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안씨의 시작, 영광, 그리고 쇠락
● 고려시대 - 성씨의 시작
- 고려시대는 지방분권시대이고 행정 기본단위는 군·현이다. 문벌귀족이 다스리는 힘이 센 군현이 있고 지방 향리가 다스리는 힘이 약한 군현이 공존한다. 즉, 군현은 토착호족이 지배하고 있었다.
- 문벌귀족은 왕으로부터 정치적 목적으로 성을 부여받았고 이를 사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문벌귀족들의 자식들은 추천으로 중앙정치에 입문할 수있었다. 이들은 관할지역을 본관으로 갖는다. 반면에 힘이 약한 토착호족들은 지방 향리직을 맡았고 자식들도 중양정치에 뛰어들 수있었는데 이는 주로 과거시험을 통해서이다. 과거를 통해 중앙정치에 입문한 사람들을 신흥사대부라 불리어지며 녹봉을 받아 생활을 유지한다. 신흥사대부들도 출신지역에 따라 본관을 달리 갖는다. 고려시대는 출신지역에 따라 새로운 성도 생기고 새로운 본관이 생기는 시대이었다. 이를 토성이라 부른다
- 토성은 정치적으로 생긴 성도 있고 자연스럽게 지역 지배세력에 의해 생긴 성도 있다. 어쨌거나 본관은 출신지역에서 출발한다.고려시대는 남자들이 장가를 가기 때문에 씨족마을은 없다. 군현을 중심으로 지역이 결정된다.
- 세종대왕은 세종실록지리지(1432년)에 군현에서의 토성을 조사하여 기록하였고 이 때 토성은 고려말 당시의 토성을 대변해 준다. 그 당시 탐진에 토성으로 안씨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탐진안씨의 시작 - 고려말, 조선초
- 탐진안씨는 탐진현의 토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 탐진 안씨는 탐진에 거주했던 안씨들이나 탐진에 연고를 둔 그 후손들이다. 탐진안씨는 고려말 탐진에 거주하던 안씨 성을 가진 원주민(토착호족)이나 그 후손들 중에서 중앙정부관리로 기록을 남으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는 구기족에서 관리가 배출 되는 구조이다. 호족이 아니면 과거를 볼 수가 없는 시대이다.
- 탐진을 본관으로 하시는 분들 중에 고려사, 고려문과방목, 조선왕조실록, 조선문과 방목에 기록은 남기신 분들은 다음과 같다.
1) 안우는 공민왕 집정시 입각하여 홍건적전쟁 시 도원수 대장군으로 고려사에 탐진인으로 기록되어 있고 출생지는 탐진읍성 남쪽이다. 제1차 홍건적 전쟁 후 원나라에 파병될 당시 오성군(탐진의 별칭)으로 봉군 받았다.
2) 아래 급제자 들은 모두 탐진안씨 들이다. 비록 숫자는 매우 작지만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고 조선의 황금기인 조선 초에 이런 기록이 있다는 자체가 중요하다.
● 조중운의 씨족원류-잃어버린 씨족
조중운의 씨족 원류에 보면 고려말로 전공총랑(정4품) 안덕린이 나오고 그 후손이 엄청 많이 기록되어 있다. 안상천님의 <탐진안씨선게변정록>에는 안덕린은 안원린의 잘못된 이름이라고 나오고 자 복은 도의 임시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 후손들의 이름이 다르다.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 오성군파 안기(安起)의 직계 손자 누락
- 윤기-안사종(安士宗) - 안기(安起) - 안맹의(安孟毅) - 안집(安緝) (- 안종손(安終孫)
- 안중의(安仲毅)
- 안기의 손자인 안집(安緝)과 그 아들 안종손(安終孫)은 탐진안씨에서 누락되어 있다.
- 1460년 안집(安緝) 문과방목 : 부친은 안맹의(安孟毅)이나 본관이 공산(公山)으로 잘못되어 있다. 다행히 안집의 묘소는 전라남도 김제군 예촌리 안기, 안지 묘지 이웃에 위치한다.
- 1498년 안종손(安終孫) 문과방목 : 본관이 공산(公山)으로 잘못되어 있으나 부친 안집(安緝), 조부 안맹의(安孟毅)로 보아 탐진안씨이다.
- 참고 : 탐진안씨 안석손(安石孫), 안종손(安從孫)은 누구인가?
- 안집과 안종손은 탐진안씨이나 착오로 공산안씨로 분류되어 있다.
공산안씨(公山安氏) 문과 급제자
● 강진안씨- 조선 후기 1883년 시작
- 탐진안씨는 또는 강진안씨로 불리우기도 하는데 이는 탐진이란 지명이 조선 태종 1414년 도강현과 탐진현이 합쳐지면서 강진현으로 개명되었기 때문이다. 탐진현은 지금의 강진군 중에 강진읍성을 포함한 남쪽 부분이다. 지금도 탐진이라는 흔적은 탐진강이라는 이름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탐진안씨 본관은 고려말에 시작했으므로 정확한 명칭은 탐진이다.
- 강진안씨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간된 족보는 19세기 조선 말기인 1883년이다. 다시 말하면, 강진안씨 사용은 최근의 일이다. 가능하면 탐진안씨로 사용하는게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 탐진군 안원린 출현
- 조선 후기나 말기에는 말기에는 족보발간이 성행하였다.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거치며 나라는 쇄국정치를 하게되고 내부 분열과 족벌 형성에 혈안이 된다.
- 1830년 족보를 만들면서 탐진군으로 봉군을 받았다는 인물이 언급하게 된다. 탐진안씨이니 누군가는 탐진군으로 봉군 받았을거라는 생각은 조선후기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성씨는 반드시 봉군을 받아서 생긴다는 개념은 조선후기 시대의 산물이다.
- 탐진군 안원린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순흥안씨에 원숭 ·원형 · 원린 삼 형제가 있었고 이들은 1341년에 동방급제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탐진군은 원래 본관이 순흥이므로 순흥으로 복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주장은 모두 위작이다.
● 탐진안씨의 쇠락
- 드디어 1990년 초반 순흥안씨와 순흥-죽산-탐진 대동보가 만들어 진다.
- 2000년 대 들어서는 본관이 바뀌고 족보상에 순흥안씨 탐진군파가 등장한다.
- 그래도 많은 많은 종원들은 탐진안씨를 사용하고 있다.
● 탐진안씨의 미래
- 지금시대에 탐진안씨로 본관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순흥안씨로 본관을 가질 것인가는 각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된다. 당분간은 여러 가지 불확실성에 의해 공존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한 두 세대 지나야 정리되겠지만 분열에 의한 쇠락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쇠락이냐? 소멸이냐?
- 탐진안씨들은 우리 조상이 예전 고려 말에 탐진에 자리 잡고 살았었다는 향수를 느끼며 산다. 그 당시에는 집성촌은 형성되기 이전이라 유물도 없고 모두 전국적으로 흥어져 살지만 그래도 탐진이란 이름에서 고려말과 조선초의 아련한 향수를 느낀다.
- 더구나 앞으로는 함께 모여사는 기회는 더더욱 없다. 우리는 조그만 역사 기록의 한 장면에 향수를 먹고 살 것이다.
- 남아있는 텀진안씨들은 다양성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지금의 시대에 발 밎추어 좀 더 진취적으로 조상의 업적을 되살리면서 자랑스럽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