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천사 / 양선례
아버지는 나를 낳고, 무려 서른 살이 되어서야 군대에 갔다. 나는 엄마와 자지 않고,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에 끼어서 잤다. 아버지가 군대에서 돌아오고 사 년 터울의 남동생이 태어났지만 그분들은 첫 손녀인 나를 많이 아꼈다.
할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었다. 논에서 일하고 돌아오시면 막걸리에 밥을 말아 드셨다. 생고구마를 가마니에 쓱쓱 비벼서 베어드셨다. 그 눈빛에, 표정에 할아버지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수다스러웠다. 생일상만 차려도 물을 떠 놓고 빌었다. 가마솥에서 밥물만 끓어올라도 ‘우리 자식 잘되게 해 달라.’고 두 손을 모았다. 동생이 아프거나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할머니 또래의 당골네(무당)를 불렀다. 장독대, 우물가, 정지(부엌)를 돌면서 바가지에 든 붉은 팥죽을 조금씩 떠서 뿌렸다.
나는 할머니 치마폭에서 자랐다.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나를 데리고 가셨다. 정월 대보름에 꽹과리, 북, 장구, 소고 등의 악기로 꾸린 광양 버꾸놀이를 처음 본 곳도 시계탑 사거리 부근의 부잣집 마당에서였다. 광양읍 인서리 숲에는 500년 된 팽나무 여러 그루가 있다. 여름이면 큰 그늘아래 모여서 노는 어른들의 쉼터이기도 했지만, 북망산에 가기 전에 마지막 노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상여를 가운데 두고 커다란 교자상 두 개를 맞붙여 상이 차려지고, 일정한 예를 치르고 나면 음식은 모인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갔다. 먹을 것 귀하던 그 시절, 그건 또 다른 별미를 맛볼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음식을 챙겨 한입이라도 내 입에 넣으려 했지만 나는 끝끝내 먹지 않았다. 귀신이 먹었던 음식이라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이 컸다. 그건 배고픈 것보다, 시장기보다 더 앞섰으니 어릴 때부터 나는 겁 많은 아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다른 지역에 살던 큰아버지가 온 가족을 끌고 우리 집으로 이사 왔다. 그분의 자식은 3남 5녀나 되었는데 하필 그해에 나랑 동갑인 아이가 병으로 죽었다. 다 키운 자식이 그리되어서 상심했는지, 아니면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큰아버지는 살던 곳을 정리하고 읍으로 올라왔다. 장자의 말에 토를 다는 어른은 없었다. 결혼하면서부터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건만 아버지는 형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우리 식구는 큰아버지가 사 준 작은 집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집과는 그리 멀지 않았으나 태어나면서부터 그 골목에서만 자랐기에 새로 이사 온 동네에 정이 들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와 동생들을 보살피고 반갑게 맞아 주던 할머니가 더 이상 집에 계시지 않았다. 조부모가 많이 그리웠지만, 그 집에는 친하지 않은 내 또래의 사촌들이 살고 있어서 자주 놀러 갈 수도 없었다. 어쩌다 가더라도 잠깐 머물다 와야 했다. 그러면서도 사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닌 듯 낯설고 어색했다.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키운 내게 먹을 것을 숨겨 놓았다가 주기도, 종종 사촌의 흉을 보기도 했지만 큰아들이 어려워서 대놓고 그러지는 못했다.
중학교 1학년 봄 체육대회를 마치고 집에 왔다. 분가하고부터 저녁 식사 준비는 내 차지가 되었다. 아버지 몫까지 일해야 했던 엄마는 늘 바빴다. 다섯 살, 일곱 살, 열 살의 동생도 챙겨야 했다. 아침에 엄마가 해 둔 국과 반찬을 주로 먹었지만 밥 짓는 건 내 몫이었다. 두레박으로 물을 떠서 쌀을 씻고 있는데 옆집에 사는 옥근이가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누나, 할아버지 돌아가셨다던데. 누나는 거기 안 가?” 처음에는 평소에도 장난기 많은 그였기에, 거짓말하는 줄 알았다. 얼마 전부터 편찮으시긴 했지만 돌아가실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색하고 물으니 진짜란다.
큰집에 들어서니 사립문 양쪽에, 짚으로 만든 망태기에 사잣밥이 걸려 있었다. 온 집에 불이 환히 켜져 있고, 마당에는 사람이 많았다. 부산 사는 고모 셋도 이미 와 있었다. “아부지, 아부지가 이뻐라 하던 선희가 왔어요.” 큰고모가 나 대신 할아버지께 알렸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엄마는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부산에서 고모가 올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데, 아무도 내게 연락하지 않은 것이었다.
고모와 어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간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곡소리를 내며 울었다. 울다가, 웃다가 꼭 연극배우들 같았다. 더 이상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안 계신데 사람들이 저리 웃는다는 게 야속했다. 밤이 되자, 혼자 집에 왔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목 놓아 울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고3 수험생 시절, 밤 열 시까지 학교에 남았다. 대학을 가라는 사람도, 보내 준다는 사람도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은 공부나 하자고 마음을 다잡지만 실날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아 한번씩 맥이 풀리곤 했다. 그런 날이면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할아버지 별이라 여겼다. 지금 이 순간을 슬기롭게 잘 넘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빌었다.
공부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은 15분쯤 걸렸다. 멀더라도 큰 도로를 따라 안전한 길로 갈 것인가, 어둡고 당산나무가 있지만 조금 더 가까운 길로 갈 것인가를 두고 늘 고민했다. 골목에는 지금은 흔한 가로등 하나가 없었다. 밤에 보는 당산나무는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그때마다 마음 속으로 할아버지를 찾았다. 항상 그분이 지켜 줄 거라고 믿었다. 할아버지를 ‘수호천사’라고 여겼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수호천사를 꽤 오래 잊고 살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그 집에는 지금은 큰집의 큰오빠가 산다. 젊어서부터 부산에 자리 잡아서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은 그가, 큰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낙향하여 그 터에 집을 새로 지은 것이다. 어느 해 봄, 할아버지 제삿날에 맞춰서 남편과 갔더니 음식을 거하게 차리긴 했는데, 아무런 의식 없이 먹기만 하더라. 아아. 짧은 추도식이라도 했더라면 덜 서운했을 것이다.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찾지 않았다. 가난하긴 했으나 어른들의 넘치는 사랑으로 내 유년의 뜰은 참으로 따스했다.
첫댓글 슬프고, 따뜻하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글이네요. 저도 항상 생각한 게 내가 지금까지 고비고비 잘 넘길 수 있었던 게 꼭 누군가가 저를 지켜준 것 같아요.
그 따뜻한 사랑 덕분에 오늘의 그대가 있나 봅니다.
글 고맙습니다. 그러네요 슬프고, 따뜻하고.
늘 아쉬움과 서운함은 남겨진 이들의 몫인 거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어렸을때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선생님의 품이 넉넉한 것 같습니다.
철이 빨리 들어서 오늘의 선생님 모습이 되었군요.
할머니, 할아버지 보고 싶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랑 받은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영특하셔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 같아요. 수호천사...제게도 있답니다. 훈훈함으로 잘 읽고 갑니다.
조부모님의 기억이 남다르시네요. 선생님의 어렸을 적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살가운 정을 많이 받아 늘 선생님의 표정도 밝으셨나봅니다.
글에서도 따뜻함이 느껴지네요. 잘 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