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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아의 중풍병을 고침
사도행전 9:31-35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행 9:31-35 / 그러는 동안 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안정이 되어 튼튼히 자라갔다. 신도들은 진심으로 주님을 경외하였고 성령의 위로를 받으며 살아갔다. 32) [고침받은 애니아] 여러 지방에 있는 신도들을 방문하는 도중에 룻다에 들른 베드로는 33) 거기서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났다. 이 사람은 8년째 중풍으로 누워 있었다. 34) 베드로가 그를 보고 말하였다. `애니아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병을 고쳐 주셨으니 일어나 침구를 정돈하시오.' 그러자 그 순간에 그의 병이 나았다.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주민들은 애니아가 일어나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 주께로 돌아와 신도가 되었다.
본문은 베드로의 전도활동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복음의 지역이 예루살렘과 유다 지역을 뛰어넘어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수가 더 많아지니라(31)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지금까지의 복음화의 과정을 “수가 더 많아지니라”는 한 마디로 요약하였습니다.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주님의 복음이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로 점점 더 확산되어 갔습니다. 이는 복음의 주체가 인간 사역자들이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은혜를 그 어떠한 것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수가 더 많아지니라”는 누가의 요약은 앞으로 사도행전 나머지 부분에서 펼쳐질 복음의 확산을 예고합니다.
베드로의 룻다 사역(32-35) 갑자기 주인공이 사울에서 베드로로 바뀝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베드로라는 인물보다 베드로가 활동한 폭넓은 지역입니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40km 지점입니다. 복음은 이미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으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신자들이 이방의 접경지역까지 더욱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을 훨씬 벗어난 지역까지 사역을 확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일찍이 예언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행 1:8). 베드로는 룻다에서 중풍병자 애니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보여주셨던 치유의 방식을 그대로 재현합니다. “네 자리를 정돈하라”는 말은 주님의 치유의 방식을 그대로 흉내 낸 것으로 보입니다(마 9:6; 막 2:11). 여기서 베드로는 치유를 위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선포한 데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곧 애니아의 회복이 자신의 신비한 능력이나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살아계시는 주님의 역사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치료의 목적을 주님의 살아계심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데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대로 그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애니아의 회복을 보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기적은 기적 자체를 위하지 않고 전도를 위한 것입니다.
적 용 : 베드로는 병자들을 고치신 예수님의 방법을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병든 애니아를 고쳤습니다. 성도들의 진정한 능력은 예수님을 모방하는 데서 나옵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삶을 얼마나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으며 또 본받고 있습니까?
인생을 만남의 사건이라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만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이 되기도 합니다. 부모님과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사회적으로 많은 만남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가 찾아가고 남이 찾아오는 그 많은 만남도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좋은 만남을 주십시오. 내가 좋은 만남의 주인공이 되게 해 주십시오. 베드로가 애니아를 만남 같이...
< 설 교 >
우리가 가야 할 길
■ 잘 하시는 예화입니다. 다시 한 번 마음에 되새겨봅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바닷가를 거니는 장면이었습니다. 하얀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모래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한 짝은 자신의 것이었고, 또 한 짝은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의 발자국이었습니다. 그는 자국을 유심히 돌아보았습니다. 아, 그런데 나란히 찍혀 오던 두 짝의 발자국이 어느 순간에는 한 짝만 찍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랬습니다. 그는 발자국이 한 짝만 찍혀 있는 순간들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그때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슬픈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는 몹시 의아해서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로 했을 때 항상 저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제가 가장 비참했을 때, 제가 가장 슬펐을 때, 제가 가장 주님을 필요로 했을 때, 그 때 그 순간에는 한 짝의 발자국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던 주님은 저를 떠나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귀하고 가장 소중한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를 결코 떠나지 않았단다. 네가 비참하다고 느꼈을 때, 네가 슬퍼할 때, 네가 고통당하고 있을 때, 시련당할 때에도... 네가 본 한 짝의 발자국은 바로 나의 발자국이니라. 그 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이것이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301장의 배경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 가운데 이 찬송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데, 1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지낸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이 가사처럼 교회가 창립된 지 지금까지 이렇게 된 것은 주님의 크신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물론 창립된 이래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픔도 있었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이처럼 좋은 믿음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세워주셨고, 좋은 예배당을 주셔서 지금까지 특별한 불편 없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교회에게 부어주신 주님의 은혜이며, 여러분들께서 헌신한 결과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 교회를 세워주시고 그동안 한결 같은 사랑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그 동안 눈물로 기도해주시고 물질과 시간과 온 정성을 다하여 헌신해주신 여러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 어느 글에서 얼마 전 TV에서 방영한 ‘한국의 고수(高手)’라는 다큐멘터리에 대한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17세 때 우연히 동네 뒷산에서 발견한 산삼 한 뿌리에 인생을 걸고 38년 동안 심마니의 길을 가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산삼을 찾아다니는 심마니의 세계에서도 고수들은 나름대로 그들만의 철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간다. 남들 따라 다니지 않고 외롭고 힘들어도 혼자 가야 한다. 험한 곳에 귀한 물건이 있다. 고수는 전문가이다. 고수에게는 시간과 장소가 따로 없다. 자연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결론을 내린다. 밤에는 냄새를 맡고 낮에는 숲의 색깔을 본다. 짐은 속 옷 한 벌이면 된다. 한 번 가면 끝까지 간다. 가는 곳에도 법도가 있다.”
산삼을 캐러 다니는 심마니의 세계에 길이 있는 것처럼, 영적인 세계에도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 있고, 주님의 몸 된 교회인 우리 교회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우리 교회가 사는 길이요, 더 나아가 이 공동체에 속한 저와 여러분들이 축복된 인생을 사는 길입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세 가지 길, 세 가지 방향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1. 평안한 교회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교회는 평안한 교회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평안입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평안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평안은 인간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냉난방 시설이 완벽하게 되어 있는 궁궐 같은 집에서 인체공학적으로 만든 고가의 침대에 누운 후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뉴질랜드산 양털 이불을 덮고 자면 뭔가 다르기는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 말씀에 의하면 평안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평안을 줄 것 같은데, 사실은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참 평안이 아닙니다. 돈만 많으면 평안할 것 같지요? 그런데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불안합니다.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더 불안하게 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조르고 언제 누가 자기를 헤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기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오히려 더 평안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지금의 인기가 언제 떨어질지 몰라서 불안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예인들이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술을 마시고 대마초나 마약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 되면 나중에는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으면 앉을수록 불안하게 됩니다.
이 평안은 인간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평안할 수 있습니다. 평안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평안케 하시려고 2,000년 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처음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당신을 배신하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제자들을 향해 야단을 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뒤늦게 나타나서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 하겠노라.”고 큰 소리쳤던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안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모든 사람에게 평안을 주기 위함입니다.
■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하려다 워털루 전투에서 패전한 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돼 있을 때의 일입니다. 지난 날 그는 세계를 제패했던 영웅이었지만, 이제는 죄인의 몸이 됐기에 좀처럼 남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기자가 어렵사리 그를 인터뷰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날을 회상할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백발을 날리며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였지. 잠시 전투가 그친 어느 주일 아침이었는데, 산 아래 조그만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왔지. 그 소리에 이끌려 교회로 들어갔다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보았다네.” 천하의 나폴레옹도 주님의 전에서 안식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행복과 평안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불안과 염려와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평안을 맛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초대교회는 평안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는 평안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다같이 오늘 본문 31절을 읽겠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초대교회는 평안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평안’입니다. 극심한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이 주신 참된 평안을 누렸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처럼 평안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 다니는 것이 지긋지긋해요.”라는 말을 듣는 대신에, “교회에 오면 그 동안 눌렸던 마음이 풀리고 마음에 평안이 임하네요.”라는 말을 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벗어놓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안을 맛보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든든히 서 가는 교회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교회는 든든히 서 가는 교회입니다. 다시 한 번 본문 31절을 읽겠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여기 ‘든든히 서 가고’라는 이 말씀은 당시 건축용어로 사용되던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교회의 모습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건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각 성도가 연결되어 지어져 가는 것을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엡 2:20-21) 이 말씀은 성도들이 어떻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❶ ‘모퉁이 돌(Cornerstone)’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 모퉁이 돌이 중요합니다. 모퉁이 돌이 튼튼하게 받치고 있으면 건물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모퉁이 돌이 중요합니다. 무엇이 우리 신앙생활에서 모퉁이 돌이 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모퉁이 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이 모퉁이 돌이 되면,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친한 사람을 모퉁이 돌로 삼는다든지, 목사를 모퉁이 돌로 삼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퉁이 돌로 삼았던 그 사람에 따라 내 신앙이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신앙생활의 모퉁이 돌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신앙생활의 모퉁이 돌로 삼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신앙생활의 모퉁이 돌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❷ ‘서로 연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서로 연결하라’는 말은 원어로 ‘짜 맞추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독립된 건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립된 건물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로 맞추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 안에 보면 다 다릅니다. 출신지역이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성격과 취미와 연령대가 다릅니다. 개성도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믿음의 정도도 다릅니다. 말 전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 소리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그마한 것에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고,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않고 인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똑같은 사람은 단 사람도 없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모이면, 소리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다르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 나와 다른 사람들만 있다고 너무 안타까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 다르게 지어져서 지구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다른 우리가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짜 맞추면 됩니다.
■ 좀 지난 이야기입니다. 역대 혹은 현역으로 뛰었던 미국의 운동선수 중에 미국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은 사람은 마이클 조단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농구 황제’라고 부릅니다. 사실 미국의 프로 농구 역사에 보면 뛰어난 선수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황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마이클 조단이 황제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뛰어난 농구실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를 농구 황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그가 처음 미 프로농구에 입문했을 때 혼자서 30~40점 대의 높은 점수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높은 점수를 올리는 날은 꼭 경기가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점수를 20~30점대로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패스하는 것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팀이 경기에 이기게 되었습니다. 지금 마이클 조던은 친구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그가 현역으로 뛸 때 많은 선수들이 그와 함께 한 팀에서 뛰기 원했습니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 경기를 하면 자신의 플레이가 훨씬 더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멋진 패스를 많이 합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맞출 줄 아는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농구 황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속한 시카고 불스는 승승장구하며 몇 차례나 우승컵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마이클 조단 같은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만을 주장하는 교인보다 내 생각과 내 주장은 죽이고 서로 맞춰주는 ‘마이클 조단’ 같은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것들을 조금씩만 다듬는다면 우리는 서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듬지 않고 상대방만 다듬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연결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힘을 발휘할 수 없고, 절대로 든든히 서가는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교회가 세상의 이론이나 철학이나 경험이나 사람을 모퉁이 돌로 삼지 않고 주님을 모퉁이 돌로 삼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더 나아가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마이클 조단처럼 서로 상합하고 연합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처럼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처럼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3. 성장하는 교회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다시 한 번 본문 31절을 읽겠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여기 ‘수가 더 많아졌다’는 것은 계속해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중단하지 않고 성장한 교회였습니다.
■ 우리가 잘 아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노인과 바다>라는 걸작품을 쓴 사람은 헤밍웨이입니다. 그는 믿음이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미국의 전도자 무디와 가까운 사이였고, 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믿음을 갖게 된 헤밍웨이의 아버지는 의사이면서 선교사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살았던 굉장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밍웨이의 어머니는 오직 예수만 믿고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헤밍웨이는 어릴 적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청년이 되고, 또 결혼을 한 이후에도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문학 활동을 하면서 부터 신앙생활을 소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노벨상까지 받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게 되자, 점점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는 야단을 치며 이렇게까지 경고했습니다. “너 그렇게 하면 망한다. 세상에서는 성공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가면 너는 영원히 망한다.” 그래도 헤밍웨이는 어머니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그의 생일 케익을 만든 다음, 그 케익을 담은 박스 안에 그의 아버지가 쓰던 권총을 넣어 보내며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너,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려면 차라리 이 권총으로 자살하는 게 낮겠다.”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나는 예수님도 믿고, 하나님도 믿어요. 지금은 믿음생활을 잠시 쉬는 것 뿐입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그러나 헤밍웨이는 더 이상 믿음 안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자살로 그의 인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건전지 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연결하려 해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움과 공허함 가운데서 살고 있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믿음 성장의 중단은 잠시 쉬는 것이 아니라 후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생활의 중단은 현상유지가 아니라 파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멈추지 않고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물론 초대교회라고 해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대교회를 완벽한 교회라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중에 완벽한 교회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지상교회는 다 문제가 있습니다. 초대교회라고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초대교회라고 해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초대교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도 많고 갈등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한 마음 한 뜻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만, 아나니와 삽비라와 같은 사람처럼 자기 몫을 챙기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나면서도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수많은 이적과 역사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러한 역사가 나타나면 날수록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핍박이 극심해졌습니다.
초대교회는 과부들과 같이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섰지만, 한쪽에서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바람에 사도들은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일곱 집사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도 문제가 많고 갈등도 많고 다툼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성장하는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장을 멈춰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성장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 어느 날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로 향하는 강의 지류에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떠내려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음덩어리 위에는 얼어 죽은 양 한 마리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때 창공에서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발톱을 양털 깊숙이 박고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습니다. 독수리는 죽은 양고기를 먹느라 점점 폭포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독수리가 폭포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천길 낭떠러지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래도 독수리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날개를 펴 창공에 날아오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수리가 폭포에 이르러 날개를 펴려는 순간,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양털 속에 깊이 박힌 발톱이 얼어서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독수리는 양의 시체와 함께 폭포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새가 날개로 날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땅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땅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해서 날개를 저어야 합니다. 새가 날아가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날개를 펄럭이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생활을 중단하는 것은 현상유지가 아닙니다. 믿음 성장을 중단하는 것은 잠시 쉬는 것이 아니라, 멸망의 시작입니다.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서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쉬지 말고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쾌락의 양고기에 취해 죽는 줄도 모른 채 뜯어 먹던 독수리처럼, 점점 추락해가는 줄도 모르고 믿음의 성장을 멈춘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❶ 진정한 평안을 맛보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❷ 주님을 모퉁이 돌로 삼고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상합하고 연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❸ 디모데전서 4장 15절에서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제 자리에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함으로 위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위에는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는 저와 여러분들과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