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아기의 초청 / 사 9:1-7, 요 1:14-18
73세 할아버지. 4번 실패, 어제 수능점수 발표, 좋은 점수를 받았다 함. 72세 김대중 대통령 당선, 4수만에. 노인들도 할 수 있다. 희망을 가져라. 젊은 사람들, 고난을 끝까지 참고 견디면 영광의 날이 온다.
한 사회학자는 의사소통이 발달하면서 현대 사회에는 신화가 사라졌다고 말한 바 있다. 통신의 발달로 정보 취득이 용이해지고 빨라지자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은 신비한 것이 설자리가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에는 영웅이나 성자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엄격하게 말하면 영웅이나 성자의 탄생은 정보 부재나 정보 차단의 환경에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북한을 예로 들어보자. 북한은 온갖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 살고 있다. 최근에 북한에 다녀온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김일서잉 죽은지 만 2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만수대 언덕이나 금수산 의사당에는 아직도 절을 하며 통곡하는 주민들이 있다고 한다. 만일 이들에게 온갖 정보가 공개되고 김일성, 김정일의 비밀들이 낱낱이 공개된다 해도 과연 이렇게까지 할까? 아마 그때는 사정이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개방이다. 로마 카톨릭교회에 오랫동안 신화적인 영웅이나 성자나 교황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정보를 통제한 결과였다.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신화는 사라진다. 이런 현상은 더 이상 인간을 신격화할 기반이 사라졌다는 점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신화가 사라지자 지도자에 대한 불신이라는 반대 현상을 가져왔다. 서울대학교 사화과학연구소에서 1,500명을 대상으로 ‘21세기를 향한 국민 의식의 성향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국민이 가장 싫어하는 직종이 뭐냐는 물음에 70%가 정치가라고 대답을 했다. 또한 우리 사회의 가장 부패한 계층에 대해서도 70.1%가 정치가라고 답변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 한국 사회는 새롭고도 참된 유형의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 김대중 선생이 당선되었다. 호남 사람들의 열화같은 성원으로 당선되었다. 참으로 어려운 현실에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는데, 이 난국을 국민들의 소망대로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온 국민이 힘을 합해야 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형편이 이와 비슷했다. 아하스 왕을 포함한 그 시대의 지도자들은 딱 두 단어로 설명하자면 ‘부패와 무능’이다. 백성들은 나라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지도자들을 두었기 때문에 외세의 침입 앞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야 했다. 그런데도 관리들은 여전히 뇌물을 받는 등 사치와 허영에 탐닉하고 있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지도자들, 오늘 우리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유사하지 않은가? 벡성들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을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깊은 절망의 수렁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바로 이런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면서 이렇게 외친다. ‘그러나 여러분, 위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한 지도자를 이 역사 속에 보내실 것입니다. 그 지도자를 소망하며 사십시오. 그 지도자는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여러 이름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 하나의 이름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그분의 영광스러움, 그분의 아름다움, 그분의 사역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그분의 인격의 탁월성과 그분의 존재의 신비스러움을 소망하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통치자요, 기묘자요 상담자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 통치자, 기묘자. 모사 외에 더 많은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지난 주에 이어 다른 이름들을 소개하겠다.
1. 전능하신 하나님
장차오실 이 아기는 본질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이 말은 모사라는 표현 다음에 나온다. 모사를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면 지난 주 말씀드린대로 ‘상담자’라고 할 수 있다. 또 그것을 문자 드대로 번역하면 ‘지혜자’이다. 아기로 오실 그리스도는 지혜자이시다. 그분은 우리 삶에 필요한 지혜를 공급해 주실 분이다. 가슴앓이를 할 수밖에 없는 소통스러운 삶의 현장, 사면이 막혀버린 삶의 자리에서 나에게 가장 적합한 지혜를 공급해 줄 수 있는 지혜자가 바로 그분이시다. 그러나 지혜만 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혜와 더불어 실제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이 메시야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지혜를 힘입어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도록 능력까지 공급해 주신다. 그분은 지혜자인 동시에 전능자이시다. 지혜와 능력만큼 탁월한 짝도 없을 것이다. 지혜가 없는 능력은 위험한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능력이 없는 지혜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아기로 오시는 우리의 메시야는 지혜자인 동시에 전능자가 되신다.
우리 성도들에게 어떻게 하면 신앙과 일상생활이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최근에 상담학 책을 구해 읽어보았다. 신학교 다닐 때 공부한 것을 기초로 수십권의 책을 구하여 읽어보는데 상담학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상담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상담의 한계는 이런 것이다. 문제를 들고 찾아오는 성도들의 아픔에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다. 같이 아픔을 느낄 수가 있다. 그들을 수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의 문제나 그들의 어려움을 내가 짊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상담학에서는 실제로 상담하러 찾아온 자(내담자)의 문제를 짊어지려고 하지 말라고 상담자에게 충고한다. 상대의 짐을 지려고 하면 상담하러 찾아온 자와 상담자가 함께 무너질 수 있으니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결국은 이것이 상담의 한계이다. 그러나 참된 상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나? 그분은 우리의 얘기를 경청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느껴주시며, 우리의 아픔을 같이 나눠주시는 분일 뿐아니라 이런 고통스러운 삶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시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니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부르고 계신다. 마 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벧전 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상담자이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모든 짐과 인생의 고통을 온전히 맡기라. 그러면 그분께서 이 짐을 관리하고 해결해 주실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계속된다. 사 53장은 이사야 예언의 절정을 이루는 부분이다. 4절상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또한 시편 기자는 68:19절에서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셀라)’라고 고백한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의 짐을 짊어지신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셔서 같이 아파하고 같이 눈물을 흘려주신다. 우리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받아주고 열납하실 뿐아니라 그 짐을 함께 져 주신다. 그리고 해결하신다.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다. 출구를 열어주신다. 이분을 믿기 바란다. 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이것을 히브리어로는 ‘엘 기볼’이라고 한다. ‘기볼’이란 본래 전쟁터에서 꼼짝없이 지고 있는데, 갑자기 등장해서 나를 대신해서 싸워주며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주는 전사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엘 기볼’이란 능력있는 전사와 같으신 하나님이란 뜻이다. 싸움터와 같은 내 삶의 자리에 개입하여 상황을 바꿔주시는 그분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아기로 오신 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바란다.
2. 영존하시는 아버지
이 말은 ‘아들이 곧 아버지다. 성자가 곧 성부이다.’ 하는 삼위일체 교리를 입증하는 근거 구절로 생각하지 마라. 그런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오히려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성적(父性的)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마치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이사야 선지자는 계속되는 예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 63:16절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플라우트 맥이라는 심리학자는 그의 문제작 ‘아버지에 대한 굶주림(Father Hunger)’에서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굶주림에 대해서 지적한다. 모든 사람은 참된 아버지, 완전한 아버지, 기댈 수 있는 아버지, 내 상처를 싸매줄 수 있는 아버지, 나를 참으로 도와줄 수 있는 이상적인 아버지를 마음속 깊이 희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육신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이런 필요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리만족을 시켜줄 대상으로서 정치적인 지도자나 종교적인 지도자에게 의존한다. 저는그 대표적인 예를 북한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데서 삶의 위로를 찾을 수 없었던 북한 주민들은 신격화된 어버이 수령에게서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유일하게 믿고 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1년이고 2년이고 어떻게 울지 않을 수가 있겠나? 평양거리에는 아직도 10m 간격으로 대형 현수막들이 걸려있는데, 거기에는 ‘어버이 수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그것으로 도시 전체를 도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김일성 역시 진실로 믿을만한 아버지가 아니었음을 발견하는 순간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되겠나? 소위 우상의 신화가 깨어지는 순간 그들이 무엇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겠나?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때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음만이 해답일 것이다. 실제로 북한 사람들 사이에서 김일성 신화는 서서히 깨져가고 있다. 그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면 그렇게 잘 들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들 마음이 옥토같이 준비되어 있다, 수령님 대신 예수님만 집어넣으면 북한 사회는 성서구절로 꽉 차있는 나라라 해도 될 그런 나라이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그들과 함께 걸으셨으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셨고, 그들이 갈 길을 알려주셨다. 또한 저 건녀편에 있는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소망이요 위로요 피난처요 삶의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께서 어디론가 곧 떠날듯이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제자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서둘러 예수님께 묻는다. ‘선생님, 어디로 가십니까?’ 마음에 깊은 공포와 두려움을 품은 채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한다. 요 14:1-2절‘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그때 갑자기 빌립이란 제자가 툭 튀어나와 ‘선생님, 아버지를 한번만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부탁한다. 그때 예수님이 무어라고 대답하시나? 9절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렇다. 예수님은 바로 아버지 같은 분으로 오셨다. 이것을 믿는가? 그분이 바로 우리의 근본적인 필요를 해결하고 우리와 함께 있어주며, 우리에게 목표를 보여주고, 영원한 가나안을 향해서 함께 가주며,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동일한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 아버지를 신뢰하기 바란다. 영존하시는 그 아버지께서는 2천년 전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 아버지를 만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