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호 지음 _ 피천득 문학세계 / 1. 시의 세계
이제부터 각 시기의 구분을 넘어 1930년대부터 시기와 주제별로 대표 작품 1편씩 골라 읽어보기로 하자.
〈불을 질러라〉(1932)
피천득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잡지 《동광》(12월호)에 시 <불을 질러라>를 발표하였다. 《동광》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만든 흥사단에서 출간한 기관지였고 당시 피천득은 흥사단우였다. 피천득은 그 후 자신의 단행본 문집 어디에도 이 시를 게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나치게 과격했다고 느꼈을까 아니면 작품의 예술성이 약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우선 시를 읽어 보자.
마른 잔디에 불을 질러라!
시든 풀잎은 살라 버려라!
죽은 풀에 불이 붙으면
희노란 언덕이 발갛게 탄다
봄 와서 옛터에 속닢이 나면
불탄 벌판이 파랗게 된다
마른 잔디에 불을 질러라!
시든 풀잎을 살라 버려라!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척박한 일제강점기를 상징하는 “마른 잔디”와 “시든 풀잎”을 모두 태워버리자고 소리친다. 타다 남은 시꺼먼 땅은 봄이 되면 파란 새순이 돋아나지 않겠는가?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잔디와 풀잎은 “불탄 벌판”에서도 다시 부활되고 재생되는 것이다. 마른 잔디와 시든 풀잎은 타지 않으면 계절이 바뀌어도 다시 돋아나지 않는다. 차라리 모두 타버려야 다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피천득은 1연을 3연에서 똑같이 반복함으로써 강조하는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피천득은 평소에 자신의 작가적 삶을 “소극적 저항”이라고 언명했지만 이 시에서는 식민지 시대 문인으로서 “적극적” 저항마저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