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여행을 하는 데 있어 두 사람 이상이 함께 하면 입이 즐겁고 혼자 하게 되면 시간에 쫓기지 않는 여행이 되니 편리하다. 그러나 전라도 여행에서 선택을 하라면 아무래도 두 사람 아니 네 사람이 환상적인 멤버가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 하게 되는 여행에서도 입이 즐거울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먹는 거 아무거나 먹으면 어때'라고 말한다면 할 말 없지만 그래도 먼 길을 떠나온 것인데 조금이라도 더 남도색이 물씬 풍기는 것을 찾는 것이 사람 마음이 아닐까?
순자씨 밥줘! - 세상물정과 담싼 할머니의 투박한 손맛
새벽 5시. 장날이 아닌데도 새벽 시장은 벌써 사람들로 법석인다. <전라도닷컴>에서 참조한 전주 풍남문 아래 남부시장 안 밥집 '순자씨 밥줘!'.
자식들이 그만 두라 말려도 "엄마가 편한 날은 죽는 날인께 그리 알어"라는 말로 막는다. '순자씨 밥줘'란 가게 이름은 큰딸이 지어준 것. 처음 온 손님들도 "이름이 멋져 불잔혀. 그래서 와봤제"라고 좋아라 하는 이름이다.' - <전라도닷컴> -
사진과 신문기사는 별로 믿을 것이 못 된다지만 이 정도라면 맛이 어떻든 한번 가보고 싶어진다. 시장건물 아래 쪽 먹자골목은 피순대집이 많이 들어서 있다. 유혹을 떨쳐 버리고 2층 밥집으로 향한다. 금방 문을 연 듯 나이든 아주머니 한 분이 가스 불을 지피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 | ▲ 장날이 아닌데도 전주 남부시장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시장건물 2층에는 '순자씨 밥줘!'란 상호의 밥집이 있다. | | ⓒ 이덕은 | | 커다란 공업용 선풍기를 틀어 밤새 가게 안에 갇혔던 더운 공기를 빼내고는 있었으나 순간 '아차'하는 감정이 솟는다. 그러나 아침 개시를 잡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차마 발길을 돌리질 못한다. 작은 된장 뚝배기 몇 개 가스불 위에 올리는 것을 보고 애써 눈길을 밥상에 올려놓은 일정표로 돌린다. 새벽장을 보던 상인이 하나 들어오더니 두말없이 보리밥을 주문하는데 그제야 부담감이 줄어든다.
| | ▲ 뚝배기를 3개씩이나 가스불에 올려 놓고 끓여 무엇인가 궁금했더니 이와같이 두부찌개, 강된장, 동태찌개를 필두로 각종 밑반찬을 달고 한상 차려 나온다. | | ⓒ 이덕은 | | 이윽고 반찬을 가득 담은 쟁반을 가지고 오는데 '아하 이래서 뚝배기를 여러 개 놓고 끓였구나'. 두부찌개, 강된장, 동태찌개가 가운데를 차지하고 주위에 각종 밑반찬을 돌려 모두 12가지 아니 배춧잎까지 13가지가 나온다.
우선 강된장을 떠서 맛을 본다. 동물성이 거의 없고 청양고추와 홍고추로 마무리한 강된장은 할머니가 퍼주는 그야말로 오래 묵은 조선된장의 짠 맛이다. 보리밥을 반쯤 덜고 반찬류와 고추장, 강된장을 넣어 썩썩 비벼보지만 변형된 맛에 간사해진 내 입맛은 음식을 서글퍼지게 만든다.
| | ▲ 강된장은 조미료와 동물성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조선된장의 맛이다. 그 맛은 세련된 아줌마의 맛이 아니라 세상물정과는 담싼 투박한 할머니의 손맛이다. | | ⓒ 이덕은 | | 요새 사람이 좋아하는 입맛으로 조리도 할 수 있으련만 그저 남의 비위 맞추지 않고 내 맛을 찾는 사람이 있으면 좋고 아니어도 괜찮다는 듯한 그런 '순자씨'에게 2500원을 쥐어주고 나오는 게 너무나 미안하기만 하다. 그러나 모처럼 세태와는 담싼 할머니의 투박한 밥맛을 본 것 같아 가슴이 찡해온다.
담양 암뽕순대 - 향이 있는 순대
담양에서 먹을 음식은 여럿 있어 고르기도 힘들다. 내세우는 것으로도 죽순회, 떡갈비, 대통밥, 관방천변 국수 등이 있으나 그중 암뽕순대라는 독특한 이름의 순대는 함경도 아바이 순대처럼 이 지방 음식이다.
순대라는 것이 기다란 창자에 선지를 베이스로 갖은 양념을 넣을 수 있는 것이라, 이제는 포장마차용 비닐 순대부터 호텔에 납품되는 순대까지 모습이 다양하지만 그래도 맛있던 것을 꼽으라면 굵기와 선지와 밥이 적절히 배합된 표준 순대인 동대문 시장순대, 마포 공덕시장에서 새벽에 얼큰하게 다진 양념을 듬뿍 풀어 넣고 먹는 서민 순대국이다. 창자에 소를 집어 넣는 광경을 볼 수 있는 태백시장 순대골목 순대는 간식용으로 한 봉지 사 들고 차 안에서 먹는 맛이 일품이라 하겠다.
| | ▲ 담양에 먹을거리는 의외로 많다. 죽순회, 떡갈비, 대통밥, 관방천 국수. 암뽕순대를 한다는 청운식당에 들렀다. | | ⓒ 이덕은 | | 담양 청운식당은 허름한 옛집은 가정집으로 쓰고 건너편에 2층집을 영업장으로 쓰고 있는 집이다. 오래 된 시골 식당들이 그러하듯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작은 방이 양쪽에 있다. 이른 점심이라 손님은 외지에서 온 건설 노동자인 듯한 사람들이 한자리 차지하고 점심 겸 반주를 하며 떠들썩하고 있다.
부글부글 끓는 뚝배기에 순대국이 반찬과 함께 쟁반에 올려 나온다. 메뉴판에 적혀 있는 암뽕순대에 대한 설명은 껍데기로 애기보를 쓴다고 나왔는데 국물 속에 담긴 순대는 밥이나 당면이 없는 영락없는 피순대이고 새우젓, 묵은지, 묵은 깍두기, 물김치 등이 곁들여 나온다.
새우젓을 꾹 짜서 국물에 풀어 넣고 순대를 건져 올려 맛을 본다. 두꺼운 창자의 질감과 선지가 씹히는 맛, 아~ 하나 더 있다. 이 향기는 무엇인가? 선지와 머릿고기의 느끼한 맛을 줄이려고 선지에 깻잎을 갈아 넣었다.
함께 들어 있는 머릿고기도 흔히 볼 수 있는 종이 씹는 듯한 허드레 고기가 아니라 노린내도 별로 없으면서 씹을 때 고기 맛이 느껴진다. 함께 국물에 씻어 먹는 삭은 깍두기와 김치. 이건 탕을 제대로 끓이는 집에서 내놓는 반찬이다. 신맛이 가득한 김치나 깍두기는 짜지 않은 국물에 씻어 먹는 것이 제 맛이다. 뜨거운 국물 속에서 다시 하얗게 질감이 살아나며 씹으면 숙성된 김치 국물이 배어 나오는 맛은 길들여지면 탕만 보면 찾게 된다.
화순 능주면 삼거리 돼지족발 - 한잔술이 그리워지는 식당
| | ▲ 새우젓 국물을 꾹 짜내고 새우만 한숟가락 퍼서 국물에 넣고 순대를 한점 먹어 본다. 우선 질감이 좋다. 두툼한 순대皮와 선지. 그런데 한가지 더 있다. 깻잎을 선지에 갈아 넣어 산뜻한 향이 머릿고기와 순대의 느끼함을 없애 주고 있다. | | ⓒ 이덕은 | | 밥을 반 그릇씩만 말아 먹었는데도 배는 아직 꺼지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추천하는 맛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허름한 집인 줄 알고 한참 헤매다 찾은 집의 상호는 '삼거리 식당. 수퍼'로 적혀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쪽은 테이블 4개 정도 들어 가는 작은 홀과 반대 쪽은 가게로, 경계를 짓고 있는 주방용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에 작은 돼지족발이 사각쟁반 가득 담겨 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동네사람들의 시선이 카메라를 들고 들어서는 이방인에게 잠시 집중된다.
| | ▲ 누가 추천을 한다면 무언가가 있어서 일 것이다. 그 무엇에서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이 집의 느낌은 도시사람의 호들갑보다는 담담한 파동같은 무엇이다. | | ⓒ 이덕은 | | '어서 오세요'라는 말없이 상을 치우던 아주머니는 간단히 '뭣 드시겠소' 한마디로 주문을 받는다. 내가 본 돼지족발 백반이라는 것은 없고 '돼지족발 5천원, 백반 3천원'이라는 메뉴만 있다. 돼지족발을 시키니 순식간에 족발이 먹기 좋게 해체되어 소주 한 병 들이키기 좋을 정도의 양만큼 작은 접시에 올려놓고 마늘, 풋고추, 쌈장, 오이지 무침, 묵은지 등과 함께 나온다.
색깔이 허연 족발은 예상대로 오향과 약들이 가미되지 않아 심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특이하게 족발을 소금에 찍어 먹지 않고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이 집은 세끼 밥 사이에 잠시 들러 한가롭게 출출한 배를 족발 안주삼아 막걸리 한 대포 들기 좋은 집이라 생각하며, 마늘 한 점 쌈장 듬뿍 찍어 먹는데 일순에 족발의 느끼함이 사라지며 젓가락을 그 쪽으로 자꾸 향하게 만든다.
나오며 주인아들에게 물어보니 집에서 만든 쌈장이라 한다. 그 쌈장 하나로 자칫하면 금방 물릴 수 있는 족발을 '발꼬락'까지 들게 하는 은근한 매력이 있다.
| | ▲ 무엇 때문에 이 식당을 추천한 것일까.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대포를 하고 있는 동네사람들을 보며 마늘 한점 쌈장에 찍어 먹는데 순간 족발의 느글함이 싸악 사라진다. | | ⓒ 이덕은 | | 한정식은 혼자 먹을 수도 없으려니와 해주는 데도 없다. 아니다. 법성포에 작년에 들렀던 집(다랑가지)에 굴비를 곁들인 한정식을 혼자 먹을 수 있겠는가 물었더니 '어떻게 하겠어요? 드려야지요' 했으나 시간이 일러 차마 대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돌아선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음식이라는 것이 호화스럽고 혀와 식도만 만족시켜 주는 것으로만 치부한다면 그것처럼 건조한 세상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글은 2박3일 일정의 전라도 맛기행의 일부입니다. 다음에 한 차례 더 (여럿이 먹기) 음식에 대한 글을 싣고 다음에 여행지에 대한 기행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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