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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크로노그래프 - 시간을 쪼갤 수 있을까
손목 위 시계를 본다. 일반적인 분침과 시침 외에 12시를 가리키며 정지해 있는 가늘고 긴 바늘이 있다. 3시, 6시, 9시 방향에 각각 더 작은 바늘과 더 작은 눈금으로 나뉜 세 개의 작은 시계들(?)이 수상하다. 작은 시계들은 비행기 계기판이나 경주용 자동차 속도미터기 같다.
오른쪽 버튼을 누른다. 정지되었던 12시 방향의 가늘고 긴 바늘이 돌아간다. 바늘의 움직임은 눈금과 눈금 사이의 이동 간격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이제 보니 프레임을 이루는 큰 시계 속 분침과 시침도 100분의 1 단위 미세 눈금 사이로 움직인다. 나머지 작은 시계들의 바늘도 제각각의 리듬과 눈금 단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고급 시계의 일반 모델이 된 크로노그래프 시계다. 이 시계는 시간의 화살을 대개 100분의 1초 단위로 나눈다. 한 시계 명가는 최근에 1000분의 1초, 1만분의 1초 단위로 눈금이 나뉜 시계를 선보였다. 손목시계지만 일상의 약속 시각을 확인하기 위한 물건이라고 할 수 없다. 무한소에 가깝게 쪼개지는 시계 눈금은 인지할 수조차 없는 시간과 시간의 `사이`를 측정함으로써, 시간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크로노그래프는 시간의 화살을 무한히 쪼개려 하지만, 이 무한소가 0 같은 `영원`으로 수렴되지 않고, 날아갈 수 있다는 걸 물리적으로 시현하는 사물이다.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라는 이름은 역설적이다. `크로노스`(그리스어 `시간`이라는 뜻)는 자식을 잡아먹는 신이었지만, 이 시곗바늘은 눈금들의 `사이`에 무한한 시간의 아들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하지만 시간을 쪼갤 수 있을까. 어떤 직관에 따르면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시간관은, 시간을 `공간적으로` 사고하여 `배치`한 인식론적 오류다. 중세의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의식`일 뿐이며, `시간의식`에서는 기억(과거)과 기대(미래)를 종합한 `현재`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과거는 이미 가서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없는 것이다.
이 말이 우리를 실망시킨다면 후설 식의 긍정적 버전으로 바꿀 수도 있다. 현재에는 기억과 기대가 통합되어 있다고. 어떻게 말하든 `현재`만이 있다. 이미 사라진 시간의 볼모가 되어 현재를 포기하지 말 것이며, 아직 오지 않아 없는 시간에 저당 잡혀 현재를 희생하지 말 일이다.
함돈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매일경제, 2013. 8. 16.)
시계. *철학자의 사물들(장석주) 중
시간과 대지는 순환적이며 영속적인 불변의 성질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의 바탕에는 영원한 동일성에 대한 갈망이 깔려 있다.
- 리아코헨, 《탁자 위의 세계>
시계를 갖는 것은 오랫동안 성공의 확실한 상징이었다. 이제 서양인들은 너무도 철저하게 시계
의 통제를 받고 있어서 시계는 제2의 천성이나 다름없고 그들은 시간을 지키는 일을 당연한 사실이라고 여긴다.
- 루이스 멈퍼드, 기술과 문명><셰리 터를 엮음, <내 인생의 의미 있는사물들>에서 재인용)
사람은 시계와 더불어 일상과 미래의 기획들을 기계적으로 분절하고 배분하면서 살아낼 수 있게 되었다.
첫 월급을 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손목시계를 산 것이다.손목에 시계를 차자 시간의 구획들이 의식과 생활을 분절했다.초, 분, 시, 일, 주, 월, 년, 세기는 시간을 분절한 표지表識들이다.
나는 자진하여 시간의 포획, 즉 “시간이라는 촘촘한 그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계의 통제를 받는 문명세계에서 시간은 우리의 삶을 그것 안에 묶고 가두며 지배한다.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시간의 경계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바깥에 자리 잡고서 우리의 일생을 터널과 같이 좁고 긴 영역으로 제한할뿐더러, 안에서 우리의 몸 자체를 지배하기도 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 하는
시간이라는 조건은 우리를 혈류의 박동과 세포의 끊임없는 재생 속에 옴짝달싹 못하게 가두어 놓는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주로 태양의 모습을 통해 형성된다. 태양은 보이지 않는 시간이 우리 눈앞에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이다. 우리는 하늘에 박혀 있는 태양의 고정성과 땅위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유동성의 관계로부터 시간이라는 실을 자아내고 초, 분, 시, 일, 주, 월, 년, 세기라는 단위를 써줄과 날줄로 삼아 광막한 우주의 흐름을 시간이라는 촘촘한
그물 속에 담아내고자 한다.
- 리아 코헨 , 《탁자 위의 세계>
손목시계를 찬 사람은 초, 분, 시, 일, 주, 월, 년, 세기라는 단위로 시간을 구획하는 이 현실세계의 일원으로 녹아들어간다. 시계를 통해 나온 시간은 순간순간 우리 몸을 가로지른다
우리는 시간이 규정하는 삶의 의미 안에서 의미를 구하고, 그 의미의 장 안에서 숨 쉬고 살아간다.
시간이란 반복 가능한 분절들이고, 따라서 몸도 반복 가능한 분절들로 변한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인간관계들이 얽힐수록 이 분절은 더욱 촘촘해진다. 해마다 늘어나는 나이는 시간의 분절을 대표하는 셈법의 한가지다. 그 많은 분절들 속으로 사건과 사람들이 부침하며 흘러간다. 누구도 이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