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 곁채에 아들만 다섯 둔 아주머니가 사셨다 우리 집이 농사하는 집이 아니었으니 아저씨는 헛간의 쌓인 재나 화장실 퍼내던지 연료로 쓰이는 쌀겨나 다른 땔감을 사올 때 말고는 거의가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으셨고 방달엄니도 부지런히 남의 집일 도우며 집안살림까지 도맡아했다 아들만 있으니 누가 부엌살림 거들어 줄 리도 없거니와 자식들을 여자스러운 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집안도 빈궁하고 끼닛거리 걱정하는 방달네 형제들은 하나같이 밖으로만 나돌았지 엄마 도울 생각은 하는 둥 마는 둥 그렇지만 방달엄니는 항상 선한 미소를 지녔다
그 시절 사내가 집안살림 하면 흉볼꺼리가 되었지만 이웃 이발소집도 아들이 다섯인데 그들은 방달네와는 전혀 달랐다 그네들은 우리 집 우물로 쌀도 씻으러 오고 걸레도 빨아가고 장남은 아에 부엌살림꾼이었다 이발소 형님은 집안도 부유했고 딸이 없어도 집안일 도와줄 아들이 다섯이니 고운 한복 차려입고 나들이도 잘 하였다 것두 부족하야 이발소 형님은 착한 아들들 달달 볶느라 집안에서의 큰소리가 담장밖으로 날마다 들릴 정도였다 그러하니 형님은 얼굴 생김이 우거지상이었다.
철따라 방달엄니는 감자나 고구마를 삶아 파셨다 까만 색 헐렁한 몸빼바지 런닝셔츠위에 무명저고리 입으시고 (이 차림은 그 당시의 간편복의 패션이다 치마는 활동하는데 치렁거리니 몸빼가 제격이지만 젖가슴까지 가려주는 치마말이 고무줄 허리바지로 내려간 때문에 맨살 보이지않기위해 짧은저고리 속엔 흰런닝셔츠를 입었는데 일할 나이의 여성들은 거의가 출산기의 아낙들이므로 너나 할것없이 터질 듯한 젖가슴을 철렁이고 다녔었다) 젖먹이아이를 업고 새벽길을 떠나시는데 20여리 넘게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시어(왕복 거의 50리!!) 유명한 망운 밤고구마를 한 광주리 머리에 이고 고개 빠져라 허리 끊어져라 다니셨다 교통수단도 얼마든지 있고 또 장이 서면 망운 밤고구마가 들어오련만 한사코 새벽길 나서서 직접 고구마 밭에 가시는 까닭은 밑천도 짧거니와 조금이라도 원가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무거운 고구마 이고 아기를 업고 먼길 다녀오셨건만 곤한 몸 잠시 쉴 틈도 없이 지푸라기 수세미로 고구마를 팍팍 문질러 황토색 물이 맑은 물 되도록 헹구고 또 헹궈내어 양쪽 꼬다리를 보기 좋게 잘라 큰 가마솥에 찌는 것이다 고구마가 다 삶아지면 대나무 꼬챙이에 가운데에 젤 큰거 양옆으로 차차 작은것 순서로 가지런히 끼워 사과궤짝위에 탑모양 쌓아서 극장 앞이든 병원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파셨다 고구마 감자 삶는 솜씨가 어찌나 좋으신지 껍질이 터질 듯 살짝 벌어져서 하얀 속살이 들여다 보이고... 생각만 해도 침이 넘어간다. 아주머니는 고구마 양쪽에서 잘라낸 꼬다리를 우리 집에 거의 날마다 주셨는데 가마솥이 자기네 것보다 큰 우리 부엌에서 삶으신 때문인지 아님 자기 아이들과 사이좋게 놀라고 주신 건지 어린 마음에도 얻어먹는 게 미안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서울서 삶은 고구마 파는 모습에 코웃음이 나왔다 꼭지도 떼지 않고 다듬지도 않은 채 삶아서 두서너개 옹기종기 모아놓고 한 무더기에 얼마라니... 우리 고향 쪽의 좌판장사 하시는 분들의 얌전한 솜씨를 인정했다 그 아주머니의 솜씨를 본 받아 우리들은 소꼽놀이 할 때면 비듬풀(내 고향선 나물이 아님) 줄기를 감자로 치고 고구마줄기처럼 생긴 풀을 따다가 고구마라 하여 탱자가시에 얌전하게 꼽아서 고구마장사를 하며 놀았었다.
갑자기 방달엄니가 생각난 것은 아침마다 다니는 산책길에 통통하게 살오른 비듬풀이 수없이 깔려있기에 소꿉놀이하던 때를 떠올리며 60년대 가난했던 시절에 허리 휘어지는 고생을 하신 한 아주머니의 生을 생각해 보았다 그분이 살만해졌단 말은 들어보질 못했고 아들들이 소년원으로 시작해서 어디로... 무수한 소문만 들었을 뿐.
이발소형님의 비명에 가까운 괴성과 자식 패대는 교육은 그 아들들 모두가 반듯하게 자라주었는데 방달엄니는 큰소리 한번 지르지 못할 정도로 주눅들어 사신 분이었길래 자식들에게 매를 들지 않은 때문인지 생활고가 아이들을 비뚤어지게 만들었는지 암튼 자식농사가 엉망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60년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시고 팍팍하고 어렵게 사시던 분이었지만 얼굴엔 늘 잔잔한 미소를 지니셨다 오늘따라 그 미소가 내 마음을 짠하게 한다
드라마틱한 얘기론 그 중 한 아들이 대성하여 엄마를 무시하던 어쩌든 집안의 기둥이 되어줄만한 넘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흔하게 나오는 연극처럼 그렇게 드라마틱하게만 흐르지는 않더라 초등학교 졸업 후 교복 입은 그 집 아들을 본 기억이 없고 좀도둑 아니면 껄렁한 깡패 족들에 끼어있는 걸 보았었다. 하긴 내가 그분집안의 어수선한 얘기를 들은 것은 20代였으니까 갑절의 세월을 뛰어넘은 지금은 행복하시리라 믿는다 그런 분들의 生은 당연히 해피앤딩 이어야 할 것이다.
감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