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자정이 지나 21일 새벽이 되어도 시민들의 항쟁은 그칠 줄 몰랐다. 새벽 1시에 시민들은 세무서로 몰려가 기물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국민들의 삶과 복지를 위하여 쓰라는 세금이 자신들을 죽이고 두들겨팬 군대와 그들이 갖고 있던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시민들은 경찰서나 기타 공공건물을 오히려 보호하는 분위기였으므로 방송국과 세무서 방화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초기에 파출소를 공격했던 것과는 그 이유가 질적으로 달랐다.
항쟁 나흘째로 접어든 21일 아침 지난 새벽의 광주역에서 사망한 시민의 시체 2구가 시민들의 손에 들어왔다. 시민들은 손수레에 시체를 싣고 대형 태극기로 덮어 천천히 시내로 나아갔다.
시위대의 식사는 각 동네 아주머니들이 준비하였다. 시장 주변에서는 쌀과 반찬을 모아 지나가는 시위대에게 제공하였으며, 그외에도 각종 음료수와 부식 등이 지나가는 시위대에게 전달되었다.
오전 10시경, 금남로를 메운 10만여명의 인파 속에는 쇠파이프나 몽둥이로 원시적인 무장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무렵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정부 당국으로서는 처음으로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의 담화문은 '광주사태'를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방화·선동'에 기인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계엄군의 자위권을 강조함으로써 발포명령이 이미 내렸졌음을 암시한 셈이다. 그날 오전 10시 10분경에는 벌써 도청광장에 있던 공수부대에 실탄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2. 도청앞의 집단발포
21일 오후 1시 정각, 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애국가에 때맞춰 일제히 요란한 총성이 터져나왔다. 공수부대원들이 '엎드려 쏴' 자세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집단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전일빌딩, 상무관, 도청, 수협 전남도지부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들이 시위대열의 선두에 있는 시민들을 겨냥하여 사격을 실시했다. 사격은 메가폰으로 '사격중지 명령'을 내릴때까지 약 10분간 계속되었다. 이로써 광주시민들이 간절하게 품고 있던 소박한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의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금남로는 피바다를 이루었다. 시민들로 가득찼던 거리는 적막에 빠졌고 죽은 이들의 피와 부상자들의 신음만이 금남로를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태앞에 시민들은 넋을 잃고 분노와 공포감으로 치를 떨었다.
이 집단발포로 몇 명의 시민이 살상당했는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군의 발표와 1988년 이후 피해자 신고서 내용을 종합해볼 때 이곳에서 최소한 54명 이상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이날 도청앞 집단발포를 명령한 자는 누구인가? 광주특위 청문회에 불려나온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① 시위대가 먼저 발포했다 ② 실탄은 31사단 병력이 제공한 것이다 ③ 상부로부터 발포명령은 없었으며 대대장급 이상의 현장 지휘관들도 발포명령을 하지 않았다 ④ 정당방위 차원에서 누군가가 먼저 발포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항쟁 1년후 육군본부가 각 부대의 상황일지를 종합·검토하여 정리·편찬한 「소요진압과 그 교훈」에는 총과 실탄이 동시에 피탈당한 최초의 사례를 5월 21일 오후 2시 30분경 나주경찰서 삼포지서, 영광파출소, 금성파출소, 수안파출소의 예비군 무기 피탈과 오후 3시 50분경 화순파출소 무기 피탈로 기록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1988년 12월 21일 광주특위 제21차 청문회에서 80년 당시 광주로 투입된 11공수여단장 최웅은 "예하 대대장들이 그전 -도청앞 발포- 부터 벌써 실탄을 달라고 했지만 절대 발포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21일 아침부터 우리는 윤흥정 사령관에게 강력하게 철수를 요구했다. ………… 상황이 너무 급히 돌아가고 보니까 부하들의 생존을 보장해주어야 하겠고, 불필요한 충돌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병력을 빼야 되겠다, 이런 강한 의지로 한단계 높혀서 결심권자에게 요청을 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윤흥정 사령관은 최웅 11공수여단장의 이런 건의를 받은 사실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21일 서울에 있던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발포여부를 묻는 급전을 받았다. 정호용은 "사태가 악화되자 발포여부를 묻는 급전이 날아와 나는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지만 절대 발포불가 명령을 내렸다"고 1988년 5월의 월간「경향」이태원 기자와의 「정호용, 광주사태 책임자 밝히다」라는 인터뷰에서 그 내용을 말한 바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최정예부대인 공수부대의 지휘관들이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현지사령관에게는 발포건의를 하지 않고 지휘계통에 있지도 않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발포여부를 묻는 급전을 보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도청앞 발포 명령 책임을 부하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명예로 아는 군인들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부하들에게 발포책임을 전가하려는 이들의 행태는 4·19당시 발포명령을 포함한 모든 책임을 지고 사형을 감수한 최인규를 떠올리게 한다. 발포명령 책임자를 밝히는 일은 광주항쟁 진상규명의 핵심적인 사항이지만 진실을 규명하기에는 그간 신군부가 구체적인 핵심증거를 5공화국 7년동안 모두 없애버려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3. 시민군 탄생과 공수부대 철수
시민들은 무장을 서둘렀다. 계엄군의 총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시민들도 총이 필요했다. 총을 확보하기 위하여 시위대중 일부는 광주 근교의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담양 등지로 달려갔다. 화순 탄광에서는 광부들의 도움으로 다량의 다이나마이트와 뇌관이 확보되었고, 그외 각지역의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는 카빈 소총 등이 획득되었다. 획득된 무기들은 즉시 광주시내로 반입되어 청년들에게 분배되었다. 이들 무장시위대는 광주시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렸고, 계엄군에 맞서 싸우는 '아군'으로 간주되었다. 무장한 시민군은 주로 광주공원에 있는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았다.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정식 발포가 시작된지 2시간 20분 정도가 지난 21일 오후 3시 20분경부터 응사를 시작하였다. 시가전은 도청을 중심으로 전남대 의대 근방, 노동청 근방, 공원 근방, 금남로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특수훈련을 받은 정예 공수부대와 비조직적인 시민군이 전투를 벌임에 따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시민군들사이에 자발적으로 전투지도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들 지도부들은 무기를 소지한 사람들을 10여 명씩 조를 나누어 편성하였다. 이들은 각각 조별로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 시내 주요지점으로 배치되었다.
무장한 시민들이 도청으로 끊임없이 압박해 들어가자 계엄군은 오후 5시 30분 총퇴각이결정되었다. 시민군들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계엄군은 길 양옆에다 M60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도청 뒷담을 넘어 철수했으므로 철수한지 한참이 지나도록 시민군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저녁 8시경 시민군 일부가 총을 쏘면서 도청 안으로 뛰어들면서 드디어 시민군은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시의 전지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이날의 총격전으로 광주 시내의 모든 병원들은 총상환자로 만원이었다. 버스나 소형차량들은 주로 부상자나 시체들을 병원으로 실어날랐다. 의약품이나 일손도 태부족이었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려고 글자 그대로 신명을 다했다. 또한 병원 앞에는 시위 대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못한 가정주부, 아주머니, 아가씨들이 헌혈을 하기 위하여 몰려들었고, 어린이까지도 팔을 걷고 달려왔다. 적십자병원 앞에는 인근 술집아가씨들이 '우리도 깨끗한 피를 가졌다'고 절규하며 헌혈을 간청하고 있었다.
이날부터 전개된 새로운 사태의 하나는 항쟁이 더 이상 광주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목포를 비롯한 전남지역 일원으로 광범위하고도 급속하게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이날 광주 시내에 거주하던 미국인 약 200명은 미리 송정리로 빠져나가 군용비행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피신하였으며, 송정리 공군기지에 주둔해 있던 미공군은 그곳의 모든 비행기를 군산과 오산비행장으로 이동하였다.
5월 21일 계엄군 퇴각은 한편으로는 광주시민들의 투쟁의 결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군의 전술적인 작전이기도 했다. 계엄군은 이미 '광주지역의 봉쇄-내부교란-최종진압'이라는 단계적 작전개념을 수립하고 있었다. 한편, 시내의 모든 질서는 '시민군'에 의해 자체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첫댓글 헐..이걸 다쳤어?
ㅋㅋㅋ인터넷에서복사하고붙여넣기했지?ㅋㅋㅋ 말투가니말투가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