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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지는 계절에
김 선 구
거리의 가로수에서 플라타너스 넓은 잎이 춤을 추듯이 너풀거리며 떨어진다. 가을이 깊어졌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찬바람이 쓸고 간 거리 길가에서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여 뒹구는 낙엽들의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나무 밑에 소복이 쌓인 낙엽들의 모습은 포근함을 안겨준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의지하여 시름을 달래듯이 낙엽들도 서로 의지처가 있어 덜 외로운 모양이다.
낙엽은 떨어져 대지를 덮고 땅위의 생물들에게 따뜻한 이불이 되어준다. 벌레들의 알이나 번데기들을 보호해 주고 지렁이나 달팽이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 심지어는 자신을 떨쳐버린 나무의 밑 둥을 감싸고 한겨울 동안 얼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봄철이 되면 썩어서 다시 대지의 품안으로 되돌아갈 낙엽들이지만 그들을 밟고 서니 넉넉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낙엽들은 버림받은 존재들이다. 나무들은 닥아 올 겨울철에 대비하여 나뭇잎을 거추장스러워 한다. 가을이 되면 나무들은 떨 켜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잎으로 가는 수분의 통로를 차단해 버린다. 안전하게 월동하기 위한 자구책이다. 봄과 여름동안 나뭇잎은 영양대사와 호흡 등으로 주인을 섬기듯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도 가을이 되어 쓸모가 없어지자 미련 없이 도려내 버린다. 자연의 질서란 때로는 매정한 것이다. 나무들의 생태 속에서 인간사의 일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어렵고 암울했던 시절 이웃집소녀들이 하나 둘 도시로 떠나갔다. 앞집 순이, 뒷집 영이, 모두 정든 집을 떠나 도시의 친척 집으로, 아니면 잘 사는 부잣집으로 식모살이 하러갔다. 힘들게 일은 하지만 밥은 굶지 않기 위해서였다. ‘쌀 한 말도 먹어보지 못하고 시집간다.’는 시골 처녀들이 많았다. 쌀밥 한 끼가 천금보다 귀했던 시절이었다. 하루 종일 일해주고 세끼 밥을 얻어먹는 것으로 족하던 시절이 있었다.
눈치 보며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지만 주인집 아이들의 비위까지 맞추며 더부살이 생활을 이어갔다. 때로는 주인마님 비위에 거슬려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보따리 싸들고 거리를 헤매었던 식모아가씨들의 가여운 모습이 길거리에 흩날리는 낙엽신세였을 것 같다.
낙엽들이 땅위에 뒹구는 모습 속에 도심거리를 방황하던 시골 소녀들의 모습을 본다. 모진 가난을 헤쳐 보고자 무작정 상경하던 시절이 있었다. 빈한한 나라에서 온정의 손길이 뻗을 수 없었고, 암흑의 나락으로 추락 하던가 범죄에 연루되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훗날 나라의 살림이 낳아지면서 이들은 산업역군으로 변하였다. 경제개발도상에서 이들은 공장의 여공으로 일하며 가계를 도왔고 야간학교를 다니며 나름 데로 꿈을 키웠다.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고,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시골집을 떠나 도시로 가버린 이웃마을 아가씨를 그리는 시골 총각들의 하소연을 담은 노래가 이때 널리 불리었다.
새마을 운동에 힘입어 우리나라의 경제가 거듭 발전했다. 선진국이 10년 걸려 이룩한 일을 1년에 이룩하자는 목표로 노력하고 독려했다.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나라가 경제대국의 기틀을 이루었다. 이윽고 고급아파트가 건설되고 자동차가 범람하게 되었다. 먹거리가 풍성하고 해외여행이 일상화 되었다. 우리의 살림살이가 윤택해졌다. 절약을 권장하던 경제교육이 이제는 소비가 미덕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먹고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요구는 많고 양보가 없는 사회로 변한 것 같다. 주장만 있고 타협이 없다. 살벌한 데모대와 집회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예날 식모살이 하던 소녀들, 산업의 역군이었던 아가씨들이 유모차 몰고 데모대에 참여하는 전사로 변하였다. 경제발전에 주력한 나머지 정신문화가 함께 발전하지 못하고 미숙한 결과가 아닐까하고 지난날들을 되새겨 보게 된다.
근래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윤택해졌다. 그렇지만 국민정서는 더 메말라가는 것 같다. 이러한 사회의 살벌한 분위기가 거리의 낙엽들에게도 전달되는 모양이다. 낙엽은 도심의 쓰레기로 변하였다. 가로수 밑에 수북이 쌓여있는 낙엽들은 청소부들에게 일감을 제공할 뿐이다. 이따금 불어오는 강풍에 휘날리는 가랑잎이 되어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도심에 흩날리는 낙엽 속에서 허전함을 느낀다. 낙엽을 태우며 온정을 나누던 옛 시절이 그리워진다. 낙엽을 긁어모아 아궁이에 불 피우던 시절이 떠오른다. 낙엽 중 제일 불태우기가 좋은 것은 마른솔잎이었다. 숲속에 들어가 수북이 쌓여 있는 솔잎들을 갈퀴로 긁어모아 단을 지어서 짊어지고 집으로 오면 좋은 땔감이 되었다. 함께 따온 솔방울도 아궁이에서 화력을 더하였다. 겨울은 추웠지만 방안은 훈훈하였다. 살림이 빈한했지만 마음은 넉넉하였다.
낙엽들은 소리 없이 타들어 갔다. 일생을 마감하고 하늘나라로 날아가려는 듯 굴뚝에서 연기가 되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자신을 불태우며 마지막 선물이라도 하려는 양 따스한 온기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부뚜막에 둘러 앉아 낙엽들이 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순도순 얘기들을 나누었다. 마른 솔잎을 태우며 느꼈던 온정들이 아득한 옛날의 추억으로 떠오른다.
우리도 낙엽같이 남을 축복해주고 온정을 주는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버림받고도 봉사하는 낙엽들의 희생을 배웠으면 좋겠다. 남을 탓하기 전에 나를 되돌아보는 미덕을 보였으면 좋겠다. 낙엽이 지는 계절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좀 더 양보하고 인정을 베푸는 사회를 기대해본다.
다향(茶香)이 현해탄을 넘어
김 선 구
친구와 함께 다방 안으로 들어서려니 입구에서부터 은은한 향기가 감지된다. 커피 향과는 또 다른 냄새가 취각을 매료시킨다. 시중의 카페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분위기이다. 실내는 여느 때와 같이 장 노년 층 손님들로 붐볐다. 주인 J여사가 한쪽에 있는 자리로 안내해주자 제주에서 온 특별 손님이라고 친구를 소개했다.
벽면에는 동양화와 붓글씨 그리고 여러 가지 소품들이 걸려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 중에는 사회의 저명한 인사는 물론 문학과 서예 등 예술분야에 탁월한 인사들이 많다. 그들이 손수 만든 작품들을 걸어 놓아서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차 냄새가 덕성스런 인향, 묵향 과 어우러져 그윽한 향기를 발산했다.
올해로 90돌을 맞이한다는 M다방은 대구 근대역사의 산 증거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숫한 사회변화를 겪으면서도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유지해 왔다. 사라져가는 전통 문화의 면모를 그대로 담고 있어서 지난추억을 되새겨보고 싶은 장 노년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한 때는 유학자들이 많이 찾아와서 ‘양반다방’이라 불리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전통과 고유문화를 아끼는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구 근대문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진골목에 자리 잡고 있어서 과거와 현대를 잇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친구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은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함에서였다. 타지방에서는 쉽게 접해볼 수 없는 분위기이다. 대구 근대골목의 모습과 M다방의 독특한 분위기를 기회 있을 때 마다 지인들에게 언급했던 터였다. 마침 친구부부가 대구를 방문하였다. 친구는 시조시인이며 제주시조문학회장 등을 역임했고, 지금도 폭 넓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나름대로 느낌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차를 가져온 J여사가 친구와 몇 마디 덕담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언제나 단정한 한복 차림 속에 친절한 미소가 후덕한 인심을 느끼게 했다. M다방과 함께 한길을 걸어온 J여사도 인간문화제나 다름없다고 생각되었다. 이따금 TV에 출연하여 대담하는 모습을 보면 이미 이곳에서 유명인사가 되어있다. 7남매 중의 막내라는 이력도 특이하지만 불우이웃을 돌보고 봉사를 미덕으로 살아간다는 모습에 더 호감이 갔다. 가끔 장 노년층 인사들이 경청하는 강좌에 나와서 시낭송을 할 때가 있다.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크고 맑은 음성과 감정이 실린 목소리에는 아직도 소녀 적 꿈이 생동하는 듯했다.
내가 M다방을 알게 된 것은 나의 학교 선배인 Y장군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장군이란 호칭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장교임관 후 장군으로 예편하였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선배의 이력 중 특기 할 것 하나는 육사생도시절 최초로 육사에 불교학생회를 조직하고 군승장교제도를 주장하는 등 군 불교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별명이 ‘목탁장군’이었고 그렇게 불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예편 후에는 대학에 적을 두고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수필가로서, 불교계 인사로서 널리 활동하였다. 모임이라도 있는 날이면 꼭 M다방을 거쳐 갔다. 동향인들과 자리를 함께하면 항상 푸근한 면모를 풍겼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장군들을 덕장, 지장, 용장으로 구분한다면 그분은 덕장에 속할 만큼 소탈하고 친근감이 넘쳤다. 주위에 널리 베풀고 봉사하며 후덕함을 보였으니 나에게는 자랑스러운 선배였다.
어느 날 강원도 화천군엘 함께 가보자고 제안하였다. 군에 제직시절 대민사업으로 주민들에게 팔각정을 지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 곳 시골마을 주민들이 우정의 표시로 기념비를 세워주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배가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약속을 실행하지 못하여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이제 M다방에 가면 자연히 선배의 자취를 더듬어보게 된다.
이날도 Y선배에 대한 회고가 이어졌다. 고교시절 불교학생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선도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부친의 고향이 충북이었으나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도를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 등.
나의 친구는 일찍이 교육계를 퇴임하고 흙을 벗 삼아 귤 농사를 지으며 지내고 있다. 고향에 가면 언제나 만나 회포를 풀지만 육지부에서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오래 만에 만난 터여서 한 사흘 같이 주변명소를 둘러보았다. 청도 운문사를 위시하여 팔공산 일대를 둘러보고, 마지막 날에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과 이상화고택, 그리고 대구 진골목을 거쳐 M다방에 들렸다.
친구 역시 다방의 분위기가 신기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향이 독특한 약차 맛도 그렇고, 사발 같은 찻잔과 접시에 듬뿍 담긴 과자가 이채로운 모양이다. 우리는 고향얘기, 친구들 얘기 등으로 담소를 마무리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제주도로 내려가서 얼마 후 소식을 보내왔다. 대구를 다녀가면서 느낀 바를 적은 글이었다.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을 가진 일본에 의해 지게 된 나라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기 위한 애국운동의 본고장, 한국기부문화 일 번지 국채보상운동기념관과 빼앗긴 들에서 민족혼을 일깨운 이상화시인의 고택을 관람했다. 그리고 진골목으로 들어섰다. <중략> 100여 미터도 안 되는 이 진골목엔 대구 100년의 풍경과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철조망이 둘러쳐진 빛바랜 담장, 1947년 개원한 대구 최초 정소아과 의원은 간판만 그대로 남아 골목을 지키고 있다. 옛집 그대로 꾸민 식당들. 유명한 M다방에서 차 한 잔 마시는 행복감도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복을 입은 여인이 옛날과자 한 접시를 들고 인사를 하며 탁자 위에 놓는다. 주인 J마담이다. 손님은 거의 노년층이다.
1928년 문을 열고 오늘 날까지 그 모습 그대로 당시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다방 벽면에는 문인과 예술가들이 기증한 작품들이 빽빽하다. 다방이 아니라 갤러리라 해도 되겠다. 대구의 저명한 예술가, 정치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래서 명소(名所)로 뜨고 있다.」
‘대구 중구 골목투어’란 제목의 이 글을 일간지 제주신보의 ‘해연풍’이란 칼럼 란에 개제하였다. 글 말미에는 제주도가 추진하는 원 도심 살리기 시책에 대구근대골목의 설립취지도 참고 했으면 하는 뜻을 비치었다. 대구의 명소 M다방의 다향이 비로소 현해탄을 넘어 제주에 이르렀다. 다향과 함께 대구의 근대골목의 역사와 풍경도 소개되었다. 그 향기 속에는 제주를 사랑하고 동경했던 Y선배의 모습도 어른 거렸다. 다향이 싣고 간 대구 근대골목의 모습이 제주 인들에게 접목되어 새 문화를 창달하는 개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덴마크에서 추억을 더듬다
김 선 구
지난달 하순부터 4월 초에 걸쳐 유럽지역을 다녀왔다. 관광이 아니고 산업시찰이 목적이었다. 양계산업의 새로운 진로를 찾아보기 위해 평소 교류하던 양계인 들과 함께 독일, 이태리, 네덜란드, 덴마크를 거치며 관련 업체들을 방문하였다. 오래 만에 유럽 땅을 밟아보니 나름 데로 감회가 새로웠다.
첫 기착지인 독일 뮌헨까지는 인천을 출발한 후 열 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30여 년 전 처음으로 유럽에 갔을 때는 이틀간에 걸쳐 장시간 비행했던 일이 떠올랐다. 홍콩에서 독일국적비행기로 갈아타고 방콕과 뉴델리를 거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이르렀다. 그 때는 국가 간 의념의 대립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하늘 길이 막혔었고, 국내항공기의 항로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늘 길이 활짝 열렸고 세상은 좁아졌다. 당시 알프스를 통과하기 위하여 관광버스에 의지하여 지루하게 달렸던 산길도 이번에는 비행기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건넜다. 이태리 베니스에서에서 알프스 산악지대로 이어지는 파도바의 넓은 평원, 눈에 덮인 알프스 산정의 경관 그리고 잘 정비된 독일 땅 초원의 모습들이 장관을 이루어 눈앞에 펼쳐졌다.
마지막 목적지 덴마크에서는 회사 측에서 제공해준 버스를 타고 전국토를 종단하였다. 유틀란트 반도의 북쪽도시 올보그에서 출발하여 핀섬의 오덴세를 거쳐 셀란섬에 있는 코펜하겐으로 이어졌다. 버스 유리창을 통하여 보이는 것은 목장과 초원이었다. 흐리고 음산한 날씨 때문인지 바깥풍경이 아직도 겨울잠에서 덜 깬 것처럼 침묵에 싸여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이 북해에서 불어오는 모진 바람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 가지를 벌리고 있었다. 이 험난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덴마크는 유럽에서도 최고의 낙농입국이며 복지국가로 성장하였다. 낙농뿐만 아니라 양돈과 양계업도 발달하였다. 우리 일행은 이 나라 유수의 두 회사에서 계란의 생산과 처리과정 그리고 거기에 이용되는 기계와 장비들의 운용실태를 둘러보고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코펜하겐 방문은 이번이 네 번째이다. 관광차 방문하기도 했었고 독일입국비자 때문에 불가피 한 일로 오기도 했었다. 앞선 경험을 살려 코펜하겐 시내관광의 길잡이가 되어 팀원들을 안내하였다. 낮 익은 거리를 거닐어보니 오래전 독일에 체류 중 이곳에서 겪었던 일들이 새롭게 떠올랐다.
1. 무비자 독일 입국
1991년 3월 어느 날 나는 독일북부 쉴레스비히-홀스테인(Schilesbig-Holstein)지방의 주도(州都)인 킬(Kiel)을 출발하여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이른 새벽이어서 버스 안은 나와 운전사 두 사람뿐, 차안이 조용하였다. 날이 밝아오자 차창을 통하여 푸른 초원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북부독일의 날씨도 우리나라의 봄 날씨 만큼 포근하였다. 앙상한 가로수의 가지 끝에서도 새순이 움트고 있었다. 이슬을 머금은 초록빛 풀잎들이 아침햇살에 반사되어 더욱 푸르고 영롱하게 보였다. 북부독일 대 평원에서 펼쳐지는 이국의 정취를 혼자서 감상하며 달리고 있는 마음이 환희와 희망으로 가득 할 만 하였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떨쳐 버리지 못한 불안이 깔려 있었다. 그것은 덴마크 주재 독일대사관에서 독일입국비자를 받아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 10월 동독과 서독이 하나의 국가로 합쳐졌다. 독일정부에서는 통일 후 자국민의 일자리보호와 외국인 노동자의 독일 내 유입을 막기 위하여 법령을 재정비 하고, 제반 조치를 강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도 모른 채 나는 이듬해 초에 독일 땅을 밟게 되었다. 교육부가 추진했던 교수해외파견 연구계획에 따라 1년간 체류예정으로 독일의 킬 대학에 여장을 풀었다.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자 나를 초청한 메틀러 교수가 독일 내 채류신고부터 하라고 하였다. 채류신고가 단순한 신고가 아니고 채류허가여부를 심사하는 절차란 것을 후에 알았다.
외국인 등록 센터에 가서 담당직원에게 용건을 말하고 여권을 내밀었다. 의혹에 찬 눈으로 나의 여권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2개월간 채류허가인을 찍어주면서 기간이 끝날 때 다시 오라고 하였다. 별 의심 없이 지내다가 다시 갔더니 서류를 하나 주면서 “잘 읽어보고 그대로 실행하십시오.”한다. 서류내용은 「당신은 비자 없이 독일 땅에 불법 입국했으니 벌금 30마르크를 지불하고, 3주 이내 출국하라. 그렇지 않으면 독일 법 ○조○항에 의거 강제집행 하겠다.」는 요지였다. 2개월 동안 그들은 나의 독일 내 체류문제에 대하여 여러 규정을 검토하여 최종 결론을 내렸나 보였다.
황당한 마음에 함부르크에 있는 한국 총영사관에 전화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담당직원의 답변은 원론적이었다. “독일 통일 후 외국인 통제가 강화되어 이곳에서 비자를 받기는 불가능합니다. 귀국하여 비자를 받고 다시 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가 도와드릴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독일에서 한국이 이웃처럼 쉽게 갔다가 올 수 있는 여건도 아닌데 나 몰라라 하고, 성의 없는 대답을 들으니, 이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해외에서 근무하고 있는지 화도 나고 한심스럽기도 하였다.
도리가 없어 이번에는 본에 있는 한국대사관으로 전화하여 해결책을 물었다. 그러자 이곳 담당영사의 대답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우선 내가 관용여권을 소지하고 있음을 확인한 후 “우리나라와 독일은 무비자입국협정이 체결되어 있으니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더구나 당신은 관용여권을 소지한 공무원 신분이므로 준 외교관이나 다름없다. 함부로 추방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독일정부 관리의 설명은 달랐다. “무비자입국협정이란 독일을 여행하는 외국인들의 편리를 위하여 3개월간 범위 내에서 독일에 머물 수 있도록 허용한 조처일 뿐이다. 당신의 경우는 입국목적이 학술연구이며, 채류기간도 1년이므로 무비자 입국협정적용대상자에 해당되지 않는다. 한국주재 독일대사관에서 반드시 비자를 발급받고 입국해야 했다”라고 했다.
출국 전에 나는 외무부 여권과에 가서 독일입국비자를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당시 여권과 담당공무원으로부터 “독일과 우리나라는 무비자입국협정이 맺어진 상태이므로 이 협정을 잘 이행해주는 것이 양국의 신뢰를 쌓아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별도로 비자를 요청한다면 무비자협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고 핀잔이 섞인 답변을 들었다. 이 말이 독일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통하는 얘기였다. 이미 10여 년 전에 독일에 채류 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 때 독일의 국제공항에서는 입국심사 없이 외국인들을 통과 시켰다. 그리고 신원이 확실하고 주거지가 마련되어 있으면 별다른 제한 없이 채류를 허가해줬다. 그러나 통일 후에는 모든 제도를 강화하고 철저히 시행하고 있었다.
통일이란 국가의 희망이요 대업이지만 감당해야 할 난제들이 많이 뒤따르는 법이다. 통일 후 독일이 겪었던 여러 가지 어려움과 부작용들이 많이 소개되었다. 의념과 체제가 다른 두 나라가 합쳐져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갈등을 겪었다. 특히 동독지역의 산업이 붕괴되면서 일자리 마련이 최대의 과제였다.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합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입국한 외국인은 독일 내 체류를 엄격히 통제하였다. 때문에 내가 시범적인 희생양이 될 판이었다.
통일 후 독일정부가 취하고 있는 정책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된 안내를 해준 외무부 직원도 그렇고, 곤경에 처한 자국민에게 어떤 해결책도 마련해 주지 못하는 독일주재대사관 직원들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니 그 수습은 나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2. 도움을 준 사람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이 내게 필요한 주문이었다. 주위에 아는 교포와 상의했더니 한인 학생회장 M군을 소개해 주었다. 나의 딱한 사정을 듣더니 “대학에 상주하고 있는 학생상담법률가를 통하여 일 단 소송을 제기 해봅시다.”고 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은 ‘해외추방’ 같은 불상사를 막을 수 있으니 시간을 벌고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제의였다. 급할 때 대처능력이 높은 것이 우리 국민의 특성인지 모른다. 궁여지책으로나 검토해볼 수 있는 일이지만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마운 일이지만 받아들이기에는 온당치가 않다고 여겨졌다.
결국 나는 메틀러 교수를 찾아가서 나의 입장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독일에서 교수에 대한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합리적인 해결방안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바로 메틀러 교수와 외국인 등록 센터의 소장 사이에 통화가 이루어 졌다. 그리고는 한가지방법을 제시받았다. “이웃나라에 상주하고 있는 독일대사관에 가서 독일입국 비자를 요청해보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가능할 것이다.” 라고 했다.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어느 나라에서나 인맥이 필요한 법이다. 메틀러 교수가 큰 힘이 되어주었다.
가장 가까운 곳은 덴마크의 코펜하겐이다. 등록 센터 소장이 코펜하겐 소재 독일대사 앞으로 협조를 구하는 서류를 만들어 주었다. 메틀러 교수도 독일 대사에게 비자발급을 부탁하는 편지를 써주었다. “우리는 한국인 교수와 함께 공동연구를 수행 중이다. 이미 실험이 상당부분 진척되었지만 그의 입국비자문제로 현재는 실험이 잠시 중단된 상태이다. 그에게 비자를 부여해서 우리의 연구에 차질이 발생치 않도록 협조해준다면 고맙겠다. 그가 한국을 출발하기 전에 반드시 비자를 받고 와야 한다는 사실은 알리지 못한 것은 나의 실수였다.”라는 요지였다. 순전히 나를 배려한 변명이었다.
서류를 챙겨 코펜하겐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를 태운 버스가 계속 달려 발트 해 연안도시인 푸트가르텐의 항구에 이르자 그곳에 대기 중인 카페리여객선 안으로 들어갔다. 여객선 안에는 각종 화물차며 승용차 그리고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가는 열차까지 실려 있었다. 여객선 밑바닥은 철로가 놓여있고 열차는 두 줄로 나뉘어 서 있다. 후에 경험한 일이지만 코펜하겐과 스웨덴 사이에도 이런 식으로 철로가 연결되었다. 북유럽의 국가들은 배를 이용하여 철도를 이어주고 있었다. 예날 북유럽 국가들이 도시와 도시사이의 뱃길을 개설하여 무역했던 한자동맹의 결과가 오늘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는지?
배가 출발하여 덴마크 땅에 이르기까지 한시간정도 소요되었다. 그동안은 배의 갑판으로 올라가서 여러 시설물을 둘러보기도 하고,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차가운 바다바람에 몸을 맡겨보기도 하였다. 옛날 바이킹 족들이 이 험난한 바다를 누비며 북유럽을 재패했을 역사적 사실들을 회고하며 항해를 즐겼다. 한때 강인했던 덴마크 바이킹세력이 영국과 프랑스를 거쳐 지중해까지 진출하며 위용을 과시했던 모습들이 겹쳐 지나갔다. 배안에는 바다를 조망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식당과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면세점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처음 접해보는 이국의 풍물모습에 잠시나마 모든 시름을 맡겨보았다.
배가 덴마크의 뢰드비히 항에 이르자 버스기사도 덴마크 인으로 교체되었다. 이 버스는 덴마크 본토인 유틀란트반도에서 출발하여 독일 땅을 거쳐 코펜하겐까지 가는 버스였다. 국경이 개방적인 유럽사회는 교통망이 편리하게 이어져 있었다. 국경지방에서는 이웃나라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여행도하고 쇼핑도 즐긴다고 했다. 특히 발트 해 주변 국가들은 서로 간에 바닷길을 열어 통행이 자유스러웠다.
버스가 배에서 내려 출발하려 하자 덴마크 국경감시원이 올라왔다. 버스 안은 이미 여러 명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그 중 외국인인 나에게만 여권을 제시토록 요구했다. 그가 여권을 점검하고 난 후 나의 여권에 덴마크입국허가인을 찍으려 했다. 내가 황급히 말리자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이것은 나의 의무인데”하고 말했다. “예 압니다. 그렇지만 내 여권에 스탬프를 찍지 않았으면 합니다.”하고 부탁조로 응대했다. 버스 내 승객들이 우리의 대화모습을 주시하는 것 같았다.
내가 출국 전에 교육부에서 교육을 받았다. 해외에 파견해 있는 동안 이유 없이 파견국 이외에 다른 나라를 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파견 목적이외에 관광이나 여행 등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귀국 후 여권을 조사하여 출장비를 회수할 것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덴마크 공무원에게 매달려 양해를 구해야 했다. 당시 후진국 신세인 한국인 교수가 벌인 해프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고 치졸한 짓이다. 나의 설명을 들은 국경감시원은 스탬프를 거두고 여권을 내어주었다. 그러면서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 격려까지 해줬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권력남용이거나 공무위반에 해당될 일이다. 그럼에도 자기 판단으로 공무를 처리해주는 덴마크 공무원의 자세에 한 층 신뢰가 갔다.
코펜하겐에 있는 덴마크주재독일대사관은 예상과는 달리 조그만 건물이었다. 은행창구처럼 꾸며진 작은 사무실에는 많은 민원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휴대하고 간 서류와 편지를 접수시켰더니 담당영사가 보고 다음날 다시 오라고 했다. 흔하지 않은 일이어서 나름 데로 검토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덴마크주재 독일대사관은 덴마크 인이나 독일인을 대상으로 민원을 처리해 주는 곳이다. 한국인에게 비자를 발급한다는 것은 분명 편법일 것이지만 민원인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자세인 것 같았다. 다음날 찾아갔더니 ‘오직 킬 대학 객원교수로 활동하는 기간에만 독일 채류가 유효하다’라는 문구를 여권에 명기하여 3개월간 독일채류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국내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고심했던 흔적이 역역했다. 나머지 기간은 독일 내에서 채류기간연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원칙에 충실 한다는 것이 독일인들의 기본자세이다. 그런데도 사안에 따라서는 규정에만 억 메이지 않고 해결책을 모색해보려는 독일공무원들의 업무자세를 보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조차 비자발급이 거부되었다면 나는 독일 재입국이 불가능했고 바로 우리나라로 돌아와야 할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공직자들도 이러한 면을 본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마음속에서 움텄다. 물론 교육부에서 파견된 독일주제한국대사관의 Y교육관, 그리고 코펜하겐주재 한국영사관의 L영사가 나름 데로 도움을 주었다. 사소한 부주의 때문에 일이 잘못 처리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수고를 끼치게 만들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격언을 되새겨보게 했다.
3. 예정에 없던 덴마크 여행
독일대사관에서 독일입국비자를 발급받기까지는 해결의 가능성 보다는 혹시 거부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의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1%의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외국인등록센터 소장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나의 소심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잘못되면 다른 방안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비자를 발급받고 나니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사람의 마음은 요사한 것이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니 또 다른 욕심이 생겼다. 이왕에 이곳까지 왔으니 주변 명소들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솟아났다. 때는 주말을 끼고 있어서 연구실로 일찍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비자발급을 기다리며 코펜하겐에 머무는 동안 이미 시내 관광은 마쳤다. 시청광장에서 인어공주동상이 있는 곳까지 걷다보면 볼거리들을 거의 접한 듯했다. 왕궁건물들과 위병교대식, 옛 증권거래소 건물, 국립미술관, 티볼리공원 등. 그 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시청광광에 서 있는 안데르센 동상과 왕립도서관 앞의 키르케고르 동상이다. 이 두 사람은 덴마크가 낳은 자랑스러운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젊은 시절 나의 관심이 대상이었다. 그의 대표적 저술인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숙독 했었다. 그 책의 앞장에 적혀있던 문구 ‘권위도 지혜도 명성도 우정도 쾌락도 행복마저도 그 모든 것은 바람이며 연기일 뿐, ...’이라는 문구에 매료되기도 했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간 외로운 철학자, 그는 그날도 정원 한편에서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듯했다.
또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많은 꿈을 안겨준 안데르센은 유명한 동화작가이다.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인어공주를 형상화하여 코펜하겐북쪽 바닷가에 동상을 세워 놓았다. 그 때문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인어공주를 보기위하여 세계 각처에서 찾아오고 있었다. 한 예술작가의 힘이 어떠한가를 대변해주는 듯도 했다.
코펜하겐 시내관광을 마치고 중앙역에서 열차를 타고 북쪽으로 한 창 올라가니 셸란 섬 북쪽 바닷가에 있는 작은 도시 헬싱괴르에 이르렀다. 길거리에 세워진 햄릿과 오필리어 조각상이 눈길을 끌었다. 그곳에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무대였던 크론보그 성이 있었다. 바다 건너 맞은편에는 스웨덴 땅이 이웃처럼 가깝게 보였다. 덴마크에서 스웨덴까지 거리는 불과 4km로 북해에서 발트 해로 들어오는 입구이다. 옛날 덴마크 왕국에서는 이 해협을 통과하는 배들로부터 통행세를 징수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크론보그성은 통행세를 징수하기 위하여 만들어졌고, 여기에 스웨덴을 감시하는 망루가 설치되었다. 이 망루에 귀신이 나타나면서 ‘햄릿’에 대한 얘기줄거리가 시작된다. 셰익스피어는 이 궁에 실재했던 왕자 암레트(Amleth)를 희곡 ‘햄릿’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Amleth라는 이름 중 마지막 글자 H자를 앞으로 옮겨 Hamlet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안내인을 따라 궁 안에 들어서니 왕의 집무실, 손님접대실, 무도회장, 왕후의 방과 침실 등 당시 왕궁 내의 생활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도구와 그림들이 전시되었다. 그 중에는 셰익스피어가 왕을 알현하는 장면의 그림도 보였다. 지하에는 병사들의 무기고, 이층에는 항해에 쓰였던 여러 가지 배들 모습이 전시되어 있었다. 덴마크인 들은 예로부터 해상활동을 중요시했었음을 느끼게 했다. 코펜하겐대학에 들어서면 먼저 보이는 것이 지리연구소였다. 연구소 내부에는 해로를 표시한 고지도들이 걸려있고, 시내 서점가에도 해양과 지리에 관한 서적들이 즐비하였다. 국토가 좁고 기후풍토가 조악했던 이 나라 선조들이 일찍부터 해상진출에 공들였던 결과라고 유추해보았다. 세계에서 제일 큰 섬 그린란드를 덴마크보호령으로 둘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헬싱괴르 유스호스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바닷가를 산책했다.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싸늘하게 몸을 감싸 안았다. 그렇지만 매끄러운 자갈돌들이 널려있는 바닷가는 마치 나의 고향 제주도 해변을 걷는 것과 같았다. 바닷물의 술렁임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해변의 모습도 그렇고 바람결이 주는 느낌도 비슷하다. 차가운 바람결이지만 거기에서 나의 나라 내 고향의 냄새를 맡았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흘러온 바닷물이 이 바닷물에 섞여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에는 경계가 없다. 바닷물은 하염없이 어디로든 퍼져갈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양이 특이하게 생긴 돌들을 몇 개 주워들고 호텔로 돌아오니 아침식사 시간이 되었다. 덴마크에서는 호텔비와 식비를 별도로 계산하기 때문에 아침식단이 풍성했다. 독일에서는 호텔 비에 아침식사비가 포함되어있다. 그러므로 유스호스텔인 경우 빵 2개에 버터와 쨈 그리고 커피한잔으로 끝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덴마크에서는 각종 빵이며 여러 종류의 치즈, 햄과 소시지, 우유와 요구르트, 과일과 과자 등 다양하게 즐길 수 있도록 음식을 풍부하게 마련 해 주었다. 이곳에서 나는 먼저 시리얼에 우유를 타서 먹으며 위를 자극한 다음, 빵과 치즈와 햄 등으로 정식을, 그리고 요구르트, 과자와 과일로 후식을 즐겼다. 마지막으로 커피 한잔으로 마감했다. 이렇게 푸짐하게 아침을 해결하면 점심은 먹지 않아도 되었다. 이른 봄 덴마크의 낮 시간은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당에는 스웨덴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았다. 단체보다는 가족단위로 승용차를 갖고 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게 스웨덴 가는 길을 물었더니 바로 가까운 곳에 여객선이 있다고 안내해 주었다. 덴마크의 헬싱괴르와 스웨덴의 헬싱보르 사이에 바다 폭이 가장 좁은 곳을 ‘에머슨해협‘이라 했다. 이 해협을 통과하는 배가 15분마다 출항하고, 25분 항해하면 스웨덴 땅에 도착한다. 배 삯도 편도면 21크로네, 왕복은 28크로네. 완전히 이웃 나들이인 셈이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맞은편의 스웨덴 땅까지 섭렵하였다. 헬싱보르로 가는 배위에서 만난 스웨덴 아가씨들은 맥주를 사기 위하여 덴마크에 자주 간다고 했다. 스웨덴은 물가가 비싸고 주류산업이 국영이어서 술을 구입하기가 어렵다. 덴마크의 헬싱괴르 맥주공장에서 생산되는 토속맥주의 맛과 향이 스웨덴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알맞았다.
북쪽대륙 사람들은 대체로 개방적이고 활달한 인상을 준다. 아가씨들이 다정하게 구는 바람에 나를 같은 일행으로 착각했나보았다. 임검하는 경찰관이 여권을 보자고 하지 않아 그냥 통과했다. 우리나라 인삼에 많은 관심을 보이던 스웨덴 아가씨들은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즐거운 여행을 하라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 헤어졌다.
다시 덴마크로 돌아와서는 헬싱괴르 역에서 오덴세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오덴세 남쪽에 랑겔란드라는 조그만 섬이 있다. 이 섬에서 배를 타면 내 거주지가 있는 독일의 킬에 바로 도착할 수 있다. 오덴세는 안데르센의 고향이다. 안데르센의 자취와 기념물들을 둘러보고 독일로 들어 갈 생각이었다. 오덴세에 이르는 길은 멀었다. 셸란 섬과 핀 섬 사이는 카페리여객선을 이용해야 하므로 밤늦게 도착하였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호텔식당에 가보니 많은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찾아온 것을 보니 역시 안데르센은 청소년들의 우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데르센 박물관은 오전 11시가 되어야 문을 열었다. 주변공원과 시가지를 둘러보고 갔더니 내가 첫 손님이었다. 동양인을 보는 것이 신기해서 그런지 여사무원이 문을 열어주면서 미소로 맞이한다.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전시실에 들어가 보니 안데르센의 다양한 작품들과 성장 일대기가 벽화로 전시되어 있다. 그는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코펜하겐으로 가서 활동하였다. 훗날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후 고향을 방문하자 오덴세 사람들의 열광적인 축복 속에 명예시민으로 추앙받았다.
전시실을 둘러보는데 두 아들을 데리고 함께 구경하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이 떠올랐다. 우리 애들이 여기에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하고 부러운 마음이 일었다. 양해를 얻어 그들 부자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다. 훗날 나의 가족들과 함께 다시 방문할 것을 기대하여 큼직하게 나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1991년 3월 10일 첫 방문자로 나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전시실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랑겔란드 섬으로 향했다. 주변이 안개로 자욱했다.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한 다리를 지나 부두에 이르러 보니 독일로 가는 마지막 배가 이미 출항해 버렸다. 낭패였다. 다음날은 연구실에 출근해야 하니 열차를 이용하여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독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보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열차는 스톡홀름을 출발하여 덴마크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를 거쳐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까지 가는 국제선 열차였다. 출발지에서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3일이 걸린다고 했다. 승객 6명이 마주앉을 수 있는 쿠셑 칸에 들어서니 웬 여자노인이 혼자 있었다. 그녀는 스톡홀름을 출발하여 소피아로 여행을 떠나는 중이었다. 독일어를 잘했다. 히틀러 때문에 어렸을 때 독일어를 배우게 되었다한다.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하여 연금으로 살아간다고도 했다. “스웨덴에 복지제도가 잘되어 있지 않으냐?” 고 물었더니 비싼 물가와 고액세금 등 서민들 살기가 힘들다고 했다. “젊었을 때 전쟁을 겪으면서 어렵게 살다보니 결혼도 못했다. 정년이 되어 퇴임하고 보니 지나간 세월이 아쉽고 후회된다.”며 한숨 쉬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열차가 독일 땅에 들어섰다. 나는 독일의 뤼백에서 내리며 작별인사를 나눴다. 여기서 킬로 가는 열차를 갈아타야 했다. 스웨덴 처녀할머니의 넋두리를 들으며 나의 덴마크 여행도 끝을 맺었다. 풍성한 주말여행을 즐긴 셈이다.
다음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했더니 모두가 반겨주었다. 메틀러 교수를 방문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자 이제부터 실험에 전념해 달라고 당부했다. 당시 우리의 연구테마는 ‘남성불임 치료를 위한 체외수정연구’였고, 메틀러 교수는 이 분야에 저명한 교수였다. 때문에 방문하는 손님도 많았고, 강의와 세미나, 회의 그리고 환자들 특별진료 등으로 항상 바빴다. 나를 위하여 편지를 쓸 때는 피곤한 기색이 역역하였다. 이마에 손을 얹고 고심하던 모습을 보며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였다. 메틀러 교수의 호의로 나는 비자문제를 순조롭게 해결하였고, 부수적으로 덴마크 여행까지 즐기고 왔다. 한편 생각하니 그의 호의를 역 이용한 것 같아 마음한쪽이 께름칙했다. 주어진 기회를 이용했을 뿐인데... .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인가 보았다. 그 동안의 심적 고통에 대하여 불평도 변명도 다 잊어버렸다. 도움을 준 여러분들에게 고마움을 보내고 싶을 뿐이었다.
어떤 면에서 과거를 반추해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동안 변화된 사실과 대비시켜보면 감회가 더 새롭다. 지금은 덴마크의 핀 섬과 셸란 섬 사이에도 다리가 놓여서 오덴세와 코펜하겐사이는 바로 자동차로 통행이 이어지고, 왕립도서관도 현대식 건물로 단장하여 위용을 과시하는 듯했다. 선원들의 거리 뉘하운, 아말리엔보그 궁전과 근위병들은 옛 모습 그대로였고, 인어공주동상도 변함없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1913년 조각가 에릭슨에 의하여 만들어진 인어공주는 이제 백세연령을 넘긴 셈인데도 옛 모습 그대로이다. 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은 것들. 모두가 나름대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번 덴마크에서 체류기간이 너무 짧았다. 여행목적이 다르다 보니 기대했던 곳을 가볼 시간이 없었다. 과거로 회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만족해야 했다. 무슨 일이나 완벽한 것은 없다. 아쉬움을 남겨놓는 것이 다음을 기약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아쉬움을 안고 코펜하겐 공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