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화양연화를 봤습니다. 아무런 스토리도 모른 채 시작하기 5분 전에 극장에 들어갔죠. 그간 지젤님의 글을 보고 오히려 더 보고 싶더군요.
1960년대의 여린 감성을, 그 안타까움을 21세기에 반추하는 왕가위식 사랑은 어떤 형태로 비쳐질까?
<화양연화>
롱 테이크와 Spanish BGM이 주인공의 감정을 적절히 대변하면서 내게로 다가온 이 작품!
이 번 영화를 보면서 기존의 현란하고 실험적인 촬영기법은 보이지 않았고, 유고 출신의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이나 혹은 스페인의 영웅 알모르 페르도바르의 근접에 의한 디테일이나 심리묘사에 치중한 촬영이 아니었나 싶었다. 두 주인공을 비출 때 한 귀퉁이에 암전과도 같은 벽을 같이 두는 카메라 앵글이나 훔쳐보기식의 연출, 스틸 컷의 활용 등은 전체적인 극의 흐름을 위해서 아니면 의도적으로 1960년대로 퇴행한 듯한 착각을 줌으로써 애틋한 향수를 선사려는 의도는 아니었는지. 그리고 느린 극의 전개는 나의 사랑을 되보게 하는 시간을 위해 감독이 배려한 듯, 글썽거리는 눈시울이 뜨겁기만 했다. 그 안타까움에, 그 낯설음에.
관객의 입장에서 이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통속적으로 소위 '드라마틱'을 조장한 전형적인 멜로로의 회귀는 필시 아닐 것이다. 장만옥, 양조위의 은근하고 느린 사랑에의 다가섬이 사랑의 진정성을 느끼게 하면서 끝내 엇갈리기만 하는 그 해프닝(?)은 어쩌면 이 세상에 진정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설은 아닐까?
하지만 양조위의 '비밀'을 간직하려는 행위 (벽의 구멍에다 고백을 하고 흙으로 메꾸는) 속에 사랑의 완성을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의 Ending Title이 '終劇'인데 이 작품은 '完'으로 끝나는 것을 보면.
마지막으로 시간의 추이, 숏의 변화를 장만옥의 원피스와 양조위의 넥타이로 표현한 것은 좋은 눈요기가 아니었는지.
1960년대의 홍콩으로 새삼스럽게 돌아간 감독의 의도는 그 시절의 사랑이 너무도 빠른 요즘에도 통했으면 혹은 이런 사랑도 있구나 하는 가녀린 미소를 기대한 건 아닐까 싶다.
모처럼 마음이 아릿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