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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다 이루었다’의 의미_요한복음 강해 46 :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킹제임스흠정역성경, 설교, 강해, (2021.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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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6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다 이루었다’의 의미
요19:17-42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마다 정해진 운명이 있다.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달리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운명으로 이 땅에 오셨다.
요13-17장, 십자가 처형 전날 제자들과의 만남, 13-16장은 제자들을 위로하고 앞날에 있을 일들을
알려주시는 대목, 17장은 예수님의 기도
핵심17:4, 아버지의 영광이 내 목표, 그 일을 끝마쳤다. 그분이 끝마친 것이 무엇인가?
정확하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
이것을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한다. 고전15:1-4. 참으로 아이러니
18장 1-27절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일, 베드로 포함 제자들의 부인, 그러나 여전히 주님께서 제자들에
게 은혜를 베푸시는 일, 18:28-19:1-16에는 빌라도의 심판정에서 고난을 당하시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주제는 다음에 설교하도록 하고 오늘은 요19:17-42, < >, 복음의 핵심 십자가,
죽음, 매장, 다 이루었다는 마지막 말씀의 의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등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십자가 처형(17-27)
유대인 지도자들 주님을 죽이고 싶었지만 사형 선고는 로마가 해야 한다. 빌라도 설득, 위협, 빌라도
어쩔 수 없이 사형 선고, 그러자 수제사장들,로마 군인들 십자가 처형장으로 주님을 끌고 감
로마의 정치인/철학자 키케로: 십자가 처형은 가장 진인하고 치욕스러운 형벌
<십자가를 알아야 구원을 안다> 마르틴 헹엘 | 이영욱 역 | 감은사
2020년 3월 2일 크리스천투데이 책 리뷰 글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로마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고안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처형이었다. 로마는 자신의 체제를 따르지 않고 그들의 법에 불순종하는 국가적 반역자들에게 이
형을 선고한다. 평범한 죄수에게는 선언하지 않고, 국가 반역죄를 지은 흉악한 죄인에게 내리는 벌이
다. 그래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를 처형함으로 로마의 권력을 보여주고, 황제에게는 절대 순종해야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유대교에서도 신명기 말씀에 근거해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법이 있었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그들의 종교를 흔들고 체제를 허무는 자와 외세의 힘을 빌려 민족을 위협하는
자는 나무에 죽인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빌라도와 헤롯이 전에는 원수였으나 예수님의 사형에서는 하나가 되었듯이 유대인 지도자들은
로마의 심판을 지지하며 자신들의 종교와 신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적극 찬성한다.
이렇듯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와 죽음의 상징이다. 십자가 처형에 대한 보고를 읽으면, 그 현장이 정말
처절하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하다. 그 고통은 지옥의 공포를 느낄 정도이고 그 수치는 차라리
죽음이 나을 정도이다.
십자가는 고대 아시리아에서 패잔병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공포의 도구였는데 이것이 로마까지 이어져,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사형 제도가 되었다. 유대교에서도 율법으로 정해진 저주받은 자가 죽어야
하는 형벌이다.
그러나 이런 죽음의 십자가가 오늘날 생명의 상징이 되었다. 고대 십자가의 이미지와 오늘날 십자가의
이미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인데, 이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는 너무
깊고 풍성하다.
주님의 골고다 십자가 길
먼저 십자가를 지고 가기 전에 주님은 살이 뜯기고 뼈가 드러나도록 심한 매질을 당하셨다(19:1).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 처형장까지는 아마도 1킬로미터 정도 길, 처형을 당하는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거기까지 가야 한다. 보통 사람도 감당하기 어렵다. 우리 주님은 너무 지쳐서 지고 가지 못한다.
구레네 사람 시몬의 등장, 유월절을 지키려고 북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올라온 구레네 사람 시몬은
강제로 차출되어 지치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올라간 인물이다. 그의 가족은 주님을 - 140 -
알게 된다(롬16:13).
죄수의 죄목을 적은 명패를 십자가 위에 붙여야 한다(19).
유대인들의 왕 나사렛 예수
많은 사람들이 읽음(20), 수제사장들의 반발, 빌라도의 대답(21-22) 그는 종교인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그분이 십자가에 죽은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마27;18).
위협 때문에 처형을 허용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망신을 주고 싶었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여러 민족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공개 처형되심
히브리어 종교, 그리스어 철학/문화, 라틴어 법
모든 민족들이 모이고 종교/철학/문화/법 등 인간의 모든 영역을 주관하는 가치들이 모여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음
그럼에도 그날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영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심
사실 빌라도는 자기도 모르게 온 세상이 그분의 정체를 알도록 큰일을 수행함
성경은 그의 행위를 통해 예수님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려준다(마2:2; 눅 1:31-33)
십자가 처형 장소: 예루살렘 도시 밖의 어디(히13:11-13), 아무도 모른다.
AD70년경 로마의 타이투스, 로마 병사들 예루살렘 파괴, 너무 파괴가 극심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히브리말 골고다: 해골(19:17)
갈보리(눅23:33)는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유일하게 킹제임스 성경에만 나온다.
예수님은 두 명의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심(19:18), 사53:12
당시 예수님은 유명한 분, 유월절을 지키러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방문
다수의 사람들이 십자가 처형 소식을 듣고 그분의 처형을 보았을 것이다. 조롱하였을 것이다.
또 도시에 처형을 위해 여러 명의 군사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군사들을 다스리는 백부장도 있었다.
예수님은 유명 인사이므로 빌라도는 많은 군사를 배치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습관: 군사들이 죄수들의 물품을 나누는 것
예수님께는 그분이 입으신 옷밖에 없었다.
군사들이 그것을 가지기 위헤 제비를 뽑는다(23-24), 시22;18
1명 배반, 10명 도망함(제자들은 다 도망하고) 요한만 여자들과 함께 남아서 그분의 처형을 보고 있다
(25-27).
그분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잊지 않고 요한에게 위탁하심
마리아는 공생에 시작 가나의 혼인 잔치(2;11), 그리고 공생애 끝 처형 장소(25)
마리아 역시 이런 운명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눅2:34-35)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분의 곁을 지킨다.
마리아는 그 뒤 마가의 오순절 다락방에 제자들과 함께 거한다(행1:14).
막달라 마리아, 마귀들에게 고통을 받다가 주님을 통해 구원받음. 재물로 주님을 섬김
막달라 마리아는 눅7:36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이 아니다.
살로메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막15;40), 치맛바람(마20:20-29)
아마 십자가 처형을 보면서 살로메는 자기의 이기심을 수치스럽게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28-30)
이런 위헌함 순간에, 극도로 아픈 순간에도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행하시면서 모든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28).
성경 말씀 성취를 위해 내가 목마르다(시69:21).
그분은 12시부터 오후3시까지 십자가에 세 시간 달려 있었다(마27:45-49).
어둠이 온 땅을 덮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최종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가 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에게 쏟아부어지고 있다. - 141 -
극도의 갈증, 칠흑 같은 어둠, 아버지에게서 철저히 고립됨, 지옥의 형벌을 당하고 있다.
결국 오후 3시에 다 이루었다(30) 하시고 숨을 거두심
It is finished. 이제부터 영원무궁토록 끝난 상태로 있다.
Finish, 100미터 달리기, 마라톤, finishing line
다시 그리스 사람들이 늘 쓰는 말
종이 주인에게 보고할 때, 제사장이 희생예물 검사를 끝냈을 때, 작가가 책을 끝냈을 때, 예술가가
작품을 끝냈을 때
장사하는 사람들이 쓰는 말, 누구에게 빚을 주었는데 상대방이 돈을 다 갚으면 It is finished.
빚이 전액 지불되었다.
요17: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드디어 끝났다.
고후5:21
히12:2
예수님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한 희생예물로서 우리의 모든 빚을 전액 배상하셨다.
그래서 끝이 났다.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
느니라. 히9:26
더 이상 죄들로 인한 헌물이 필요 없다.
짐승 희생 더 필요 없다.
더 이상 우리가 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일은 그분을 믿는 것이다(요6:29).
그분의 매장(31-42)
돌아가신 주님을 무덤에 안치하는 일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
로마의 군인들(31-37), 유대인 성도들(38-42)
매장 때에도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유대인들의 소원(31)
군인들은 원해 사형수의 뼈를 꺾어야만 한다(32).
그런데 그 일을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한다(33-34). 이로써 성경기록이 성취된다(36; 출
12;46; 민9:12; 시34;20).
그분의 옆구리를 찌른다(슥12:10; 계1:7).
요한은 그분의 몸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을 보았다(34). 기록한 이유: 영지주의,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온 것 부인함, 요한일서 4장 3절(*)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의 등장(38-42), 이들이 아니었으면 그분의 몸은 더러운 데로 갔을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 그는 부자였다. 예수님의 제자
여기에 또 하나의 신비가 있다.
당시 부자들은 무덤을 도시 안에 판다.
마태, 마가, 누가의 증언: 그것은 새 무덤이다. 분명히 요셉이 자기를 위해 판 것이다.
왜 그는 도시 밖에, 그것도 십자가 처형장 옆에 무덤을 만들었을까?
여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다.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잠시 후
니고데모는 3장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치리자, 당시는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왔으나 지금은 공개적으로
나타났다. 확고한 믿음 표시
이 두 사람은 십자가 처형 이전부터 면밀하게 그분의 죽음 대비, 무덤, 많은 양의 향품 준비(몰략, 알로에
39)
이 두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구약 성경을 열심히 살펴보았을 것이다(요5:39).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
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 142 -
성경을 탐구하다가 드디어 이사야서 53장을 찾았을 것이다. 53:9, 또 그는 사악한 자들과 더불어
자기 무덤을 만들었으며 죽어서는 부자와 함께하였으니 이는 그가 폭력을 행사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속임수가 없었기 때문이라. 또 12절도
십자가 처형 예상, 도시 밖에 그 장소 곁에 무덤을 준비하고 향품을 준비함
이러한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도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최선을 다해서 그 뜻을 수행해야 한다.
결론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사역: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피를 흘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시
는 것, 우리 주님은 그것을 다 이루었다. 죄, 지옥 형벌, 완전한 대신 속죄 희생,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주님의 의를 입었는가?
니모데모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사람들의 신실한 믿음의 행위로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이런 일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한다.
https://youtu.be/V5f5xqz0hZU?list=PL4P6SBDceLgEmB9HYmdwkPL5koSLUzw1t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실 때에 그 음성을 알아들으십니까?_요한복음 강해 47 :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킹제임스흠정역성경, 설교, 강해, (2021. 4. 18)
요한복음 47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실 때에 그 음성을
알아들으십니까?
요20:1-18
이제 드디어 요한복음 끝에 왔다.
공생애 사역 마치시고 요17장의 주님의 기도
내가 모든 것을 마쳤습니다(17:4). 이들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 제자들의 도망, 드디어 붙잡혀서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선고 받고 다른 2명의
죄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음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요19:30). 인류의 모든 죄가 그분에게 놓이고 그분이 죄가 되고 하나님이 외면하시
고 지옥 형벌을 받으시고 결국 오후3시경에 돌아가심
아리마대 요셉과 니모데모의 등장, 새 무덤에 예수님의 몸을 둠
그리고는 안식을일 지키러 모두 집으로 돌아감
복음의 핵심: 고전 15:1-6, 죽고 묻히고 부활하심
오늘은 복음의 핵심 중 마지막 1개, 부활하신 것을 살펴보려 한다. < >.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과 정상적인 사람들의 반응
막달라 마리아: 주일 새벽, 돌무덤에 감, 돌이 돌무덤에서 옮겨짐(1)
베드로와 요한에게 사람들이 주님을 돌무덤에서 옮겼다. 장소는 모르겠다(2).
두 사람이 돌무덤으로 감(3)
요한이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함(4)
먼저 몸을 구부려 안을 보니 아마포가 놓여 있음(5)
베드로가 들어가서 아마포를 보고 그분 머리 주위에 있던 수건이 한 곳에 따로 놓인 것을 봄(7)
요한도 그제야 믿음(8)
그 이유(9)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 복음서 기사를 당연히 여기지 말라.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와 요한, 예수님의 부활을 봄, 그러나 믿지 않음
우리의 반응: 아니 이 사람들 이상하네. 예수님이 몇 번이나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셨는데 왜 그분의
부활을 믿지 못하지? 더욱이 베드로와 요한은 3년 반을 같이 다녔는데.
복음서에 기록된 사실을 우리 것으로 만들려면 지금부터 2000년 전 십자가 사건, 부활이 있던 곳으로
우리도 돌아가야 하다.
자 그때로 돌아가면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
사흘 전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숨진 뒤 옆구리에 창이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신 분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믿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이 사실 이상한 사람
예수님 부활에 대해 믿지 못하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정상인, 마리아, 베드로, 요한 다 정상인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
요20:1에는 막달라 마리아, 다른 복음서에는 다른 여자들도(막16:1-8; 눅24:1-8)
사흘 전 십자가 처형 이후 요셉과 니모데모가 급하게 그분의 몸을 무덤에 안치하고 돌아감
이 여인들은 사흘 동안 예수님만 생각함, 그분의 장례를 제대로 완결해야겠다는 생각
이들의 문제: 어떻게 돌무덤에 들어갈까? (*) 여자들 힘으로는 불가능
이들이 알지 못한 것: 지진이 발생하고 천사가 돌을 굴려내었다(마28:2). 거기 앉아 있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여인들보도 먼저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이 무단 침입, 주님의 몸을 가져갔다고 생각함
당시 마리아는 이 결론 외의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없음
날은 아직 어둡고(1) 그녀는 아직 부활을 믿지 않았다)9).- 144 -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는 베드도와 요한에게 보고함(2). 그런데 우리라고 말함(2)
곧바로 다른 여인들도 무덤에 옴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는 소식을 천사에게 들음(막16:1-8).
그래서 무덤을 떠나서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함
정리: 예수님의 부활의 첫 소식은 믿음을 가진 여인들에게서 나왔다.
당시 여인들은 사람 수에도 들지 못하는 존재, 그러나 여인들이 끝까지 십자가 처형, 부활 소식
교회는 여인들의 수고와 사랑이 없이는 세워지지 않는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 감사
막달라 마리아의 믿음, 불신이 아니라 가려져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도. 그리고 잠시 후에 이 셋은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아왔다.
베드로와 요한(3-10)
예수님은 생전에 여러 차례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복음의 초기에 요2:19, 2;22
요나의 비유(마12;40)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마16:21)
십자가 사건 바로 전 날, 주의 만찬, 아버지께로 간다. 너희를 떠난다.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증거에 의거한 믿음. 수의를 보았다. 예수님의 몸이 거기에 없다.
이런 증거들이 사람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삶을 바꾸지 못한다.
지금 우리는 이들이 가졌던 증거가 없다. 수의, 열린 무덤 등
다만 우리에게는 성경말씀이 있을 뿐이다(9). 요19:35; 21:24 등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성경 말씀을 사용하셨다(요2:22; 12;16; 14:26)
성경기록을 믿어라.
그래서 베드로는 인간의 경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의 기반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벧후
1:12-21). 1;19
당시 제자들의 성경기록은 구약이었다. 사도들은 사도행전에서 계속해서 구약 성경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복음을 전함
바울: 부활 행13:33, 시2:7, 베드로 다윗 시16:8-11, 행2:23-36)
예수님, 요나(마12:38-40)
부활 뒤에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보이지 아니하시고 몇몇 사람들에게만 보이심
이들이 부활의 증인이 됨(행10:39-43). 이들의 증언이 신약 성경에 기록됨
그래서 성경전서 안에는 예수님의 북음과 매장과 부활이 모두 기록됨
베드로와 요한도 아직 어둠 속에 있었으나 이날 저녁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어둠에서 빛으로
뛰어나와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성경 말씀이 부활의 증인으로 남아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믿음(11-18)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는 두 제자의 뒤를 따라 갔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미 집으로 돌아감.
그녀는 돌무덤 부근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 막달라는 갈릴 바다 서쪽의 도시
눅8:2에 한 번 나옴, 눅7의 죄인인 어떤 여자와 동일 인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몸에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심
마귀 하나가 있어도 힘든데 일고 마귀가 있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이 일 뒤에 그녀는 예수님께 헌신하고 다른 여인들과 함께 십자가 처형장까지 따라간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가 사랑하나니 일찍 나를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나리라. 지혜 인격화
마리아는 자기의 주님께 아침 일찍 이런 사랑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145 -
마리아는 아직도 주님이 죽어 있다고 생각함(11).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으면 크게 울었다. 우는 여인들을 고용하였다. 아마 마리아도 이렇게 울었을지
모른다. 가슴이 미어지면 울게 되어 있다.
이렇게 울다가 돌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두 천사가 있었다(12). 흰옷 입은 두 청년
마리아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들과 대화하였다(13).
예수님의 몸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함, 이 사람들하고 더 대화해야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뒤로 돌아섬
그런데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함(14).
그렇게 찾고자 하는 분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감추었을 수 있다(눅24의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사람들).
아직 어두운 새벽, 울다가 갑자가 돌아서서 그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신이 없다.
더 확실한 답변: 그분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에 그분이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예수님의 질문: 왜 우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15)
마리아가 그분의 부활을 알았다면 지금은 마리아가 울 때가 아니라 기뻐서 찬양해야 할 때이다.
롬8:1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고 울 때에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신다.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와 주님의 대화(15), 동산지기로 생가감
주님은 그녀가 부활을 믿지 못함을 책망하지 않는다.
마리아의 마음과 생각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신다.
어떻게 드러내시는가? 이름을 부르신다. 마리아야!
그러자 즉각 마리아는 그분을 알아보았다.
복음 성가
주 나의 이름 부를 때 나의 이름이 존귀케 되리
주 내가 어딜 가든지 나와 함께 하시네
날 써 주소서 날 받으소서 내 생명 다해 주만 섬기리
사랑합니다 경배합니다 내 생명 되신 나의 주
그분의 양들은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는다(요10:3).
아마도 예수님과 이야기하다가 다시 무덤 쪽을 향함, 예수님의 음성, 마리아야!
마리아의 말: 곧바로 랍보니여, 선생님이여, 주님이여
너무나 기뻤다. 이 주님이 다시는 자기를 떠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분을 붙잡으려 하였다.
지난 3년 반 동안 동고동락하던 그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같이 계시기를 소망하였다.
주님의 말씀(17),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알리라(19)
내 형제들(히2:11-12; 시22:22), 즉 자신의 부활의 권능과 영광을 공유할 자들
신약 시대 교회의 특징
17절은 난해 구절 중 하나
내게 손을 대지 말라.
다른 곳에서는 손을 대라고 하신다. 도마에게(요20:27), 다른 제자들(마28:9) 그분의 발을 붙잡음
그 이유: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제자들에게 전할 말: 내가 내 아버지께로 올라간다.
대다수의 주석가들: 마리아는 너무 기뻐서 그분을 껴안고 부활의 기쁨을 나누려 하였다. 이러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는 급한 것, 그러니 손을 대지 말고 속히 - 146 -
가서 메시지를 전해라.
그런데 문제는 전하라는 핵심 메시지는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간다. 실제 승천은 40일 뒤에, 물론 부활
소식도 있지만
성경 그대로 믿는 성도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믿는다.
지난주 처형 뒤 사흘 동안 어디에 가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일단 지하세계로 가셨다. 노아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 타르타로스의 영들 승리 선포
아브라함의 품(낙원) 구약 시대 구원받은 성도들
엡4:8-9,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잡힌 자들을
포로로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지하 낙원에 갇혀 있던 성도들을 데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심, 낙원을 하늘로 옮기심(고후12)
이 과정에서 일부 구약 성도들이 부활하여 예루살렘에 나타남
마27:51-53 이에,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들이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성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 그분의 부활 뒤에 무덤 밖으로 나와서 거룩한 도시로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아직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음
또 동시에 대제사장으로 해야 할 일이 있음
(히 9: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완전한 성막을 통해 오셔서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
즉 하나님이 계시는 곳, 거기에는 참 성막이 있다. 땅에 있는 것들은 모형이다(8:5).
예수님은 지상에서 아버지가 하라고 하신 모든 것을 끝마치셨다.
다 이루었다. 우리의 구속을 이루셨다. 더 더할 것이 없다.
그러나 아직 부활하시며 천상에서 하실 일이 있다.
낙원을 옮겨야 한다.
구약 성도들 일부를 부활시켜야 한다. 자신의 부활 증언
자기 피를 힘입어 하늘의 거룩한 곳(지성소 혹은 하늘 그 자체)에 들어가 부활 승리하셨음을 아버지께
보고하는 일
그래서 자기가 아버지께 올라가기 전에는 자기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으로 보임
이것을 잘못 오해하면 이단 소리를 듣게 된다. 즉 자기 피를 가지고 가서 하늘의 지성소에 있는 긍휼의
자리에 뿌림으로써 구속 사역을 완성했다. 십자가 끝이 아니라 부활 뒤 하늘의 성소에 피를 뿌리는
일까지 해야 구원 완성, No!! 성경에는 이런 말 없다.
땅에서 하실 일 모두 완성, 구원에 관한 한 더 더할 일이 없다. 복음의 핵심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낙원을 아버지 계시는 셋째 하늘로 옮기고 부활 승리 보고하는 일을 하셔야
한다.
그 이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자기를 보이시고 몸을 만지게 허락하였다.
이 부분은 매우 묘한 부분이므로 이것에 강조점을 두면 안 된다. 다만 미국의 성경 신자들 중에는 이렇게
믿는 분들이 많고 나도 개인적으로 이렇게 믿는다.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가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전달하고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알린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셨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과 그분이 말씀하신 것들을 그들에게 말하였다(18).
즉 살아계신 주님의 살아계신 말씀들을 전할 때 그들에게 믿음이 생겨났다.- 147 -
결론
부활하신 주님이 내 이름을 부르시는가?
공중 강림하실 때에 출석부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그때에 주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반응해야 한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1912년 마일즈가 요20장을 읽으며 묵상할 때 가사가 떠오름
원래 가사
이슬이 아직 장미꽃 위에 있을 때 홀로 동산에 갔습니다.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후렴, 그분께서 나에게 나는 자신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He walks with and he talks with me and he tells me that I am his own.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우는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1장에 있는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러 오심(14)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심(1;29)
공생애 시작, 다양한 기적, 말씀 선포, 유대인들의 환호, 수많은 군중
종교 지도자들의 방해,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반대 세력(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커진다.
3년쯤 되었을 때에 드디어 가이사랴 빌립보, 내 교회를 세운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할 것 예고(마16:21)
제자들, 무리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드디어 마지막 유월절,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의 근심
내가 아버지 집에 가서 처소를 마련하고 다시 온다(요14:3).
내가 가는 것이 유익하다. 위로자 진리의 성령님께서 오신다(14:16).
교회 시대가 열린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너희를 미워할 것이며 너희가 박해를 받을 것이다(15:19-20).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터이나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
https://youtu.be/Na43taBsK5s?list=PL4P6SBDceLgEmB9HYmdwkPL5koSLUzw1t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당신의 삶이 바뀌고 있습니까?_주일 오전 실시간 예배 :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킹제임스흠정역성경, 설교, 강해, (2021. 5. 2)
요한복음 48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당신의 삶이 바뀌고 있습니까?
요20:19-31
예수님의 복음: 죽음, 매장, 부활, 지난 몇 주 이 세 가지 설명
지난주 요20:1-88,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야,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실 때에 그 음성을 알아들으십니까? 알아들어야 구원받은 사람이다.
< >,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삶이 변하고 있는가?
왜 예수님을 믿는가? 부활하려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히 살려고
그런데 죽기까지 육신을 가진 상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나는 전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전자만 생각하고 후자가 형편없는 사람을 좋은 그리스도인이
라고 말하지 않는다. 즉 부활의 소망 때문에 삶이 변화가 되어야 좋은 그리스도인이다.
사실 목사와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
부활의 소망 때문에 삶이 변화되는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하기 위해
그래야 인간의 본분, 교회의 본분을 다할 수 있다.
부활의 권능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주저함과 함께, 나중에는 열정과 함께
처음에는 제자들도 믿지 않았다. 도마는 증거를 요구하였다.
그런데 부활 이후 중요한 일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삶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오늘 우리는 이런 변화를 맛본 사람들 이야기를 살피려 한다.
오늘 우리는 다시 물어야만 한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는가? 그분 때문에 내 삶이 변했는가?”
두려움에서 벗어나 용기를 가진 사람들로(19-25)
1. 일단 그분은 그들에게 오셨다(19).
그들이 모인 장소는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두려워서 떨고 있던 그들에게 오셔서 확신을 주셨다.
주님의 부활하신 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어가신다.
그분의 몸은 분명히 물리적인 몸이다. 음식을 드시기도 한다(눅24:41-43). 옷, 말씀하신다.
우리도 부활하면 휴거되면 바로 이런 몸을 소유하게 된다. 나는 이것이 가장 좋다.
제자들의 상태: 부활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였다.
부활 소식: 여인들, 엠마오 재자들, 베드로
그런데 기뻐하지 않고 불신 가운데 두려워함
이런 그들이 변화가 되어 온 세상을 뒤집어엎어놓았다.
2. 주님의 인사(10),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히브리말 샬롬, 지금도 사용하는 말
그들을 꾸짖는 대신 화평의 인사를 전한다.
십자가 사역은 화평의 사역이다
그래서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화평의 복음이다(롬10:15).
사람은 하나님과 싸우려하는데 하나님은 호퐐이 지내자고 하신다.
3. 그들에게 상처를 보여 주시면서 확신을 주신다(20). 나는 진짜 메시아다. 유령이 아니다.
주님의 상처는 단지 그분을 확인시켜 주는 표적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값이 전액 지불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샬롬 하신다.
4. 그들이 반가워하는 때에 그들에게 평안의 말씀을 다시 하시고 위임의 말씀을 주신다(21).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우리는 가야하는 사람, 왜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세상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으므로- 150 -
고후518-19
세상 끝까지 복음의 메시지를 들고 가라(마28:18-20). 다만 순서가 있다(행1:8).
5.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신다.
창2:7을 기억하라고, {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숨(영)이 들어가야 흙덩어리가 제 구실을 한다.
처음 숨, 물리적인 생명, 예수님의 숨, 영적인 생명
6. 그들에게 죄들을 용서하는 권능을 주신다(23).
23절은 천주교에서 대단히 크게 오용하는 말씀
그들의 주장: 하나님이 몇몇 사도들에게 실제적으로 죄들을 용서하는 권능을 주셨다.
그들의 대표가 베드로이고 그가 초대 교황이다. 그에게 왕국의 열쇠들을 주셨다(마16:19).
그래서 교황권이 계승되는 천주교회를 통해서 특별히 사제 제도를 통해서 죄들의 용서가 이루어진다.
천주교에는 고백성사 등 다른 데는 없는 것들이 있다.
이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죄를 용서하는 권능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하나님만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용서, 사면, 사한다 다 같은 말, 사람은 그런 권능이 없다.
23절의 의미: 제자들 혹은 성도들이 실제로 용서나 사면을 준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 실제로 그리스도로 인해 죄들의 용서 혹은 사면 메시지를 전한다.
그것 자체가 바로 우리가 죄들을 사면한다는 말이다.
고후2:10, 너희가 누구에게 어떤 일을 용서하면 나도 용서하노라. 만일 내가 누구에게 어떤 일을
용서하였다면 내가 그것을 용서한 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를 위해 한 것이니라.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죄들의 용서 메시지를 전할 뿐이지 실제로 우리가 죄들을 용서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한 두 가지 반응:
1.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고 믿음으로 주님께 나오면 그들의 죄들이 그리스도로 인해 사면됨
2. 거부하면 그들의 죄들이 그대로 남아 있음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이런 직무를 수행할 뿐이다.
7. 드디어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용기를 갖게 되었다. 사명도 받게 되었다. 죄들의 용서를 전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의심하던 사람이 확신의 사람으로(24-28)
무슨 이유인지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음, 불안, 의심, 두려움, 낙심 등 복합 요인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본래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었다(요11:16).
그때에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자기 동료 제자들에게 이르되,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제자들의 말을 들은 뒤 그의 반응(25).
그는 의심의 사람, 불신의 사람은 아니다.
주님의 책망도 의심에 대한 것이지 불신에 대한 것이 아니다(27).
의심: 우리는 믿으려 하는데 이런 문제들이 있습니다.
불신: 이런 증거를 주지 않으면 우리는 믿지 않으려 합니다.
드디어 1주일 뒤 주님이 다시 나타나심(26), 이때에는 도마도 함께함
다시 한 번 평안의 말씀(26)
우리 주님은 이미 도마의 말을 들으시고 그가 원하는 대로 말씀하신다(27).
도마의 마음속에서 진행되는 나쁜 과정, 여기에 쐐기를 박으심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151 -
도마는 요11장에서 나사로의 부활을 직접 보았다. 그리고도 여전히 또 다른 증거를 요구한다.
이것은 불신의 마음이 요구하는 것(히3:12)
이제 도마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도마는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그분을 보고는 엄청난 고백을 한다(28).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그는 예수님에 대해 고백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백을 하였다.
나의 주, 나의 주인,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창조자
우리 주님은 낙담해서 의심하고 두려움에 찬 자들에게 관심을 표명하시며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신다.
병, 직장, 가정 등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
예수님께 아뢰기 바란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후5:7).
믿음의 대상이 누구신가.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신가?
요한복음의 목적(29-30)
많은 사람들의 질문: 그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으니 우리보다 믿기가 쉬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경험을 할 수 없다.
이런 질문을 예방하기 위해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였다.
요점: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반드시 그분을 볼 필요는 없다(29).
초기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부활을 보았다. 축복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본 것으로 인해 구원받지 않았다. 그들은 그분을 믿은 것으로 인해 구원받았다.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것: 믿는 것, believe, 적어도 100번 이상 나온다. 요3:16
우리는 그리스도를 볼 수 없고 요한이 기록한 표적들을 볼 수 없다.
다만 그 기록만 볼 뿐이다. ? 그것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롬10:17,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는다. 예수님을 마주 대한다. 그분이 사신 방법, 하신 말씀, 이루신 기적들
이 모든 것이 보여주는 결론: 그분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세상의 구원자
요한이 기록한 표적들은 그분의 신성을 보여 주는 증거, 이것들 중요하다.
그러나 죄인들은 이런 표적들을 믿어서 구원받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받는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많은 유대인들 그분의 표적들을 믿고 그분을 따랐다.
그런데 나중에는 거의 다가 그분을 버리고 떠났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음
어떤 것이 정상적인 믿음인가?
기적에 대한 믿음이 그분의 말씀에 대한 믿음, 그리고 궁극적으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인 믿음으로 가야 된다.
기적들은 사람이 믿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바르게 되려면 말씀을 믿는 단계로 사람을 인도해야 한다.
계속해서 기적만 따라다니면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모든 기적들을 적을 필요가 없었다. 사실 적을 수도 없다(21:25).
사실 이런 완전한 기록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 도움이 안 된다.
요한복음과 다른 세 복음서 기록만으로도 충분하다.
죄인은 이것들을 통해서 자기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고백
그래서 29절의 말씀이 나온다.
요한은 이 모든 것을 30-31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들도 많이 행하셨으나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 152 -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핵심: 이 모든 표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한다.
그 결과 그것을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어야 한다.
요한복음은 단순히 한 사람의 전기가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보여 주는 기록
이것을 믿을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분의 표적들이 아니다. 그분의 이름(속성, 인격, 권능)
결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100% 모두 변화되었다.
두려움에서 용기
의심에서 확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함, 구원받음
따라서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면 삶에 변화가 생겨야 한다.
생각에 변화가 생겨야 한다.
이전 행실을 버리고 과감하게 성령님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변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구원에 대해 점검해야 한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고백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1. 주일과 안식일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 주의 첫 날(20:1, 19), 일요일 아침
창세기 하나님의 6일 창조, 일곱째 날 안식하심, 안식일, 하나님의 6일 창조의 완성을 기념하며 쉬는
날, 주일, 구속 사역의 완성을 기념하는 말, 새로운 창조물이 될 것을 기념하는 날
하나님은 안식일을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표적으로 주심(출20:8-11; 느9:14).
그들은 육신적으로 안식하였다. 예배나 특별 행사로 모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기과느 바리새인들 안식일 규정을 만들어 백성을 괴롭게 하였다.
예수님이 하신 일: 안식일 준중하되 안식일 규정은 없애심
부활하신 날 예수님은 적어도 5차례 몇 사람에게 나타나셨다.
막달라 마리아(요20:11-18), 다른 여인들(마28:9-10), 베드로(고전15:5, 눅24;34), 엠마오 마을
로 가는 두 사람(눅24:13-32), 도마를 제외한 10명의 제자들(요20:19-25). 한 주 지나서 다시
주일에 모임, 이때에는 도마도 있었다(요20:26-31).
제자들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주의 첫 날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 주의 날 주일(계
1;10).
행20:7, 고전16:1-2 등을 보면 초기 교회들은 주의 철 날 저녁에 모인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안식일 준수는 사라짐
일곱째 날에서 첫째 날로 바뀐 것은 교회나 공회의 결정이 아니다.
부활의 증인들의 증언과 믿음에 의해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하나님은 안식일 강제 규졍을 이스라엘 외의 다른 나라에 부과하신 적이 없다.
교회에서 지키라고 하신 적도 없다. 십계명의 9가지 명령, 서신서에서 그대로 반복됨
그러나 안식을 준수는 예외, 안식일 정신을 지키지만 일곱째 날 준수는 없다.
https://youtu.be/nXCoB_RQLPA?list=PL4P6SBDceLgEmB9HYmdwkPL5koSLUzw1t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먹이라_주일 오전 실시간 예배 :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킹제임스흠정역성경, 설교, 강해 (2021. 5. 16)
요한복음 49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먹이라
요21:1-25
지난 1년 이상 요한복음 강해, 오늘 49회, 마지막 강해
지난 두 주, 예수님의 부활, 마리아, 도마 등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 공통점: 그들의 삶이 변하였다.
오늘은 < >, 예수님을 만난 뒤 삶이 변하여 그분을 섬기는 자들을 살펴보려 한다.
21장의 배경
우리가 글을 쓴다면 아마 20장에서 요한복음을 마쳤을 것이다.
도마의 위대한 고백(20:28), 요한의 기록 목적(31)
그런데 기록자 요한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25절을 더 써서 21장으로 마무리한다.
이유: 자기 친구 베드로에 대한 추가 설명 필요함
사도행전, 베드로와 요한의 엄청난 변화, 파워, 섬김, 특히 베드로, 성도들은 그가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요한은 AD 90년경에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을 묘사해서 그렇게
된 과정을 우리에게 알려줌
그는 또한 자기가 예수님 재림 때까지 살아남을 것이라는 잘못된 소문을 정정하려 하였다.
여기 사건을 통해 우리의 사명을 바로 알자.
성도들은 어부이다(1-8)
십자가 수난 전 주님의 당부, 너희는 갈릴리에서 나를 만날 것이다(마27:7). 디베랴 바다(1)
이들은 다 거기로 갔다(1). 그런데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가기로 결심함(3), 이유는 모름
아마도 성급한 성질, 가만히 있지를 못함
자기만 간 것이 아니라 6명이 함께 갔다(2).
아마도 제자 12명 중 7명이 어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어부들을 많이 부르셨을까?
1. 용감하다. 2. 자기 일에 헌신적이다. 3. 진짜 어부들은 직업을 그만 두지 않는다. 4. 명령대로
한다. 5. 함께 일한다.
여하튼 7명이 고기를 잡으러 갔으나 실패하였다. 밤새도록 노력했지만 물고기를 잡지 못함(3)
아마도 베드로는 3년 전에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를 기억했을 것이다(눅5:1-11).
그때에는 주님이 성공하게 해 주셨다.
이때에 주님께서 바닷가에 나타나셨다(4). “먹을 것을 좀 잡았느냐?”(5), “No”
이제부터 주님이 대화를 이끌어가신다.
그물을 던질 곳을 알려주시니(6) 제자들이 순종하고 153마리의 큰 물고기를 잡았다(11).
153 숫자에 의미 없음
성공과 실패는 예수님의 개입 여부에 달려 있다. 예수님의 뜻 안에 있는가?
교회에서도 목회 사역에서도 종종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열심히 일해도 결과가 없을 때가 있다.
우리가 주님의 뜻 안에 있는지 목사와 성도들이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분이 주님이신 것을 요한이 가장 먼저 알아챈다(7). 주의 만찬 시 그분의 품, 십자가 처형장
그분에 대한 사랑이 컸기에 그는 가장 먼저 주님을 알아본다.
그러자 성급한 베드로가 가장 먼저 주님께로 간다(7).
눅5장에서 그는 주님보고 자기를 떠나달라고 부탁한다.
눅5, 요21장의 물고기 사건, 사람들을 낚는 어부에 대한 이야기(마4:19)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리로 사람들을 낚는다.
만사형통, 만수무강 등의 거짓말이 아니라 진리로...
어부는 산 고기를 잡아 죽게 만든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잡아서 산 사람이 되게 한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을 시켜 사람들을 낚게 하려고 7명이나 되는 어부들을 택하셨다. 우연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사명: 사람들을 낚는 것이다. 죄와 범법들로 죽어 있는 사람들을 살려내야 한다.
이것이 현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 마28:19-20- 154 -
성도들은 목자이다(9-18)
주님은 바닷가에서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하고 그들을 맞이하셨다(9).
예수님을 보는 순간 그에게 여러 일들이 생각났을 것이다.
눅5장의 고기 잡던 일, 벳새다 근방에서 오병 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던 일(요6)
공생애 끝 부분에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주님에 대해 고백하는 일(마16:18).
거기에는 숯불이 있었다(21:9). 베드로에게는 숯불 트라우마가 있었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님이 심문 받을 때 숯불을 쬐면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요18:18)
날이 추우므로 종들과 직무 수행자들이 숯불을 피우고 거기 서서 몸을 녹이니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몸을 녹이더라.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공황장애 혹은 공황발작
과거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어려운 일, 가난했던 일, 죄를 짓던 일, 누구나 다 있다.
그런데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불행한 사람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과거의 트라우마를 이기고 앞을 향해 전진한다는 것(빌3:13-14).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뒤 이미 개인적으로 베드로를 만나셨다(눅24:34; 고전15:5). 죄들의 고백, 용서
등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공적으로 주님을 부인하였기에 공적으로 그를 회복시키는 일이 필요하였다.
성경에서 죄를 다루는 방법
은밀하게 지은 죄, 본인이 은밀하게 고백하면 된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지은 죄는 원칙적으로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다윗의 경우를 보라. 공개적인 죄, 공개적인 수치(압살롬까지)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 권징(마18, 고전5)
베드로의 공개적인 시인과 고백이 필요함
예수님은 그에게 세 번에 걸쳐 개인적인 질문을 한다(21:5. 6, 7)
그리고는 그의 회복을 위해 세 번에 걸쳐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신다.
15, 다른 성경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1. 요한은 오역이다. 마16:17 바요나 시몬아, 바 아들, 요나의 아들 시몬아
2.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these는 이것들, 이 사람들 둘 다 된다.
2가지 의미,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혹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러나 문맥은 이런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1. 그는 항상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서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하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2.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 앞에서 그와 그들을 비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항상 복종하지는
않았지만 다 그분을 사랑하였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것(그가 추구하는, 사랑하는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KJB에는 이것들보다로 되어 있다. 베드로의 대답 역시 이런 번역 지지
목사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베드로
는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고 하며 이 안에 큰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웬만큼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이라면 아마도 학자/목사들이 이 구절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한두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어에서 ‘아가페’(agape)라는 단어가 ‘깊고 은밀하며
자기를 돌보지 않는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필레오’(phileo)라는 단어는
‘일상적인 친구 사이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뒤 우리의 설교자는 영어 단어(혹은 한국어
단어)의 제한된 표현에 대해 거의 눈물을 자아낼 정도로 한탄을 하며 자기의 주장을 폅니다. 다시 - 155 -
말해 영어로는 이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님께서 사실은
이렇게 물어보신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아가페’(agape, 즉 깊고 은밀하며 자기를 돌보지 않는 희생의
사랑)로 사랑하느냐?”
이에 대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phileo, 즉 일상적인 친구 간의 사랑)로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 뒤 원어 성경 추종자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던 대답을 듣지 못하셨기에 베드로에게 다시 물어보셨다고
말합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로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그런 깊은 관계에 자신을 맡기기 꺼렸기 때문에 다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로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이제 이쯤에서 우리의 성경 교정자는 큰 슬픔에 잠기신 주님께서 베드로의 헌신이 부족함을 이해하시고
‘아가페’대신 ‘필레오’라는 그리스어 단어로 질문을 바꾸셨다고 말합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필레오’로 사랑하느냐?”
그러자 이같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베드로는 깜짝 놀라 자신이 주님께 영적으로 성실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설교자는 자신 있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슬픔에 잠긴 베드로가 마침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필레오’로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우리의 거짓 교사는 의미가 빈약한 영어나 한국어를 사용해서는 이 구절의 깊은 뜻을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다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또다시 저 신뢰할 만한 ‘그리스어’는 영어나 한국어가
전달해 줄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준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됩니다!
참으로 위의 예는 ‘원어 찬양’을 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그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하나의
큰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단점이란 다름이 아니라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위의 정의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실상은 이렇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아가페’와 ‘필레오’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성경
기자들은 이 두 단어를 늘 바꾸어가며 사용했습니다. 그리스어 문법책이나 그리스어 교사들 그리고
그리스어 설교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속한 신학 대학의 교수나
혹은 목사가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해 잘못 가르쳐서 이 같은 속임수에 빠지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즉시 여러분의 선입견을 품고 저의 주장을 반박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렇게 경건하고 지식이 많은 교수들이 틀릴 수 있겠는가?”
저는 이 사실을 입증하려고 시도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 바울,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제가 대조를 위해 택할 수 있었던 신약성경의 다른 기자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결코 그들만이 저를 지지하는 최후의 증인들은 아닙니다. 최종적이고도 가장
확실하게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분은 바로 독자 여러분입니다.
결론: 고린도전서 13장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신약성경에서 아가페와 필레오는 큰 구분 없이 사용되었
다.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참조> 질문 47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요3:16 아가페, 16:27 필레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요3:35 아기페, 요5:20 필레오
성도들끼리의 사랑, 13:34 아가페, 요15:19 필레오
이 대화는 주님과 베드도 사이의 대화
그러나 베드로 뒤에서 다른 제자들도 들으면서 동일하게 그 질문에 대답하였을 것이다.
우리 성도들도 오늘 요21장을 읽으며 예수님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해야 한다.
네가 이것들보다(네가 추구하는 모든 것)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156 -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양들을 먹여야 한다.
1. 목사 등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 당연히 주님의 말씀으로 신실하게 양 떼를 먹여야 한다.
베드로의 교훈(벧전5:2)
악한 이리들의 침략을 막아내야 한다(행20:28-35).
내가 목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이유 중 하나: 적들의 공격의 핵심, 성경 공격
요즘 어떤 목사의 황당한 주장: 눅17:36, 행8:37, 행15:34절은 다수 사본, 소수 사본에 모두
없음 구절이라고 한다. 사본에 없는데도 킹제임스 성경에 이런 구절들이 있는 것은 후대에 사람들이
임의로 추가한 것이다. 이것은 신성모독 발언, 이제 성경 교정 작업 끝났으므로 무식한 자들의
공격에 대해 답을 하려고 한다. “사본에 없는 단어는 킹제임스 성경에 한 자도 없다.”
20세기 최고의 사본 학자 장로 교인 에드워드 힐즈, 킹제임스 성경 변호,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2. 목사가 아닌 성도들은 어떻게 먹일 수 있을까? 교회에 온 사람들, 다니는 사람들 넘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특히 새로 온 사람들, 아직 잘 모른다. 좋은 꼴을 먹이지 않고 넘어뜨리는 말을
하면 안 된다. 좋은 언행으로 다른 지체들을 세워야 한다.
3. 즉 그리스도인은 어부의 역할을 하고 동시에 목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베드로의 죽음(19-25)
지금까지는 베드로의 삶과 사역, 이제는 그의 죽음
예수님이 직접 공개적으로 자기의 죽음에 대해 말하니 그는 놀랐을 것이다.
마16:21,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죽음 언급, 베드로는 그분을 책망함
동산에서 그분을 지키려고 칼을 휘두름,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하고는 그분을 부인하고 도망함
우리 주님은 이제 이 문제도 다루어야 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다(18).
그는 십자가의 죽음(19). 주님의 명령: 너는 나를 따르라. 십자가까지
그리고 이것은 주님께 영광을 돌림, 전승: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한다.
베드로의 반응: 뒤에서 요한이 오는 것을 보았다(20).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21)
너는 나를 따르라(22). 믿음 생활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말라.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저
사람은 노나요?” 등, 우리는 우리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계획, 다른 사람에 대한 계획
제자들의 오해(23)
예수님이 올 때까지 요한은 머물렀는가? 그렇다. AD 90년경 그가 밧모 섬에 유배되어 갔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 요한 계시록을 주셨다. 그는 거의 90세를 살며 주님이 오시는 것을 보았다.
요한복음에 대한 확신(24-25)
결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생긴다. 그분은 누구신가, 하나님, 하나니의 아들 그리스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
양들을 먹이는 어부가 된다.
심지어 죽음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요한복음의 목적(20:31), 영존하는 생명을 소유한 성도들이 되기를 원한다.
- 끝 -
정동수 목사님 프로필
- 학 력 -
인하대학교 기계공학 학사(1982)
캐나다 뉴브런스윅 주립대 기계공학 석사(1984)
미국 매리랜드 주립대 기계공학 박사(1988)
미국 펜사콜라 신학대학원 석사(2001)
목사 안수(2001)
- 경 력 -
현, 인하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1992-현재)현, 사랑침례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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