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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둘래산길 트레킹 02월 정기산행
비슬산둘레길 1구간
2022년 02월 12일, 둘째주 일요일.(흐림, 기온 -2˚~ 13˚)
비슬산둘레길 1구간(화원역사탐방로길)
산행출발 :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403-2(남평문씨세거지)
산행도착 : 대구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 969-67(송해공원)
코스 : 남평문씨 본리세거지 -> 인흥서원 -> 까치봉 -> 본리임도(명곡) ->
기내미재 - 함박산 -> 기내미재전망대(점심) -> 함박산전망대 ->
송해선생부부묘소 -> 기세마을 -> 옥연지송해공원.
거리및 시간 : 11km / 6시간 / 난이도(中)
산행안내 팀장 : 젠틀맨
안내지기 : 새바람/바론/자하잘
사진 청마(靑馬)
※ 시산제를 위하여 봉사를 해주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칠곡휴게소에서
연래행사인 달달한 자판기커피로 기분을 업 시키며 반가운 회원님들과 아침 인사를 나눈다
남평문씨 본리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
남평 문씨 본리세거지(南平 文氏 本里世居地)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에 있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일족이 모여 살던 곳이다. 1995년 5월 12일 대구광역시의 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문익점의 18대손 문경호가 터를 닦아 남평 문씨 일족이 모여 살던 곳이다. 원래 절이 있던 명당터를 구획하여 집터와 도로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집을 지었다. 지금은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 9채와 정자 2채가 남아 있으며, 도로에 접한 부분에는 나지막한 담을 쌓았다.
이곳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수봉정사와 광지당·인수문고를 들 수 있다. 수봉정사는 세거지의 입구에 있는 정자로 정원을 매우 아름답게 꾸민 곳이다. 주로 손님을 맞고 일족의 모임을 열 때 사용하던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지당은 문중의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이다. 또 인수문고는 문중의 서고로,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책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으나 후에 크게 늘려지었고, 도서열람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놓았다.
주변경관이 아름답고 도로망도 편리하게 정리되어 있는 옛 마을이다.
오늘
둘레길 시작지인 남평문씨 본리세거지에 도착을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달의여인' 드라마 촬영지 안내판과 '문익점 동상'이 자리한 입구
문익점(文益漸)
본관은 남평(南平). 첫 이름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출생. 문숙선(淑宣)의 아들이다.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啓禀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였고,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해 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다.
『고려사』열전 문익점전에 의하면, 정치적 격동기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원에 체류한 채 덕흥군 편에 붙었으나 덕흥군이 패배하자 고려로 귀국하였다. 문익점이 실제로 덕흥군을 지지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從者)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중국[元] 승려 홍원(弘願)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더불어 목화 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다.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는 시를 지어 찬양한 바 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는 곧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고,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준(李遵)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한 바 있는데, 문익점은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문익점은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사전 혁파를 비롯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했던 것이다. 문익점은 이 사건으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追贈)되었고, 1440년(세종 22)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또한 그의 고향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졌다. 또,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시험 재배했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고, 여기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조식이 쓴 『목면화기(木棉花記)』에 있으며, 이 책은 규장각도서에 있다.
전 대구시장 사죽헌 문희갑씨의 본가, 대문 앞에 걸린 글귀가 명언이다.
'얻었다 한들 본래 있던것, 잃었다 한들 본래 없던 것' ↓
남평문씨본리세거지는 문익점의 18세 손 문경호(1812~1874)가 입향조로 이곳에 정전법에 따라 구획정리를 하고 도로와 집터를 반듯하게 닦은 후 거류하였다고 한다. 현재 아홉 채의 집과 정자 두 채가 있고, 세거지의 돌담은 여느 동네 돌담에 비해서 무척이나 높은게 특징인데 이는 양반가의 사생활을 못보도록 하고 겨울철 낙동강 바람을 막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한다.
문중의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인 광거당(廣居堂)은 1910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냥 밖에서 외경만 보고 지나간다. ↓
녹색길 안내판 오른쪽에는 '본리1리' 마을 표석이 자리하고 있다.
세거지 입구의
본리1리 정류장에서 120미터쯤 화원읍사무소 방향으로 이동하면
진행로 좌측에 '천내천' 간판이 서있고 둘레길은 좌향하여 '인흥교' 건너 '인흥서원'으로 이어진다.
인흥서원연혁 표석
인흥교 앞에는
인흥서원 안내판과 이정목, 인흥서원연혁 표석 등이 서있다.
지금까지 온 방향은 화원휴양림(녹색길 및 비슬산둘레길), 직진은 화원(1km),
둘레길은 좌향하여 다리건너 인흥마을(0.3km) 방향이다.
인흥서원(仁興書院)
1866년(고종 3)에 추황(秋篁, 1198∼1259), 추적(秋適, 1246~1317), 추유(秋濡, 1345∼1404), 추수경(秋水鏡, 1530∼1600) 등 추계추씨 4현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1938년에 복원하여 매년 음력 3월 중정일과 10월 3일에 춘추 향사를 봉행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추황은 호가 회암(悔庵),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1213년(강종 2) 문과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예부상서(禮部尙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조의혼상제례(朝儀喪祭禮)』가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추적은 충렬왕 초 과거에 급제하여 민부상서,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말년 안향(安珦)에게 발탁되어 7품 이하의 관리와 생원들의 유학교육을 담당하고, 『명심보감(明心寶鑑)』을 편찬하였다.
추유는 자가 윤지(潤之), 호는 운심재(雲心齋)로 1362년(공민왕 11) 성균시에 급제하여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추수경은 호가 세심당(洗心堂)으로 중국 오현군(五賢郡) 출신인데, 임진왜란 때 곽산·동래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전주에서 전사하였다.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추봉되어 후손들이 본관을 전주로 삼았다.
서원의 건물은 강당, 동재와 서재, 사당인 문현사(文顯祠), 신도비각, 장판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문현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동서재는 각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장판각에는 『명심보감』, 『조군영적지(竈君靈蹟誌)』, 『추계가승(秋溪家乘)』, 『추계가승속편』, 『추계가승집록』 등의 책판이 소장되어 있다. 그중 『명심보감』은 1869년(고종 6)에 추세문이 편한 것으로, 명심보감판본(明心寶鑑板本) 31매가 1995년 5월 12일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서원 관련 기록으로는 유주목이 지은 「인흥서원기」가 『계당집(溪堂集)』에 수록되어 있다. 또 「인흥서원전국도(仁興書院全局圖)」, 「명당재기(名堂齋記)」, 건립 당시 위패를 봉안할 때 작성한 봉안문과 축문, 「인흥서원창건기(仁興書院剏建記)」‚ 「인흥서원상량문(仁興書院上樑文)」‚ 「입묘개묘시고유문(立廟開墓時告由文)」‚ 「입묘봉안시고묘문(立廟奉安時告墓文)」 등이 1869년(고종 6)에 간행된 『추계가승(秋溪家乘)』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1934년에는 인흥서원에서 18권 17책의 『추계추씨족보(秋溪秋氏族譜)』를 간행하였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인흥서원 입구 우측에는 추적 선생의 '신도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
까치봉에서
대한민국 둘레산길 트레킹 시산재를 지낸다
도로건너 직진은 화원휴양림(비슬산 정상),
둘레길은 오른쪽 반송.명곡임도로, 옥포 용연사 방향이다.
임도를 따라 15분가량 걸으면 널찍한 공터가 있는 '기내미재'에 닿는다. 기내미재 고개는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와 옥포면 반송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이상향인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인 '귀넘이' 또는 '귀네미'에서 유래한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비슬산명품산악자전거길 안내판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와 옥포면 반송리를 연결하는 고개 기내미재에서 바라본 모습
아치조형물과 이정목, 녹색길 안내판과 벤치 등이 있는 '기내미쉼터'를 만난다.
둘레길은 아치문 뒤로 이어진다.
남평문씨 세거지 4.5km, 좌측은 옥연지 5.7km,
비슬산 둘레길은 옥연지 송해공원 3.9km 방향으로 직진하여 올라간다.
이정목 옆에는 비슬산 둘레길 우회노선 안내판이 서있는데 우회로는 이곳에서 좌향하여 반송삼거리로 이어진다.
급경사 오르막길에는 원목데크가 설치되어 있고, 뻑세게 올라야한다.
함박산 정상석에서 인증샷을한다.
기내미재에서
20여분쯤 꾸준히 오르막길을 따르면 함박바위를 만난다.
두개의 큰 바위가 양 옆에 서 있다.
기내미재 전망대에서 점심상을 편다.
송해공원 옥연지가 조망되고..
저 멀리에 합천 가야산이 우뚝솟아있다.
합천 가야산 주봉인 상왕봉(1,430m)과 칠불봉(1,432m)이 나란히 잘 조망된다.
족발이 어찌나 맛나던지..
아직도 안개가 많이 남아있고..
멀리 가야산
합천에 명산 오도산(1.120m) 중계소가 정확하게 보인다.
다시담아본 합천 가야산
점심후에 기념촬영을 한다.
기내미 전망대에서 20분쯤 꾸준히 오르면 함박산 전망대에 닿는다.
함박산 전망대에서는
대구 시가지는 물론 멀리 팔공산까지 조망할 수 있고,
사문진교와 낙동강의 아름다운 풍광 전체를 한 번에 감상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안개로 전망을 전혀 볼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전망대에서 100여미터 지나 함박산 저승봉 정상 삼각점,
표지판과 이정목을 만나고 왼쪽으로 꺾어 내려간다. 지금까지 온 방향은 기내미재 1.9km,
우측은 설화리 2.8km, 비슬산 둘레길은 옥연지 2.2km 방향으로 좌향하여 내려간다.
여기서부터 종점인 옥연지까지는 내리막길이다.
옥연지로 가기전에 잠시 우향하여 50여미터 지나면 송해 선생 부부 묘소가 있다
비슬산둘레길 1구간(화원역사 탐방로길)의 종점인 소계정을 만난다. 소계정은 축대가 쌓인 높은 지대에 '추도문' 뒤로 자리하고 있는데 문이 닫겨서 내부는 볼 수가 없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옥포로 57길 25-14(세리 972)에 자리한 소계정(小溪亭)은 석재준(1866∼1945)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23년 제자들이 건립한 것으로, 그의 호를 따라 ‘소계정’이라 하였다. 석재준은 학당을 열어 문하생들이 오랑캐의 풍속에 물들지 않게 하고 선비정신을 일깨워준 인물이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양옆에 방)·옆면 1칸 반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1995년 5월 12일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기세리마을회관
뽀나스..
보시느라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