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리가 전하는 말
내가 살던 곳은 졸졸 돌돌 물소리 청아한 산골 도랑이었다. 물가에 자라는 흔한 풀이라고 해서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나는 옆에 있는 여뀌와 개구리를 벗 삼아 참말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어떤 날은 꼬마들이 개울가에 모여 앉아 파란 내 이파리를 따면서 해방 나무라고 했다. 인두로 짖은 듯한, 한자 여덟 八자가 잎에 또렷하게 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보고 해방을 알리는 징조의 풀이라고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너무 기뻐서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이었다.
내 친구 여뀌는 나와 다르게 독성을 가진 풀이다. 아이들이 고기를 잡을 때는 뜯어온 여뀌를 돌 위에 올려놓고 짓이겨서 물에 풀었다. 독한 냄새에 취한 고기들이 배를 하얗게 내놓고 잠시 기절하면 이때다. 하고 아이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고기를 주워 담았다.
올챙이가 개구리로 부화하면 좁은 도랑이나 논에서 날마다 음악회가 열렸다. 폴짝폴짝 힘찬 율동을 할 때는 우리를 깔아뭉개서 아프기도 하지만 개구리들이 부르는 합창에는 언제나 흥겨워했다.
세상 어느 것도 부러울 게 없는 나의 고향은 매봉산에서 발원한 물로 농부는 풍년을 구가하였고 달뜨는 밤이면 은빛으로 물드는 물살이 나를 건강하고 튼튼하게 키워주었다. 그래서 나는 고향이 언제나 좋았다.
한 달 전쯤인가? 하늘에서 천둥 번개 치더니 무섭게 폭우가 쏟아졌다. 눈 깜짝할 사이 축대가 무너지고 터지면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흙탕물에 뒤엉켜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내려갔다. 유속이 빨라지면서 내 몸에 상처도 생기고 숨이 막혀 곧 죽는 줄 알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글쎄 나는 돌 위에 처박혀 있었다.
태백교 아래서 내 손을 잡아주던 돌은 냇물 중앙에 있었다. 꼼짝할 수 없는 돌 위에서 얼마나 살 수 있으려나? 흙과 물만 있으면 되겠다 싶었으나 욕심 같아선 누가 나를 물가로 데려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야위어 가는 나를 의식하면서 물가에 있는 고마리가 한없이 부러웠다. 옆에 있던 풀들이 하나둘 말라 죽어가고 나도 언제 죽을지 불안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늦여름이 끝나갈 즈음 오락가락하던 비가 끝 장마답게 큰비를 내렸다. 냇물이 다시 불어나자 돌 위에 있던 풀들을 휩쓸어 갔다. 고맙게도 나는 무리 지어 있는 고마리에 걸려 더는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천신만고 끝에 석사교까지 떠내려온 나는 모살이 잘하면서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남들처럼 꽃을 피우려고 꽃대에 힘을 모았다. 처서가 지나면서 내 꽃대에 핀 꽃봉은 연분홍에서 담홍색으로 더욱 도드라진 색깔로 익어갔다. 고마리의 무리 속에서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더 예쁘게 꽃을 피워냈다. 냇가에서 볼 수 있는 고마리 꽃밭, 가끔 나오는 어떤 할머니가 우리가 예쁘다며 사진을 찍어갔다.
꿀을 저장하고 있는 나에게 날개도 없는 일개미가 도전장을 내밀고 덤벼들었다. 죽기 살기로 덤비니 참고 있는 나도 죽을 지경이다. 무게에 눌려 숨까지 죽이고 있는데 이번에는 벌이 와 꿀을 따갔다. 건너편에 있는 여뀌는 꽃이삭을 간당이며 바람과 놀고 있는데 난 이게 뭐냔 말이다.
그렇지만 넓은 냇가에 오니 볼 것들이 참 많다. 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이 거친 숨 뱉으며 걷기도 하고 운동기구에 매달려 체력증진에 힘쓰고 있다. 왜가리도 일찍이 날아와 긴 목을 늘이며 먹이를 낚아채고 그런가 하면 몸집이 작은 알락할미새는 가볍고 빠르게 잘도 난다. 까지는 떼거리로 몰려와 수변에서 놀다 가고 날개가 예쁜 비둘기도 온다. 참새 떼 가 나무에 앉아 짹짹 일 때는 귀가 따가워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정신이 없다.
냇가 친구들이 귀띔해 주었다. 고마리는 더러운 물을 정화하고 번식력이 강한 아주 고마운 식물이라 했다. 내가 물가에 살게 된 이유와 죽다가 살아난 강한 의지력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살만하게 되니 밤이면 하늘과 사방을 흩어볼 여유가 생겼다. 달을 사랑하는 달맞이꽃은 이미 져버렸고 반짝이던 그 많던 별들은 다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주변 아파트에서 새어 나오는 전등불로 도시의 밤이 깊어갔다.
한차례 서리가 내렸다. 푸른 빛을 띠고 있던 식물들이 한꺼번에 폭삭 주저앉았다. 언제 왔는지 청둥오리 떼와 흰뺨검둥오리 떼가 물살을 가르며 시선을 끌고 있다. 늘 혼자이던 왜가리까지 유유자적하고 있는 오늘의 저 풍경이 내 생에서 마지막 보는 시간이 될 것 같다. 가끔 나오는 할머니가 그동안의 나를 동영상으로 찍더니 오늘도 또 찍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