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般若三昧
善知識이여
若欲入-深法界-及般若三昧者하면
須修般若行하며持誦金剛般若經하면
卽得見性이니라
當知
此功德이 無量無邊을 經中에 分明讚嘆했으나
莫能具說이노라
此法門은 是最上乘이니 爲大智人說하며
爲上根人說이니 小根小智人이 聞心生不信이니라
何以故하면
譬如大龍이 下雨於閻淨提하면
城邑聚落이 悉皆漂流하여 如漂棗葉이며
若雨大海하면 不增不減이니라
若大乘人과 若最上乘人이
聞說金剛經하면 心開悟解라
故知하라 本性自有-般若之智하여
自用智慧하여 常觀照故로 不假文字니라
譬如雨水-不從天有라 元是龍能興致하여
令一切衆生과一切草木의 有情無情이
悉皆蒙潤하고 百川衆流가
却入大海에 合爲一體처럼
衆生本性인 般若之智도 亦復如是니라.
선지식이여!
만약 심히 깊은 법계와 반야 삼매에 들고자 하면
모름지기 반야행을 닦으며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을
가져 외우면(持誦: 가르침을 읽어 계합해 가짐)
곧 견성하게 될 것이니라.
마땅히 알라,
이 공덕이 한량없고 갓(끝이 다함)이
없음을 경 가운데 분명히 찬탄했으나
능히 갖춘 것을 말로는 다 할수 없노라.
이 법문은 최상승이니
큰 지혜가 있는 이를 위하여 설하며,
근기가 높은 이
(최상승근기)를 위하여 설하신 것이니,
작은 근기(하근기)와 적은 지혜의 사람이 들으면
불신의 마음이 생기게 될 것이니라,
왜냐하면 비유컨대
마치 큰 용이 염부제에 비를 내리면
도시 마을이 다 떠내려가는 것이
대추잎이 물에 떠내려 가는 것과 같으며,
만약 큰 바다에 비를 내린다면
물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을 것이니라.
만일 대승인과 최상승인이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열리어 깨달아알게 될 것이니
그러므로 알라,
본성에
자기의 반야인 지혜가 있어
스스로 지혜를 써서 항상 관조하므로
문자를 빌리지(글자에 끄달리지 않고
스스로 밝게 앎) 않느니라.
비유컨대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용(본성의 작용)이 능히 일으켜서 하여금
일체 중생과 온갖 초목의 유정 무정이
모두다 윤택함을 입게 되고,
백천의 흐르는 물줄기가 돌아서
큰 바다에 들어가 합하여
한바탕(體)이 되는 것처럼
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라.
강설:
심히 깊은 법계와 반야삼매에 든다는 것은
법계성품인 법성
(즉 자성)은 본래 비어 모습이 없되
묘한 있음이 있어
이 없이 있는 것의 가장 요긴한 것이
곧 반야이며,
이 법성에 합일하게 되려면
삼매에 들어야 하는 것이다.
※
이 삼매에 들려면
일체의 마음길이 끊어져
사량분별이 사라진 경계
(一相삼매)라야만 가능한 것이다.
마음길이 끊어진다고 해서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아무 것도 없는
無記落空에 떨어지거나 昏迷에 빠진 것을
'내라는 것이 없어졌다고'하여
마치 '공한 자성을 보았다'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 반야삼매는
心行處滅의 경계이면서
또렷하고 맑아 밝은 경계인 것이다.
이렇게 되고자 하는 진리(法)의 길(道)로써
"반야행(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을 닦으며
금강경을 가져 외우(持誦:
가르침을 읽어 계합해 가짐)면
견성하게 된다" 하셨으니,
여기서 六바라밀행을 닦고
금강경을 가져 외우라는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것이다.
지송한다는 것은 우선 외적으로 경을 가지고
읽고 외우는 것도 필요한 것이나,
내적으로 지송의 의미를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니
持는
수지로써 가르침(修)을 받아 지니는 것이며,
誦은
외운다고 무턱대고 입으로 문자 만을 암기해서
읊조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가르침을 받아 계합해 깨달아 알아서
그 도리를 다시 (외움: 깨달아 안 것을)
토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수지독송 할 수 있는 법위가 되면
불지견을 이룬 것이 되며,
문자에 즉해도 문자에 집착하지 않으며
문자나 말에 굴림을 받는 교학자가 아니라
문자(經: 法理)를 굴리며 문자를 빌리지 않는
(글자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 밝게 앎)
佛祖인 明眼宗師의 法位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강경 반야행의 수행 공덕은 갓(끝)이 없이
무량무변하여 지금까지 찬탄하여 설한
간략한 것으로는 이 공덕을 갖추어
모두 설명할 수 없는 한없이 넓고
심오한 것임을 밝히셨고,
따라서 이 법문은 최상승 최상근기인
(높은 근기)을 위해 설한 것이며,
이런 이들 이라야만 듣고 곧 계합해서
깨달음을 얻어 성불할 수 있는
심묘한 것임을 비를 예로 들어 설파하신 것이다.
그러하나
본성은 최상승·최상근기 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이 또한 본래 그렇게 모두 구족하고 있어,
필경 빗물이 바다에서 하나가 되듯이
하근기(작은 근기)의 근본성 또한
일체가 一合相으로 둘 아닌 것이 이 또한 법성이요,
둘 없는 일체의 자성(體인 마음이 한바탕)인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善知識이여
小根之人이 聞此頓敎하면
猶如草木-根性小者하여
若被大雨하면 悉皆自倒하여
不能增長이리니 小根之人도
亦復如是이니라
元有般若之智는 與大智人하여
更無差別이나 因何聞法하여도
不自開悟인가 緣邪見障重으로
煩惱根深이니
猶如大雲이 覆蓋於日하여
不得風吹-日光不現이니라
般若之智도 亦無大小이나
爲一切衆生이 自心이 迷悟不同하여
迷心外見하고 修行覓佛하여
未悟自性하나니 卽是小根이며
若開悟頓敎하여 不執外修하고
但於自心에 常起正見하여 煩惱塵勞가
常不能染하면 卽是見性이니라
선지식이여!
낮은근기의 사람이 이 돈교
(평등문으로 直指人心하여
몰록 깨우쳐 들게 가르침)를 들으면
오히려 뿌리 성품이
아직 약한 풀이나 나무와 같아서,
만일 큰 비를 만나면 모두 뽑혀 쓰러져서
능히 더 자랄 수 없는 것이리니
낮은 근기의 사람도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라.
원래 있는 반야지혜는
큰지혜가 있는 사람과 더불어
다시 차별이 없으나
무슨 까닭으로 법문을 들어도
스스로 깨달아들지 못하는가?
삿된소견의 무거운 업장의 연으로
번뇌의 뿌리가 깊어서이기 때문이니,
마치 큰 구름과 같이
해(법성반야)를 두텁게 가리웠음으로
바람이 불어(큰 법문을 들어)도
(구름:번뇌가)벗겨지지 않아
(와닿지 못해서) 햇빛(반야)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니라.
반야의 지혜도 또한
(본래)대소가 없으나
일체중생의 스스로 마음에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같지 않아,
마음이 미혹해서
밖으로 보고(相見) 수행하며
부처를 찾아 자성을 깨닫지 못하나니
곧 이것이 낮은근기며,
만약
돈교로 깨달음이 열려
밖으로 닦는것을 집착하지 않고
다만 자기 마음에 항상 바른 견해를 일으켜
번뇌망상이 항상 물들지 않게되면
곧 이것이 견성이니라.
善知識이여
內外不住하고 去來自由하여 能除執心하여
通達無碍하나 能修此行하면 與般若經으로
本無差別이니라
善知識이여
一切修多羅-及諸文字인 大小二乘의十二部經이
皆因人置이며 因智慧性하여 方能建立이니
若無世人이면 一切萬法이 本自不有니라
故知하라 萬法本自人興하며
一切經書가 因人說有이니 緣其人中-有愚有智하여
愚爲小人이고 智爲大人이라
愚者는 問於智人하고 智者는 與愚人說法하나
愚人도 忽然悟解心開하면 卽與智人으로 無別이니라
선지식이여!
안과 밖에 머물지 않고, 가고 옴이 자유로워서
능히 집착하는 마음을 제거하여
통달해(꽤뚫어 통함) 걸림이 없어야 하나니
능히 이러한 행으로 닦으면 반야경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느니라.
선지식이여!
모든 수다라와 모든 문자인 대소 2승
(소승·대승)의 12부경이
모두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며
지혜의 성품으로 인하여 바야흐로 세워진 것이니,
만일 세상 사람이 없다면 일체 만법이 본래 스스로
있지 않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알라,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며
일체의 경서가 사람이 설하므로 있는 것이니
그 사람 가운데 어리석은 이가 있고
지혜로운 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어리석음으로 소인이 되고
지혜로움으로 대인이 되는지라,
어리석은 자는 지혜로운 이에게 묻고
지혜로운 자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법을 설해 주나,
어리석은 사람도 홀연히 깨달아 알아 마음이 열리면
곧 지혜로운 이와 더불어 다름이 없느니라.
善知識이여
不悟하면 卽佛是衆生이요
一念悟時면 衆生是佛이라
故知하라
萬法盡在自心이니
何不-從自心中頓見-眞如本性인가
菩薩戒經에 云我本元自性이 淸淨이니
若識自心見性하면 皆成佛道라하며
淨名經云하시되
卽時豁然하면 還得本心하니라
선지식이여!
깨닫지 못하면 곧 부처가 중생이요
한 생각에 깨달을 때면 중생이
바로 부처님인 것이니라.
그러므로 알라,
만법이 다 자기 마음에 있으니
자기 마음 가운데를 쫓아
진여인 본성을 몰록 봄을 어찌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이르시기를
'나의 본원인 자성이 원래 맑아 깨끗한 것이니,
만일 자기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見性)
모두 불도를 이룬 것이니라’하셨으며
정명(유마)경에 이르시기를
'즉시에 막힘없이 밝게 깨달아서
돌이켜 본심을 증득한다'고 하셨느니라.
강설:
본성이야
일체가 佛이나 무명으로 인하여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으면 중생이라 하고
그 중생이라 하더라도 還原本際하여 깨달으면
覺인인 부처님이 되는 것이니,
따라서
본성인 자성심(부처)을 깨달으면 부처님인 것이다.
이 진여자성인 마음 가운데 만법이 있건 만
어찌 자기가 자기를 보지(깨닫지) 못하는가?
본심과 보리와 부처가 더불어 하나로되
이름이 다르고 쓰임이 다른 것이니
깨달음(始覺) 즉 견성이요 곧 부처님이요,
이것이 본래부처 (本覺)를 계합함인 것이다.
六祖大師의
법문은 차별문인 교법이 아니라
평등문으로 몰록 깨달아 들게
直指人心하는 가리킴이기 때문에
상근기는 말 아래 開悟하게 되거니와
하근기는 마치 약한 뿌리의 초목이
큰 비(頓法)를 맞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짐과 같이 감당키 어렵다 하신 것이다.
본성이야 상근기니 하근기니 하는 차별이 없으나
삿된 소견으로 상에 집착해서 무거운 업장으로
두터운 구름(번뇌망상)이 태양(반야)이 가려
바람에도 벗어 나지 않음과 같이
이 돈법문을 들어도 그 장애가 두터워서
법문이 와 닿아 계합되지를 못하기 때문이라
하신 것이다.
밖으로 세속 一切相이 항상하고
가짜 나를 참 나로 알아 끄달려 보면서
(집착하면서)
성불을 바라는 수행은 무명만 더할 뿐
깨달음은 멀어질 것이며,
만상에 상즉하되
만상을 여읜 바른 지견으로 닦아
만상(만사)에 물들지 않으면
이것이 청정본성 그것이며
견성인 것이라 하신 것이다.
또 안과 밖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일체의 본성이 원래
眞空圓融하여 안과 밖이 없어
참으로 비어 공한 것을 깨달아
집착할 것이 없음을 요달함인 것이다.
따라서
일체에 원만히 항상 머무는 것이므로
갈 곳도 올 곳도 없이 일체처에 두루한 것이니,
나투고 작용함이 자유로울 수 밖에 없음을
꾀뚫어 통(통달)해 알게 되면
이것이 곧 반야(지혜)인 것이라
곧 금강반야바라밀다심을
일러 주신(經)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모든 부처님의 일대시교
(소승, 대승교, 十二부경)와
수다라(경, 율, 논, 三장 외의 따라
결집한 여러 대승경전)가
사람이 사람을 위해
사람의 말(글)로써 설한 것이며,
이 설함이 반야로써
불지견으로 드러내 보이신 것이며,
사람이 없다면 이러한 것(經)들이
필요치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만법(萬有)이 이 자성(법성)인
마음으로 부터 나툰 것(건립)이니 따라서
일체상은 이 마음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그 가운데
사람들이 지혜로운 이와
어리석은 이로 벌어진 것이니,
어리석은 이는 지혜로운 이(깨달은 覺인
즉 佛祖)에게 배워야 하고
깨달은 이는 迷惑한 중생을 가르치고
제도하게 되는 것이라 하신 것이다.
그러나
迷한 사람도 깨닫게 되면 곧 覺人이라
본래의 淸淨한 心處에 머물게 되니
서로 다름이 없는 것이라 하신 것이다.
善知識이여
我於忍和尙處에서 一聞하고 言下便悟하여
頓見眞如本性이니 是以로 將此敎法流行하여
令學道者를 頓悟菩提하여 各自觀心하여
自見本性하리니 若自不悟하면
須覓大善知識-解最上乘法者하여 直示正路하라
是善知識은 有大因緣하여 所謂化導하여 令得見性이니
一切善法이 因善知識하여 能發起故-三世諸佛의
十二部經이 在人性中하여 本自具有건마는
不能自悟하기에 須求-善知識指示하여서
方見이나 若自悟者는 不假外求니라
若一向執謂로 須要-他善知識하여 望得解脫者는
無有是處이니
何以故하면 自心內에 有知識自悟이니
若起邪迷하여 妄念顚倒하면
外善知識이 雖有敎授나 救不可得이며
若起正眞-般若觀照하면一刹那間에 妄念俱滅이니
若識自性一悟하면 卽至佛地하리라
선지식이여!
내가 五조 홍인화상 처소에서
한번 듣고 말씀 아래 문득 깨달아
몰록 진여인 본성을 보았으니
이로써 장차 이 교법을 각처를 다니며
(유행) 도를 배우는 자로 하여금
몰록 보리를 깨달아 각각 스스로
마음을 관하여 본성을 스스로 보게하는 것이니,
만일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모름지기 최상승법을 아는 큰 선지식을 찾아서
바른 길(실상의 진리)을 바로 봄(直指人心)을 구하라.
이런 선지식은 큰 인연이 있어서
이른바 화도(이끌어 교화)하여 견성하게 하나니
모든 선법(바른 법)이 선지식으로 인하여
능히 일으켜 지므로 三世의 모든 부처님의
十二부경(모든 경)이 사람의 자성 가운데 있어
본래 스스로 구족하여 있건마는
능히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에
모름지기 선지식의 가리켜 보이심을
구하여서 바야흐로 보게 되는 것이나,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은
밖으로 구함을 빌리지 않느니라.
만일 한 쪽(말만)으로 만 치우친
(말 밖의 뜻을 모르는) 까닭으로
모름지기 바깥 선지식을 의지해서
해탈을 얻을 것만을 바라는 것은 옳을 수 없으니,
왜냐하면 자기 마음 안에 아는 식
(반야: 선지식)이 있어서 스스로 깨닫는 것이니
만일 삿된 미혹을 일으켜서
망념된 생각으로 뒤집혀 졌다
(삿된 소견)면 밖의 선지식이
비록 가르쳐 주더라도
구하는 것을 증득하지 못하거니와,
만약 바르고 참다운 반야를 일으켜 비춰 보면
찰라 사이에 망념이 모두 사라질 것이니,
만일 자성을 알아 한번 깨달으면
곧 부처님의 지위에 이르게 되니라.
강설:
五조로 부터 법을 부촉 받으신 六조께서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두루 다니시며
도를 깨닫고자 하는 이들로 하여금
몰록 깨우쳐 들게(頓法)할 것이나
깨우치지 못한 자라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
선지로 直指人心의 가르침을 구하라.
선지식(명안종사)은
바른법을 깨우쳐 아는 분이므로
능히 이끌어 주기 때문이니
일체법과 경의 말씀이
자성 가운데 원만구족하여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므로
선지식의 지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 하시고,
그러나 이 말에만 쫓아 치우친 소견으로
잘못 알까 염려하여 부언하시기를
선지식의 가르침을 구한다하여
밖의 선지식이 깨닫게 해 준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오직 의존하는 것으로
선지식을 찾는다면 옳지 못한 것이니,
깨달음은
스스로 증오하는 것이지
스스로 망념된 자기 소견에
국집한 생각으로 전도되어서는
지도를 받는다고 견성할 수 없는 것이니,
마치 밥은 가져다 줄 지라도 먹는 것은 스스로요,
배불러짐도 먹음(계합)으로써 인한 것임을
알아서 바르고 참된 반야지혜로 관조하면
짧은 한순간(찰라에) 망념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망념이 사라지면 본래 청정한 자성을 깨닫게 되어
곧 부처님(佛地)이 되는 것이다
하신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