 <입정안국론>을 제출한 때, 두 번째는 다쓰노구치법난 때) 이 예언이 적중함으로써 니치렌 대성인은 “나에게 세 번의 고명(高名)이 있노라”(어서 287쪽) 하고 말씀하십니다(세번의 고명)
<고명이란 특별히 뛰어난 ‘명예’, ‘명성’을 말함.>
⑥ 미노부입산
세 번째 간효도 막부가 받아들이지 않저 니치렌 대성인은 가마쿠라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가이 지방(현재의 야마나시현) 하키이 고을에 있는 미노부산에 들어가셨습니다. 미노부는 닛코 상인의 교화(敎化)로 대성인 문하가 된 지두 하키이 로쿠로 사네나가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대성인은 1274년 5월에 미노부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은 미노부 입산은 결코 은거(隱居, 속세를 떠나서 조용히 사는 일)가 아니었습니다.
미노부에서 대성인은 <선시초(選時抄)>, <보은초(報恩抄)>를 비롯하여 수많은 어서를 집필하시고 대성인 불법의 중요한 법문을 설했습니다. 특히 삼대비법(三大秘法, 본문의 본존, 본문의 계단, 본문의 제목)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법화경 강의 등을 통해서 미래의 광포를 짊어질 인재 육성에 온힘을 쏟으셨습니다.
또 각지의 남성, 여성 재가의 신도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 격려하셨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강성한 신심을 관철하여 인생의 승리와 성불의 경애를 득할 수 있도록 간절한 지도와 격려를 게속하셨습니다.
⑦ 아쓰하라법난과 출세의 본회
니치렌 대성인이 미노부에 입산하신 뒤에 스루가 지방(현재의 시즈오카현 중앙부)의 후지 방면에서는 닛코 상인이 중심이 되어 절복, 홍교를 펼쳐 천태종 등의 승려와 신도가 지금까지 믿어온 신앙을 버리고 대성인에게 귀의했습니다.
그러자 그 지역의 천태종 사원에서 꾸민 박해가 시작되어 대성인에게 귀의한 사람들을 협박하는 사건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1279년 9월 21일에는 아쓰하라 농민신도 스무 명이 억울한 죄를 쓰고 체포되어 가마쿠라로 연행됩니다.
농민신도는 헤이노 사에몬노조의 사저에서 고문과 다름없는 문초를 당하고 법화경의 신심을 버리도록 협박을 받았지만 모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관철합니다. 그리고 진시로, 야로로 야로쿠로 삼형제가 처형되고, 남은 열일곱 명은 거주지에서 추방당합니다. 이 탄압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법난을 ‘아쓰하라법난’이라 합니다.
농민신도들이 불석신명(不惜身命, 불도수행을 위해서는 신명을 아끼지 않는 것)을 다하는 모습에 대성인은 민중이 대난을 견디는 강한 신심을 확립했다는 것을 느끼고, 10월 1일에 쓰신 <성인어난사(聖人御難事)>에서 입종(立宗) 이래 ‘27년’째에 대성인 자신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를 나타내셨습니다. ‘출세의 본회’란 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젊은 날에 불법의 간요를 아는 지자가 되어 모든 사람을 고뇌로부터 근본적으로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우십니다. 이 서원 성취가 평생을 두고 목표로 삼으신 근본목적이라고 배견됩니다. 대성인은 만인성불의 근원법인 남묘호렌게쿄를 설하고, 본문의 본존과 본문의 계단과 본문의 제목이라고 하는 삼대비법을 밝히고 미래 영원에 걸친 광선유포의 기반을 확립하셨습니다.
이 아쓰하라법난에서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를 수지하고 불석신명의 실천으로 광선유포하는 민중이 출현함에 따라 세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니치렌 대성인의 민중불법이 현실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생애를 건 근본 목적인 ‘출세의 본회’를 달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1279년 10월 12일, 그 의의를 담은 어본존을 건립하셨습니다.(이른바 1279년의 어본존)
또 아쓰하라법난에서 대성인 문하는 이체동심(異體同心)의 신심으로 싸웠습니다. 특히 인근 지역의 지두인 청년 난조 도키미쓰는 동지를 지키는 등 활약을 했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의 생애 간략 연보(年譜)
서기 | 성수 월일 | 니치렌 대성인 사적 |
1222 | 1세 2월 16일 | 아와 지방에서 탄생 |
1253 | 32세 4월 28일 | 세이초사에서 입종선언 |
1260 | 39세 7월 16일 | <입정안국론>을 호조 도키요리에게 제출. 마쓰바가야쓰법난(7월 또는 8월) |
1261 | 40세 5월 12일 | 이즈 지방으로 유배 |
1264 | 43세 11월 11일 | 고마쓰바라법난 |
1268 | 47세 10월 11일 | <십일통어서>를 관계 부처로 보냄 |
1271 | 50세 9월 12일 | 다쓰노구치법난 |
50세 10월 10일 | 유배지인 사도로 향함 | |
1272 | 51세 1월 16~17일 | 쓰카하라문답 |
51세 2월 | 막부 내부의 내란이 일어남(2월 소동) | |
51세 2월 | (개목초(開目抄)를 문하 일동에게 줌 | |
1273 | 52세 4월 25일 |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를 집필 |
1274 | 53세 3월 26일 | 사도유배에서 귀환하여 가마쿠라에 도착 |
53세 4월 8일 | 헤이노 사에몬노조에게 연내에 몽고내습이 일어날 것을 예언 | |
53세 5월 17일 | 미노부로 들어감 | |
53세 10월 | 몽고의 대군이 규슈를 습격(문영의 전역<戰役>) | |
1279 | 58세 9월 21일 | 아쓰하라의 농민신도 20명이 체포됨 |
1281 | 60세 5월~ | 몽고의 내습(홍안의 전역<戰役>) |
1282 | 61세 10월 13일 | 이케가미 무네나카의 저택에서 입멸 |
⑧ 입멸과 닛코 상인의 계승
1282년 9월 8일, 대성인은 제자들의 권유로 히타치 지방(혀내 이바라기현 북부의 후쿠시마현 동부)으로 온천치료를 하기 위해 9년 동안 머무신 미노부산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무사시노 지방 이케가미(현재의 도쿄 오타구)에 있는 이케가미 무네나카의 저택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후사를 명확히 정했습니다.
9월 25일에는 병을 무릅쓰고 문하에게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강의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1282년 10월 13일, 니치렌 대성인은 이케가미 무네나카의 저택에서 ‘법화경 행자’로서 꿋꿋하게 살아온 예순한 살의 존귀한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대성인 입멸 후, 닛코 상인은 오직 홀로 대성인의 뒤를 이어 불석신명의 광선유포 정신과 행동을 계승하셨습니다.
또 광선유포 계승자라는 자각에서 방법엄계(謗法嚴誡)의 정신을 관철하여 국주간효(國主諫曉)를 추진함과 동시에 대성인이 쓰신 모든 저술을 ‘어서(御書)’로 소중히 여겨, 말법(末法)의 성전으로 배견하고 연찬을 장려해 행학(行學)의 이도(二道)에 힘쓰는 수많은 뛰어난 제자를 배출했습니다.
남묘호렌게쿄
남묘호렌게쿄는 니치렌 대성인이 깨달은 만인의 고뇌를 근본부터 해결하는 법입니다.
여기서 남묘호렌게쿄의 중요한 측면을 몇가지 확인하겠습니다.
우주와 생명을 꿰뚫는 근원법
남묘호렌게쿄는 우주와 생명을 꿰뚫는 근원법입니다.
석존은 사람들의 고뇌를 자신의 고뇌로 받아들여 그 해결법을 탐구했습니다.
그 결과, 우주와 생명을 꿰뚫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근원법을 자신의 생명 안에서 깨달아 부처(佛陀, 불타)라 불렸습니다. 그리고 지혜와 자비로 여러 가지의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그 가르침은 갖가지 경전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여러 경전 중에서 부처가 깨달은 진실을 전한 경전이 법화경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고뇌를 근본부터 해결하고 행복을 여는 부처가 깨달은 이 근원법이 바로 남묘호렌게쿄라고 밝히셨습니다.
성불의 근본법
부처는 근원법을 자신의 몸에 체현해 고난을 이겨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행복경애를 흉중에 확립한 사람입니다.
이 근원이 되는 법인 남호렌게쿄가 바로 성불의 근본법입니다.
만인에게 갖춰진 영원한 법
부처는 근원의 법이 자신의 생명을 꿰뚫고 있다는 점을 깨달음과 동시에 만인의 생명에도 본디 갖추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꿰뚫는 근원법은 생사를 초월해 결코 없어지거나 파괴되지 않는다고 깨달았습니다.
남묘호렌게쿄는 만인에게 갖춰진 보편적인 법이자 괴거세, 현재세, 미래세라는 삼세(三世)를 꿰뚫는 영원한 법입니다.
이름에서 엿볼 수 있는 깊은 의미
남묘호렌게쿄는 이름 그 자체에서 근원법이라는 깊은 의미를 엿볼 수 있습니다.
묘호렌게쿄는 법화경의 자세한 이름입니다. 법화경에서 설한 근원법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법이므로 ‘묘법’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묘법의 특질을 설명하기 위해 식물 ‘연꽃<蓮華>’를 비유로 듭니다.
예를 들면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고 향기 짙은 꽃을 피웁니다. 그것은 묘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 고뇌가 소용돌이치는 현실세계에 살면서도 깨끗한 마음과 행동으 유지해 사람들을 교화하는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또 연꽃은 다른 꽃과 달리 꽃봉오리 때도 꽃잎 속에 연밥인 연대(蓮臺)가 있어서 꽃잎과 열매가 동시에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뒤에도 꽃잎이 있습니다. 원인은 꽃과 결과인 열매가 함께 있어 동시(同時)입니다.
이는 아직 부처의 경애(불계(佛界)가 열리지 않는 범부일 때도 부처의 경애는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갖춰져 있다는 것, 그리고 부처가 된 뒤에도 범부의 생명경애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연꽃을 비유로 들어 묘법의 특징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묘법은 영원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므로 ‘경(經)’으로서 존중받는 신앙의 대상입니다.
또 ‘나무(南無)’는 고대 인도의 말소리를 한자로 옮긴 것인데, 그 뜻을 따서 ‘귀명(歸命)’이라 번역합니다. ‘귀명’은 몸도 마음도 귀의(歸依)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침을 실현하여 체현한다는 의미입니다.
남묘호렌게쿄는 모든 사람을 구하려는 부처의 자비와 지혜의 삶이 응축된 부처의 마음 그 자체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의 부처의 생명
법화경에는 우주와 생명을 꿰뚫는 근원법을 나타내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또 그 명칭을 분명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법화경에서 나타낸 근원법이 자신의 생명에 갖추어져 있음을 깨닫고 그것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밝히셨습니다.
다시 말해 남묘호렌게쿄는 단순히 경전(經典)의 이름인 ‘남묘호렌게쿄’ 앞에 ‘나무’를 붙인 것이 아니라 근원법 그 자체의 명칭입니다.
이로써 자신의 진실한 생명이 어떤 모습인지도 모르고 근본적으로 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구축하는 길을 현실에 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니치렌 대성인을 말법이라는 고뇌가 소용돌이치는 혼란한 시대의 어본불로서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남묘호렌게쿄는 우주와 생명을 꿰뚫는 근원법을 체현하신 대성인의 부처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범부도 본디 묘법 그 자체
그리고 범부 즉 평범한 사람의 생명에도 불계(佛界, 부처의 생명경애)는 엄연히 갖춰져 있습니다. 본디 우리 한사람 한사람도 남묘호렌게쿄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범부는 그 진실한 생명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내적인 근원법인 남묘호렌게쿄의 힘과 작용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 진실을 깨달은 상태가 부처이고, 이 진실을 믿지 못하고 헤매는 상태가 범부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남묘호렌게쿄를 믿고 실천할 때 묘법의 힘과 작용이 나타납니다.
만다라로 나타내어 수행의 본존으로
니치렌 대성인은 자신의 불계의 생명을 한 폭의 만다라로 나타내셨습니다.
범부인 우리가 대성인과 똑같이 남묘호렌게쿄를 자기 몸에 체현하고 성불하기 위한 수행의 본존으로 하셨습니다.
“이 어본존을 결코 타처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흉중의 육단(肉團)에 계시느니라.”(어서 1244쪽) (통해: 이 어본존을 결코 다른 곳에서 구하면 안 된다. 다만 우리가 법화경을 수지하고 남묘호레게쿄라고 봉창하는 마음속에 계십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만다라인 어본존으로 도현하신 근원법이자 부처의 생명인 남묘호렌게쿄를 만나 뵙고, 그것이 우리 자신의 생명에도 엄연히 갖춰져 있다고 믿고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내적인 묘법을 개현해 부처의 경지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또 성훈에 “처음으로 나의 마음이 본래의 부처라고 이름한다. 소위 남묘호렌게쿄는 환희 중의 환희이니라.”(어서 788쪽)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이 본디 부처라고 아는 것을 대환희라고 한다. 남묘호렌게쿄는 환희 중의 대환희다.) 라고 씌어 있습니다.
자신이 본디 부처인 남묘호렌게쿄 그 자체라는 것을 알고, 그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위대한 복덕(福德)을 자기 몸에 개현한다. 인생에서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묘법을 근본으로 갖가지 어려움을 이겨낼 때, 영원히 저대로 무너지지 않는 행복 궤도를 나아갈 수 있고, 이 일생을 대 환희로 장식할 수 있습니다.
일생성불과 광선유포
(1) 일생성불
신심의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 자신이 부처의 경애를 얻는 일입니다.
어본존을 신수하고 순수하게 자행화타를 실천하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일생 동안에 성불의 경애를 득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일생성불’이라고 합니다.
자행화타의 ‘자행’은 자기가 공덕을 받기 위한 수행이고, ‘화타’는 타인이 고덕을 받도록 교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행, 창제에 면려함과 동시에 불법을 이야기하고 교화하는 홍교(弘敎)의 실천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법화경의 행자는 여설수행(如說修行)을 하면 반드시 이랭 중에 한 사람도 남김없이 성불하느니라. 비유하면 봄 여름에 농사를 짓는데 조만(早晩)은 있을지라도 일년 중에는 반드시 이를 거둬 들이듯”(어서 416쪽) (통해: 법화경 행자는 부처가 설한 대로 수행하면 반드시 일생동안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불할 수 있다. 비유하면 봄 여름에 농사를 짓는데 빨리 열매를 맺는 품종의 차이는 있어도 일년 동안에 모두 반드시 수확할 수 있는 것과 같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성불은 현재의 자기와는 전혀 다른 특별한 인간이 된다거나, 사후에 다음 생에서 현실세계를 떠나 정토에 태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서에는 성불의 ‘성(成)’은 “성이란 연다는 의의이고”(어서 753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성불은 자기 내면에 갖춰진 부처의 생명경애(불계<佛界>)를 여는 것을 말합니다.
‘범부’ 다시 말해 보통 사람인 우리가 지금 모습 그대로 부처의 생명경애를 개현(開顯)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부성불’ 또는 ‘즉신성불’이라고도 합니다.
성불은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실세계에서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인 행복경애를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어서에 “앵매도리(櫻梅桃梨)의 각기의 당체를 고치지 아니하고 무작삼신(無作三身)이라고 개견(開見)하면”(어서 784쪽) (통해: 벚꽃, 매화, 복숭아, 자두에는 각각의 특질이 있듯 우리도 각각의 특질을 고치지 않고도 그대로의 모습으로 무작삼신의 부처라고 개현하는 것이다. ‘무작삼신의 부처’는 아무 것도 꾸미지 않는 모습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처의 특질을 갖춘 참된 부처를 말함)이라고 말씀하셨 듯이 성불은 본디 자기의 특질을 살려서 더욱더 충실하게 사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즉 성불은 생명이 정화되어 본디 갖춘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여 갖가지 어려움에 부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굳센 경애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성불은 종점에 도착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묘법을 수지하여 악을 없애고 선을 낳는 싸움을 계속하는 그 경애가 부처의 경애입니다.
끊임없이 광선유포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바로 부처입니다.
범부성불, 즉신성불
‘범부’는 보통 사람을 말합니다. 법화경에서는 범부의 몸에 본디 부처의 경애를 갖추고 있기에 개현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몸에 위대한 부처의 경애를 열 수 있습니다. 이를 ‘범부즉극(凡夫卽極)’ 또는 ‘범부즉불(凡夫卽佛)’이라고도 합니다.
성불은 인간이 갖춘 본디 부처의 경지(境地, 본유<本有>의 불계<佛界>)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에서 동떨어진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범부의 몸에 부처라는 최고의 인간성을 개현한다는 것이 대성인의 성불관(成佛觀)입니다.
이러한 성불을 ‘즉신성불’이라고 합니다. 즉신성불은 중생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 범부의 몸을 바꾸지 않고 부처의 경애를 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법화경 이외의 여러 경전에서는 ‘성불’을 설하지만 적어도 두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이승(二乘, 성문과 연각), 악인과 여인은 아니어야 합니다.
이승들은 위대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스스로 굳게 믿고 아라한(阿羅漢, 성문의 가르침으로 최고의 가르침을 득하는 자)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그치고, 번뇌를 완전히 없앤 경지로서 몸과 마음을 멸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이러한 이승을 대승의 여러 경전은 성불하지 못한다고 엄하게 비난했습니다.
또 중생이 악인이라면 선인으로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악인과 여성은 그 몸 그대로 성불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불을 설하지만 현실적으로 성불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둘째, 몇 번이고 생사를 되풀이해서 불도수행을 해야(역겁수행<歷劫修行>), 범부의 경애를 벗어나 부처의 경애에 도달한다고 했습니다.
범부의 몸 그대로 일생 동안에 성불
이와 반대로 법화경에서는, 성불은 ‘부처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 몸에 ‘불계의 생명경애를 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 몸에 ’불계의 생명 경애를 여는 것‘이라고 설했습니다.
대성인은 모든 부처를 부처로 만든 근원법을 남묘호렌게쿄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근원법과 하나가 된 대성인 자신의 생명을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을 신수함으로써 누구나 자신의 생명에 불계를 개현할 수 있습니다.
니치칸(일관(日寬) 상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본존을 신수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면 우리 몸이 즉 일념삼천의 본존, 연조성인(蓮組聖人)이니라”(《니치칸 상인 문답집》)
어본존을 신수하고 광선유포의 실천과 신심을 관철하면 범부의 몸 그대로 흉중에 대성인과 똑같은 부처의 생명경애를 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범부의 몸 그대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즉신성불, 일생 동안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일생성불이라 하는데 둘 다 같은 법리를 표현한 말입니다.
<니치칸 상인은 에도시대의 학승으로 니치렌 대성인이 닛코 상인에게 계승한 불법의 법리를 정리하여 선양했다.>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
즉신성불의 법리를 다른 가고에서 표현한 것이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입니다.
소승교라 불리는 여러 경전에서는 고뇌의 원인은 자신의 번뇌에 있다고 설하고, 고뇌를 해결하려면 번뇌를 소멸시키는 수밖에 없다 하여 수많은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거듭하여 해탈(解脫, 깨달음으로 고뇌에서 해방)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번뇌를 완전히 없앤 경지로서 몸과 마음을 소멸시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삶은 결국 생명 자체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권대승교라 불리는 여러 경전에서는 소승교를 실천하는 이승과 악인 그리고 여인성불을 부정합니다.
실질적으로는 소승교와 마찬가지로 범부와 부처 사이에 넘기 어려운 단절이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부처에 대해서도 아미타불과 대일여래 등, 인간을 초월하고 현실세계에서 유리된 다른 세계에 사는 가공의 부처를 설합니다.
범부가 부처가 되려면 생사를 반복하는 동안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를 일부분씩 차례로 배우고 수행하여 터득해야 한다고 설합니다.
또 자신의 힘으로는 위대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부처의 절대적인 힘으로 구제받기를 강조하는 생각도 나타납니다.
이에 비해서 법화경에서는 자비와 지혜가 넘치는 부처의 경지를 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고, 그것을 개현함으로써 성불할 수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번뇌에 뒤덮여 악업을 쌓아 고뇌에 허덕이는 범부일지라도 자신 안에 불계를 갖추었다는 진실에 눈을 뜨면서 부처가 깨달은(보리<菩提>) 지혜를 발휘해, 고뇌에서 해방되어 자우자재의 경지를 득 할 수 있습니다.
번뇌에 뒤덮인 고뇌의 몸이 그대로 보리의 지혜에 빛나는 자유자재의 몸이 됩니다. 이 법리를 ‘번뇌즉보리’라고 합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계를 남묘호렌게쿄라고 밝히셨습니다.
우리는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을 믿고 제목을 불러, 존엄할 정도의 참된 자신에 눈을 뜨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가 솟아오르고 고난에 도전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용기가 생겨,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자비도 생겨납니다.
‘생사즉열반’이란 어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면 생사로 인해 발생하는 괴로운 경애에 놓인 생명에, 부처의 깨달음으로 득할 수 있는 안온한 경애(열반)를 개현할 수 있다고 밝힙니다.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의 법리는 묘법의 신심에 서면 온갖 고뇌를 자신의 성장과 행복의 밑거름으로 전환하는 적극적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상대적 행복과 절대적 행복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선생님은 행복에는 ‘상대적 행복’과 ‘절대적 행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상대적 행복은 물질적으로 충족되거나 욕망이 만족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욕망에는 끝이 없고, 설령 일시적으로 만족스러운 것 같아도 영속성이 없습니다. 외부 조건이 갖추어 졌을 때 성립하는 행복이므로 그 조건이 무너지면 그 행복도 사라져 버립니다.
이에 비해서 절대적 행복은 어디에 있어도 또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 있는 그 자체가 행복하고 즐거운 경애를 말합니다. 그것은 외부의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행복이기에 절대적 행복이라 합니다. 성불은 이 절대적 행복경애를 확립하는 것을 말합니다.
현실 세계에 사는 이상, 인생에는 갖가지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등산에 비유한다면 건장한 사람은 다소 무거운 짐을 짊어져도 유유히 산을 오를 수 있듯이, 자신의 생명에 절대적 행복경애를 확립한 사람은 갖가지 어려움이 일어나도 그 어려움을 발판으로 삼아 더욱 강한 생명력을 발휘하여 역경을 유유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장한 사람은 오히려 산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그것을 극복하는 기쁨을 맛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는 생명력과 지혜를 터득한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소용돌이치는 현실세계 그 자체가 충실감으로 가득 찬 가치창조(價値創造)의 자리입니다.
또 환경에 의존하는 상대적 행복이 ‘죽음’으로 단절되는 데 비해, 절대적 행복인 부처의 경애는 “자신, 법성의 대지를 생사생사로 유전(流轉)해 가느니라.”(어서 724쪽) (통해: 자기 몸이 묘법의 대지를 생사생사로 유전한다.) 하고 말씀하셨듯이 죽음을 뛰어넘어서 존속합니다.
(2) 입정안국과 광선유포
불법을 실천하는 목적은 개인의 일생성불을 실현함과 동시에 자타 함께 행복을 확립하는 데 있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현실사회에 자타 함께 행복을 확립하는 실천의 지표로서 ‘입정안국’과 ‘광선유포’를 설하셨습니다.
입정안국
니치렌 대성인 불법은 각자의 생명경애를 변혁하고 금세 동안에 절대적 행복경애를 여는 가르침입니다. 그와 더불어 각자가 생명경애를 변혁해 평화로운 사회건설을 목표로 삼습니다.
대성인은 평화 실현을 위한 원리를 <입정안국론>에서 밝히셨습니다.
‘입정안국’은 ‘정(正)을 세워서(立) 나라(國)를 안온케(安) 한다’고 읽습니다.
‘입정’은 사람들이 인생의 의처로서 정법을 신수하는 것이고 또 불법ㅇ이 설하는 생명 존엄의 이념이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원리로 확립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안국‘은 사회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안온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입정안국론>에서 말하는 ‘국(國, 나라)’은 권력을 중심으로 한 통치기구라는 면과 더불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민중의 생활 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형성한 사회 체계뿐만 아니라 자연 환경인 국토도 포함합니다.
대성인은 민중을 중심으로 국가를 파악했다는 점은 <입정안국론>의 친필에서 나라 국(國) 한자를 큰 입구(口) 변에 백성 민(民)자를 쓴 ‘국’으로 쓰신 데서 엿볼 수 있습니다.
또 대성인은 “왕은 백성을 어버이로 하고”(어서 1554쪽)라고 하시며 권력자도 민중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또 국주이면서도 ‘민중의 한탄’을 모르는 자는 악도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어서 36쪽)
<입정안국론>은 직접적으로는 당시 일본의 안국을 실현하려고 집필하신 글이지만, 그 근본 정신은 민중의 안온을 실현하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래 영원에 걸친 전 세계의 평화와 사람들의 행복을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대성인이 당시 사람들의 고뇌를 해결하고자 <입정안국론>을 저술해서, 권력자를 간효한 것 자체가 불법을 행하는 자는 단지 자신만의 성불을 기원하는 신앙이 아니라, 불법의 이념과 정신을 근본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사회적인 과제에 관여해야 한다는 점을 몸소 나타내신 것이라 미루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입정안국론>에서는 “그대 모름지기 일신의 안도를 생각한다면 우선 사표(四表)의 정밀(靜謐)을 기도해야 하느니라.”(어서 32쪽) (통해: 그대가 일신의 안도를 바란다면 우선 사표의 정밀<주위의 평온, 세계평화>를 기원해야 합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회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종교, 신앙의 세계에만 틀어박히는 이기적인 자세는 오히려 대승불교에서는 엄하게 훈계하고 있습니다.
창가학회가 오늘날, 불법의 이념을 근본으로 평화, 문화, 교육, 인권 등의 분야에서 지구적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입정안국’의 법리와 정신에 바탕을 둔 실천입니다.
광선유포
부처의 깨달음인 정법을 사람들에게 유포하고 만인을 부처의 경애로 이끄는 일이 바로 불법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도 “내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五百歲) 중에 염부제에 광선유포하여라. 결코 단절시켜, 악마, 마민, 제천, 용, 야차, 구반다들이 그 편의를 얻지 못하게 할지어다.”(법화경 601쪽) (통해: 내(석존)가 입멸한 뒤, 말법에 전 세계에 정법을 광선유포하여 단절시키지 말고, 결코 악마, 마민, 제천, 용, 야차, 구반다 등의 마물이 틈타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설합니다.
이 경문은 ‘후 오백세’ 즉 말법에 묘법을 전 세계(일염부제)에 광선유포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법화경에서는 말법의 광선유포를 ‘지용보살’에게 맡깁니다. 지용보살은 구원(久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먼 옛날)부터 석존의 제자로서 철저히 훈련받은 보살이라고 합니다.
법화경을 설법하는 자리에 대지 밑에서 무수한 지용보살이 용현합니다. 그리고 상행보살(上行菩薩)을 중심으로 석존 멸후의 묘호렌게쿄 홍통을 서원합니다.
석존은 자신이 입멸한 뒤에 이 지용보살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태양과 달처럼 중생의 어둠을 비추어 사람들을 구하리라고 예언합니다.
광선유포가 바로 대성인의 근본정신
대성인은 이 법화경의 경문대로 말법악세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수많은 대난을 견디며 남묘호렌게쿄의 대법을 홍통하셨습니다.
어서에 광선유포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원(大願)이란 법화홍통(法華弘通)이니라.”(어서 736쪽)
“니치렌의 자비가 광대하면 남묘호렌게쿄는 만년외 미래까지도 유포하리라. 일본국의 일체중생의 맹목을 여는 공덕이 있으며, 무간지옥의 길을 막았느니라.”(어서 329쪽)
“니치렌이 법화경을 믿기 시작한 것은 일본국에는 일제(一渧), 일미진(一微塵)과 같음이라. 법화경을 이인, 삼인, 십인, 백천만억인이 불러 전해 간다면 묘각의 수미산으로도 되고 대열반의 대해로도 될 것이로다. 부처가 되는 길은 이것 이외에 또 구하는 일 없을지니라.”(어서 288쪽)
참으로 광선유포가 바로 니치렌 대성이의 근본 정신입니다.
대성인은 제자에게도 광선유포를 위해 끝까지 살고, 성불을 실현하여 입정안국을 실현하도록 거듭 촉구하십니다.
창가학회가 바로 광포의 유일한 단체
대성인의 정신을 이어받아 어서 말씀대로 묘법을 홍통하고, 광선유포를 추진한 화합승(和合僧, 불법자의 모임)이 창가학회입니다.
“니치렌과 동의란다면 지용의 보살이 아니겠느뇨.”(어서 1360쪽)라는 말씀처럼, 대성인의 마음 그대로 묘법을 홍통한 창가학회가 바로 광선유포의 사명을 짊어지는 지용보살의 단체입니다.
대성인 멸후 700년, 창가학회가 출현하기까지 아무도 묘법을 넓히지 못했습니다. 창가학회가 석존과 대성인의 미래기(예언)를 실현했습니다. 창가학회가 광선유포의 사명을 짊어지고 출현한 불의불칙의 교단이라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염부제에 광선유포’라고 경문에 있듯이 현실적으로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묘법을 넓혔습니다.
-법련 2017년 1월호-
십계(十界)
여기서는 십계론의 법리(法理)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지금의 인생에서 자신의 생명에 갖춰진 부처의 경애를 열어 나타내는 신심의 근본목적을 배웁니다.
십계
‘십계’는 생명의 상태, 경애를 열종류로 분류한 불법에서 설하는 생명관의 기본입니다. 십계의 법리를 배움으로써 경애를 올바르게 파악하여 각자가 각각의 경애를 변혁하는 지침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십계’ 각각의 이름은 지옥계(地獄界), 아귀계(餓鬼界), 축생계(畜生界), 수라계(修羅界), 인계(人界), 천계(天界), 성문계(聲聞界), 연각계(緣覺界), 보살계(菩薩戒), 불계(佛界)입니다.
이중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 천을 모아 ‘육도(六道)’라고 하고, 성문, 연각, 보살, 불을 모아 ‘사성(四聖)’이라고 합니다. ‘육도’는 인도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세계관을 불교가 받아들인 것으로 본디 생명이 생사를 되풀이하는 세계를 크게 여섯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또 ‘사성’은 불도수행으로 얻는 경애입니다.
법화경 이외의 경전에서는 십계를 각각 고정화된 생명경애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그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깨고, 십계 중 불계를 제외한 지옥계부터 보살계까지 구계(九界)의 중생에게 불계가 갖춰져 있다고 밝혔습니다. 성불한 부처도 구계의 경애를 갖추고 있다고 설하여 십계는 고정적인 별개의 세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에 열 종류의 경애를 갖추었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지금 십계 가운데 어느 하나의 계(界)의 모습을 나타내는 생명이라도 십계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연(緣)에 따라 다른 계의 경애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십계의 각계가 서로 십계를 갖춘 것을 십계호구(十界互具)라고 합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정토라 함도 지옥이라 함도 밖에는 없느니라. 오직 우리들 가슴속에 있느니라. 이것을 깨달음을 부처라 하고 이에 미혹함을 범부라 하며”(어서 1504쪽, 통해 : 부처의 청정한 국토라 하는 것도 지옥이라 하는 것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가슴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부처라 하고, 이를 깨닫지 못하면 범부라고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에 십계가 모두 갖춰져 있다는 것은 설령 자신이 지옥의 괴로운 경애에 있다 하더라도 크게 환희하는 불계의 경애로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법화경에 바탕을 둔 십계론은 자신의 생명경애를 다이나믹하게 변혁할 수 있는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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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십계 각각의 경애를 알아봅시다. 먼저 우리 생명에 갖춰진 육도에 대해 대성인은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주 타면(他面)을 보건대, 어느 때는 기뻐하고 어느 때는 노(怒)하며, 어느 때는 평온하고 어느 때는 탐(貪)을 나타내며, 어느 때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어느 때는 첨곡(諂曲)이니라. 노함은 지옥, 탐함은 수라, 어리석음은 축생, 첨곡함은 수라, 기뻐함은 천(天), 평온함은 인(人)이니라.”(어서 214쪽)
① 지옥계
지옥은 본디 ‘지하의 감옥’이라는 뜻으로 경전에서는 팔열지옥(八熱地獄), 팔한지옥(八寒地獄) 등 수많은 지옥을 설합니다.
지옥계는 괴로움에 사로잡힌 가장 낮은 경애입니다. ‘지’는 가장 낮은 바닥을 의미하고 ‘옥’은 구속되어 묶여 있는 자유롭지 못함을 나타냅니다.
“지옥은 무서우니 불길을 가지고 집으로 삼는다”(어서 1439쪽)고 하듯이 지옥계는 자신은 둘러싼 세계 전체를 마치 불길처럼 괴롭히는 세계라고 느끼는 경애를 말합니다.
또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노함은 지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는 뜻대로 되지 않는 자기 자신이나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주변 세계에 불만을 쏟을 데가 없는 원한에 쌓인 마음입니다. 괴로움의 세계에 사로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생명의 신음소리가 분노입니다.
말하자면 ‘사는 것 자체가 괴롭다.’ ‘무엇을 봐도 불행하게 느끼는’ 경애가 지옥입니다.
② 아귀계
아귀계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애입니다.
고대 인도에서 아귀의 본디 뜻은 ‘죽은 자’를 말합니다. 죽은 자는 언제나 굶주려 음식을 먹고 싶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멈출 줄 모르는 심한 욕망의 불길에 몸도 마음도 타버린 생명상태를 아귀계라고 표현합니다.
대성인은 “탐(貪)함은 아귀”, 또 “아귀는 슬프니라 기갈(飢渴)로 굶주려 아이를 잡아먹고”(어서 1439쪽)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굶주려 아이마저 잡아먹을 정도의 탐욕, 즉 끝이 없는 욕망에 휘둘려 마음이 자유롭지 못해 괴로워하는 경애를 말합니다.
물론 욕망 그 자체에는 선악의 양면이 있습니다. 인간은 식욕 등의 욕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욕망이 인간을 진보, 향상시키는 에너지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창조적인 방향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 괴로워하는 경애가 아귀계입니다.
③ 축생계
축생이라는 말은 본디 짐승이나 새 등의 동물을 가리킵니다. 축생계의 특징은 눈앞의 이해에 사로잡혀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어리석음’입니다.
대성인은 “어리석음은 축생”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인과(因果)의 도리를 모르고 정사(正邪), 선악의 판단에 눈이 어두워 당장의 이해에 따라 행동하는 경애입니다.
“축생의 마음은 약함을 위협하고 강함을 두려워하느니라.”(어서 975쪽), 축생은 잔해(殘害, 상처를 입혀서 죽임)라 해서 서로 살육한다.”(어서 1439쪽)고 말씀하시듯 축생계의 생명은 이성과 양심을 저버리고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을 해치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을 관철하는 경애입니다. 눈앞의 일밖에 보지 못해,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은 자신을 파멸시켜 괴로워합니다.
<축생이라는 표현은 고대 인도의 표현을 답습한 것입니다. 동물이라 해도 예를 맹도견처럼 사람을 돕는 것을 사명으로 하여 살아가는 사례도 있습니다. 거꾸로 인간이라 해도 전쟁처럼 다른 동물보다도 잔혹한 행위를 일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의 셋은 모두 고뇌하는 경애이므로 ‘삼악도(三惡道)라고 합니다.
④ 수라계
수라는 본디 아수라(阿修羅)라고 하여 다투기를 좋아하는 고대 인도의 신의 이름입니다.
자기와 남을 비교하여 늘 남을 이기려는 ‘승타(勝他)의 염(念)’이 강한 것이 수라계의 특징입니다.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이 뛰어나고 타인이 뒤졌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만심(慢心)을 일으켜서 타인을 가벼이 여깁니다. 그리고 타인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타인을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또 자신보다 강한 자를 만나면 비굴해져서 아첨을 떱니다.
자신을 매우 뛰어나게 보이려고 허상을 만들기 위해 겉으로 인격자나 착한 사람인 것처럼 꾸미고, 겸허한 체 하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 대한 질투와 분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안과 밖이 서로 다르고 앞뒤가 다른 것도 수라계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첨곡함을 수라”라고 설하셨습니다. ‘첨곡’은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상대방에게 영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첨(諂)’은 아첨하다, 비위를 맞추다‘는 의미이고, ’곡(曲)‘은 ’도리를 굽히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수라계는 탐진치의 삼독(三毒“ 탐욕, 분노, 우치라는 세가지 근본적인 번뇌)에 휘둘리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와 달리, 자신의 의사로 행동을 결정짓는 만큼 삼악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괴로움을 수반하는 불행한 경애이므로 삼악도에 수라계를 더해 ‘사악취(四惡趣)’라고도 합니다.
⑤ 인계
인계는 평온하고 평정한 생명 상태로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경애를 말합니다. 대성인은 “평온함을 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계의 특질은 인과의 도리를 알고, 사물의 선악을 판단하는 이성의 힘이 명확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성인은 “현명함을 사람이라고 하며, 어리석음을 축(畜)이라 하느니라.”(어서 1174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판별하는 힘이 있고 자기 통제가 가능한 경애입니다.
이 인간다운 경애도 결코 노력 없이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악연이 많은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향상하려는 자기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 합니다. 말하자면 인계는 ‘자기를 이긴’ 경애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인계의 생명은 ‘성도정기(聖道正器)’라 하여 불도(=성도)를 이룰 수 있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인계에는 악연을 만나 악도로 떨어지는 위험성도 있는 반면, 수행에 면려함으로써 불법의 개달음의 경애인 사성으로 가는 길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⑥ 천계
천계의 천은 본디 고대 인도에서 지사의 인간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신들을 말하며, 또 신들이 사는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금세의 선행을 베푼 사람은 내세에 천에 태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불법에서는 천계를 생명경애의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노력한 결과, 욕망이 채워졌을 때 느끼는 기쁨의 경애입니다. 대성인은 “기뻐함은 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욕망이라 해도 수면욕과 식욕 등의 본능적인 욕망, 새로운 자동차나 집을 사고 싶다는 물질적인 욕망, 사회에서 지위와 명예를 얻고 싶다는 사회적인 욕망, 미지의 세계를 알거나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고 싶다는 정신적인 욕망 등이 있습니다.
그러한 욕망이 충족되어 기쁨에 젖어 있는 경지가 천계입니다.
그러나 천계의 기쁨은 영속적인 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점차 희미해지고 결국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천계는 목표로 삼을 참돤 행복경애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육도에서 사성으로
앞서 말한 지옥계부터 천계까지의 육도는 결국 자신의 외부 조건에 좌우되는 것들입니다.
욕망이 채워졌을 때는 천계의 기쁨을 맛보고, 환경이 평온한 경우는 인계의 평온함을 맛볼 수 있지만, 그러한 조건이 사라진 경우에는 바로 지옥계와 아귀계의 괴로워하는 경애로 전락하고 맙니다.
환경에 좌우된다는 의미에서 육도의 경애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주체적인 경애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육도의 경애를 뛰어넘어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주체적인 행복경애를 구축하려는 것이 불도수행으로 얻는 깨달음의 경애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라는 사성의 경애입니다.
⑦ 성문계 ⑧ 연각계
성문계와 연각계의 둘은 불교 중에서도 소승교(小乘敎)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경애라 하여, 성문계, 연각계를 모아 ‘이승(二乘)’이라고 부릅니다.
성문계는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부분적인 깨달음을 획득한 경애를 말합니다.
이에 비해 연각계는 여러 가지 사물을 연으로 삼아 혼자 힘으로 불법의 부분적인 깨달음을 얻은 경애입니다. 독각(獨覺)이라고도 합니다.
이승의 부분적인 깨달음은 ‘무상(無常)’을 깨닫는 것입니다. 무상이란 만물이 시간과 함께 변화, 생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과 세계를 객관시하고 세간 즉 현실세계에 있는 것은 모두 연에 따라 생겨남과 동시에 변화 소멸한다는 진리를 자각하고 무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 이승의 경애입니다.
우리도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자신을 포함해 만물이 무상한 존재라는 것을 강하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성인은 “세간(世間)의 무상은 눈앞에 있으니 어찌 인계에 이승계(二乘界)가 없으리요.”(어서 241쪽)라고 하시며 인계에 이승계가 갖춰져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승의 경애를 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무상에 집착하는 번뇌가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라 하여 그 번뇌를 멸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자기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소멸시킨다는 잘못된 길 (회신멸지<灰身滅智>에 들어서고 맙니다.
이승이 얻은 깨달음은 부처의 깨달음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이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승은 그 낮은 깨달음에 안주하고 부처의 참된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스승인 부처의 경애가 위대하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자기들은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낮은 깨달음에서 멈추고 맙니다.
또 이승은 자신의 깨달음에만 집착하여 타인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에고이즘에 빠져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의 마음에 이승의 한계가 있습니다.
⑨ 보살계
보살은 부처의 깨달음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중생이라는 뜻입니다.
이승이 부처를 스승으로 삼고 있어도, 자신들은 부처의 경애에 도저히 이르지 못한다고 하는 데 비해, 보살은 스승인 부처의 경애에 도달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또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여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합니다.
즉 보살이 도달한 경애의 특징은 불계라는 최고의 경애를 구하는 ‘구도(求道)’와 함께 자신이 불도수행의 도중에서 얻은 공덕을 타인에게도 나누어 주려는 ‘이타(利他)’의 실천이 있습니다.
현실 세간 속에서 사람들의 괴로움과 슬픔에 동고(同苦)하고, 발고여락(拔苦與樂,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줌)의 실천을 통해 자타 함께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보살의 마음입니다.
이승이 ‘자기중심’의 마음에 사로잡혀 낮은 깨달음에 안주하는데 비해, 보살계는 ‘남을 위해’, ‘법을 위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경애입니다.
이 보살계의 경애는 ‘자비’가 근본입니다.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무고(無顧)의 악인도 역시 처자(妻子)를 자애하니 보살계의 일분(一分)이니라.”(어서 241쪽)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타인을 돌아보지 않는 악인이라도 자기 처자식을 자애하듯이 생명에는 본디 타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듯 보살계는 자비의 마음을 만인에게 베푸는 삶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⑩ 불계
불계는 부처가 체현한 존극(尊極)의 경애입니다.
부처(불타)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우주와 생명을 꿰뚫은 근원법인 묘법에 눈을 뜬 사람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인도에서 태어난 석존(釋尊, 석가불) 등을 말합니다.
여러 경전에 아미타불 등 갖가지 붜가 나오는데 이는 부처의 경애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가공의 부처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말법의 일체중생을 구하려고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생명에 불계라는 존극의 경애를 나타내고 일체중생의 성불의 길을 확립하신 말법의 어본불이십니다.
불계란 자기 생명의 근원이 묘법이라고 각지(覺知)함으로써 열리는 광대하고 복덕이 풍부한 경애입니다. 이 경애를 연 부처는 무상(無上)의 자비와 지혜를 체현하여 그 힘으로 일체중생에게 자신과 똑같은 불계의 경애를 얻도록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합니다.
불계는 우리 생명에 본디 갖춰져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괴로움이 많은 현실 생활 속에서 나타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성인은 사람들이 불계의 생명을 나타내기 위한 방도로 어본존을 나타내셨습니다.
어본존에 말법의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이 깨달은 불계의 생명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진수가 남묘호렌게쿄입니다.
우리는 어본존을 믿고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친 창제에 힘쓸 때 자신의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불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불계의 생명과 신심과의 깊은 관계에 대해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말대(末代)의 범부가 출생하여 법화경을 믿음은 인계에 불계를 구족하기 때문이니라.”(어서 241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법화경은 만인이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하는 가르침인데 그 법화경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써 자신의 생명 속에 본디 불계가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와 같이 대성인의 말씀을 이어받아 니치칸(日寬) 상인은 “법화경을 믿는 마음이 강함을 이름하여 불계라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화경은 말법의 법화경인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을 꿋꿋이 살아가는 ‘강성한 신심’ 그 자체가 다름 아닌 불계입니다.
이 불계의 경애를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그 어떤 것에도 침해당하지 않는 ‘절대적인 행복’입니다.
제2대 회장 도다 선생님은 신심으로 얻은 이 경애를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경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불계의 경애는 종종 사자왕(師子王)에 비유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자왕처럼 두려움이 없는 안온한 경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증(三證)
여기서는 사람들을 절대적인 행복으로 이끄는 정법(正法)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삼증(三證)’을 들어 니치렌 대성인 불법이 바로 일체중생의 일생성불(一生成佛)을 가능케 하는 종교라는 것을 배웁니다.
삼증
삼증은 ‘문증(文證)’, ‘이증(理證)’, ‘현증(現證)’의 셋을 말합니다.
‘문증’은 그 종교의 교의가 근거로 삼는 경문이나 성전이 뒷받침하고 있느냐하는 점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경문에 명백함을 쓰고 문증 없는 것은 버리라는 것이니라.”(어서 482쪽) 하시며, 경문에 명백한 근거가 있는 교의를 써야 하고 경전에 근거가 없는 가르침을 쓰면 안 된다고 훈계하셨습니다. 문증이 명확하지 않은 교의는 결국은 자기 멋대로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석존의 가르침 즉 경문을 반드시 근거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경우로 말한다면 문증이란 대성인의 ‘어서’에 근거가 있으냐 없느냐입니다.
다음, ‘이증’은 그 종교의 교의와 주장이 도리에 맞느냐 안 맞느냐입니다.
“불법이라고 함은 도리이며”(어서 1169쪽)라고 씌어 있듯이 불법은 어디까지나 도리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도리에 어긋난 주장을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현증’은 그 종교의 교의를 바탕으로 신앙을 실천한 결과, 생명이나 생활 그리고 사회에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점입니다.
종교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이나 인생에 반드시 커다란 영향을 주었느냐에 따라 종교의 승렬과 천심을 판단해야 합니다.
대성인은 “니치렌이 불법을 시험하건대, 도리와 증문보다 더한 것은 없고, 또 도리와 증문보다도 현증 이상은 없느니라.”(어서 1468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월에서 도리란 이증을 말하고, 증문은 문증을 말합니다. 이 글월에서 분명하듯 대성인은 현증을 가장 중히 여겼습니다.
그것은 본디 현실을 사는 인간을 구하려고 불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삼증 중 하나가 빠져도 올바른 종교라 할 수 없습니다.
약으로 비유하면 성분과 효능에 관한 설명서가 있고(문증), 효과가 있다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이증), 실제로 복용하여 몸이 회복되는 명확한 결과가 나와야(현증) 효력이 있는 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니치렌 대성인 불법은 이론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만인이 수긍할 수 있는 객관성, 보편성을 띤 종교입니다.
신행학(信行學)
여기서는 우리가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실천하는데 있어 세가지 기본인 신(信), 행(行), 학(學)을 배웁니다.
자신의 생명변혁을 목표로 하는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수행의 기본은 ‘신, 행, 학’입니다. 이중 ‘신’은 말법의 정법인 대성인 불법, 특히 궁극인 어본존을 믿는 일입니다.
‘신’이야말로 불도수행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입니다. ‘행’은 생명을 변혁하고 개척하는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학’은 가르침을 배우고 구하는 연찬이자 올바른 신심과 실천을 향한 지침을 주고, ‘행’을 돕고, ‘신’을 더욱 깊게 하는 힘이 됩니다.
이상의 셋 중 어느 하나가 빠져도 올바른 불도수행이 되지 않습니다.
<제법실상초(諸法實相抄)>에는 ‘신, 행, 학’의 바람직한 상태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계십니다.
“일염부제(一閻浮提) 제일의 어본존을 믿으실지어다. 기필코 기필코 신심을 강성히 하여 삼불(三佛)의 수호를 받도록 하시라. 행학(行學)의 이도(二道)를 힘쓸지어다. 행학이 끊어지면 불법은 없느니라. 나도 행하고 남도 교화하시라. 행학은 신심에서 일어나는 것이로다. 힘이 있는 한 일문일구(一文一句)라도 설할지니라.”(어서 1361쪽) (통해: 세계에서 으뜸가는 어본존을 믿으시오. 기필코 신심을 강성히 하여 석가불(釋迦佛), 다보불(多寶佛), 시방제불(十方諸佛)의 수호를 받도록 하시오. 행학 양쪽의 수행에 힘쓰시오. 행학이 끊어지면 불법은 없습니다. 나도 실천하고 남에게도 가르쳐 이끄시오. 행학은 신심에서 일어납니다. 힘이 있는 한 일문일구라도 말하시오.)
① 신
신은 신수(信受)라고도 합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신’이야말로 우리가 부처의 경애에 들어서기 위한 근본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석존의 제자 중에서 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 불린 사리불(舍利弗)도 오직 신수함으로써만 법화경에 설한 법리를 체득할 수 있었다고 설합니다. 즉 비유품(譬喩品)에는 “그대 사리불마저도 역시 이 경에는 신으로써 들어갈 수 있었거늘”(법화경 197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이를 ‘이신득입(以信得入)’이라고 합니다.
부처가 깨달은 위대한 지혜, 경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길은 오직 ‘신’에 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불법에서 설하는 생명의 법리가 올바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법의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은 자신이 깨달은 우주 근원의 법인 남묘호렌게쿄를 어본존으로써 도현하셨습니다.
즉 대성인이 말법의 일체중생을 위해서 자신이 깨달은 부처의 생명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 어본존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본존을 우리가 성불의 경애를 열기 위한 유일한 연(緣,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깊이 믿는 것이 대성인 불법을 수행하는 근본이 됩니다. 어본존을 신수하여 차제에 힘쓸 때, 묘법의 공력(功力)을 자신의 생명에 개현해 성불의 경애를 확립할 수 있습니다.
② 행
행은 어본존을 신수하고 행하는 구체적인 실천을 말합니다.
불법에서는 우리 자신의 생명 안에 자비와 지혜가 넘치는 부처의 생명경애 즉 불계가 본디 엄연히 갖춰져 있다고 설합니다.
그리고 불도수행의 목적은 바로 이 자기자신의 생명 안에 비침된 부처의 생명경애를 현현하여 절대적 행복경애를 확립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 안에 갖춰진 힘도 그것을 현실의 인생에 나타내어 적용시키려면 구체적으로 변혁하고 개척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부처의 경애를 자신의 생명에 현현하려면 도리에 맞는 지속적인 실천이 필요한데 그것이 ‘행’입니다.
이 ‘행’에는 ‘자행’ ‘화타’의 양면이 있습니다. 자동차의 양 바퀴처럼 어느 쪽이 빠져도 수행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행’은 자신이 법의 공덕을 얻기 위한 수행입니다. ‘화타’는 ㅌ인에게 공덕을 받도록 불법을 가르치는 실천을 말합니다.
또 “말법에 들어와서 이제 니치렌의 부르는 바의 제목은 전대(前代)와는 달리 자행화타에 걸쳐 남묘호렌게쿄이며”(어서 1022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법에는 자신의 성불을 목표로 하는 자행도, 사람들을 교화하는 화타도 성불의 근본법인 남묘호렌게쿄를 실천합니다.
즉 자신이 어본존을 믿고 제목을 부르는 동시에 사람들에게도 어본존의 공덕을 가르쳐 신심을 권하는 자행화타에 걸친 실천이 대성인 불법의 올바른 수행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자행은 근행(독경, 창제)이고, 화타는 절복, 홍교입니다. 또 광선유포를 위한 여러 가지 실천 활동도 화타의 수행이 됩니다.
생명변혁의 실천 – 근행과 홍교
‘근행’은 어본존을 향해서 독경, 창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생명변혁의 구체적인 실천 중 하나입니다.
대성인은 근행을 흐린 거울을 닦는 일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컨대 암경(闇鏡)도 닦으면 옥(玉)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도 일념무명(一念無明)의 미심(迷心)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명경(明鏡)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日夜朝慕)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어서 384쪽)
(통해: 예를 들어 흐려서 사물이 비치지 않는 거울도 닦으면 마치 옥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 범부의> 무명이라는 근본 미혹에 뒤덮인 생명은 닦지 않은 거울과 같다. 이를 닦으면 반드시 진실한 깨달음을 얻은 지혜로운 명경이 된다. 깊이 신심을 불러 일으켜서 밤낮으로 또한 게으름 없이 자신의 생명을 닦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닦으면 좋은가.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것, 이것을 닦는다고 한다.)
이 비유로 나타내듯이 거울 자체는 닦기 전이나 닦은 뒤에도 같은 거울이지만 그 작용은 전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도 나날의 근행을 지속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이 연마되어 그 작용이 크게 변혁됩니다.
또 ‘홍교’에 관해 <제법실상초>에서 “나도 행하고 남도 교화하시라. (중략) 힘이 있는 한 일문일구라도 설할지니라.”(어서 1361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쟈쿠니치보어서(寂日房御書)>에서는 “이러한 자의 제자단나(弟子檀那)가 된 사람들은 숙연(宿緣)이 깊다고 생각하여 니치렌 동일하게 법화경을 넓혀야 하느니라.”(어서 903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근행으로 자신만의 경애변혁이 아니라 자타 함께 행복을 목표로 일문일구라도 불법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신심을 더욱 심화할 수 있는 동시에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싸우는 부처와 보살의 경애를 자신의 생명에 불러 일으켜 대성인의 참된 제자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근행과 더불어 홍교를 실천하면 자신의 생명을 변혁하는 큰 힘이 됩니다.
또 법화경에는 “남몰래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법화경의 한 구절을 설하면 마땅히 알지어다. 이 사람은 곧 여래의 사자로서 여래의 여래가 보내, 일을 행하였다.”(법화경 357쪽)
이 경문을 바탕으로 대성인은 “법화경을 일자일구라도 부르고 또 남에게도 이야기하는 자는 교주석존(敎主釋尊)의 사자(使者)니라.”(어서 1121쪽) 하고 말씀하셨다.
즉 우리가 실천하는 화타행은 부처의 심부름꾼(여래의 심부름꾼)으로서 부처의 행동(여래<如來>의 사<事>)을 실천하는 가장 존귀한 행위입니다.
정행과 조행 – 창제가 근본, 독경은 보조
생명변혁의 구체적 실천의 한 기둥으로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근행을 합니다.
나날의 근행에서는 어본존을 믿고 제목을 불러, 법화경 방편품(方便品)제2(첫머리 산문 부분)와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제16의 자아게(自我偈)를 독송합니다.
근행은 어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창제가 근본이므로 창제를 ‘정행(正行)’이라고 합니다.
또 방편품, 자아게의 독송은 ‘정행’인 제목의 공덕을 나타내려고 돕는 것이므로 ‘조행(助行)’이라고 합니다.
법화경 28품(장) 중에서도 방편품과 수량품 자아게를 독송하는 이유는 이 두 품이 만인성불을 설하는 법화경의 가장 중요한 품이기 때문입니다.
방편품에서는 법화경의 전반인 적문(迹門)의 중심 법리인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설하고 있습니다.
수량품에서는 법화경의 후반인 본문의 중심 법리인 ‘구원실성’을 설하고 있습니다. 대성인은 “수량품, 방편품을 읽으면 자연히 여품(餘品)은 읽지 않아도 갖춰지느니라.”(어서 1121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행과 조행의 관계에 대해 니치칸 상인은 “소금과 식초가 밥이나 면의 맛을 북돋는 것처럼 방편품, 수량품을 독송하는 것은 ‘정행’인 제목의 심원한 공덕을 돕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조행’이라고 한다.”(취의)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근행할 때 방편품, 자아게를 독송하는 이유는 어본존의 공덕을 찬탄하기 위해서입니다.
③ 학
‘학’은 니치렌 대성인이 남기신 ‘어서’배독을 근본으로 올바른 불법의 법리를 배우는 교학 연찬을 말합니다.
올바른 불법 법리를 배움으로써 더 깊고 완전한 신을 확립할 수 있고 또 올바른 행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교학의 연찬이 없으면 자칫하면 자기 멋대로 불법을 이해해버리는 위험성이 있고 잘못된 가르침을 설하는 자에게 속아 넘어갈 우려가 있습니다.
‘행학은 신심에서 일어난다’고 대성인이 말씀하시듯 교학의 근본이 신심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또 제2대 회장 도다 선생님은 “신은 이(理)를 구하고, 구하는 이는 신을 깊이 다지고” 하고 말씀하시듯, 불법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신심을 깊이 다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되풀이 되풀이 해서 이 서(書)를 항상 읽게 하여 청문(聽聞)하십시오.”(어서 1444쪽) 등, 당신이 쓰신 어서를 되풀이해서 배우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또 대성인에게 불법의 법리를 질문한 문하에게는 그 구도심을 칭찬하셨습니다.
닛코 상인도 “어서를 심간(心肝)에 새기어”(어서 1618쪽)라고 말씀하시고, 또 “학문이 미련(未練)하고 명문명리(名聞名利)의 대중은 나의 말류(末流)가 될 수 없다.”(어서 1618쪽) 하고 교학 연찬을 강하게 권하셨습니다.
-끝-
법련 2017년 2월호
난을 극복하는 신심
인생에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또 광선유포의 투쟁에는 반드시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불법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각종 ‘난’을 배우고, ‘난을 극복하는 신심’을 확인합니다.
일생성불을 목표로 하는 우리는 일생을 통해서 신심을 관철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심을 지속하는 과정에서는 난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것을 알고 어떠한 난에도 무너지지 않는 자신의 신심을 확립하는 일이 중ㅇ요합니다.
그러면 올바른 법(정법)을 수지한 사람이 왜 난을 만나는 것일까요.
먼저 정법을 믿고 수행하여 성불의 경애를 목표로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밑바탕으로부터 변혁시키는 일입니다. 어떠한 변혁도 다 그렇지만, 불도수행에도 그 변혁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작용이 자신의 생명이나 혹은 주위의 인간관계에서 생깁니다. 마치 배가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저항 때문에 파도가 생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성불을 목표로 하는 불도수행의 도중에 일어나는 이와 같은 장애에는 ‘삼장사마(三障四魔)’가 있습니다.
또 법화경에서는 말법 탁악의 세상에 법화경을 넓히는 ‘법화경 행자’에게 ‘삼류강적(三類强敵)’나타나 박해한다는 내용을 설합니다.
이는 석존이 입멸한 뒤의 악세에서 일체중생의 성불을 바라고 법화경을 광선유포하는 실천이 있는 곳에 일어나는 박해입니다. 또 삼류강적의 출현은 참된 법화경 행자라는 증명입니다.
(1) 삼장사마
<형제초(兄弟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습니다.
“제오권(第五卷)에 가로되 ‘행해(行解)를 기위(旣爲) 힘쓰면 삼장사마가 분연히 다투어 일어난다. 내지 따르지 말지며 두려워 말지어다. 이에 따르면 바야흐로 사람으로 하여금 악도에 향하게 하고 이를 두려워하면 정법의 수행을 방해하느니라.’ 등 운운. 이 석(釋)은 니치렌 자신에게 해당될 뿐만 아니라, 문가(門家)의 명경(明鏡)이니 삼가 배우고 전하여 자량(資糧)으로 삼을지어다.”(어서 1087쪽) (통해: 천태대사의 《마하지관(摩訶止觀)》 제5권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수행이 진행되어 불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삼장사마가 분연히 다투어 일어난다. 이에 따르면 안 된다.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이에 따르면 삼장사마는 사람으로 하여금 악도로 향하게 한다. 이를 두려워하면 불도수행을 방해한다.” 이 석의 글은 니치렌 자신에게 해당될 분만 아니라, 우리 문류의 명경이다. 삼가 배우고 전하여 미래에 걸쳐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이 정법을 믿고 수행할 때, 신심이 깊어지고 실천이 진행되면 이를 방해하려고 일어나는 작용에 ‘삼장사마’ 즉 세가지 장애와 네가지 마가 있습니다.
삼장사마의 구체적인 내용을 니치렌 대성인은 <형제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삼장(三障)이라고 함은 번뇌장(煩惱障), 업장(業障), 보장(報障)이니라. 번뇌자이라고 함은 탐진치(貪瞋癡) 등에 의하여 장에가 출래하느니라. 업장이라 함은 처자 등에 의하여 출래하느니라. 보장이라 함은 국주 부모 등에 의하여 장애가 출래하느니라. 또 사마(四魔) 중에서 천자마(天子魔)라고 하는 것도 그와 같으니라.”(어서 1088쪽)
삼장(三障)
먼저 삼장의 ‘장’은 지장이나 방해라는 뜻으로 신심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로막아 방해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여기에 번뇌장, 업장, 보장의 세가지가 있습니다.
번뇌장은 탐, 진, 치 등 자신의 번뇌가 신심수행을 방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업장은 악업(나쁜 행위가 모여 쌓임)으로 생기는 신앙과 불도수행에 대한 방해입니다. <형제초>에서는 구체적으로 처자식 등 가까운 존재가 일으키는 방해를 들었습니다.
<형제초>에서는 국주와 부모 등 자신이 따라야만 하는 존재가 일으키는 방해를 들고 있습니다.
사마(死魔)
사마의 ‘마’는 신심을 수행하는 사람의 생명에서 묘법의 당체인 생명의 빛을 빼앗는 작용을 말합니다.
사마(死魔)는 음마, 번뇌마, 사마, 천자마의 네가지를 말합니다.
음마는 신심을 수행하는 사람의 오음(五陰: 육체와 마음의 작용) 활동이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해 신심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번뇌마는 탐, 진, 치 등의 번뇌가 일어나서 신심을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마(死魔)는 수행자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수행을 방해하려는 마입니다. 또 다른 수행자 등의 죽음으로 신심에 의심을 일으키는 것도 사마에 진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천자마는 타화자재천자마(他化自在天子魔)의 줄임말로 타화자재천왕(제육천의 마왕)의 방해로 가장 본원적인 마입니다.
대성인은 “元品의 無明은 제육천의 마왕으로 나타났으니”(어서 997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 마는 생명의 근본적인 미혹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권력자 등의 생명에 나타나는 등, 여러 형태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올바른 수행자에게 박해를 가합니다.
현자는 기뻐하고 우자는 물러선다
이상과 같이 우리가 불도수행하는 과정에는 장애와 고난이 다투어 일어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점은 탐진치 등의 번뇌, 아내나 남편, 자식, 부모, 五陰, 죽음이라 해도 그 자체가 장마(仗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끌려다니는 신심수행자의 약한 생명 때문에 삼장사마의 작용이 되고 만다는 의미입니다.
석존도 여러 가지로 일어나는 마음의 미혹을 마의 작용이라고 꿰뚫어보고 깨달았습니다. 우리에게도 마를 타파하는 것은 어떤 일에도 분동하지 않는 강한 신심입니다.
대성인은 “조수(潮水)의 썰물과 밀물, 월출(月出)과 월입(月入), 여름과 가을과 겨울과 봄의 경계에는 반드시 상위(相違)하는 일이 있으니, 범부가 부처가 되는데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반드시 삼장사마라고 하는 장해가 나타나는데 현자(賢者)는 기뻐하고 우자(愚者)는 물러남이 이것이니라.”(어서 1091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장사마가 출현할 때야말로 성불을 향한 큰 전진의 때라고 확신하여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는 현자의 신심으로 이겨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삼류강적
법화경 권지품 제13의 이십행의 게(시 형식의 경문)에는 말법에 법화경을 홍통하는 자에게 세 종류의 강력한 박해자 즉 ‘삼류강적’이 나타난다고 씌어 있습니다.
그 강적은 첫째, 속중증상만(俗衆增上慢), 둘째 도문증상만(道門增上慢), 셋째, 참성증상만(僭聖增上慢)이라고 합니다. 증상만은 갖가지 만심을 일으켜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첫째, 속중증상만은 법화경 행자를 박해하는 불법에 무지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법화경 행자에게 악구매리(험담을 하고 욕함)하고, 칼과 몽둥이로 위해를 가하는 일이 있다고 설합니다.
둘째, 도문증상만은 법화경 행자를 박해하는 비구(승려)를 가리킵니다.
사지(邪智)로 마음이 비뚤어져 있기에 진실한 불법을 알지 못하면서 자기 생각에 집착하여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정법을 수지한 사람을 박해합니다.
셋째, 참성증상만은 사람들로부터 성자처럼 추앙받는 고승으로 평소에는 세간에서 동떨어진 곳에 살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탐내어, 악심을 품고 법화경 행자를 궁지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그 수법은 국왕이나 대신에게 법화경 행자를 사견(邪見)의 자라는 등 참언(거짓으로 남을 헐뜯는 말)하고, 권력자를 움직여서 탄압을 가합니다.
마음속이 악으로 지배당한 상태를 경문에 “악귀입기신(惡鬼入基身, 악귀가 그 몸에 들다)”(법화경 419쪽)이라고 설합니다. ‘악귀가 그 몸에 드어간’ 이들 박해자들에게 말법에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은 여러번 거처에서 쫓겨난다고도 설합니다.
이중 첫째와 둘째는 참고 견딜 수 있지만 셋째 참성증상만은 가장 악질입니다. 왜냐하면 참성증상만의 정체는 좀처럼 꿰뚫어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 삼류강적은 말법에 법화경을 홍통할 때, 그것을 방해하고자 반드시 나타납니다.
니치렌 대성인께서는 현실로 이 삼류강적을 불러냄으로써 자신이 말법의 법화경 행자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숙명전환
니치렌 대성인 불법은 생명을 근원부터 변혁하여,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현재와 미래에 걸친 행복경애를 확립하는 숙명전환의 불법입니다.
여기서는 숙명전환의 원리와 숙명을 사명을 사명으로 바꾸는 참된 불법의 실천을 배웁니다.
(1) 숙명전환
인생의 고뇌와 고난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중에는 금세에 행한 자신의 행동과 판단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것도 있지만, 금세에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이런 괴로움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고난에 직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법에서는 이와 같은 고난은 과거세에 자신이 저지른 행위(숙업<宿業>)의 결과가 금세에 나타난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업(業)’은 본디 ‘행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금세의 행불행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세의 행위를 ‘숙업’이라 합니다. 숙업에는 선과 악의 양쪽이 있는데 금세의 고뇌를 초래하는 과거세의 악업을 숙업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법에서는 ‘삼세의 생명’ 혹은 ‘삼세의 인과’를 설합니다. 즉 생명은 금세뿐만 아니라,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의 삼세에 걸칩니다. 고거세의 행위가 인이 되어 현재세(금세)결과로 나타나고, 또 현재세의 행위가 인이 되어 미래세의 과를 가져온다고 보는 것입니다.
과거세에 악인이 있으면 금세에 고과(苦果, 고뇌에 찬 결과)가 있고, 선인이 있으면 낙과(樂果, 복덕이 넘치는 안락의 결과)가 있다고 하는 것이 일반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현재의 괴로운 원인은 알아도 그것을 금세에 곧바로 변혁할 수는 없고 미래세에 걸쳐서 생사를 되풀이하면서 악업으로 지은 죄를 하나하나 청산하는 길밖에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때때로 희망이 없는 숙명론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이에 대해 니치렌 대성인 불법은 ‘숙명전환’을 설합니다.
대성인은 <사도어서>에서 자신이 대난을 받는 것은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통상적인 인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과거세에 법화경을 비방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어서 960쪽 참고)
이는 만인성불, 인간 존경, 자타 함께 행복해지는 법을 완벽하게 설한 정법인 법화경을 비방하는 행위, 즉 방법(謗法, 정법을 헐뜯음)이야말로 근본적인 죄업이자, 온갖 악업을 쌓는 근원적인 악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정법을 믿고 수호하고 넓히는 실천을 함으로써 정법에 대한 불신과 방법이라는 근원적인 악업을 금세에 전환하는 것이 대성인 불법의 숙명전환입니다. 그리고 그 실천의 핵심이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입니다.
대성인은 “여러 죄는 서리나 이슬과 같아서 혜일(慧日)이 능히 녹여 없애느니라.”(법화경 724쪽) 하는 보현경(법화경의 결경(結經)인 관보현보살행법경(觀普賢菩薩行法經)의 경문을 인용하여 자신의 생명에 서리나 이슬처럼 내려앉은 죄장도 남묘호렌게쿄 제목의 혜일(지혜의 태양)을 만나면 금방 소멸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어서 786쪽 참고)
어본존을 신수하고, 자행화타에 걸친 창제에 면려하여, 자신의 흉중에 태양과 같은 불계의 생명이 나타나면 여러 죄업도 서리나 이슬처럼 소멸됩니다.
(2) 전중경수
우리는 신심을 열심히 하고 있어도 인생의 고난에 직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광선유포를 위해 싸우면 그것을 방해하려는 장마가 일어나 난을 만납니다.
대성인은 이와 같은 고난을 만나서 숙명전환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전중경수(轉重輕受)’의 공덕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전중경수는 ‘무거움을 바꾸어 가볍게 받는다’고 읽습니다.
과거세의 무거운 죄업으로 금세뿐만 아니라 미래세에 걸쳐서 무겁고 괴로운 과보를 받아야 하는데 현세에 정법을 믿고 넓히면 그 실천의 공덕력으로 중죄의 과보를 일시에 가볍게 받아서 죄업을 모두 소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전중경수의 공덕을 “지옥의 괴로움은 금방 사라지고”(어서 1000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은 숙업을 소멸하고 생명을 단련하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그것을 대성인은 “쇠는 불에 달구어 두드리면 검(劍)이 된다. 현인과 성인(聖人)은 매리(罵詈)당함으로써 시험되는 것이다. 내가 이번에 받은 사도유죄라는 처벌은 세간의 죄는 결코 아니다. 오로지 과거세의 중죄를 금생에 소멸하고 미래세의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라는 괴로움을 면하기 위한 것이다.”(어서 958족)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3) 원겸어업
고난에 맞닥뜨려도 신심을 관철하여 숙명전환하는 사람은 인생의 의미가 크게 바뀝니다.
법화경에서는 ‘원겸어업(願兼於業)’의 법리를 설합니다. 원은 원생(願生), 업은 업생(業生)입니다.
보살은 원하는 대로 태어나고(원생), 보통 사람은 업에 의해서 태어납니다.(업생)
원겸어업은 수행으로써 위대한 복덕을 쌓은 보살이 악세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일부러 원해서 스스로 청정한 업보를 버리고 악세에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 보살은 악업의 사람과 똑같이 악세의 괴로움을 받습니다. 여기서 난의 의의를 다시 생각해보면, 신심으로 난을 이겨내는 사람에게는 악세에 살아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숙명이 아니라 사실은 남을 구하겠다는 보살의 서원(誓願)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난을 공유하고 난을 이겨내는 모범을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이 원겸어업의 법리에 입각한 삶을 이케다 선생님은 ‘숙명을 사명으로 바꾼다’고 알기 쉽게 표현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숙명은 있다. 그러나 숙명을 정면에서 응시하고 그 본질의 의미로 되돌아가면 어떤 숙명도 자신의 인생을 심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숙명과 싸우는 자신의 모습이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거울이 된다.
즉 숙명을 사명으로 바꾼 경우, 그 숙명은 악에서 선으로 역할이 크게 바뀐다. ‘숙명을 사명으로 바꾸는 사람’은 모두 ‘원겸어업’의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받아들여 끝까지 전진하는 사람이 숙명전환의 목적지로 갈 수 있습니다.“
(《어서의 세계》 제2권)
신심즉생활
니치렌 대성인 불법은 현실생활에서 ‘무너지지 않는 행복경애’를 구축하기 위한 신앙입니다.
그러려면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신심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심은 자기 생명의 단련이기 때문입니다. 또 대성인의 불법은 ‘인간으로서의 승리’를 가르친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으로 연 지혜와 생명력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행동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는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실천하는데 있어 중요한 기둥이 되는 ‘공덕(功德)과 벌(罰)’ ‘제천선신(諸天善神)’ ‘이체동심(異體同心)’ ‘신심즉생활(信心卽生活)’ ‘사람의 행동’을 공부합니다.
공덕과 벌
우리는 남묘호렌게쿄라는 최고의 법을 올바르게 믿고 수지하면 묘법에 갖춰진 무한한 공덕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묘법의 근본이자, 공덕의 구극은 성불, 즉 흔들리지 않는 행복경애를 확립하는 일입니다.
묘법을 믿고 실천을 시작하면 성불이라는 절대적인 행복경애에 들어서는 궤도에 오릅니다. 묘법을 근본으로 살아감으로써 자연스레 올바른 삶이 되어 행복을 이루게 됩니다.
어서에는 “악(惡)을 멸함을 공(功)이라 하고 선(善)을 생(生)함을 덕(德)이라고 하느니라.”(어서 762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신심을 열심히 실천하여 우리 생명을 뒤덮은 번뇌와 고뇌 등의 악을 소멸하고 지혜와 안락 등의 선을 창출하는 것이 공덕입니다.
또 “공덕이란 육근청정(六根淸淨)이 과보이니라, 결국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同類)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육근청정이니라.”(어서 762쪽) 하고도 씌어 있습니다. 육근청정은 우리 육근(안, 이, 비, 설, 신, 의, 여섯 개의 지각기관) 즉 생명 전체가 정화되어 본디 갖춘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맞닥뜨려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불계의 경애를 자기 몸에 개현(開顯)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의 불성을 현현함으로써 현실의 인생과 생활상에 엄연한 공덕의 실증이 나나, 반드시 복덕에 가득 찬 생활을 보낼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만다라를 정성껏 믿도록 하시라. 남묘호렌게쿄는 사자후와 같으니, 어떠한 병인들 장해를 할손가. 귀자모신(鬼子母神), 십나찰녀(十羅刹女)는 법화경의 제목을 수지한 자를 수호하리라고 쓰였느니라. 행(幸)은 애염(愛染)과 같고 복(福)은 비사문(毘沙門)고 같이 되리라. 어떠한 곳에서 놀고 장난쳐도 탈이 없을 것이며, 유행(遊行)하여 두려움이 없음은 마치 사자왕과 같으니라.”(어서 1124쪽)
즉 우리는 제목의 힘으로 제천선신의 가호를 받아 인생의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했다. 복덕에 쌓인 인생은 어떠한 장소에 있어도 사자왕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경애가 됩니다.
또 “법화경을 믿는 사람은 행복을 만리 밖에서 모이게 하리로다.”(어서 1492쪽) 하고 말씀하셨듯이 묘법을 수지하는 사람은 행복을 여러 곳에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복은 마음에서 나와서 나를 빛나게 하느니라” “전단(栴檀)의 향기를 갖추고 있는 것과 같도다.”(어서 1492쪽)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전단이라는 향나무에 향기가 갖춰져 있듯이 묘법을 수지하는 사람은 복덕이 내면에서 풍겨 나와 사람들에게 사랑과 신뢰를 받아 생활도 인생도 도움을 받게 됩니다.
반대로 불법을 비방하고, 이과의 이법(理法)에 반하면 생명에 악인을 새김과 동시에 생활상에 현증이 벌로 나타납니다.
현증으로 나온 벌은 불행의 길로 빠지는 것을 알리는 징조이자 경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신앙의 자세와 생활태도를 재검토함으로써 다시 묘법을 깊이 실천하는 결의가 생깁니다.
관점을 바꿔 말한다면 벌도 또한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끄는 묘법의 뛰어난 성질의 하나이고, 결국은 공덕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니치렌 대서인 불법은 묘법을 신수(信受)하는 공더과 묘법을 비방하는 벌이 엄연하다고 설합니다.
제천선신
‘제천선신’은 정법을 수지하는 사람과 그 국토를 수호하는 모든 신을 말합니다.
‘제천’은 천계의 중생을 말하고, ‘선신’은 사람들을 수호하고 뒷받침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제천선신은 일정한 실체를 갖춘 존재가 아니라, 정법을 실천하는 수호하는 갖가지 작용을 말합니다.
신심이 강한 사람을 제천이 지킨다
우리가 정법을 실천해 선한 삶을 살아가면 그에 따라서 주위 사람들이나 환경에 갖춰진 선의 작용으로 나타난 제천선신이 우리를 지키고 받쳐줍니다.
“신의 수호라고 함도, 사람의 마음의 강함에 의한다고 쓰여져 있소.”(어서 1186쪽) 하고 말씀하시듯 우리가 정법을 호지(護持)하는 신심의 강약에 따라서 제천의 수호가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합니다.
이체동심
‘이체동심(異體同心)’은 우리가 신심으로 단결해 광선유포할 때 가장 중요시해야 할 지침입니다.
‘이체’는 각각의 겉보기, 개성, 특질, 처지 등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동심’은 뜻, 목적을 같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각자가 같은 마음으로 힘을 합쳐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불법을 실천함에 있어, 만인성불을 실현하고자 묘법을 설하고 넓히는 ‘광선유포’야말로 부처의 대원(大願)이자 근본목적입니다. ‘동심(同心)’의 ‘심’은 ‘신심’을 말하고, ‘광선유포’라는 대원에 마음을 합치는 일입니다.
즉 각자의 개성과 특질을 살려 한사람 한사람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면서 광선유포를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 이체동심입니다.
이에 비해 겉보기는 같은 모습이지만 각각의 뜻과 목적이 달라 따로따로 흩어진 상태를 ‘동체이심(同體異心)’이라고 합니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체동심이면 만사(萬事)를 이루고 동체이심이면 제사(諸事)가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 “니치렌의 동류는 이체동심이기에 사람들은 적지만 대사(大事)를 성취하여, 반드시 법화경이 넓혀지리라고 생각하오.”(어서 1463쪽)
신심의 단결로 여러 가지 난을 이겨내면서 전진하면 불법이 반드시 넓혀질 것은 틀림없다고 대성인은 가르치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지도하십니다.
“이체동심을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조직’입니다. ‘이체’는 사람들 각기 모습도 처지도 상황도 사명도 다르다. 그러나 ‘마음’은 즉 신심은 ‘동심’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이체이심’이면 따로따로입니다. ‘동체동심’은 억지로 모양이나 모습까지 통일하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독재적인 전체주의이며 자유가 없습니다.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고 모습만 갖추고 있다. 결국은 ‘동체이심’이 되고 맙니다.
“‘이체’는 개성을 살린다는 뜻입니다.
‘동심’은 신심을 근본으로 마음을 하나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단결입니다.”
우리는 이체동심의 지침 그대로 한사람 한사람이 충분히 힘을 발휘하면서 대성인의 유명이신 광선유포 실현을 향해서 전진합시다.
신심즉생활
일반적으로 신앙이란 일상생활에서 동떨어진 특별한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일상생활 속에서도 신앙시간과 생활시간은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니치렌 대성인 불법에서는 신앙과 생활은 그렇게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서에는 “사관(仕官)을 법화경이라고 생각하시라.”(어서 1295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관’은 주군 등을 섬기는 일인데 오늘날의 우리의 처지에서 본다면 해야 할 일, 맡은 바 책임입니다. 직업, 일, 생활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어서는 나날의 생활이 그대로 불도수행의 도량이며, 신심을 근본으로 한 자신의 삶을 나타내는 자리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생활은 우리의 생명활동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신심은 우리 생명을 변혁하고 알차게 하는 힘이 됩니다.
생활에서 직면하는 여러 과제에 대해 어본존을 향한 제목을 근본으로 진지한 노력을 거듭할 때 그 현실과의 투쟁 그 자체가 우리의 불계의 생명을 용현시키는 기연(機緣)이 되어 자신의 생명변혁의 무대가 됩니다.
또 신심으로 개척한 생명력, 풍부한 경애를 토대로 하여 생활의 무대로 용감하게 나설 때, 생황 그 자체도 자연스럽게 변혁됩니다.
신심을 초목의 뿌리로 비유한다면, 생활은 풍요로운 열매를 맺는 줄기와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을 근본으로 하지 않는 생활은 환경에 흘러가는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맙니다. 신심의 뿌리가 깊을수록 반석 같은 생활을 구축할 수 있다고 설하는 것이 니치렌 대성인 불법입니다.
이와 같이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신심과 생활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창가학회의 지도에서는 ‘신심즉생활’이라 하여 생활은 그 사람의 신심이 나타난 것이라고 보고, 신뢰받는 사회인으로서 생활에 승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의 행동
불법은 ‘인간으로서의 승리’를 가르친 종교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교주석존의 출세의 본회(本懷)는 사람의 행동에 있었소이다.”(어서 1174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석존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불법을 설한 그 근본목적(출세의 본회)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인간사회에서 양식 있는 행동으로 직장, 지역, 등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아 빛나는 인격자로 존경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신심의 증명이 됩니다.
최고의 ‘사람의 행동’은 ‘남을 존중하는’행동입니다.
즉 만인의 생명 속에 부처의 생명이 있다고 믿고 그 부처의 생명을 존중하여 만인을 존경하는 행동입니다. 근본은 만인을 성불시키겠다는 서원의 삶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눈앞의 한 사람을 소중히 하는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법화경에서는 만인의 내면에 숨겨진 부처의 생명을 존중하여 모든 사람을 예배하는 불경보살의 실천을 설합니다.
자신의 불계를 아직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부처의 생명을 갖추고 있으며, 이를 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인을 ‘불자(佛子, 부처의 자식)이라고 존중하는 생명존엄, 만인평등이 바로 불법의 정신입니다. 이 정신이 있으면 타인을 짓밟는 일체의 폭력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만인존중이 원리에 입각하여 대화로써 사회 변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니치렌 대성인 불법입니다.
악세 말법은 사람들의 미혹의 생명이 강해져서 다른 사람을 짓밟고, 인간을 차별하고, 도구화하는 사상이 충만한 시대입니다. 그런 탁한 사회 풍조를 바꾸어 인간 자신의 경애를 높이려면 생명존엄, 인간존경의 ‘사람의 행동’의 실천을 넓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 사회를 변혁하려면 사람들의 미혹을 조장하고, 인간을 멸시하는 사상과 용감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을 넓히고, 악을 책하는 행동이 바로 불법에서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실천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행동은 불법자 그리고 인간으로서 승리의 인생을 증명해줍니다. -끝-
법련 2017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