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소설
서슴벌레식 문답
정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정원이 씩 웃으며 해보자는 건가 했고 우리는 해보았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강철은 어떻게든 단련돼.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
정원과 나는 이런 대화법을 의젓한 사슴벌레식 문답이라고 부 르기
로 했다. 뒤집힌 채 버둥거리며 빙빙 도는 구슬픈 사슴벌레의 모습은 살짝 괄호에 넣어두고 저 흐르는 강처럼 의연한 사슴벌레 의 말투만을 물려받기로 말이다.p22
부영이는 왜든 네 전화도 받지 않아. 정원이 답한다.
어떻게 네 추모 모임에도 안 오니?
어떻게든 내 추모 모임에도 안 와. 부영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부영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든.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어. 이유가 뭐든 과정이 어떻든 시기가 언제든 우리는 이렇게 됐어. 삼십 년 동안 갖은 수를 써서 이렇게 되었어. 뭐 어쩔 건데?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p29
예기치 못한 어떠한 일이 발생되면 그냥 받아들여야 마음이 편한것 같다.
실버들 천만사
미워하지는 않고, 관심을 안 가지려고 할 뿐이야. 병석씨도 나 한테 관심이 없었으면 좋겠고. 아니, 병석씨만이 아니라 아무도 나한테 관심이 없었으면 좋겠어. 난 세상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눈에 안 띄고 싶어...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 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p75
하늘 높이 아름답게
베르타는 가을 저녁의 찬 기운에 오싹함을 느꼈다.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었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 베르타는 카디건 앞섶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p114
무구
애초에 그 땅은 무구하지 않았다. 손을 탔고 때를 탔다. 아니, 아니, 소미는 고개를 저었다. 땅은 잘못이 없었다. 소미는 그 땅의 무구함을 믿었다. 소미는 덜 덜 떨리는 목소리로, 땅을 팔지 않겠다고, 거두어들이겠다고 말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그 돈 없어도 안 죽는다고, 죽지는 않 는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두렵고 또 두려웠다.p137
어머니는 잠못 이루고
익아. 너 원채가 뭔지 아니?
어머니가 물었다. 어떤 말은, 특정 음식이 인체에 계속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 정신에 그렇게 반복적인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오익은 생각했다. 말의 독성은 음식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알레 르기 반응을 일으킨 음식은 기피할 의지만 있다면 그럴 수 있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말은 아무리 기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피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더 그 말에 사로잡혀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다. 원채는 다 갚기 전에 는 절대 안 없어진다고,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 야 하는 빚이 원채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익은 그게 바로 사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 그런 원채 같은 무서운 말과 일들이 원채처럼 쌓여가는.
오익은 잠시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지만 또렷한 어떤 소리가 들 려온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했다.p172
기억의 왈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