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과이 가는 길 / 이팝나무
지난겨울, 파라과이에 다녀왔다. 딸은 올 8월이 되면 다니던 직장의 2년 임기를 마친다. 부모에 한해 항공비가 지원되는 회사라서 근무하는 동안 한 번은 다녀오고 싶었다. 코로나로 그 좋은 기회조차 물 건너가나 싶었다. 다행히 지난 하반기부터 끝나가는 조짐이 보여서 연말에서야 항공권을 예매했다. 일 년 치 휴가를 아꼈다가 몰아서 사용하는 남편과 여행길에 올랐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까지는 국적기라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평소에 극장 나들이가 뜸한 편이라서 볼 영화는 차고 넘쳤다. 몇 편 재밌게 보고 나니 금방 도착했다. 이제부터가 문제다. 브라질 국적기인 라탐항공 비행기에서는 영어와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밖에 지원이 안 되니 미리 영화나 책을 내려받아 오라고 했다. 드디어 교수님이 말한 ‘밀리의 서재’를 이용할 시간이 된 것이다. 여행 떠나기 며칠 전에 가입하여 평소에 읽고 싶었던 작가의 책을 저장해 두었다. 베스트셀러,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책도 살폈다. 우리나라만큼 인터넷이 빠르고 잘 터지는 나라는 없다는 것을 여러 번의 여행 경험으로 알기에 읽든 안 읽든 되도록 많은 책을 챙겼다.
실로 얼마 만에 가는 여행인가. 게다가 작은딸을 1년 6개월 만에 본다는 기대까지 더해져 마음이 달떴다. 독일 프랑크프루트 공항에서 비행기를 바꿔 탔다. 그곳에서 브라질 상파울로까지는 열세 시간이 걸린다. 이미 온 시간만큼 또 견뎌야 하는 것이다. 하필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의 한가운데였다. 덩치가 큰 외국인이 남은 한 자리에 앉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몸짓이 작은 아가씨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남편은 탭에 담아 간 드라마를 보느라고 정신이 없다. 학창 시절에 학교 폭력을 당한 주인공이 치밀하게 준비하여 복수하는 이야기다. 나 역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책장에 담긴 책 중에서 가장 긴 책을 찾았다. 표지가 독특한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눈에 띄었다. 몇 장을 읽기도 전에 빠져들었다. 마을의 부잣집 도련님이자 인기남인 체이스가 시체로 발견된다. 증거도 목격자도 없다. 발자국조차 없다. 경찰은 살인 사건 용의자로 습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카야 클라크를 지목한다. 처음부터 주인공이 살인 사건의 배후로 등장하여 호기심을 자극했다.
1900년대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너의 습지가 배경이다.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가혹한 환경이라 주변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 주인공 카야 가족만이 산다. 그러나 엄마와 다른 형제가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차례로 떠나고 열 살도 채 안 된 어린 소녀만 남게 된다. 아이는 유일한 보호자이자 혈육인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아버지 역시 처음에는 소녀에게 조금 잘해 준다. 하지만 곧 그마저 떠나 버리고 혼자가 된다. 그가 남긴 작은 보트 하나를 의지하여 이른 아침 홍합을 따서 팔며 근근이 끼니를 해결한다. 마을에서는 홀로 사는 그녀를 ‘습지 소녀’ ‘늪지 쓰레기’라고 부르며 적대시한다. 학교 갈 나이가 되자, 어른 몇이 찾아온다. 난생처음 학교에 가지만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 아이는 놀림거리일 뿐, 반겨주는 이는 없다. 아이는 학교를 도망쳐 나오고 이후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어느 한 명 돌봐 주는 이 없는 아이를 살피는 유일한 사람은 기름과 식료품을 파는 흑인 부부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위안이 되어 주는 것이 자연이다. 갈대밭에 사는 물고기, 조개, 새 등이 그녀의 친구이다. 깃털만 봐도 어느 새인지, 울음소리만 듣고도 어떤 상황인지 단번에 안다. 사춘기가 되어 외로워진 소녀는 오빠의 친구였던 테이트와 가까워지고, 그는 그녀에게 글자를 가르쳐 준다. 그때부터 그녀는 관찰한 것을 글로 쓰고, 그림으로도 그린다. 둘은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지만 테이트가 대학원에 가게 되어 도시로 떠나면서 헤어지고 만다. 그녀가 습지를 떠나 살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여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사랑에 배신 당한 그녀는 세상과의 담을 더 높이 쌓는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둥이 체이스가 그녀를 보게 된다. 평소 자신이 만나던 여자들과 너무 다른 소녀에게 체이스는 끌리고, 결혼까지 약속한다. 소녀는 드디어 자신이 세상에 나설 때가 되었다며 꿈에 부풀지만 이미 약혼자가 있던 양다리 체이스는 결국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카야는 테이트의 도움을 받아 그동안 기록하고 그린 자료를 출판사에 넘긴다. 책은 곧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녀는 유명해진다. 때마침 바뀐 정부 정책으로 엄청난 규모의 습지가 그녀 소유가 된다.
과연 그녀가 범인일까. 읽어가면서 습지의 곳곳을 손금 보듯이 들여다보듯 하는 카야가 한때 그녀를 농락한 체이스를 교묘한 방법으로 살해하지 않았을까 의심했다. 결국 그녀에게 호의적인 변호사의 도움으로 카야는 풀려나고, 자신을 떠났던 테이트를 용서하며 그와 결혼한다. 아이는 없지만 부부는 평생동안 습지 생물을 연구하며 평화롭게 늙어간다. 카야가 죽자,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던 테이트는 비밀 창고를 발견한다. 거기에는 체이스가 잠잘 때조차 빼지 않고 하고 다녔다는, 그러나 사건 현장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조개껍질로 만든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한때 사랑의 징표로 카야가 선물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대반전으로 소설은 막을 내렸다.
그 사이 비행기는 적도를 지나 남반구로 날아갔다. 책에 푹 빠져있는 동안 계절도 겨울에서 여름이 되었다. 한때는 소설만 찾아 읽던 문학소녀였는데, 요즘은 인문학이나 수필류를 읽느라고 소설은 오랜만에 읽었다. 책이 없었더라면 열세 시간이나 되는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이제 파라과이까지는 두 시간 20분이 남았다.
첫댓글 세상에, 글을 다 쓰고 보니 조미숙 선생님도 같은 책으로 독후감을 썼네요.
미리 알았더라면 피했을 텐데요.
이런 우연이 재밌습니다.
와! 파라과이 여행기 기댸됩니다. 책을 읽으면 좋은 점이 많네요.
이번에 경험했습니다.
여행하는 비행기 안에서는 전자책이 최고다.
파라과이 여행기는 아주 조금 써 놨습니다.
16일의 여행 중 이제 2일치를 쓰고 있습니다.
편하게 쓰다 보니 주저리주저리.
그조차 시간 날 때만 쓰니 진도는 나가지 않고
기억은 조금씩 흐려지고 있답니다.
결국 카야가 범인이었네요. 잭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작가의 결말 처리가 돋보입니다. 주인공은 죽을 때까지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요?
강추하고 싶은 소설입니다.
굉장히 길긴 합니다만.
교수님 말씀처럼 눈 좋을 때 조금 더 읽어둘 걸 후회가 됩니다.
선생님 덕분에 여행도 하고, 소설도 읽습니다. 둘 다 탐나는 일이네요. 제주도라도 다녀오고 싶어요.
네. 봄의 제주도 멋지겠어요.
짧은 시간이라도 내서 다녀오시지요.
집을 나서는 순간, 여행이 시작됩니다. 하하.
@이팝나무 맞아요. 읍내로 가는 길이 여행길입니다.
@온도 와, 구름이 산 아래서 놀고 있는 풍경이 그대로 수채화네요.
멋져요.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다니 이렇게 복 받으신 분이 있나 했더니 전자책 이었네요. 다소 생소한 파라과이를 선생님의 글로 사전 우선 여행하겠네요. 감사합니다.
네. 전자책입니다.
파라과이는 사실 관광지가 거의 없어서 주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놀았답니다.
다음에 소개할 날이 있겠지요.
고맙습니다.
아하! 하나 배웠습니다. 파라과이는 어떻게 가는지, 글 고맙습니다.
저는 독일을 경유하여 갔지만 그 외에도 파리나 미국을 경유하여 가는 방법도 있답니다.
길은 하나가 아니랍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통하다니!
어떡하죠? 우린 천생연분인가 봐요.
하하하!
그러게요.
저도 깜짝놀랐습니다.
동갑이라서 생각도 비슷하다고 하면 비약이겠지요?
오늘 아침에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교장선생님이 쓰신 글이 생각났답니다. 다 읽고 나서 본 게 다행이네요. 하하하. 저는 테이트나 오빠가 범인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하.
재밌게 읽으셨지요?
인상적인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