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생각하고, 곡성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태안사와 시인 조태일이다.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소년 같은 미소를 보이던 시인 조태일. 그는 1941년 9월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1리 동리산 태안사에서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 세차례 옥고를 치른 고뇌하는 시인
어린 시절 동리산에서 멧돼지를 쫓으며 평화스럽게 자라던 그는 여순사건의 소용돌이와 6 ·25를 겪게 된다. 특히 혈기왕성한 시기에 겪었던 4 ·19는 젊은 그를 사로잡아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의 시인으로 만든다.
경희대 2학년이던 1964년「아침선박」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후, 그는 억압 속에서 고뇌하는 민중의 삶과 민족 문제를 시에 담기 시작한다. 1970년대『식칼론』,『국토』라는 시집 등을 펴내면서 한국 시문학사에서 현실에 정면 대결했던 강렬하고 직선적인 시인으로 상징되며, 조 시인은 80년대와 90년대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지사적인 삶을 보여준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이 된다.
시대를 외면할 수 없었던 시인에게 권력은 그의 몸을 포로로 삼게 되는데, 1977년 시인 양성우의 시집『겨울 공화국』의 제작 편집 반포 죄, 유명한 고성방가죄와 1980년 소위 신군부세력에 의해 자유실천문인협회 사건 등으로 3번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시인은 1989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가 되어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강의 시간에 그는 “시 창작의 비법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문학체험을 많이 하고, 관찰하는 눈을 가지고, 따뜻하고 진실한 가슴으로 사물의 내면을 보고, 사고를 깊고 풍부하게 하며, 서로 관계를 맺어 주고,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치고, 자연에서 배우면 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인지 그는 제자들과 함께 자주 무등산을 오르곤 했다.
■ 예언한 날 이틀 앞두고 세상 떠나
그의 일곱 번째 시집『풀꽃은 꺾이지 않는다』에서는 초기의 ‘저항시인’이라는 강한 이미지와는 달리 작고 여린 것, 소외된 것들에 눈물겨운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이 또한 동리산 전역에 열린 새빨간 접시감, 단풍, 온갖 붉은 산열매들을 보며 키워낸 원초적 서정의 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초기에 발간한 제3시집『국토』는 우리의 삶을 왜곡시키는 온갖 이데올로기와 시로서 투쟁을 벌였지만 ‘중년의 마음으로 국토를 껴안겠다’던 그의 바람대로 중년 후의 시에서 ‘국토’의 의미는 땅에 대한 애정, 즉 고향과 어머니를 향한 서정시의 발현으로 드러나게 되며, 시인의 삶도 고향에 와서 마무리 하게 된다.
그는 제자들에게 문학인의 자존심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고, 그 길을 몸소 실천하며 걸어간 시인이다. 시인은 평소 자신이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 장담하며 앞일을 꿰뚫어보곤 하였는데,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자신이 예언한 날짜를 이틀 앞두고 우리 곁을 떠났다.
마지막 시집『혼자 타오르고 있었네』의 ‘시인의 말’에서 ‘나에게 들킨 이 시집 속의 모든 사물들, 모든 상황들, 모든 사연들에게 감사드린다’는 인사를 끝으로 1999년 9월 7일 시인은 급성 간암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그를 기리기 위해 곡성군과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799번지 태안사 입구에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이 세워졌다.
■ 자신이 삶을 소설로 써내려 간 공선옥
다음으로 시조시인 차경섭을 들 수 있다. 그의 제 22 시조집『시조는 민족문학』에서 연작 형식으로 90여 편의 작품을 담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요의 하나인 ‘아리랑’이라는 제하(題下)로 창작한 연작 시조를 통해 역사의 흐름과 산천의 변화 등을 오롯이 담아놓고 있다. 그의 문학세계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과 저주를 받아 전멸의 길로 자초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어, 진실을 추구하는 그의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창비에 단편소설「씨앗불」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소설가 공선옥을 들 수 있다. 그녀는 1963년 곡성 화전민촌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일손이 부족했던 그 시절 어린 나이부터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하고 가난과 투쟁하며 어렵게 살아왔다. 자라면서 고향의 상실과 5 ·18 민주화운동의 경험은 인생에 치명적 상처가 되었으며 대학을 중퇴하고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우연히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들을 글로 적게 되었는데 소설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공선옥, 그녀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곧 소설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소설 속에서 불우한 환경 속의 인간들 이야기를 즐겨 다룬다.『나는 죽지 않겠다』와『명랑한 밤길』로 제24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한다.
■ 진실을 노래한 곡성문학의 맥을 잇다
그리고 아동문학가 김성법, 박찬섭 등을 들 수 있는데, 김성범은 광주일보신춘문예 출신으로 2001년에 도시생활(세무사)을 접은 채 곡성군 천마산 줄기에 자리를 잡고 도깨비마을을 이루게 된다. 버스를 타고 곡성을 지나다보면 직접 조각한 대장도깨비가 작업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게 보인다. 그는 기타를 치며 동요를 부르고 동시와 동화를 쓰고 조각을 하며『숨 쉬는 책, 무익조』외 9권의 동화집을 발간한다. 또한 도깨비마을 어린이들과 함께 곡성의 이미지를 살려낼 수 있는 ‘뮤지컬 인형극’도 만들고 있다. 도깨비 마을 촌장답게 곡성의 자연 속에서 삶의 진실을 찾아내고 있는 작가다. 아동문학가 박찬섭 역시 광주·전남아동문학인협회 회장직을 맡아 아동문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현재 곡성문화원장이며 곡성의 인간향토자료라고 불리는 수필가 김학근은 곡성문학이 정착되기 전, 1967년부터 <동악 펜클럽> 이라는 문학동인을 결성하며 류재원, 김인환, 서용규, 선병철 씨 등을 중심으로 미개척지였던 곡성문학의 초석이 된다.
그리고 한국문인협회 곡성지부 3대 회장인 우금수 시인은 회장 재직 시 김학근과 함께 전남문협 심포지엄 <남도문학의 뿌리를 찾아서-시인 조태일의 작품세계>와 심청의 효를 문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관계기관의 협조를 얻어 <효녀심청 학생 백일장>을 개최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업적은 곡성문학을 활성화시키는 불꽃이 되었으며, 왜곡된 현실 앞에서 끊임없이 진실을 노래했던 시인 조태일의 고향인 곡성문학을 널리 알리고 탄탄하게 이어가는 또 하나의 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아동문학가 이성자
첫댓글 전남교육신문2013년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