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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왜(倭)'의 본거지 미낙거(美洛居 : 말루쿠제도) [제1편]
2021년 08월 07일
○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한국사(韓國史)”를 보면 : ‘한반도(韓半島)’와 열도(列島) ‘왜(倭)·일본(日本)’의 관계(關係)를 보면 :
한반도(韓半島) 동남(東南) 모퉁이 작은 땅에 있었다는 신라(新羅)의 연안(沿岸)지방을 침탈(侵奪)하고 노략(擄掠)질하는 것으로 시작(始作)된다. 끊임없이 변경(邊境)을 침략(侵掠)하는 왜적(倭賊)들 때문에 신라(新羅) 조정(朝廷)은 하루 한 날 편할 날이 없었으니,
오죽하면 문무대왕(文武大王)은, 죽어서라도 왜적(倭賊)들을 물리쳐, 백성(百姓)들을 편안(便安)하게 하겠다는 일념(一念)으로, 자신(自身)의 사후(死後), 화장(火葬)하여 동해(東海)에 뿌리도록 하였다고 전해지며, 이것이 바로 수중릉(水中陵)이라고 선전(宣傳)하고 있다.
▷ 문무왕(文武王)의 유골(遺骨)을 뿌렸다고 전해지는 대왕암(大王岩)
● 그런데 고전(古典) 원문(原文)에서는,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에 옛 일본(日本)·왜(倭)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게 문제(問題)인 것이다.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에 ‘일본(日本)·왜(倭)’가 없었다면, 한반도(韓半島) 땅에 있었다는 “신라(新羅)·백제(百濟)·고구려(高駒驪)·고려(高麗)·조선(朝鮮)”은 뭐냐? 반도(半島) 땅, 하늘(天)에 떠다니는 외계인(外界人) 무리(群)들이였을까?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을 비웃는다면, “일본(日本)·왜(倭)”는, 천손(天孫)이라고 했으니, 인류(人類 : 人間)가 아니라, 하늘의 자손(子孫)인 귀신(鬼神)들일 뿐이다. 안 그러냐?
“왜(倭)·일본(日本)”은 “열도(列島) 땅에 없었다.”고 줄기차게 주장(主張)하며, 날 밤을 새워가며, 고전(古典)의 기록(記錄)을 고증(考證)하며, 자연환경(自然環境)과 기후(氣候), 동식물(動植物), 토산물(土産物)등을 비교(比較)해 왔다.
▶ 그렇다! ‘일본(日本)·왜(倭)’는 본시(本是) 서남양(西南洋)의 제군도(諸群島)가 터전이었으며, 고향(故鄕)이었다.
이들이 서남양(西南洋)의 여러 군도(群島)에 살면서, 조선(朝鮮) 즉(卽) 중조(中朝)의 울타리(藩國)을 자처(自處)하며, 의지(依支)하며 살아왔으나,
16세기(世紀) 이후의 서양(西洋)의 무역상(貿易商)들은, 사주지로[絲绸之路 : Silk Road]의 무역로(貿易路)가 폐쇄(閉鎖)되는 경우가 많아지자, 바다(海)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서남양(西南洋)의 제군도(諸群島)에 흩어져 살았던 왜(倭)들과 교역(交易)하며, 천주교(天主敎)를 전파(傳播), 왜(倭)들을 종교(宗敎)인 천주교(天主敎)를 앞세워 제압(制壓), 왜(倭)는, 이들과의 전쟁(戰爭)으로 패하자 동(東)쪽으로 이동(移動)하고, 또 패(敗)하여, 이동(移動)하고, “인도네시아·말루쿠제도·필리핀·대만·유구(琉球)”등지(等地)로 이동(移動), 이주(移住)한 집단(集團)이 바로 일본(日本)·왜(倭)의 정체(正體)다.
이래서 시대적(時代的)으로, 왜(倭)에 관한 기록(記錄)이 서로 상반(相反)되는 결과(結果)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중심(中心)으로 「당시(當時) ‘왜(倭)·일본(日本)’이 오늘날의 말루쿠제도(Maluku諸島)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려 함이다.
공교육(公敎育)이란 의무교육(義務敎育)의 폐해(弊害)
○ 국가(國家)에서 의무교육(義務敎育)으로, 공교육(公敎育)이란 미명하(美名下)에 가르치는, 역사(歷史)이야기와 고전(古典) 원전(原典)의 역사(歷史) 설명(說明)이 왜 달라야 할까? 당연히 같아야하며, 다르다는 것은, 임의적(任意的)으로 왜곡(歪曲)한다거나 조작(造作)한 것일 수밖에 없다. 왜?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위해서!!!!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즉 「식민통치(植民統治) 당국(當局)이 식민지(植民地) 백성(百姓)들을 교화(敎化)시켜, 다스리기에 편리(便利)하도록 만들어 놓은 조선사(朝鮮史)를 가감(加減)없이 가르치는 일제(日帝)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의 주구(走狗)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웃기는 이야긴가! 백번을 뜯어고쳐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그들이 항복(降服)하며, 남겨 놓은 조작(造作)된 조선사(朝鮮史)를 영광(榮光)으로 여기는 걸까?
▶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왜(倭)=일본국(日本國)에 대한 기록(記錄) 내용(內容)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첫째, 현재(現在)의「열도(列島)」에서 발굴(發掘)되는 유물(遺物)유적(遺跡)들은, 대부분(大部分)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와 고구려(高句麗)의 것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들이다. 특히 백제(百濟)의 것들이 많다. 이것은 백제(百濟)의 전성(全盛)시기(時期)에, 또는 백제(百濟) 망(亡)후에, 많은 무리들이, 왜(倭)지역으로 피난(避難)했으며, 이들은 토착민(土着民)들을 정복(征服)하고, 지배(支配)층으로 거듭났다.
둘째, 근세기에 또 다른 해양(海洋) 세력(勢力)으로, 서남(西南)아세아(亞細亞)로부터, 서구(西歐)의 압력(壓力), 공격(攻擊)으로 계속(繼續) 동(東)쪽으로 밀려난 왜구(倭寇) 역시(亦是), 이 집단(集團)들의 지배(支配)층들은, 백제(百濟)전성(全盛)시기(時期) 서남(西南)대해에 15 담로에 포함(包含)된 자(者)들이며, 백제 망(亡)시, 망(亡)후에 이주(移住)한 유민(遺民)들이다. 바로 일본(日本)천황(天皇)과 백제의 유민(遺民)들로써, 이들은 왜(倭)=일본(日本)의 이주(移住)와 함께 했으며, 이들은 일본(日本)의 핵심(核心)권력(權力)층들이었다.
셋째, 특히 19세기 열도(列島)의 내란(內亂) 상태(狀態)는, 『이주(移住)한 왜(倭)=일본(日本)과 토착(土着)세력(勢力)【열도(列島)토착민(土着民) + 백제(신라와 고구려포함) 이주민】들의 정착(定着)싸움이었다고 본다. 이주(移住)하려는 천황(天皇)세력(勢力)【백제(百濟)계 + 왜(倭)=일본(日本)】과 토착(土着) 지배(支配)층들과의 싸움에서, 이주(移住)한 천황(天皇)세력(勢力)의 승리(勝利)로 끝나고, 이들은 오늘날의 열도(列島)에, 일본(日本)의 기초(基礎)가 된 것이다.』라는 것이다.
반도(半島) 국민들은, 너무 순진(純眞)하다? 맞는 말일 수도, 틀린 말일 수도 있다. 냉정(冷靜)하게 생각해 보면 : 옳고 그름과 진실(眞實)과 거짓을 판별(判別)하는 사고능력(思考能力)의 기대(期待) 이하(以下)라는 것은 확실(確實)하다고 본다.
현재(現在)의 열도(列島) 정치인(政治人)들! 그들은 왜 과거(過去)의 침략전쟁(侵略戰爭)에 대해, 반성(反省)치 않는 것일까? 그들은 그것이 침략전쟁(侵略戰爭)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할까! 이러한 이야기는 반도조선(半島朝鮮)과 관계(關係)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수 있으며,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허구(虛構)의 것이니만큼, 그들은 반도(半島)인들에게 사죄(謝罪)할 이유(理由)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도(半島)를 식민지(植民地)화’ 한 것은, 당시(當時)의 국제(國際)세력(勢力)의 용인(容認)과 묵인(黙認)아래 시행(施行)한 것이니 만큼, 그것이 국제사회(國際社會)에서 죄(罪)가 될 수 없다고 판단(判斷)하는 것은 아닐까?
침략(侵略) 전쟁(戰爭)이든, 정당(正當)한 양국(兩國)간의 전쟁(戰爭)이든, 패배(敗北)한 측의 비참(悲慘)함은 필설(筆舌)로 옮길 수 없다. 칼과 활을 들 수 있는 자(者)들은, 대부분 목이 잘리고, 나이 어린 아이들과 부녀자(婦女子)들은 승자(勝者)의 포로(捕虜)가 되어, 노예(奴隸)로 살아야 하며, 젊은 여인(女人)들은 전사(戰士)들에게 전리품(戰利品)으로 나누어주었다. 이게 인간(人間)의 세상(世上)이다.
「한민족(韓民族)은, 평화(平和)만을 사람하며, 이민족(異民族)들이 쳐들어와 죽이거나 말거나, 그저 평화(平和)롭게 살기만을 바랬다.」는 말은, “비웃는 것이다. 오죽 못났으면, 비웃는 말인지 조차 구분(區分)하지 못한다.” 이게 현실(現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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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주제(主題)는 해국도지(海國圖志) 중심(中心)으로, 「“일본(日本)·왜(倭)”의 위치(位置)와 그들의 인종(人種)」에 관한 것이다. 본래(本來)이 “일본(日本)·왜(倭)”는, 비록 중조(中朝)의 울타리(藩國)을 자청(自請)했으나, 우리(朝鮮)와 결코 닮지 않은, “이민족(異民族)이었다”는 사실(事實)이다.
【海國圖志017.東南洋[(海島之國.原無今補),日本島國錄(凡前史無關海防者不錄)] : 海國圖志 : 淸의 위원(魏源 1794-1856)이 1847-1852에 걸쳐 완성(完成)하였다.】
[1] 《明史云 : 自言為平秀吉,沙摩洲人之奴,雄健矯捷,有口辯.信長見而悅之,令牧馬,名曰木下人.中略. : 평수길(平秀吉)은, 사마주(沙摩州) 사람의 노예(奴隸)로, 웅건(雄健)하며 용감하며 날세며, 말주변이 좋았다. 신장(信長)이 이를 보고 기뻐하며, 목마(牧馬)를 시키며, 목하인(木下人)이라고 이름하였다. 중략(中略). 僭稱關白,盡有其眾,時為萬曆十四年.於是益治兵征服六十六州,又以威脅琉球.呂宋,暹羅,佛郎機諸國,皆使奉貢. : 관백(關白)이라고 참칭(僭稱)하니, 그 무리들을 모조리 없애니, 때가 만력(萬曆) 14년이다. 드디어 군대(軍隊)를 가다듬어 66주를 정복(征服)하고, 유구(琉球), 여송(呂宋), 섬라(暹羅), 불랑기(佛朗機)등의 여러 나라(諸國)를 위협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고 하였다.
➊ 평수길(平秀吉)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나오는 것이니 오늘의 주제(主題)는 아니다. 평수길(平秀吉)이 66주(州)를 정복하고 나서, 「유구(琉球), 여송(呂宋), 섬라(暹羅), 불랑기(佛朗機)등의 여러 나라(諸國)를 위협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고 했을 때,
「유구(琉球)와 여송(呂宋), 섬라(暹羅), 불랑기(佛朗機)는 어디에 있었던 나라들이냐?· 하는 문제(問題)다. 당시의 평수길(平秀吉)이 정복(征服)한 66주(州)의 땅과 근접(近接)해 있었어야 평수길(平秀吉)이 이들 나라를 위협(威脅)하고 협박(脅迫)하여 조공품(朝貢品)을 바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➋ 유구(琉球) : 오늘날의 유구(琉球)가 될 수 없다.
➌ 여송(呂宋) : 본래(本來)의 여송(呂宋)은 서양국(西洋國)이나 루손[Luzon]섬 또는 남(南)쪽의 민다나오(Mindanao)섬일 것이다.
➍ 섬라(暹羅) : 오늘날의 타이(Thai) 반도(半島)며, 옛 적토국(赤土國)이라고 한다. 섬라[暹羅]는 타이(Thailand)의 고명(古名)인 시암(Siam)의 한자음(漢字音) 표기(表記)라고 한다.
➎ 불랑기(佛朗機) : 서양국(西洋國)인 불란서(佛蘭西)를 말한다고 한다. 이때의 불랑기(佛朗機)는, 서양의 불란서(佛蘭西)를 말하는 것이 아닌 당시(當時)의 식민지(植民地)를 말하고 있을 것이다.
중종실록(中宗實錄) 41권, 15년(1520 경진 / 명 정덕(正德) 15년) 12월 14일(무술) : “불랑기국(佛朗機國)이 만자국(滿刺國)에게 길을 차단당하여 명(明)나라가 개운(開運)한 이래 중국에 오지 못하였었는데, 이제 만자국을 멸하고 와서 봉(封)하여 주기를 요구하였습니다.[通事李碩,以中朝聞見事啓曰:佛朗機國爲滿刺國所遮欄,自大明開運以來,不通中國.今者滅滿刺國,來求封]”라는 구절(句節)이 있다.【만자국(滿刺國) = 만랄가(滿剌加)】
명사(明史)를 보면 : 《불랑기(佛郞機)는, 만랄가(滿剌加) 가까이에 있다. 정덕(正德) 중에 불랑기(佛郞機)가 만랄가(滿剌加) 땅에 거하며, 그 왕(王)을 내쫓았다.[佛郎機,近滿剌加。正德中,據滿剌加地,逐其王.]》고 하였는데,
「만랄가(滿剌加)는 : 말라카(Malacca) 왕국(王國)을 일컫는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싱가포르[Singapore]와 말레이[Malay] 땅”을 말한다고 한다.
▶ “만랄가(滿剌加)는 곧 만자국(滿刺國)이다.” 이때 불랑기(佛郞機)가 오늘날의 “말레이[Malay]반도(半島)와 말라카[Malacca]해협(海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평수길(平秀吉)이 66주(州)를 정복(征服)하고, 「유구(琉球), 여송(呂宋), 섬라(暹羅), 불랑기(佛朗機)등의 여러 나라(諸國)를 위협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고 했을 때,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에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다. 즉(卽) 당시(當時)의 ‘일본(日本)·왜(倭)’는 『오늘날의 필리핀[Philippines], 말레이반도[Malay 半島)], 인도네시아[Indonesia], 말루쿠 제도[Maluku 諸島]등지(等地) , 그 인접(隣接)한 곳에 있었어야 한다.』는 뜻이다.
[2 ] ‘俞正燮 癸巳類稿’ 에 의하면 【계사유고[癸巳類稿] : 청(淸) 유정섭(兪正燮(1775-1840)이 저술(著述)한 의서(醫書)】
《俞正燮癸巳類稿:萬曆中,台灣為日本倭所據,末年荷蘭紅毛人自西洋來,欲據香山不可,則據澎湖,又不可. : 俞正燮,癸巳類稿(유정섭, 계사유고) : 만력(萬曆) 중에, 대만(臺灣)에 ‘일본(日本)·왜(倭)’가 의지하였는바, 말년(末年)에 화란(和蘭) 홍모(紅毛)인이 서양(西洋)에서 와, 향산(香山)에 의거하려 하였으나 가능치 않았고, 팽호(澎湖)에 거하려 하였으나, 또 불가(不可)하였다. 乃南據美洛居,及葛留巴。以鴉片煙誘葛留巴,葛留巴人俱臃腑不能動,役於荷蘭。既而荷蘭聚集精銳,攻香山,戰敗。: 이에 남(南)쪽의 미낙거(美洛居)와 갈류파(葛留巴)에 의지하였다. 갈류파(葛留巴)는 아편(鴉片)에 유혹(誘惑)되어, 갈류파(葛留巴)인들은 모두 오장육부에 부스럼이 생겨 제힘으로 움직일 수 없어지자, 하란(荷蘭)에 부역(賦役)하였다. 이에 하란(荷蘭)은 정예(精銳)를 취집(聚集 : 모아들어)하여, 향산(香山)을 공격(攻擊)하니, 전쟁에서 패하였다. 揚帆東走至澎湖,使人行重賄於福建巡撫,援意大裏亞人居香山故事,以求澎湖必得。: 닻을 올려 동(東)쪽으로 달려 팽호(澎湖)에 이르렀으나, 복건순무(福建巡撫)의 사인(使人)이 뇌물(賄)을 주고, 의대리아(意大裏亞)인들이 향산(香山)에서 설던 고사(故事)를 도왔는데, 이에 팽호(澎湖)를 필히 득해야 했다. 巡撫使人善諭之,則投日本於台灣。歲納鹿皮三萬,求台灣互市也。: 순무(巡撫) 사인(使人)이 좋은 말로 타일러, 일본(日本)을 대만(台灣)에 받아들였다(보내었다). 해마다 록피(鹿皮) 3만 장을 바쳐야 했음으로, 대만(台灣)의 호시(互市)에서 이를 구하였다.》고 하였다.
➊ 이때의 대만(台灣)은 어디를 지칭(指稱)하는 걸까? 「이때 홍모(紅毛)인들이 대만(台灣)의 향산(香山)에 살려 하였으니 불가하였고, 또 팽호(澎湖)에 살려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니, 그 남쪽의 미낙거(美洛居)와 갈류파(葛留巴)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갈류파(葛留巴)인 들에게 아편(鴉片)으로 유혹(誘惑)하여 육체를 병들게 하고는 홍모(紅毛)인들이 모든 일을 처리하고, 정예(精銳) 병사(兵士)들을 모아 ‘향산(香山)’의 ‘일본(日本)·왜(倭)’를 공격(攻擊), 빼앗았다.」는 것이다.
➋ 이에 왜(倭)들은 배에 닻을 올리고 팽호(澎湖)로 들어가려 했으나, 복건(福建)순무사(巡撫使)에게 뇌물(賂物)을 주고 녹피(鹿皮) 3만 장을 바치는 조건(條件)으로 살도록 했다는 것이다.
➌ 여기서 대만(台灣)이 오늘날의 타이완(Taiwan)일까? 지리적(地理的)으로 보면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왜냐하면
첫째는 평수길(平秀吉)이 66주(州)를 정복(征服)하고, ‘유구(琉球), 여송(呂宋), 섬라(暹羅), 불랑기(佛朗機)’등의 나라를 위협(威脅), 협박(脅迫)했다고 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당시(當時) 대만(台灣) 남(南)쪽에 “미낙거(美洛居)와 갈류파(葛留巴)”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대만(台灣)의 남(南)쪽에 “미낙거(美洛居)와 갈류파(葛留巴)”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미낙거(美洛居)”는 오늘날의 “마륵가군도[摩鹿加群島 : 馬魯古群島 : 印度尼西亞語:Kepulauan Maluku: 말로쿠諸島]”』이다.
지도(地圖)를 놓고 찾아보니, 『필리핀의 민다나오의 남(南)쪽, 뉴기니아의 서(西)쪽, 보르네오의 동(東)쪽, 호주(濠洲)의 북(北)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말루쿠(Maluku)제도(諸島)』를 말하고 있는데,
➍ 북(北) 말루쿠(Maluku) 제도(諸島) : 당시(當時)의 “대만(台灣)”이다.
➎ 남(南) 말루쿠(Maluku) 제도(諸島) : “미낙거(美洛居)·갈류파(葛留巴)”이다.
▷ 이러한 ‘일본(日本)·왜(倭)’【북(北) 말루쿠(Maluku) 제도(諸島) : 당시(當時)의 “대만(台灣)”이다.】가 하란(荷蘭)의 천주교(天主敎) 전파(傳播)로부터 발목이 잡혀, 전쟁(戰爭)에 패하게 되자, 섬(島)과 섬(島)으로 이동(移動)하여, 그 북(北)쪽의 “필리핀[Philippines]과 타이완(Taiwan), 오키나와[Okinawa]”를 거쳐 오늘날의 “열도(列島)”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열도(列島)에 자리 잡게 된 때는 19세기다.
▶ 이렇게 “개구리(蛙)가 뛰어다니는 형세(形勢)”의 왜(倭)의 이동(移動)은, 뒤에 미국(美國)의 태평양(太平洋) 전쟁(戰爭) 당시(當時) 이를 적용(適用)한 “개구리 뛰기 전법(戰法)”이 되어, 일본제국[日本帝國:軍國主義]의 발목을 잡기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일까?
▷ 摩鹿加群島的地形圖 [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세계인문지리사전 / 말루쿠 제도[Maluku Kepulauan]
인도네시아 동부의 제도. 술라웨시 섬과 뉴기니 섬 서부 사이에 있음. 【다른 이름] 몰루카 제도 Moluccas(영국), 몰루켄 Molukken 제도(네덜란드)】 중심 도시는, 암본섬의 암본. 넓이 8만 3670km2. 모로타이섬 · 할마헤라섬 · 테르나테섬 · 티도레섬 · 마키안섬 · 바치안섬 · 오비제도 · 술라제도의 “북말루쿠 제도”와, 부루섬 · 세람섬 · 암본섬 · 반다제도 · 카이제도 · 아루제도 · 타님바르제도 · 바바르제도 · 키사르섬 · 웨타르섬의 “남말루쿠 제도”로 되어 있음. 열대 몬순 기후로 비가 많음. 코프라 · 임산물 · 고기 · 향료 등을 산출함. 향료가 특산임. [네이버 지식백과] 말루쿠 제도 [Maluku Kepulauan] (세계인문지리사전, 2009. 3. 25.)
▷ 이미지 출처 : 아고다
[3] 《澳門紀略曰:日本國禁天主教最嚴,其海口葛羅巴馬頭石鑿十字架於路口,武士露刃夾路立,商其國者,必踐十字路入。: 오문기략(澳門紀略)에서 말하기를 : 일본국(日本國)은 천주교(天主敎)를 가장 엄하게 금지하였는데, 그 해구(海口) 갈라파(葛羅巴)의 입구 길에 돌을 깍아 만든 십자가(十字架)가 있는데, 무사(武士)가 협로(夾路)에 칼을 들고 서 있으면서, 장사치나 그 나라 사람들을, 필히 십자로(十字路)에 들어가게 하였다. 如回避者,立斬之。又捏耶穌石像於城閾,以踏踐之,故西洋夷船,不敢往商其國。: 이를 따르게 하여 이리 저리 피하는 자는, 곧 참수(斬首)해버렸다. 또 성궐(城闕)에 야소(耶蘇) 석상(石像)을 꾸며놓고, 발로 짓밟으며 유린하였는데, 무릇 서양(西洋) 오랑캐의 배들은, 장사를 위해 그 나라를 감히 가지 못하였다.》
미낙거(美洛居)·갈라파(葛羅巴)
▶ 갈라파(葛羅巴) : 오문기략(澳門紀略)에 따르면 : 갈라파(葛羅巴), 이곳은 당시(當時)의 ‘일본(日本)·왜(倭)’의 항구(港口)였다.
▶ 위의 구절(句節) 즉(卽) 俞正燮癸巳類稿에 의하면 : 당시(當時) 왜(倭)·일본(日本)은, 『미낙거(美洛居)와 갈류파(葛留巴)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 참고(參考)《澳門記略》乃由印光任、張汝霖所撰,兩位皆曾出任澳門海防軍民同知(簡稱澳門同知)。1744年,印光任成為第一任澳門海防軍民同知後,已發現澳門的歷史地理資料非常缺乏,欲編撰一部澳門地方誌書;印光任隨即開始搜集相關資料,於1745年完成了初稿。其實,早在1741年在香山任職縣令的而張汝霖,已開展了對澳門的研究;1748年,張汝霖更被派出任澳門海防軍民同知一職。印光任與張汝霖各於在任澳門同知時,各自搜集並累積了大量澳門地方之第一手資料。在1751年(即清乾隆十六年)印光任署潮州知府,張汝霖則在潮州出任鹽運通判。兩位著者同時在潮州任職,於是開始合力展開《澳門記略》的編撰工作。《澳門記略》以印光任的初稿為藍本,再進行增刪修改,於1751年底便公諸於世。[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美洛居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에서, ‘미낙거(美洛居)’를 검색(檢索)하면, ‘摩鹿加群島’가 검색되어 나온다.] 摩鹿加群島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摩鹿加群島(印度尼西亞語:Kepulauan Maluku),又譯馬魯古群島,有時也會被稱為「東印度群島[註1]」,位置處於蘇拉威西島東面、新幾內亞西面以及帝汶北面,為印度尼西亞境內眾多群島板塊之一,是馬來群島的組成部分。中國和歐洲傳統上稱為香料群島者,多指這個群島。
「香料群島」是公元15世紀前後歐洲國家對東南亞盛產香辛料的島嶼的泛名。[1]它說明了當時歐洲人對東方香辛料的渴求,也是導致大航海時代(地理大發現)展開的其中一個原因。
地理 / 該群島內大多數島嶼為氣候濕潤的山地,其中部分島嶼存在活火山。島上雨林被茂盛的植被所圍繞,所出產的農作物有西米、水稻以及豆蔻、丁香等香料。
居民 / 摩鹿加群島當地居民大部分是身為土著的美拉尼西亞人,但其人數曾在早期的殖民統治下急劇減少。到了荷屬東印度時期,大量馬來人開始從北面逐漸移入此地。
香料群島與歐洲殖民
東羅馬帝國滅亡 / 在東羅馬帝國(拜占庭)滅亡前,歐洲各國一直經由安那托利亞半島的陸路(絲綢之路)通往印度、中國與亞洲其他地區。然而當1453年東羅馬帝國國都君士坦丁堡陷落於鄂圖曼土耳其人手中後,歐洲人無法突破土耳其人的疆土,使大量依賴買賣絲綢、寶石及香料的歐洲國家陷入經濟危機。故此歐洲人決定找出一條航線繞過安那托利亞半島直達遠東,直接與香料群島居民交易。
大航海時代 / 歐洲人建造大量船隊,向南部及西部持續航行。往西部的船隊發現了美洲新大陸,而往南的船隊則發現並繞過非洲好望角,到達印度及東南亞一帶。完成航路開發後,歐洲人便重新進行香料貿易。然而經海路前往東南亞比經陸路遠得多,航程亦比從前長了幾倍,加上歐陸需求急劇上升,使香料嚴重供不應求。於是歐洲人決定建造更多的船隻及艦隊前往香料群島以便進行更龐大的交易。那時,一船肉桂足以支付遠征印度一次的費用有餘。
野心紛起 / 由於非洲於地理位置與歐洲幾乎接軌,而非洲本土科技嚴重落後於歐洲,歐洲各國的野心家便頻繁地前往非洲殖民,以換取可可、咖啡豆與奴隸。這種風氣亦迅速延蔓至印度及斯里蘭卡等地。於是荷蘭人及葡萄牙人因地利及貿易航線就便,接連派出遠航艦隊攻佔香料群島,並以絕對武力在東南亞大肆殖民,以壟斷歐洲香料市場。西方殖民以來,摩鹿加群島最早被葡萄牙控制。最後落入荷蘭人手中。除東南亞外,荷蘭的勢力甚至延伸到中國東南沿海與台灣、琉球群島及日本之遙,而葡萄牙亦取得了澳門的居住權。
注釋 / 歷史上,「東印度」的地域概念比較鬆散,既適用於現在的印度尼西亞共和國(前荷屬東印度),也可包括馬來群島(菲律賓屬於此群島),亦可延伸到整個東南亞和印度。
參考文獻 / Chisholm, Hugh (編). Moluccas. 大英百科全書 18 (11th ed.). 劍橋大學出版社. 1911.
延伸閱讀[在維基數據編輯] / 維基文庫中的相關文本: 《欽定古今圖書集成·方輿彙編·邊裔典·美洛居部》,出自蔣廷錫《古今圖書集成》[제1편 / 끝]
※ [2편]에서는, 「일본(日本)·왜(倭)는 이민족(異民族)이었다.」는 주제(主題)를 가지고 논해보기로 하겠습니다.
2021년 08월 07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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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더위 때문에 글 쓰기나 원전을 보는 것도 고역중의 하나다.
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이걸 정리, 확인, 고증등을 거쳐야만 가능한 것인데.....
많은 부분을 축약해 2편으로 나누니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어쩌랴!!!!
이 더위를 막는 방법이 없으니.......!
무더위에 집필하시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선생님 무엇보다 건강에 유의하셔서
강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안녕하세요. "Romantic"님!
올 해의 장마철은 사라지고, 무더위만 존재합니다.
무더위야 해마다 오는 것이지만, 코로나까지 겹치다보니 더 찌는 것 같습니다.
'우리 카페에, 우리 조선사'에 관심과 성원을 항상 보내주시는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님과 댁내에도, 늘 평안과 건강이 함께 하시길.....기원드립니다.
읽을 때마다 문 무 선생님의 열정에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
안녕하세요! "현조"님!
많은 분들에게 '조선사의 진실'을 하나라도 더 알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젊은 분들이 '조선사=한국사'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신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결과는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어느 정도의 발판(기초)은 만들어졌다고 보아집니다.
다음의 문제는 '대한민국의 경제력과 국방력이 비례하는 강국이 되어야만, 조선사의 진실 추구는 가능할 것이라 봅니다."
현재의 '일본과 중국, 서양세력들은, 조선사의 진실추구'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륙의 분열은,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리라 여겨집니다.
그 때를 위해 열심히 '힘을 추구'해야합니다.
관심과 성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댁내 평안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유럽의 복지 시스템을 본받자는 유행 덕분에, 문재인 대통령님께서 소득주도 성장정책안을 받아들여서 시행한 결과, 마침내 우리나라의 경제는 이탈리아의 GDP 순위를 추월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GDP 순위와 GNP 순위가 유럽의 최상위 국가 독일과 일본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추미애 후보님께 2차 소득주도 성장정책안을 제안하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