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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강 질그릇 안의 보배 ~ 4장 질그릇
26.04.23(목)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11절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오늘 고린도후서 다섯 번째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4장 7절부터 18절이고 제목은 질그릇 안에 보배입니다.
많이 인용되고 있는 말씀이죠. 질그릇의 보배를 가졌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질그릇이다. 하는 얘기입니다.
바울 사도를 가리켜서 사람들이 비난하고 배척하고 거절하는 이유는 너 도자기인 줄 알았더니 질그릇이구나 우리하고 똑같네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것인데 바울사.도가 그래 여러분들이 잘 본 겁니다. 나는 질그릇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계가 있고 그러면 복음은 우리를 도자기로 바꿔주는 것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좀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 유념해야 할 포인트는 복음의 역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굉장히 역설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생각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이 어떻게 바울 사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지는가? 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또 하나는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으신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았다. 그렇잖아요.
보배라는 것은 도자기에 담겨야죠 어울리지 않는 형편없는 가치 없는 것에 가치 있는 것을 담지 않거든요. 이런 문제들을 우리가 좀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정말 속 깊은 이야기 고린도후서는 제가 처음에 소개해 드렸던 것처럼 바울 사도가 쓴 많은 서신 중에서 가장 바울 사도의 어떤 심정적인 개인적인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사도는 가슴 속 깊은 이야기를 던집니다.
그 첫 번째는 어울릴 수 없는 조화 믿어지지 않는 진실 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데,
고린도 후서 4장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이 말을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를 하는 것이 복음을 우리가 깨닫고 이해하는 것과 직접 관계가 있습니다.
첫째 어울릴 수 없는 조화라고 얘기한 것은 질그릇은 도자기가 아니라 질그릇을 통해서 바울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은 뭔가 하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범죄한 아담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창세기의 이야기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숨 쉬고 인공지능도 만들고 인간이 지난 역사 속에서 만들어낸 그 문명이라고 하는 건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흙입니다.
역사 속에서 제 아무리 잘 나고 똑똑하고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질그릇이라는 말은 우리의 그런 존재 그런 뉘앙스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보배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서 바울사도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라고 말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바로 그 앞절에서 했던 얘기입니다.
빛이 비추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질그릇에 불과한 우리 인생 속에 담으셨다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가 쓰여지는 전체 맥락을 여러분 놓치시면 안 됩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내가 가짜 사도라면 내가 전한 복음도 가짜고 내가 전한 복음으로 너희가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내가 전한 복음이 가짜라면 너희의 중생도 회심도 가짜고 너희도 가짜 그리스도인이고 이렇게 논리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얘기예요.
이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얼마나 진짜 복음인가를 말합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그래서 내가 전한 복음이 이렇게 대단한 거야. 라고 말하지 않구요.
복음이 얼마나 대단한가 근데 그 복음을 하나님이 나 같은 질그릇 같은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나도 참 기이하고 놀랍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에요.
바울 사도의 고백은 너희들이 나를 볼 때 도자기가 아니고 질그릇이라고 봤지 그래 나 질그릇 맞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도 자신과 자신이 가진 직분을 구별해요. 말하자면 나는 질그릇이야 그렇지만 내 안에 하나님이 담아 놓으신 보배는 진짜 보배야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하죠. 야 네 안에 진짜 보배가 있으면 너는 질그릇이 아니고 도자기여야 되지 이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오해하는 복음이고 오해하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겉으로 근사하고 멋있고 굉장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거는 그거하고 아무 상관없어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거는 내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연봉 많이 받는 거 아니고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거 아니고 우리 아들들이 우리 딸들이 뭐 대단한 일들을 하는 거 아니에요.
그것하고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거하곤 상관이 없어요. 내가 이 세상에서 약하고 굶주리고 가난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바닥의 5%에 드는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질그릇이여요.
이게 그래도 하나님이 영광받을 수 있는 거는 그거하고 상관이 없다. 왜 질그릇 안에 담겨진 게 뭐냐가 결정한다. 하나님이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으셨다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자신과 자신의 직분을 구별해야 돼요.
내가 질그릇이라고 해서 내가 가진 보배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이 나한테 맡겨주신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직분의 영광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음의 영광 능력 이것이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해지지 않는다. 하는 것이죠.
복음은 자기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증명하는 거예요. 우리는 전부 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포로라고 하는 2장 14절의 말씀에서 생각했던 것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혹은 바로 뒤에서 멋있게 백마 타고 가는 승리한 장수처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끄트머리에 이 개선 행렬의 끄트머리에 있는 포로라고요.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증명하면서 우리말에 이런 말 있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생각하기가 참 쉬워요 하나님의 영광에 나도 살짝 편승하는 거예요.
바울사도가 얘기하는 것은 그의 삶 속에서 거의 지속되었던 바 그는 정말 약했고 고난 가운데 있었고, 매일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거죠.
굉장히 다른 얘기예요. 그러니까 자기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향해서 나 이런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증명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를 증명함으로써 하나님을 증명하고 싶은 것은 성경적 방법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을 증명함으로써 하나님을 증명하는 방법은 마귀가 주었던 그리고 사람들이 했던 도전과 똑같아요.
너 한번 내려와 봐 십자가에서 그렇게 못 박히시고 처참하고 죽어가는 존재로써 십자가에서 갑자기 점프해서 딱 내려오시면 얼마나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들의 일반적 생각이지만 그의 약함 그리스도의 약함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을 택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이 꼭 나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죠. 성화는 성화 중요한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감추고 강한 모습으로 보이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 다 그렇죠. 약점 감추고 싶어 하죠.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훨씬 더 용감해질 수 있고 담대해질 수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내 약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게 아니고 나는 그저 약한 사람이구요.
나 가난한 사람이구요. 나 실패한 사람이구요. 나 정말 뭐 세상적으로 말하면 자랑할 게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 속에 보배를 담으셨기에 이렇게 되는 게 복음의 능력이에요.
여기에 이제 복음의 역설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설은 도자기 안에 보배가 있다. 역설이 아니죠. 질 그릇 안에 보배가 있다 이게 복음의 역설입니다.
바울 사도가 가슴 속 깊은 얘기를 하는 가운데 자신이 당하고 살아왔던 고난에 아니 과거의 얘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죠.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가 여전히 바울을 싫어하니까 배척하니까 사중의 어려움을 바울사도가 토로합니다. 이렇게 말하죠.
검정 글씨로 쓰여진 부분들을 쭉 보세요. 우겨싸움을 당한다. 답답한 일을 당한다. 박해를 받는다.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이건 뭐 레슬링 하는 것처럼 그냥 막 메타 꽂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일들을 사중으로 바울은 이걸 다 당하고 살아가요 고린도 사람들이 그냥 막 바울을 들었다 놨다 해요.
누가 이런 꼴을 당하고 싶어요. 비참해지죠 이런 상황이 되면 사람이 참 비참해지고 힘들어지죠 그런데 바울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이런 사중의 어려움들이 있는데, 바울은 우겨싸움을 당하는데 쌓이지 않는대요
참 희한하죠. 그리고 답답한 일을 당하는데 낙심하지 않는대요
4장 1절에서도 그랬잖아요.
하나님이 긍휼하심으로 나를 이 직분에 세우셨으니 내가 낙심할 거 없다.
나 어차피 하나님이 너무 불쌍해서 이렇게 여기다가 데리고 온 건데 내가 낙심할 거 없다. 나 훌륭해 가지고 나 온 거 아니니까 이렇게 말한 거죠.
또 박해를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않는다.
내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여러분 거절당하는 것 기분 나쁘죠 근데 가는 데마다 거절당하고 가는 데마다 유대인들이 나 죽이겠다고 그러고 그러는데 버림바 되지 않는다는 확신
그리고 네 번째로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대요 오뚜기처럼 아기들이 오뚜기 가지고 장난치면 참 재밌잖아요. 막 쓰러뜨려도 또 일어나고 쓰러뜨려도 또 일어나고 오뚜기를 이긴 어린이는 없어요.
역사에 이거를 메르텐이라고 하는 신약학자가 되게 재미있는 표현으로 이렇게 우리 현대적인 언어로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사방으로 우겨싸움을 당하여도 쌓이지 않는다.
우겨싸움을 당하는 걸 스쿼시 당하는 아주 그냥 짜내는 거죠. 즙을 짜듯이 근데 스쿼시되지 않는다. 이건 뭐예요? 으깨어지진 않는다. 그리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아주 당황하고 막 답답해 하는 그런데 비포드 정신을 잃어버리는 지경까지 가지 않는다.
세 번째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는다.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임재를 확신하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잖아요.
마음도 편하고 육신도 편하고 모든 게 너무 잘 됐고 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알아요. 그렇게 고백해요. 근데 사실은 그럴 때보다도 여러분들이 너무 고난 가운데 있고 고통 가운데 있고 좌우 사방을 둘러봐도 정말 길이 없는 것 같이 보일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달라요.
은혜를 받아본 사람들은 알죠 그때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하나님의 위로는 1장에서 말한 것처럼 고난이 넘친 것보다 그 위로는 더욱 넘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잊을 수가 없어요.
네 번째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이 표현 되게 인상적이에요.
권투 선수가 펀치를 너무 많이 맞아 가지고 이제 다운당하잖아요. 근데 오뚝이처럼 또 일어나는 거예요. 케이오 되지는 않아요. 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이겨요 다운을 10번 20번 당하는데 티 케오도 안 당하고 케오를 당하질 않아요. 이게 지금 바울이 자기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더 나아가서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랬어요.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데 언제 항상 이거는 단 한 번의 죽음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요.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와라 그랬는데 한 번 죽는 게 아니고 항상 내가 예수님의 죽으심의 자리에서 날마다 죽노라 이 고백을 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바울의 고난은 연결이 돼요. 이것을 우리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이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이걸 찾아볼 수가 있는데 사울이 물어요.
주여 뉘쉬니이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땅에 엎드러져 들음의 소리가 있어 이러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아니 제가 언제 당신을 박해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를 동일시하신 것이죠.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거든요.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지금 자신이 받고 있는 고난이 곧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여긴 것이고.
이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된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3장 10절에서는 바울은 이런 고백을 했죠.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의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영광과 능력을 알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부활이라는 거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지나서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고난을 바울은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지 고난받지 않고 고통당하지 않고 편하게 살자 이게 바울의 모토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도리어 고난에 대해서 훨씬 더 담대하게 와야 할 고난이라면 와라 내가 피하지 않겠다.
적극적인 의미를 영적인 의미를 그는 이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고 고난을 통해서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는 것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래서 고난과 죽음은 성화의 방편이다.
이게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고난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는 뭐로 나타나냐 하면 약함이에요. 약함 실패 실패도 죽음이죠. 실패 좌절 약함 낙심 이 모든 것들을 고난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이것은 성화의 방편이다.
결국은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데리고 가시는 인생길에서는 우리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다.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그냥 너 고생해 봐라가 아니라 그걸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거룩하게 빚어가신다 하는 것이죠.
4상 12절에서 바울은
그런 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이게 무슨 표현입니까?
나는 지금 너희에게 배척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힘들고 날마다 죽는 일이 있어 그런데 이 고난 내가 받는 고난 자체도 목적이 있는 고난인데 내가 이 고난을 받음을 통해서 너희들 안에서 내 안의 역사하는 죽음을 통하여 너희 안에서 생명이 역사할 수 있다면 내가 그게 바라는 바다 이게 목회자인 고린도 교회를 향한 목회 바울의 목회적인 염려요 마음이었습니다.
이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마땅히 율법의 형벌과 저주를 받아 죽어야 할 자들을 살리신 것이죠.
내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이죠. 그게 주님이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일인데 바로 바울 사도가 주님이 행하신 그 일을 똑같이 행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그 자리에 자신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껴안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끌어안고 가는 거죠.
그래서 고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인식은 뭔가 하면 질그릇이 이렇게 하나 있다고 해봐요. 이 안에 하나님이 보배를 담아 놓으셨어요.
근데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 사망이라고 하는 게 오면 질그릇을 깨뜨리고 금이 가게 하고 막 부수는 거죠.
그러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요? 보배가 드러나게 된다는 고난이라는 거는 환영할 만한 것이다. 굉장히 역설적인 표현이죠. 내가 죽고 너희가 사는 것 바울이 지금 그런 얘기를 하고 고난은 보배를 드러내는 기회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강 질그릇 안의 보배
그리고 바울 샤도가 하나 크게 더 얘기하는 게 있어요. 마지막에 다 밝혀진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언제나 그날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그랬죠 너는 앞에서는 예하고 뒤에 가선 아니라고 그러고 일부 이언하는 목회자 아니냐 그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 사도는 마지막에 다 드러날 겁니다.
이 얘기를 이제 하기 시작합니다.
4장 14절 15절입니다.
주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바울 혼자 아니에요. 너희와 함께 나하고 너희하고 다 함께 그리스도 앞에 선 거예요.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안다
이 안다는 표현을 사도 요한도 많이 쓰고 바울도 많이 쓰지만 이 안다는 표현은 사실은 때로는 믿는다는 표현보다 더 강한 표현이에요. 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뭐여요?
바울 사도는 지금 자신이 지금까지 예를 들어서 예하고 아니오. 하고 이 모든 자신의 비난받을 만한 모든 것들 이 모든 행동들이 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그렇게 한 거라고 얘기해요.
마치 어떤 마음이에요. 일만 스승이 있으나 아비는 많지 않다 아버지는 많지 않다 난 너희를 복음으로 낳았다. 아버지다 아버지 마음으로 바울 사도는 내가 다 너희를 위해서 한 것이야 라고 얘기를 근데 너희는 지금 그렇게 생각 안 하지 마지막 날에 밝혀질 거야.
그래서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얘기해요. 고린도 사람들 너희 나 지금 의심하고 있잖아. 근데 그날에는 너희가 감사하게 될 거야.
아 바울이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한 것이 고난을 받은 거구나 그래서 은혜가 더 넘치고 은혜가 더하여 넘치고 결국 뭐예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함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결국은 너희의 감사함이 넘치고 하나님 바울을 우리에게 주신 게 너무 고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거야. 그날에 다 밝혀져 이게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도가 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아주 그 사람과 비교 불가능한 아주 대단한 사람으로 세우셔서 그 안에 복음을 담으시고 복음을 전했으면 얼마나 좋아요. 헷갈릴 게 없잖아요.
고린도 사람들이 이 사람은 정말 세상에서 탑 클라스의 사람이에요. 그러면 이 사람이 복음 전하는 게 뭐가 문제예요.
근데 문제는 이 사람을 바울을 보면 도대체 저 사람 왜 이렇게 고생하고 살고 왜 저렇게 사람이 좀 외모를 봐도 1세기 문화의 사도행전에 보면 정말 바울의 외모에 대한 묘사를 보면 정말 우리가 바울을 모르는 게 나아요. 외모를 그래야 바울 서신을 읽을 때 은혜를 받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저 사람이 진짜일 수가 없어 이렇게 본 거예요. 외모로 보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가 왜 질그릇 같은 바울 안에 그 영광의 보배를 담으시는가
이게 바울만이에요. 아니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죠.
하나님의 의도가 뭘까요?
첫째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려 했습니다.
능력이 바울이 도자기면 사람들은 보배를 보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모든 영광을 바울에게 돌릴 거예요. 야 정말 바울은 대단해 따라갈 수가 없어 저분은 우리하고 차원이 달라 바울을 높이고 바울의 능력을 칭송하고 바울을 얘기하겠죠.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으신 하나님의 의도는 보배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다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오직 하나님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죠.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합이라 착각하고 넘어지는 이유 복음의 사역자들 목사들 영적 지도자들이 넘어지는 이유 자기 안에 담으신 보배가 나를 도자기로 만들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내가 보배라고 착각하는 거에요 그러면 망해요.
100이면 100 다 망해요. 내가 질그릇인 걸 알고 감당할 수 없는 영광을 내 안에 주신 것을 바울처럼 알아야 해요.
어거스틴한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었대요
너무 어거스틴 똑똑하니까 도대체 당신은 얼마나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신지 한번 얘기를 해보세요.
그러니까 어거스틴이 이렇게 대답해요.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면서 말씀하셨다 가장 약하고 가장 조그만 자가 땅이 어디 있나 한번 보자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말씀하셨대요 어거스틴을 보고 이제 찾았다.
그 친구는 절대 자랑하지 못할 거다 그는 자기 미천함 때문에 내가 자기를 사용하는 줄 알게 될 것이니까. 이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이여요.
그러니까 예수님 믿고 야 하나님 수지 맞으셨네 내가 다 예수를 믿어주고 이거 아니라는 거죠. 교회 역사상 최고로 탁월했던 천재였던 어거스틴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 그 안에 보배가 이 질그릇과 비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또 하나의 의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사람인 나에게 목사의 능력 사람의 능력 어떤 탁월한 지도자의 능력 아니고 보배 하나님께 있다는 것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4장 15절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바울사도가 얼마나 이 하나님의 영광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아셔야 돼요.
첫째 바울샤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봤어요.
그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고 회심하게 된 사건이에요.
두 번째 바울샤도는 주의 영광을 봄으로써 주의 영상으로 변하는 거룩하게 변하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그 말씀 속에서 살아간 거예요. 말씀 속에서 본 주의 영광이 그로 하여금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게 만든 겁니다.
여러분 성경 열심히 읽을 수 있고 신학 공부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어요. 가르칠 수 있고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은 자연적으로 자동적으로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거나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바울이 그 영광에 집착하여 살아가듯이 그 영광을 추구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기에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몇 가지 얘기합니다. 아까도 제가 설명드렸지만 바울은 사중의 어려움 낙심할 만한 낙심 천만한 상황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싸움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상황 낙심천만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살아갑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해요. 바울이 그런 얘기 표현 많이 하거든요. 그 얘기는 무슨 얘기인가 하면 바울이 낙심할 만한 상황 속에서 늘 살아갔다는 것이죠.
낙심과 싸웠다는 얘기죠 그 이유 낙심하지 않는 근거가 뭐예요? 질그릇은 점점 부서지지만 속은 날로 새로워지는 걸 경험하니까 내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니까 말하자면 내 질그릇 같은 인생이 늙어서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또 병약해져서 다 쓰러져 가는 거죠.
그런데 그 속에서 모든 게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질그릇이 닳아서 없어지고 질그릇이 깨지고 금이 가고 틈이 생기면 거기서 나오는 게 뭘까요? 보배의 빛남이죠.
그래서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걸 경험한다. 그렇게 얘기해요. 그러니까 여러분 질그릇과 보배를 구별해야 돼요. 내가 보배가 아니구요. 나는 질그릇이다. 바울이 그렇게 얘기해요.
이 구별에서 넘어지게 되면 결국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능력에 심히 큰 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저에게 있는 거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게 그냥 상투적인 겸손이 아니라 이게 이게 그렇다는 거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6절에 바울은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고 그리고 실제로 부활의 영광의 몸으로 입게 될 그 날이 가까워져 오고 있고 보배가 내 속에서 바깥으로 영광의 빛을 드러낸다
근데 여기서 하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와 관련해서 바울이 설명하는 환란과 영광의 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17절에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란에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 여기 환란이 나오고 영광이 나와요.
잠시 받는 환란이고 영원한 영광이에요.
환란은 가볍고 영광은 무거워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환란의 역할은 뭔가 하면 우리가 가진 환란에도 불구하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암에도 불구하고, 질병에도 불구하고, 장애에도 불구하고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이 환란 경한 환란 잠시 받는 경한 환란이 뭘 이룬다고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중한 것을 이룬다고 그러니까 환란이라는 것이 뭔가를 하는 거예요. 일을 근데 그 일을 하는데 우리에게 영광을 이루어 준다고요.
질그릇이 깨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그러니까 이 환란이 없으며는 이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의 얘기는 내가 받는 환란 때문에 고통 때문에 암 때문에 질병 때문에 장애 때문에 하나님 능력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이룬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복음의 목적이 무엇이냐 복음의 목적은 편안한 삶 고생 안 하고 사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 더 깊이 알고 그분을 즐거워하고 그분을 더 깊이 신뢰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지고 그분의 영광을 사모해서 고난이라는 것이 만약에 하나님 영광을 드러낼 수만 있다면 복음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면 내가 고난을 끌어안는 거예요. 이렇게 강한 것이에요.
복음이 우리에게 행하는 그 복음이 가지는 목적이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는 마지막 이유는 보이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인생 건다는 거예요.
보이는 것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서 일희일비하며 살아가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것 그게 뭐예요? 질그릇은 보이고 보배는 안 보여요.
그 안에 지금 고린도 사람들이 헷갈리는 게 바로 그 문제예요. 믿음으로만 볼 수 있어요. 거기에 여러분의 삶을 걸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18절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질그릇 아니고 껍데기 아니고 속에 있는 거 보배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건 영원하다
질그릇은 다 나이 들면 없어지는 거예요.
사라지는 거예요.
오늘 이 말씀을 정리하면 세 가지 적용점이 있는데
첫째 자신이 즐그릇임을 알고 우리의 영광은 우리 안에 담긴 보배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안티에이징 무슨 뭐 어쩌고 하는 거를 발러가지고되는 게 아니고 질그릇은 그렇게 해서 도자기 안 돼요. 질그릇이에요.
질그릇은 나이 들면 약해지고, 병들고 그래요.
근데 그것 때문에 슬퍼하고 낙심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좀 여러분의 속 사람이 새로워질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 두신 보배가 빛을 발하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 질그릇과 보배를 구별하여 낙심하지 말자
내가 보배라고 생각하면 낙심할 일 천지예요. 난 질그릇이에요.
기억하세요. 난 질 그릇이에요. 여기에 복음의 역설이 있는 거예요. 나 증명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증명해봐야 질 그릇이니까.
세 번째 보이지 않는 영원함을 추구하고 사는 거예요. 이게 신자예요. 눈으로 보는 것 가지고 사는 게 아니고요. 믿음으로 보는 것 가지고 사는 거예요. 껍데기 아니고요. 그 속에 있는 보배를 포커스하고 초점 맞추고 사는 거예요. 이 교훈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제 오늘 5강 마치고 6강 다음 주에 여러분들을 만날 때에는 5장 1절부터 10절에 있는 본문을 가지고 그러면 보이지 않는 거 영원한 걸 바라보고 산다는 게 그게 신앙의 본질인데 그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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