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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후 인간의 처지를 결정하는 것 /
지옥의 결박을 끊어내는 진리의 검과 자발적 투쟁
- 최종적 영적 상태는 내면의 지배적 사랑,
즉 의지의 지향성이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내면에서
선과 악 중 어느 것이 지배하고 있는가를
영원한 운명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다.
세상에서 법적 구속력과 사회적 평판 때문에
겉으로 선을 행했더라도
속사람의 중심(지배적 사랑)이 악을 향해 있다면
사후 두 번째 상태(내면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상태)에 진입할 때
겉모양의 선은 모두 벗겨지고 결국 자신의 본성인 악과 거짓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HH 509, 511
반대로 자신의 약함으로 인해 죄를 지었을지라도
중심이 선을 지향했다면 중간 상태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정화 과정을 거쳐 천국으로 진입하게 된다. HH 491-511, AC 1102
인간의 영적 처지는 그의 의지의 '중심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스베덴보리의 원리를
논리적으로 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최종적 영적 상태는 내면의 지배적 사랑,
즉 의지의 지향성이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되며
여기에 그 사랑이 진리에 기초하여
실제로 얼마나 실행되었는가가 결합하여 완성된다.
이는 단순히 선행의 양을 더하는 과정이 아니라
근본적인 동기가 행위의 성질을 규정하고 강화하는
유기적인 결합의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의지의 지향성’이다.
만약 중심 사랑이 자기중심적(Negative)이라면
겉으로 아무리 많은 선행(Positive)을 쌓았더라도
그 동기가 내면의 악과 결합해 있으므로
영적인 결과값은 음수(-)가 된다.
반대로 중심 사랑이 주님과 이웃을 향하고 있다면
비록 삶의 파편들이 불완전하더라도
그 영혼의 지향성은 양수(+)로 확립된다.
영계의 법칙은 이러한 영적 질서에 따라 영혼의 내면을 배치한다.
이는 외부의 강요에 의한 심판이 아니라
영혼 스스로가 자신의 본질과 일치하는 영적 기류를 찾아가는
자발적 선택의 결과다. DL 42-52; DLW 410
인간의 처지가 ‘지배적 사랑의 방향’이라는
단 하나의 본질적 기준에 의해 갈린다는 사실은
주님의 공의가 얼마나 정밀하고 엄중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엄격함 이면에는
각 영혼을 그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처소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무한한 자비가 숨어 있다.
본성이 악한 자에게 천국의 빛과 열은 오히려
고문과 같은 고통이 되기에 주님은 각자의 본성에 상응하는
자리를 허락하심으로써 모든 존재가 자신의 상태에서 누릴 수 있는
최선의 평안을 유지하게 하신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저울을 매 순간 달아보시는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오늘 행하는 ‘작은 선택 하나’가
영원의 방향을 결정짓는 이정표임을 일깨워 준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사랑의 뿌리를 보고 배열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경이롭다.
주님은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아주 작은 선이라도 보존하여
구원의 끈을 놓지 않으시지만,
인간이 스스로 빛을 거부하지 않고 자유의지로 마음을 열 때에만
그 선이 존재의 주인이 되도록 이끄신다.
이러한 배치는 억압적인 심판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자신의 본성에 따라 가장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처소를 찾아주시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이자 배려임을 깨닫는다.
- 지배적 사랑과 남은 것(Remnants)의 영적 평형 /
이기심의 중력을 이기는 스스로 하듯 행하는 실천적 투쟁
인간의 삶은 수많은 행위의 집합체이나
영계에서 그 사람을 정의하는 것은 행위의 총량이 아니라
그 모든 행위를 관통하는 '중심적인 동기'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지배적 사랑'이라 정의한다.
인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의 생계와 안락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지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자연적인 필요이며
그 자체로 반드시 악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상의 활동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느냐는 점이다.
만약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생활 속에서도
진리와 정의를 존중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양심'을 중심에 두고 있다면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은
이미 선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사람의 지배적 사랑은
그가 생각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목적이며
사후에 그가 가져가는 유일한 생명이다.’ HH 477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유전적 악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근거를
'남은 것(Remnants Reliquia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인간이 유아기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주님으로부터
무의식중에 받아 저장한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의미한다.
‘주님은 인간이 모르는 사이에 그 내면의 깊은 곳에
'남은 것'들을 갈무리해 두신다.
만약 인간에게 이 '남은 것'이 없다면
그는 결코 인간일 수 없으며 사후에 천국과 상응할
어떤 매개체도 갖지 못하게 된다.’ AC468, 1906 요지
인간이 삶의 대부분을 자기 이익을 위해 살지라도
주님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남은 것(Remnants)'이라 불리는
순수한 선과 진리의 기억들을 소중히 저장하신다.
이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느꼈던 순수한 사랑,
진실한 이야기에 감동했던 순간,
타인의 아픔을 보고 찰나적으로 느꼈던 측은지심 등이다.
이러한 '남은 것'들은 평소에는
자아의 거대한 욕망 아래 숨겨져 보이지 않으나
영계에 들어갔을 때 자아의 독소를 중화시키고
영혼이 천국을 향해 눈을 뜨게 만드는 결정적인 도구가 된다.
삶의 99%가 자기중심적이었을지라도
진심으로 행한 1%의 선이
그 사람의 본질적인 지향성을 결정짓는 '영적 유전자'가 될 수 있다.
다만, 이 '영적 유전자'가 끝내 발현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스스로 악을 정당화하여 영혼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치열한 자유의지의 협력이 반드시 요구된다.
인간이 자신의 이기심을 인지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단순히 정서적인 후회가 아니라 영적으로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양심의 형성이라고 본다.
자기중심적인 생활이 지배적인 상황에서도
말씀의 진리를 기준으로 ‘이것은 죄다’라고 명확히 자각하고,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싸우는 것처럼
그 악한 충동을 억제하며 멀리하려는 자발적인 투쟁은
지옥에서 올라오는 악의 흐름을 차단하고
주님의 전능한 유입을 받아들이는 수용체가 된다.
이러한 능동적인 투쟁의 지향성은
영적 가치 면에서 일상의 무수한 관습적 행위들을 상쇄한다.
‘악 속에 있는 자라도 진리에 의해 가책을 느낀다면
그 가책은 그가 여전히 주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진정한 회개는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자신의 악을 보고 그것을 혐오하며 멀리하려는
내면의 의지에서 시작된다.’ TCR 510 연산
인간의 영적 상태는 단순히 '시간 점유율'로 계산되지 않는다.
영계의 법칙에서는 행위의 양보다
그 행위가 향하는 '방향성'이 중요하다.
일상의 자기중심적 행위들이 수치상 압도적으로 많더라도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순수한 선의 지향성은
질적으로 무한한 무게를 지닌다.
인간이 자신의 이기심을 인정하고
그것이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죄임을 깨달아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하듯 그 악한 성향과 치열하게 맞서 싸우기로 결단한다면
그 결연한 투쟁의 지향성이
수만 시간의 이기적인 관성보다 더 강력한 영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악을 단지 아는 것을 넘어,
그것을 죄로 여겨 미워하고 마치 자기 힘으로 하듯
적극적으로 멀리하는 실천적 유혹의 과정이
영원한 생명을 결정짓는 결정적 분기점이 된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자신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미워하며,
손을 묶어두지 않고 스스로 싸우듯 행동을 제어하고 대적하는 영적 전투는,
그 악이 더 이상 영혼의 속사람과 결합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결정적 사건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투쟁의 결단이
수십 년간 지속된 외적 습관의 완고한 관성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질적 가치를 지닌다고 역설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 혹은 그보다 드물게라도 자기 마음을 살피고
자신이 지은 죄를 인식하며 주님 앞에서 그것을 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사람은 참된 회개의 길에 있는 것이다.
비록 그가 그 외의 시간에는 세상의 일에 몰두하며
악한 성향에 노출되어 있을지라도, 그 짧은 성찰의 순간에 내린 결단은
그가 이전에 품었던 수많은 악한 의도들을 영적으로 무력화한다.
왜냐하면 그 성찰을 통해 그는 자신의 의지 중심에
주님께서 머무실 수 있는 작은 처소를 마련했기 때문이며
일단 그 처소가 마련되면 주님께서는 그곳을 기점으로
인간의 내면 전체를 서서히 정화하기 시작하신다.’ TCR 529 연산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악을 보고
그것이 주님께 반하는 것임을 인지하며
그 악을 미워하고 그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사람이 비록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있을지라도,
만약 그가 내면에서 그 악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슬퍼하며 거부하고 있다면
그 악은 더 이상 그의 의지(Will) 안에 뿌리박힌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흔적일 뿐이며
주님께서는 그의 내면의 거부를 보시고
그 악이 그의 영혼과 결합하지 못하도록 분리하신다.
이런 사람에게 악은 더 이상 그의 생명이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이물질과 같은 것이 된다.’ AC 8391 연산
인간이 비록 외적 관성 때문에 넘어졌을지라도,
내면에서 그 악을 죄로 여겨 미워하고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싸우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돌아서려 투쟁한다면,
그 악은 더 이상 속사람의 의지에 귀속되지 않고
외적인 영역에 머무는 이물질이 된다.
주님은 인간이 스스로 하듯 악을 멀리하려는
그 능동적인 거부와 투쟁을 통로 삼아
그를 악의 결박으로부터 온전히 분리하신다.
영적 시간의 개념은 물리적 시간의 양이 아니라
상태의 질과 변화의 깊이에 의해 결정된다.
수만 시간의 이기적인 생활은 외적인 관성의 흐름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악을 시인하고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스스로 하듯 대적하기로 결단하는 투쟁의 순간은
영혼의 차원을 수직으로 이동시키는 강력한 영적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이를 영적 역학의 관점에서 설명하면,
악을 고집하여 정당화하지 않고 진리의 무기로 적극 대적하는 결단은
악이 영혼의 중심과 결합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며
짧은 지향성일지라도 그 영적 영향력은 이전에 쌓인
모든 자기중심적 관성을 상쇄하고 남을 만큼 압도적이다.
주님은 시간의 길이를 계산하시는 것이 아니라,
유혹이 올 때 진리를 붙들고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싸우는 것처럼
결연히 악을 멀리했던 그 실천적 투쟁의 각도를 측정하여
영원의 좌표를 확정하신다.
따라서 사후의 처지는 일상의 평범한 시간들이 아니라
그 영혼이 말씀의 질서에 순종하여
스스로 하듯 어느 방향으로 행동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평생을 이기심의 무게에 눌려 살아온 인간일지라도,
자아의 악을 시인하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돌아서려 했던
그 실천적 투쟁의 결단이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사실은
주님의 가장 경이로운 자비이다.
AC 4956
‘본질적으로 이웃에 대한 인애(charity)는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이며, 자기 자신을 오직 악과 거짓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참으로 이웃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며,
이것들에 대해 애착을 갖는 것이 곧 인애를 갖는 것이다.
반면에 이웃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악과 거짓이며
인애를 가진 사람은 이것들로부터 돌아서게 된다.
그러므로 이웃에 대한 인애를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애착으로 움직이며
악과 거짓은 자신에게서 오기 때문에 그것들로부터 돌아서게 된다.
사람이 이렇게 할 때,
자기 자신이 본질적으로 어떠한 존재인지 인정함에 따라
그 내면에 '겸손(humility)'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겸손이 존재할 때 그의 상태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이웃에 대한 인애의 이러한 본질적인 구성 요소들이
바로 주님께서 사용하신 다음 말씀의
내적 의미(internal sense)가 전하는 메시지이다.
마 25:35-3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천사들은 '주린 자'를 통해
애착에 이끌려 선을 갈망하는 자들을 인지하고,
'목마른 자'를 통해 애착에 이끌려 진리를 갈망하는 자들을 인지하며,
'나그네'를 통해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을 인지한다.
또한 '헐벗은 자'를 통해 자신 안에 선이나 진리가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자들을 인지하고,
'병든 자'를 통해 자신 안에 오직 악 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자들을 인지하며,
'갇힌 자'나 '감옥에 있는 자'를 통해 자신 안에
오직 거짓 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자들을 인지한다..’
실제 4956항 원문의 텍스트로부터, 앞서 언급된
‘인간의 비루함 속에서도 구원의 문이 열리는 원리’가
어떻게 왜곡 없이 도출되는지 그 논리적 경로를 설명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함'에서
'구원의 문(겸손)이 열림'이 도출된다.
본문은 인애의 핵심을 ‘자기 자신을 오직 악과 거짓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인정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병든 자(내 안에 악뿐임)',
'갇힌 자(내 안에 거짓뿐임)', '헐벗은 자(내 안에 선과 진리가 없음)'
라고 정직하게 시인할 때,
비로소 인간 내면에 주님이 일하실 수 있는
'겸손(humility)'의 상태가 형성된다.
주님을 향해 의지를 꺾는 시점은
내가 대단한 선을 행할 때가 아니라,
나의 철저한 악함을 인정하는 순간이라는 이치가
이 텍스트에서 명확히 도출된다.
'주님으로부터만 받아들임'에서
'지옥의 영향력을 끊어냄'이 도출된다.
본문에 따르면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악과 거짓뿐이며,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유입된다.
인간이 자신의 비루한 자아 중심성(악과 거짓)으로부터 돌아서서
주님의 유입을 받아들일 때,
영혼을 지배하던 지옥의 영향력은 끊어지게 된다.
즉, 구원은 인간이 평생 쌓은 선의 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악을 시인함으로써 주님의 무한한 선을 받아들일
통로를 열었기 때문에 성립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연산 과정을 설명해보면 이렇다.
이 실제 원문의 메커니즘을 영적 역학의 관점에서 수치화하여
연산 과정으로 설명해본다.
인간이 스스로를
‘선이나 진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헐벗은 상태(0)’,
‘오직 악과 거짓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0)’으로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영적 연산식에서 자신의 자아 값을 '0'으로 수렴시키는 작업이다.
(자아의 영향력을 차단시키는 작업이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착각할 때는
자아의 노이즈(악한 유입)가 가득 차서 주님의 유입이 차단되지만,
스스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여
자아를 0으로 만드는 순간
지옥의 압력은 주님의 무한한 신성에 의해 완벽하게 상쇄되며
영혼은 완전한 평형 상태(자유의지)에 도달한다.
본문은 자아를 악으로 인정할 때 '겸손'이 존재하게 되며,
이 겸손이 있어야만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다고 명시한다.
연산의 관점에서 '겸손'은 주님의 무한한 생명 에너지가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입력 단자(수신기)'다.
인간의 자아가 0이 되어 수신기가 켜지는 순간,
주님의 무한한 선과 진리가 그 영혼 내부로 유입된다.
결과값은 인간의 유한한 악을 가볍게 압도하는
무한한 긍정의 상태(겸손)로 전환된다.
사후 영들의 세계에서 천사들이 인간을 바라볼 때,
외적인 행위(굶주린 자에게 밥을 준 물리적 사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내적 의미, 즉 '선과 진리를 갈망하고 자신의 악을
부끄러워했던 속사람의 상태'를 인지한다.
인간이 지상 생애 동안 평생 허물투성이로 살았을지라도,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악함을 아파하며
주님의 선만을 구했던 인애의 본질적 요소들이
단 1이라도 존재한다면,
주님은 사후에 그 영혼의 악을
'자신에게서 온 것'으로 분류하여 외곽으로 떼어내시고
주님께로부터 온 선과 진리만을 남기시어 천국 공동체로 견인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쌓아온 악의 외적 질량을 보며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거대한 어둠 속에서도 손을 묶어두지 않고 스스로 하듯 진리를 선택하여
악을 대적하려 했던 투쟁의 흔적들을 보물처럼 여기신다.
완고한 자아의 관성을 깨뜨리고 주님께서 싸워주실 수 있도록
능동적인 거부의 통로를 열어젖히는 그 실천적 지향성 속에,
주님은 당신의 무한한 권능을 유입시키시어
천계적 자아를 형성하고 영혼을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마주할 용기를 내는 그 순간,
이미 주님의 강한 영향력이 작동하여
우리를 영원한 평강의 집으로 이끌고 계심을 믿는다.
이는 맹목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혼 스스로가 빛을 밀어내지 않고
자유의지로 열어젖힌 그 진실한 틈을 통해
비로소 천국의 유입이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지상의 질서이다.
그러나 그 평범하고 이기적인 일상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선의 씨앗을 심고 가꾸신다.
우리가 삶의 무게에 눌려 이기적인 관성에 노출되어 있는 중에도,
내면의 양심을 깨워 말씀의 진리를 수호하고 마치 자기 힘으로 하듯
적극적으로 악을 이겨내려 했던
그 실천적 투쟁의 순간들을 주님은 결코 잊지 않으신다.
인간의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그 유약함 속에서 스스로 하듯 악을 멀리하려는
자발적인 전투를 이끄시어 영원한 생명으로 연결하시려는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끝내 스스로 영적 구름을 끌어당겨 덮지만 않는다면
가장 평범한 인간조차도 천사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증명하는
무한한 자비의 발현이다.
우리가 숨 쉬듯 저지르는 일상의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습관들조차
주님은 정죄의 근거로 삼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안에 숨겨진
작은 진심을 찾아내어 구원의 고리로 활용하신다.
인간이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연약할 때조차
주님은 우리 내면의 '남은 것'들을 세밀하게 배열하시어
천국으로 향하는 인력을 유지하시며
스스로 그 끈을 영원히 놓아버리겠다는 지옥적 선택을 하지 않는 한
끝까지 우리를 견인하신다.
한 영혼의 짧은 탄식과 작은 양심의 가책을
우주보다 무겁게 여기시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 앞에
우리는 그 끝없는 자비와 인내에 대한 경외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악의 범람을 차단하는 남은 것의 활성화와 능동적 영적 전투
인간의 마음이 온통
지옥 같은 고통과 악의 충동에 휘말려 있을지라도
그 내면에 보존된 '남은 것(Remnants)'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 영적 생명의 불씨가 된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아무리
극악한 환경이나 유전적 악에 노출되어 있더라도
주님께서는 그가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영적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선의 조각들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신다고 설명한다.
압도적인 외부의 악이 영혼을 짓누를 때
이 작은 선의 조각은 거대한 파도 속에서 배를 고정하는
닻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이 악 속에 깊이 빠져 있을 때
주님은 그가 유아기나 소년기에 가졌던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끌어올려 악의 유입을 막고
영혼이 완전히 파멸되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AC 530 요지
영혼을 압도하는 '외부의 악'은
유전적인 성향이나 환경적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러한 외부적 압력은
인간의 겉 사람을 지옥 같은 상태로 몰아넣을 수는 있으나
속사람 안에 간직된 '주님의 처소'까지는 침범하지 못한다.
인간이 그 고통스러운 상태 속에서
‘이것은 악하다’라고 자각함에 머물지 않고,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싸우는 것처럼 그 악한 충동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제어하려 투쟁한다면
그것은 내면의 선한 조각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다.
참된 구원의 유입은 이 자각을 무기 삼아 인간이 스스로 하듯
악을 멀리하려 몸부림치는 적극적인 투쟁의 통로를 통해 시작된다.
영계의 질서에서 악의 힘은
스스로 존재하는 생명력이 없기에 본질적으로 무력하며 유한하다.
반면 주님으로부터 기원한 선의 힘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이기에 무한한 권능을 지닌다.
악의 힘이 무력하고 수동적인 성질을 갖는 것은,
그것이 고유한 생명 원천을 가진 힘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유일한 생명 에너지를
인간의 이기적인 자아로 받아들여 비틀고 왜곡한 반작용의
결과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악은 선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악은 선의 결핍이거나 선의 왜곡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둠이 빛의 부재이며
그림자가 물체에 의해 빛이 가로막힐 때만 생기는 것과 같다.
어둠 그 자체에는 아무런 능동적인 힘이 없으며
오직 빛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가 규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악의 힘은 수동적이며
오직 선에 대항할 때만 그 형체를 드러낸다.’ AC 8717 연산
악의 힘이 왜 '수동적'이며 '유한'한지
영적 역학의 관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악은 '반작용'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리 법칙에서 작용이 없으면 반작용도 없듯이
영적 세계에서 악은 주님의 생명 유입(작용)을 전제로 한다.
악은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으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빛을
자신의 이기심이라는 렌즈로 비틀어 '파괴적인 힘'으로 변질시킨다.
즉, 공급원이 차단되면 악은 즉시 소멸하는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힘에 불과하다.
또 악의 힘은 '한계치'가 정해져 있기도 하다.
선의 힘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기원하기에 무한한 확장성을 갖지만
악의 힘은 인간의 자아와 지옥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주님은 지옥의 폭동이
평형의 임계점을 넘지 못하도록 철저히 규제하신다. HH 592 연산
따라서 악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그것은 주님이 허용하신 범위 내에서만 움직이는 '갇힌 힘'이며
결코 신성의 무한한 질서를 파괴할 수 없는 유한한 성질을 갖는다.
악이 강해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방관하거나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께로부터 온 말씀의 진리를 쥐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싸우는 것처럼 결연히 대적하며
‘이것은 죄다’라고 선언하고 물리치는 순간, 악의 무력함이 폭로된다.
인간이 손을 묶어두지 않고 스스로 하듯 투쟁을 시작할 때,
주님의 능동적인 선의 권능이 그 투쟁에 결합하여
수동적인 악의 구조를 힘의 근거로부터 해체하신다.
악의 힘이 아무리 태산처럼 거대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결국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주님은 온 우주의 균형을 조절하시며 그 수동적인 어둠이
우리의 영혼을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쉼 없이 막아내고 계신다.
인간의 영혼이 어둠 속에서도 끝내 살아남는 원리는
마음 깊은 곳에 남겨진 작은 선의 씨앗이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만날 때 일어나는 경이로운 변화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AC 530을 보자.
‘남은 것이란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 두신 선과 진리를 말한다.
주님만이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며, 주님만이 그것을 보존하신다.
사람이 악과 거짓 속에 있을지라도
이 남은 것이 없다면 그는 인간일 수 없으며,
사후에 천국에 갈 수도 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오직 이 남은 것을 통해서만
인간과 결합하실 수 있고, 이를 통로 삼아 신성한 유입을 보내어
인간을 악으로부터 끌어올리시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 안에 이 남은 것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며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
AC 530 연산
주님은 인간이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선과 진리의 기억들,
즉 '남은 것(Remains)'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 보존하신다.
인간이 큰 시련이나 악의 압박 속에 처했을 때
주님은 이 '남은 것'을 깨워 당신의 신성한 유입과 결합하게 하신다.
만약 인간 안에 이 작은 씨앗조차 남아 있지 않다면
주님은 그를 구원하실 통로를 찾으실 수 없다.
이어 DP 6 을 보자.
‘무한하신 분(Infinite) 안에는 무한한 것들이 있다.
신성한 섭리는 인간을 창조함에 있어
그 안에 천국을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천국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은 곧 주님의 형상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유한함 속에 당신의 무한한 질서가
결합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시며 이를 통해 인간이 영원히
주님과 결합하여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의한 것이다.’
DP 6 연산
하나님의 섭리 6항은
‘신성한 섭리는 무한한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대주제 아래,
주님께서 어떻게 유한한 인간 안에
무한한 천국의 질서를 세우시는지를 다루는 대목이다.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식은 '무한한 설계'에 기반하고 있다.
인간의 의지 자체는 지극히 유한하고 미약하지만(먼지처럼 작지만),
주님께서는 그 유한한 의지 안에
무한한 신성이 유입될 수 있는 '영적 구조'를 설계해 놓으셨다.
따라서 인간의 작은 선택이 주님의 무한한 계획과 연결될 때,
그 힘의 크기는 인간의 차원을 넘어 무한대로 확장된다.
주님은 무한한 권능으로 인간을 강제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인간이 주님의 힘주심을 의지하여
스스로 하듯 자발적으로 악과 맞서 싸우고 천국의 질서에 순종할 때만
천국적 고유속성이 형성되고 영원한 결합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무한하신 주님은 당신의 선과 진리를 인간에게 주시어,
그가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듯 치열하게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도록 이끄신다.
인간의 의지가 비록 먼지처럼 작을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무한한 능력과 연결되는 순간,
그 어떤 지옥의 거대한 악도 그 영혼을 무너뜨릴 수 없게 된다.
선은 본질적으로 능동적이며 승리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리가
실제 영혼의 구원에서 작동되는 영적 구도는 무엇일까?
첫째, 마음 깊은 곳의 작은 씨앗이 ‘생존의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살면서 무심코 행했던 작은 친절이나
진실에 대한 갈망 같은 '남은 것'이 보물처럼 숨겨져 있다.
이것은 아주 작은 불씨와 같아서
겉으로 보기엔 거대한 어둠에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하지만 이 작은 불씨가 단 하나라도 살아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무한한 생명 에너지가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둘째, 주님의 무한함은 아주 ‘작은 가능성’ 위에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햇빛이 쏟아져도
씨앗이 전혀 없는 메마른 땅에서는 싹이 틀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의 모든 양심과 선의 가능성을 스스로 짓밟아
마음을 완전히 비워버린다면 주님도 도우실 길이 없다.
그러나 비록 상처 입고 초라할지라도
주님을 향한 단 한 뼘의 진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주님은 그 보잘것없는 진심에 당신의 모든 권능을 쏟아 부으신다.
셋째, 가장 ‘작은 진심’이 거대한 어둠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무한하기에 우리의 작은 진심과 만나는 순간
그 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증폭된다.
세상의 악과 고통이 아무리 태산처럼 영혼을 짓눌러도
주님과 연결된 그 작은 마음은 지옥의 모든 인력을 끊어내고
남을 만큼 강력한 구원의 힘을 뿜어낸다.
결국 승리는 악의 크기가 아니라
우리가 그 작은 마음의 끈을 놓지 않는 것에 달려 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옥 전체의 힘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단 하나의 선한 불꽃이 더 강하다.
따라서 영혼을 짓누르는 악이 아무리 압도적일지라도
그 질적인 우위에 있는 '선의 조각'은
자신을 짓누르는 악을 끝까지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영혼을 지옥의 영향력으로부터
끌어올려 구원의 궤도로 진입시키기에 충분한 동력이 된다.
AC 963
‘지옥 전체는 주님 앞에서 지극히 미미하다.
수백만의 악령들이 연합하여 단 한 사람을 파멸시키려 할지라도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지극히 미세한 선의 불꽃은
지옥 전체의 군대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
왜냐하면 주님의 선은 무한(Infinite)하며 전능하시기 때문이고,
지옥의 힘은 유한한 피조물에게서 나온 유한한 질량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단 하나의 선은
온 지옥을 완전히 압도하며 영혼을 지켜내기에 충분하다.’
HH 598
지옥 전체의 힘은 주님의 권능 앞에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평형을 다스리시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키신다.
만약 인간이 사후 영들의 세계(중간 상태)에서
자신이 지은 악을 끝까지 정당화하고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unless a person confirms his evils),
그 내면에 보존된 지극히 작은 선과 진리의 상태들은
주님의 무한한 천국 인력과 곧바로 동조하게 된다.
주님은 이 미세한 통로를 통해
영혼을 지옥의 모든 강력한 하강 압력으로부터 끊어내어
천국의 구원 궤도로 끌어 올리신다.’
인용된 글에서는 '무한과 유한의 대조'를 통해
'불꽃의 우위'가 도출된다.
AC 963항은 지옥 무리의 연합된 힘을
주님의 무한성과 대조하여 '지극히 미미한 것'으로 격하한다.
아무리 많은 숫자의 악령이 연합할지라도
피조물이라는 한계로 인해 그 힘의 성질은 유한성에 갇힌다.
반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단 하나의 선한 불꽃은
무한의 속성을 지니므로 질적인 면에서 지옥 전체의 군대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는 절대적 우위성이 이 대목에서 도출된다.
그리고 HH 598항은 영혼이 지옥의 하강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제적인 통로를 보여준다.
인간이 사후 세계에서
자기 악을 고집스럽게 승인(confirm)하지 않는 순간,
겉 사람의 악은 영혼과 영구 결합하지 못하고 이물질로 분리된다.
동시에 주님께서 내면에 보존해 두신 미세한 선과 진리의 상태들이
천국의 무한한 영향력과 즉각적으로 동조(동시 반응)하여
구원의 궤도로 이끌어 올리는 실체적 동력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연산해보면..
지옥의 힘은 아무리 악령의 총합의 수가 거대해진다 해도
피조물의 성질에 갇힌 유한한 숫자의 합산일 뿐이다.
반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미세한 선의 불꽃은 무한대의 성질을 갖는다.
이를 영적인 저울 위에서 연산할 때
무한은 유한의 총합을 가볍게 압도하므로,
지옥 전체가 누르는 양적인 질량은 주님이 주신 단 하나의
질적인 불꽃 앞에 상쇄되어 무력화된다.
사후 영들의 세계(중간 상태)에서는
영혼의 최종 성분을 확정하기 위한 조건들이 실행된다.
지상에서 지은 악과 잘못을 사후에도 끝까지 ‘내가 맞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며 스스로 인정하고 고집하는 상태에서는
악이 속사람과 결합하여 주님의 무한한 선이 유입될 통로가 폐쇄된다.
반대로 육신의 연약함이나 환경 때문에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사후에 그 악을 직면했을 때 변명하지 않고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며 거부하는 상태에서는
겉 사람의 악은 본질이 아닌 외적인 불순물로 분류되어 차단이 되고
내면에 감추어져 있던 '남은 것(지극히 작은 선과 진리)'이
주님의 무한한 천국 인력과 공명(Resonance)을 일으키는
유일한 '영적 접점'으로 활성화된다.
그렇게 활성화된 내면의 접점에
주님의 무한한 천국 인력이 유입되는 순간
영혼의 운동 방정식에는 강력한 상승 가속도가 부여된다.
영혼을 지옥 공동체로 끌어내리던
거대한 하강 벡터(지옥의 압력)가 아무리 무거웠을지라도
그것은 무한한 상승 벡터와의 결합을 이겨내지 못하고 끊어진다.
이 역학적 연산의 결과값에 의해
영혼의 최종 위치 좌표는 지옥의 영향권 궤도를 완전히 탈출하여,
천국 공동체의 좌표로 급격히 인양 배치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산 과정이 증명하는 것은
절망의 심연 속에서
단 하나의 작은 빛을 붙잡고 있는 영혼을 향한
주님의 시선은 눈물겹도록 치밀하다는 것이다.
세상의 잣대로는 이미
지옥의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주님은 그 불길 속에서 타지 않고 남은 작은 선의 파편을 찾아내어
그것을 씨앗 삼아 새로운 생명을 재건하신다.
압도적인 악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르는 이유는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무게를 견뎌내는 과정에서 우리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던
'남은 것'의 가치를 발견하게 하려는 섭리의 연단일지 모른다.
가장 어두운 밤에 가장 작은 별빛이 길을 안내하듯
우리 안의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의 조각이
결국 우리를 영원한 평강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손길이 된다.
인간이 짊어진 악의 무게가 태산과 같아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숨겨둔
이 작은 선의 조각을 결코 놓치지 않으신다.
세상 모든 것이 우리를 정죄하고 지옥의 영향력이 우리를 끌어당길 때,
주님은 우리가 유년 시절 무의식중에 쌓아두었던
순수한 선의 기억들을 안에서부터 일깨우시며,
인간이 그 유입에 결합하여 스스로 하듯
말씀의 진리로 악을 대적하려는 의지적 투쟁을 동력 삼아
우리를 빛의 궤도로 다시 올리신다.
압도적인 어둠 속에서 아주 미세한 빛 하나를 보존하여
마침내 온전한 생명을 재건하시는 주님의 섭리는
스스로 지옥을 선택할 수 있는 무서운 자유의지까지도
온전히 허락하시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기에
그 어떤 절망도 뚫고 나오는 무한한 자비의 현현임에 틀림없다.
롬 8장 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의 이 선언은 주님의 사랑이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이나 영적 대적자보다 강하여 결코 끊어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유한하고 깨어진 삶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동하여 영혼을 견인하는지
스베덴보리의 영적 가르침을 통해 그 과정을 살펴보자.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무한하고 영원하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아무리 깊은 지옥의 상태에 떨어져 있을지라도
그를 천국으로 이끌기 위해 쉬지 않고 작용한다.
주님은 인간의 악과 이기심을 끊임없이 허용하고 다스리시며,
그 안에서 아주 미세한 선의 가능성이라도 찾아내어 보존하신다.
만약 주님의 사랑이 인간의 이기심보다 약하다면
온 우주는 즉시 멸망했을 것이나, 주님의 사랑은 무한하기에
인간의 평생에 걸친 악보다 언제나 더 강하다.’ DP 202 연산
‘지옥의 권세와 악의 압력이
영혼을 아무리 강하게 짓누를지라도,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 두신
남은 것(Remains)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주님은 인간이 가장 비루한 자아사랑에 빠져 있을 때에도
이 감추어진 불꽃을 지키시며 이를 통로 삼아
천국의 흐름을 끊임없이 유입시키신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구원의 문을 영원히 닫아걸지만 않는다면
주님의 유입은 그를 지옥의 영향력으로부터 반드시 분리해 내신다.’
AC 587 연산
로마서가 선언한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영혼의 평형 상태에서 실질적인 구원의 수치로
전환시키면 조금이나마 그 사랑의 깊이를 측량해볼 수 있다.
로마서 38절에 언급된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은
인간을 짓누르는 외부 악의 거대한 압력과 같다.
스베덴보리의 법칙에 따르면,
이 압력이 아무리 무한대에 가깝더라도 주님의 사랑은
그 모든 피조물의 총합보다 큰 '능동적이고 무한한 힘'이다.
주님께서는 신성한 권능으로
이 지옥의 영향력을 완벽하게 상쇄하여
우리 내면에 '0'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신다.
세상의 그 어떤 영적 대적자도
우리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는 이유는
주님이 그 거대한 압박 속에서도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자유의 틈(여지)'을 완벽하게
수호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강요하셔서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허약한 상태에 있을 때조차
무의식중에 쌓아온 선의 기억들을 배열하여 천국을 향한
영향력을 유지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의 공격도 막아주시며
인간이 자유의지로 구원의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지만 않는다면
결코 그 견인의 끈을 놓지 않으신다.
지옥의 영향력을 끊어내시는 주님의 그 세밀한 사랑을,
인간의 어떤 말로 표현해야 그 무한한 깊이에 닿을 수 있을까..
비록 유약한 인간의 언어는 유한하나,
할 수 있는 한 모든 각도에서 그 자비의 실체를 기술하고 고백해보자.
그 무한한 사랑의 역학을 온전히 명상하고 언어로 풀어내는 것은
단순한 관념의 유희가 아니라
지독한 악의 관성과 싸워 이길 실제적인 방편을
우리 삶 속에 작동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시작이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허물투성이의 삶일지라도,
유혹의 순간에 자신의 무력함을 겸손히 시인하고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듯 악에 저항하며 멀리하려 했던
그 숨은 실천들을 영원의 무게로 달아주시는 주님의 섭리가
바로 로마서가 증언하는 '측량할 수 없는 자비의 극치'이다.
마음이 온통 지옥 같은 상태에서도
극히 작은 선의 조각이라도 영혼에 남아 보존되고 있다면,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빛을 거부하며
영혼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리지만 않는다면
끊을 수 없는 그 사랑으로 인해 그는 영혼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외부 악에도 불구하고 구원받게 된다.
자신의 무력함을 겸손히 시인하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스스로 하듯 악으로부터 돌아서려는 진심의 투쟁은,
그 질적 가치가 주님의 무한함과 맞닿아 있기에
평생의 이기적인 관성을 상쇄하고도 남는 영적인 무게를 갖게 된다.
사후 영들의 세계에서 겉 사람의 위선이 벗겨질 때,
이 진실한 투쟁을 통해 내면에 천계적 자아를 할당받은 자는
자신이 지은 악을 끝까지 정당화하며 고집부리지 않는 한,
주님의 무한한 천국 영향력에 이끌려 올라가게 된다.
인간의 삶이 허물과 이기심으로 점철되어 보일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어둠 속에 숨겨진
단 하나의 진실한 불꽃을 결코 꺼뜨리지 않으신다.
또 우리가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비루한
자기사랑에 빠져 있을 때조차
주님은 우리가 무의식중에 쌓아온 '남은 것'들을 동원하여
우리를 빛의 방향으로 돌려세우려 애쓰시며
우리가 자유의지로 구원의 문을 걸어 잠그지 않는 이상
결코 그 견인의 끈을 놓지 않으신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허물투성이의 삶일지라도,
유혹의 순간마다 손을 묶어두지 않고 스스로 하듯
진리의 지식으로 악을 멀리하려 했던
그 숨은 투쟁과 갈망을 영원의 무게로 달아주시는 주님의 섭리는
측량할 수 없는 자비의 극치이다.
인간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이기심의 두께가 아무리 두껍더라도
주님은 그 내면에 심어두신 남은 것을 일깨우시며,
강요가 아닌 끝없는 인내로써 인간이 스스로 하듯
자유의지로 빛을 선택하여 대적하도록 이끄신다.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가치가 없다고 느낄 때조차
주님은 우리 내면의 '남은 것'들을 배열하시어
천국으로 향하는 영향력을 유지하시고
강요가 아닌 끝없는 인내로써 우리 스스로 빛을 선택하도록 이끄신다.
그럼 이제 지독한 악의 관성과 싸워 이길 실제적인 방편을
우리 삶 속에 작동시켜 보자.
‘자신이 지은 구체적인 악을 인지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이
실제적인 회개의 시작이다.
만약 삶의 구체적인 순간마다 악을 지목하여 밀어내지 않고
그저 일반적인 말로만 후회한다면,
그것은 공중에 흩어지는 말잔치에 불과하여
영혼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힘을 갖지 못한다.’ TCR 530 연산
그 싸움의 기술은 철저히 주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되,
인간 편에서는 마치 자기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악과 맞서 투쟁하는 유기적 협력의 질서이다.
먼저 '적극적 투쟁의 각도'에서 스스로 하듯 악을 거부하며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것은 손을 묶어둔 채
주님의 직접적인 도움만을 기대하는 방관적 태도를 버리는 것이다.
유혹이나 습관적인 악이 뿜어내는 압력이 일상을 짓누를 때,
인간은 단순히 상황을 보고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총동원하여 그 악에 대항해 치열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싸우는 것처럼 능동적으로 악을 거절하고 몸부림칠 때,
비로소 주님께서 그 투쟁을 통로 삼아
지옥의 권세를 꺾으시는 영적 전투의 장이 성립된다.
인간의 능동적인 거부 행위는
주님의 무한한 능력을 끌어오는 필수적인 수용체가 된다.
그리고 '진리의 무기화 각도'에서 말씀의 지식과 애정을 발동해야 한다.
인간은 지옥의 압력과 무작정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배운 선과 진리의 지식을 무기로 삼아 싸워야 한다.
유혹에 직면했을 때 ‘이 생각과 즐거움은
주님의 신성한 질서에 반하는 악이며 죄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악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라고 명확하게 선을 그으며
말씀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싸우는 외형은 인간의 지식과 고백을 통하지만,
실상 그 진리를 매개로 하여 지옥을 정복하시고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비록 오랜 습관으로 인해 외적인 행동이 일시적으로 넘어졌을지라도,
내면의 속사람이 진리를 붙들고
끝까지 악을 죄로 보아 미워하며 정당화하기를 거부한다면,
그 악은 영혼의 영구적인 소유가 되지 못하고 사후에 분리될 이물질로 격하된다.
마지막으로 '천국적 자아의 각도'에서 공로의 근원을 오직 주님께 돌려야 한다.
이것은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그 싸울 수 있는 힘과 승리의 동력이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고 있음을 깊이 신뢰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탄식하고 대적했음에도 육체와 뇌의 낡은 관성 때문에
다음 날 똑같은 죄가 반복되어 흔들릴 때,
인간은 무력감에 속아 영혼의 문을 닫아걸지 말아야 한다.
속사람의 중심이 진리로 수정되었을지라도
외적인 삶이 천국의 질서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기까지는
점진적인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장 완벽한 변화가 체감되지 않는 무미건조한 시간 속에서도
감정의 낙심을 버리고, 주님께서 내면에서부터 악을 조금씩 분리하고 계신다는
영적 사실을 믿으며 묵묵히 투쟁을 이어가야 한다.
스스로 싸우듯 악을 멀리하되 오직 주님의 공로만을 시인할 때,
이기적 자아는 소멸하고 주님의 생명과 공명하는 천계적 고유속성이
영혼의 새로운 본질로 확정된다.
그것이 겉사람의 관성을 깎아내고 천계적 자아를 할당받는 실제적인 영적 전투이다.
DP 191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단 하나의 악도 제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악은 지옥으로부터 유입되는 것이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악과 싸우는 자는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통해 싸우신다고 믿어야 한다.
만약 사람이 주님을 바라보며 악을 멀리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을 억누를 뿐이며 그것은 내면에 남아있게 된다.
인간이 유혹에 처할 때 해야 할 실천은,
자신이 아무런 힘이 없음을 인정하고 구원을 위해 주님께 부르짖는 것이며,
주님께서 힘을 주실 때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듯 악에 저항하는 것이다.'
AC 6204
'지옥으로부터 끊임없이 유입되는 악과 거짓의 생각들은
인간을 정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지 유입일 뿐이기 때문이다.
악이 인간에게 귀속(appropriated)되는 것은
오직 그가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동의하며,
자기 안에서 정당화할 때뿐이다.
비록 외적인 삶이나 오랜 습관으로 인해
유혹에 굴복하여 악한 행위를 하였을지라도,
그의 내면의 속사람이 그것을 죄로 여기고 미워하며 동의하기를 거부한다면
그 악은 내면에 남아있지 않고 외적인 영역에만 머물다가
사후 영들의 세계에서 분리되어 소멸된다.'
AC 9334
주님께서는 인간 내부의 악들을 단 한 순간에 한꺼번에 제거하지 않으신다.
악들은 조금씩, 그리고 점진적으로제거된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들이 한꺼번에 제거된다면
인간은 즉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인데,
DLSMS 인간은 태생적으로 온통 악으로 가득 차 있고
그의 외적 습관과 기억들은 오랜 세월 그 악과 결합해 왔기 때문이다.
속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여 선으로 돌아섰을지라도,
외적인 삶과 오랜 습관들이 천국의 질서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기까지는
오랜 시간의 흐름과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도중에 옛 죄의 흔적이
드러나고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께서 내면에서부터 악을
점진적으로 분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견뎌야 한다.'
자기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자만심은 악을 고착시키지만,
그렇다고 주님을 바라보며 악을 멀리하지 않으면
악이 내면에 그대로 잔재한다는 경고로부터,
내 힘이 아닌 주님의 원천을 의지하되
주체적으로 온 힘을 다해 악을 밀어내야 한다는 능동적 의탁의 기술이 도출된다.
또 악의 귀속을 막으려면 유입을 즐거워하지 않고 거부해야 하며,
이는 인간이 획득한 선 및 진리의 가르침을 사용하여 대적할 때만
가능하다는 법리로부터, 넘어지기 쉬운 외적 관성 앞에서도
내가 가진 말씀의 진리를 붙들고 끝까지 동의를 거부하고 치열하게
마음의 거부 상태를 유지하는 실천적 투쟁이 도출된다.
이어 인간의 생명이 상하지 않도록 주님이 악을 조금씩, 점진적으로 제거하시며,
그 과정은 외적 습관과의 지속적인 조화 과정을 동반한다는 질서로부터,
중심이 수정된 후에도 여전히 외적 흔들림이 반복될 때 낙심하여 무너지지 않고,
이미 시작된 영적 질서를 확신하며
매일의 전투를 묵묵히 견뎌내는 시차의 지혜가 도출된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이기겠다고 교만할 때
자아의 저항이 발생하여 주님의 능력을 차단한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이 직접 해 주시겠지라며 손을 놓고 직접적인 도움만 기다리면
인간의 자발적 투쟁 값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인간이 아무런 능동적 투쟁도 하지 않으면 주님의 무한한 전능이 현존할지라도
영혼 내부에서 유효한 권능을 산출하지 못한다.
인간이 의지적으로 적극 행동을 제어하고 대적할 때만, 주님의 무한한 권능이
안전하게 결합하여 지옥의 압력을 상쇄하는 구원의 질서가 완성된다.
악이 영혼에 영구 소유되는 식은 인간이 유입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렸다.
겉사람의 낡은 습관으로 인해 악한 행동이 표출되려 할 때,
영혼이 내면에 저장된 진리의 지식을 무기로 꺼내어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면,
내적 동의 상태는 거부 상태로 강제 전환된다.
인간이 손을 묶어두지 않고 자발적으로 진리를 붙들고 악을 미워할 때,
외적 관성과 내적 동의의 동시 성립이 깨어지게 된다.
따라서 그 악은 영혼의 핵심과 결합하지 못하고 외적인 영역에만 머무는
이물질로 격하되어 사후 영적 분리라는 질서를 통해 탈락한다.
인간이 진리를 가지고 조금씩 악을 몰아내는 과정은
시간에 따른 점진적 여과 연산이다.
속사람이 바뀐 시점 직후에도 겉사람의 육체와 기억에는
과거 악의 관성이 남아 연속적인 유혹을 만들어낸다.
주님은 인간의 생명 구조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인간이 치열하게 유혹과 싸우는
점진적 과정을 통해 외적 관성을 서서히 감소시키신다.
당장의 흔들림은 패배의 결괏값이 아니라,
인간이 능동적으로 전투를 지속함으로써 천계적 고유속성인
새로운 자아를 정착시켜 나가는 필수적인 영적 섭리의 과정이다.
종합해보면 이렇다.
인간의 언어는 유한하기에
지옥의 결박을 끊어내시는 주님의 세밀한 사랑을 온전히 묘사할 수 없다.
그러나 관념의 한계를 인정하고, 삶의 구체적인 유혹과 시험의 틈새마다
손을 묶어두지 않은 채 진리의 지식을 무기 삼아 스스로 하듯
치열하게 맞서 싸우고 악을 멀리하려는 그 자발적인 투쟁 속에서,
주님의 무한한 영향력은 비로소 실체적인 힘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인간이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싸우는 것처럼 결연히 악에 저항할 때,
주님은 그 적극적인 투쟁을 통로 삼아 지옥의 모든 하강 압력을 끊어내시고
영혼을 천계적 자아의 궤도로 이끌어 올리신다.
- 인간의 태생적 악(자기사랑)과 주님의 유입(남은 것) 사이의 상충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자기중심적인 성향, 즉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을
기본 바탕으로 살아간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악에 기울어져 있으며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은 자연적인 본성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흘러 들어오는 천국적인 선의 저장소가 존재한다.
이 저장소는 인간이 유아기부터 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으로부터 받아 그의 기억 속에 보존된
선과 진리의 상태들이며, 이것은 성인이 되어
자아의 악한 중력에 직면했을 때 인간이 스스로 싸우듯 대적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수호하시는 영적 평형의 추가 된다.
‘모든 인간은 지옥을 향해 기울어진 채 태어나지만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내면에 '남은 것(Remnants)'이라 불리는
선과 진리의 씨앗을 심어두어
자아의 중력에서 벗어날 길을 마련하신다.’ AC 1050. 1906 연산
단, 이 '남은 것'은 맹목적인 구원을 보장하는 장치가 아니며,
인간이 스스로 짙은 구름을 끌어당겨 진리의 빛을 끝내 거부할 때는
억지로 발동하지 않는다.
인간이 겉으로 행하는 선행이
모두 자기중심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스베덴보리는 행위 그 자체보다
그 행위를 추진하는 '의지의 목적'을 중요하게 여긴다.
만약 어떤 이가 타인을 도우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명성이나 대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인했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자기중심적'인 행위가 된다.
반면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그것이 옳기 때문에,
혹은 이웃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명하여 행했다면
그 의지는 주님께로부터 온 '천국적인 선'에 해당한다.
세상에는 자아를 완전히 버린 성자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는 수많은 '투쟁하는 영혼'들이 존재한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평형(Spiritual Equilibrium)' 교리에 따르면
지옥은 영혼을 이기적인 욕망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천국은 영혼을 선을 향해 끌어올리려 함으로써
자유의지가 작용할 수 있는 평형 상태를 이룬다.
인간의 최종적인 의지는
자아가 가진 본능적인 중력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부여하신 선택의 힘을 통해 결정된다.
만약 자아의 중력과 천국의 영향력이 평형을 이루고 있다면
인간은 그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든 움직일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갖게 된다.
이때 인간이 단 1만큼이라도 자신의 욕망을 죄로 여겨 억제하고,
말씀의 진리를 쥐고 악과 맞서 싸운다면
그 의지의 실천적 지향성은 자기중심에서
주님과 타인을 향한 천국적 방향으로 전환된다.
세상 대부분의 인간이 자기중심적으로 보일지라도
유혹의 순간에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주체적으로 진리를 선택하여
악을 멀리하는 적극적인 투쟁이, 그를 천계적 고유속성을 지닌
선한 사람으로 분류하게 만드는 핵심 변수가 된다.
인간의 의지적 선택은 영적 평형점에서의
미세한 벡터(영적 지향성, Orientation) 변화로 산출된다.
(벡터가 '크기'와 '방향'을 동시에 가지듯,
인간의 마음도 단순히 크기, 즉 얼마나 열심히 믿는가보다
방향, 즉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영계에서는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힘은 실재하지 않으므로
벡터는 곧 '마음의 눈이 고정된 방향'을 의미한다.)
자아의 본능적 중력이 강하더라도,
주님이 허락하신 평형 상태 덕분에 인간은 외부의 강압 없이
스스로를 선택할 수 있는 지점에 서게 된다.
이때 인간이 손을 묶어두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려는 능동적인 투쟁을 시작하면,
주님의 무한한 권능이 그 행위에 결합하여 영혼의 전체적인 방향성이
자기중심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천국의 질서로 완벽하게 전환된다.
이는 인간 편에서의 공로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주시는 힘을 신뢰하며
자발적으로 결연히 악을 대적하여 멀리할 때 성립되는 질서의 전환이기에,
이러한 실천적 결단을 통해 영혼의 좌표는 거듭남의 차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자아의 거대한 중력 아래
속절없이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을 위해
주님은 천국과 지옥의 힘을 완벽하게 조율하시어
'선택의 공간'을 마련해 주신다.
우리가 행하는 작은 선의나 진리를 붙들고 행하는 영적 투쟁은
인간 편에서는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주님은 그 자발적인 거부와 대적을
영원한 생명을 향한 위대한 도약의 통로로 삼으신다.
자아의 악을 멀리하기 위해 치열하게 나아가는 그 실천적 투쟁 속에
주님의 온 우주적 섭리가 유입되며, 그 능동적인 거부를 통해
천계적 자아를 형성하시어 영원한 평강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세밀한 사랑에 깊은 경외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선택의 공간'에서 천국의 방향을 강요하시지 않으며,
스스로 빛을 기피하고 어둠에 숨어드는 자에게는
그 영혼의 문을 억지로 부수지 않으신다.
모든 인간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각자의 마음속에
작은 양심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고 보존하신다.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만큼 완벽하게 이타적이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이기심이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죄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단호하게 저항하며
그 악한 충동과 치열하게 맞서 싸워 멀리하려 할 때,
주님은 인간의 그 능동적인 투쟁을 통해 지옥의 군대를 정복하시고
거대한 영적 승리를 완성하신다.
인간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은
우리가 단번에 결함 없는 존재가 되기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유혹의 순간마다 손을 묶어두지 않고 말씀의 진리를 무기 삼아
악을 거부하고 버리려 몸부림치는 그 실제적인 투쟁을
천국적 자아를 심어주시기 위한 영원한 생명의 근거로 삼으신다.
인간의 본성이 본래 지옥을 향해 기울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남은 것’이라 불리는 선한 보물들을 끊임없이 저장하시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시는 주님의 섭리가 참으로 세밀하다.
지옥을 선택할 자유마저 허락하시는 그 처절하고 엄정한 공의가 있기에,
반대로 우리가 완벽하게 결함 없는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유혹의 순간마다 손을 묶어두지 않고 주님의 말씀과 진리를 무기 삼아
적극적으로 악을 멀리하려 투쟁하는 그 자발적인 노력을
천국 전체의 무게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이시다.
끝까지 거부할 수 있는 자유 속에서,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자발적으로 행한 결연한 저항의 실천들을
영원한 생명의 불꽃으로 키워내시는 주님의 배려 앞에 경외심을 고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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