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Giorgio Agamben
이탈리아의 철학자. 비평가. 미학자.
아감벤의 문체는 대단히 신학적이고 철학적이면서도, 그가 분석하는 역사 인식이나 세계관이 너무나 참신하기 때문에 지금 세계에서 가장 뜨겁게 논쟁되고 있는 철학자 중의 한 명이다.
2. 생애
아감벤은 1942년 4월 22일에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나, 1965년에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Sapienza – Università di Roma)를 졸업하면서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의 정치사상에 관한 미발표 학위논문을 집필했다. 1966년과 1968년에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헤겔에 관한 하이데거의 르 토르 세미나에 참가한 적이 있고, 1970년대에는 주로 중세 문화에서의 언어학, 언어학, 시학, 주제 등을 연구했다. 이 기간 동안, 아감벤은 비록 그의 정치적 스탠스를 아직 명백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요 개념들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1974~1975년 그는 이탈로 칼비노를 통해 만난 프란체스 예이츠의 호의로 런던대학 워버그 연구소의 회원이 되었다. 이 펠로우십 동안, 아감벤은 그의 두 번째 책인 『방들』(Stanze,1977)을 짓기 시작했다.
그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는 하이데거, 발터 벤야민, 미셸 푸코가 있다. 아감벤은 1996년까지 개인적으로 수집한 벤야민의 작품들을 편집해서 이탈리아어로 번역했으며, 벤야민의 생각을 "하이데거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해독제"라고 불렀다. 90년대에는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과 토론을 하면서 정치적 글을 쓰기도 했으며, 그의 최근 저술에서는 "최근 몇 년간 내가 많이 배운 학자"라고 부르는 미셸 푸코의 개념에 대해서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아감벤의 정치적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나 니코마코스의 윤리학, 그리고 중세 텍스트의 전통적 주석들에 관한 흥미진진한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감벤은 장 뤽 낭시의 에세이 《무위의 공동체》(1983년), 모리스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1983)에 이은 이론 논쟁에 뒤늦게 개입하기도 한다. 이 글들은 유럽연합이 토론되던 시기에 공동체의 개념을 분석한 것인데, 아감벤은 《도래하는 공동체》(1990년)에서 정체성의 범주를 전제하지 않는 자신만의 공동체 모델을 제안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아감벤은 허먼 멜빌의 단편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존재론적 조건과 '정치적' 태도를 분석하였다.
최근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건축대학 디자인예술학과 교수, 미국 버클리대학교 방문교수, 프랑스 파리국제철학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면서 저술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3. 호모 사케르
호모 사케르(Homo Sacer)는 본디 로마법에서 '누구나 죽여도 살해의 책임을 지진 않지만, 희생물로는 바쳐질 수 없는 존재', 요컨데 인간 사회에서도 버림받고 신에게도 버림 받은 상태를 의미한다[1].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그냥 먹고사는 문제(오이코스)만을 해결하면 되는 동물이 아니라, 폴리스(공공)에서의 정치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폴리스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닌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아감벤은 이 개념을 자신의 철학에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둔 것이다. 즉, 추방령을 당한 상태의 사람은 '호모 사케르'가 되며, 추방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자를 두고는 '주권자'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아감벤은 칼 슈미트의 개념을 들고 온다. 칼 슈미트는 주권자란 '예외 상태'에 관해서 결정하는 자라고 말했다. 예외 상태란 법의 바깥 부분을 말하는데, 일종의 무법 지역을 뜻한다. 어떤 사람을 '예외 상태'로 만드는 것이 권력이며, 그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주권자'다. 즉,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주권자'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외 상태'는 '호모 사케르'와 의미가 통한다. 호모 사케르는 법의 영역에서 쫓겨나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에 놓여있는 목숨이라는 점에서 '예외 상태'에 놓인 사람과 동일하다.
아감벤은, 과거에는 독재자가 주권자였지만 지금 시대의 주권자는 '국가'라고 주장한다. 국가는 수용소를 통해 주권자가 되고, 반대로 수용소에 갖힌 사람은 호모 사케르가 되는 것이다. 수용소는 죄를 지은 사람을 형법에 따라 가두는 '감옥'과는 다르다. 수용소는 죄가 있는지 없는지 모호한 상태에서 사람을 구금하는 것이다. 아감밴은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를 예로 든다.[2] 수용소에서는 국가 안보에 위험한 사람이라고 규정되면 어떤 기소나 재판도 없이 일단 가두어 놓는다. 국가 안보라는 명목으로 인신을 구속하는 초법적인 형태의 시설인 것이다. 여기에는 테러리스트도 있겠지만, 억울하게 구금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수용소는 법의 보호를 받게 할 것인지 받지 못하게 할 것인지가 결정되는 곳이며, 이것이 국가가 '생명'을 '관리'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는 핵심이 된다고 아감벤은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현대에도 무법적인 공간(예외 상태)이 존재한다. 수용소는 전시 상태에서나 만들어지지 평화시기에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감벤은, 평화로운 상태로 보이는 복지국가에서도 '체계적으로 생명을 관리한다는 점'에서는, 결코 수용소의 생명관리 시스템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법에도 우선순위가 있으며, 우선적으로 법의 관리를 받는 부분과 나중에서야 법의 관리를 받게되는 '예외 상태'의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는 것이다. 또한 서구 민주주의도 전지구적 시각으로 보면 제3세계에 '경제적 예외 상태'를 둠으로써 자신의 경제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며, 이렇게 제3세계에 '경제적 호모 사케르'를 만들어내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 또한 수용소와 다를 바 없다고 아감벤은 비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